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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121화 (121/408)
  • < 121화. 복귀 (1) >

    “이것들을 전부 가져가고, 도망까지 치라니요. 혹시 원하시는 바가 있으신 겁니까?”

    “저를 그리 파렴치한 자로 보시는 겁니까? 수사께서 목숨을 걸고 굳이 살릴 필요 없는 저를 살리셨습니다. 그것만으로 이윤 충분하지 않을까요?”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한 종족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자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었다.

    특히나 그동안 아마르곤이 보여준 행동을 본다면 더욱더.

    “정녕 그것이 다입니까?”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인족들은 이곳을 벗어날 때 무작위로 나타나는 공간 소용돌이를 만나야 한다고 알고 있지요?”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삼각형으로 이루어진 대륙의 끝단에 가면 외부로 나가는 통로가 있습니다.”

    아마르곤의 말에 준혁은 정신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헌데 왜?”

    “지금까지 아무도 모르냐 그 말입니까? 인족인 수사께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우린 봉인지의 비밀이 풀리면 이곳을 드나드는 인족을 깡그리 죽이려 했습니다. 그렇기에 오래전 발견한 외부로 도망칠 수 있는 통로를 드러나지 않게 조치했지요.”

    혹시나 함정이 숨어있나 잠깐 의심해보던 준혁은 아마르곤의 변화가 종속의 인 때문이란 걸 알아차렸다.

    생각해본다면 주(主)인 준혁의 감응이 올라간 것보다 종(從)인 아마르곤이 영향을 더 받았을 건 일반적인 사실.

    다만 아마르곤의 수행이 종임에도 훨씬 더 높았기에, 준혁은 일반적이지 않다고 여기고 있었을 뿐이었다.

    결국 준혁은 아마르곤의 진심을 느끼고는 짧은 한탄을 내뱉었다.

    “수사, 진심이시군요. 혹 종속의 인으로 이어진 유대감 때문입니까?”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닙니다. 저 역시 그저 그러고 싶을 뿐···.”

    그 뒤로도 아마르곤은 준혁에게 몇 가지 이야기를 더 건넨 후, 작별을 고하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저는 부상이 심해 수사를 놓쳤으니 죄가 큽니다. 배웅하지 못함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마르곤의 마지막 인사에 준혁은 짧게 묵례를 올리고는 등을 돌렸다.

    그때 눈을 감고 있던 아마르곤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사. 손속에 사정을 부탁드립니다···.”

    +++

    -혹 훗날 선계에 이를 방법을 찾게 된다면···. 그때 저를 한번 생각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영원토록 이 비좁은 세상에 갇혀 살지 않게 해주시겠습니까?

    -수사라면 지금이라도 저와 함께 비경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들을 두고 저 혼자 떠나겠습니까. 최 수사. 수사께서 약속을 중히 여긴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약속이란 말로 그대를 얽매이게 하고 싶진 않습니다. 다만···. 한 번쯤 우릴 떠올려 줄 수 있겠습니까?

    ‘선계라···.’

    아마르곤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준혁은 곧장 동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준혁을 보내주며 아마르곤이 했던 부탁 아닌 부탁이 자꾸 뇌리에 맴돌았다.

    그때 영수대에서 빠져나온 청호가 사막의 탁한 공기마저 행복하다는 듯 만끽하며 크게 숨을 쉬었다.

    “많이 힘들었나 보구나.”

    예전 산들바람 때의 일이 떠올라 청호를 꼭꼭 감춰두고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준혁.

    그런 준혁에게 심통이 났는지, 청호는 그의 가슴 품으로 비집고 들어가면서도 짐짓 화난 표정을 했다.

    “너무 괴로웠어요.”

    준혁은 그런 청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내 수행이 부족하다 보니 너를 보호하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었다.”

    품 안에 자리 잡은 청호는 준혁이 진심으로 사과하자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에요. 괜히 투정 부렸어요.”

    그리고는 준혁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

    “그런데 주인님. 예전보다 더 좋은 냄새가 나요. 기분이 이상해요. 힘이 나는 것 같아요.”

    “그러느냐?”

    예전과 달리 준혁은 달리 의구심이 들지 않았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청호가 예전에 말한 엄마 품 같다는 냄새의 원인은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말하는 힘이 나는 것 같다는 이유는 짐작이 가는 것.

    그건 바로 지목족 혈맥의 힘 때문이었다.

    아무런 저항 없이 지목족의 힘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게 된 준혁은 처음엔 식검의 능력에 다시 한번 놀랐었다.

    겨우 청혈 한 방울에 들어있는 혈맥의 힘도 아니고, 한 종족을 아우르는 거대 혈맥의 힘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먹어 치워버린 식검.

    아무리 수도계에 신비한 일투성이라 하지만, 식검의 능력은 정말 기이하고, 예측 불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운을 완전히 갈무리하고 난 후, 그 능력을 파악하고 난 뒤엔 다른 건 신경 쓰지도 못했다.

    선계 최강 세력 중 하나라는 법문이 그토록 얻길 원했던 지목족 혈맥의 힘.

    그 혈맥의 힘에 대해 알게 되자 온몸에 전율이 돌았고, 어째서 지목족이 짧은 시간 안에 그토록 융성하게 됐는지도 깨달았다.

    비록 천균과의 약속은 이행할 수 없게 됐기에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가 이해해 줄 거라고 준혁은 생각했다.

    “공법을 운용해 보거라.”

    준혁의 말에 평소처럼 백호족 특유의 호흡법으로 영기를 깊게 빨아들인 청호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세상에! 주인님 이게 어떻게 된 거죠?”

    깜짝 놀라는 청호의 반응이 재밌었는지, 준혁이 보일 듯 말 듯 입가를 씰룩거렸다.

    +++

    다른 봉인지와 달리 모래사막은 비경의 끝부분에 있었기에, 아마르곤이 말한 출구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준혁의 속도면 사나흘도 걸리지 않을 거리.

    막상 목족에게서 벗어나 비경 밖으로 나갈 수 있단 생각이 들자, 준혁은 목족 거처에 비밀리에 심어둔 힘이 생각났다.

    혹시나 그 안에서 탈출해야 할 일이 벌어질까 싶어 심어두었던 힘이 적지 않았기에, 회수하지 못함이 아까웠다.

    그렇다고 가지러 갈 수도 없는 것.

    “더 큰 것을 얻고도 작은 것에 미련을 가지는 것이 인간이라···.”

    고소를 지은 준혁은 고개를 저어 상념을 날려버렸다.

    +++

    한참을 이동하자, 사막의 경계가 보였다.

    경계 너머엔 아마르곤의 경고대로 목족 수사의 기운이 느껴졌다.

    ‘모든 봉인지를 지키고 있을 거라더니, 사실이었구나.’

    그들을 감지하게 되자 준혁은 기운을 완전히 죽인 채 조용히 사막의 경계를 벗어났다.

    보이는 족족 죽여버리는 일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웠지만, 아마르곤의 부탁도 있었고, 굳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기에 무시했다.

    하지만 모든 게 준혁의 의도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법.

    사막의 경계를 지나쳐 넓은 초원이 시작되는 곳에 진입하려던 준혁은 현 상황에서 가장 만나기 싫은 자를 맞닥뜨려야만 했다.

    “쥐새끼 같은 인족 놈. 역시 아마르곤 수사의 예상대로 혼자서 도망쳤구나!”

    앞을 가로막으며 나타난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준혁에게 강한 반발심을 내비쳤던 수사.

    원영기로 보이는 목족 수사 두 명을 대동한 완영기 초기 수사인 호하였다.

    ‘마지막까지 쉽게 보내주질 않는구나.’

    갑작스레 등장한 호하를 보며 준혁은 얼굴 가득 수심을 드리운 채, 품 안에 있던 청호를 영수대로 돌려보냈다.

    ‘그녀가 오기 전에 도망쳐야 한다.’

    떠나오기 전 아마르곤에게 들었던 말에 의하면, 여왕의 공간 진법은 원영기급 이상의 수사와 공명해야지만 발동할 수 있다 했었다.

    그 말인즉, 지금 호하가 준혁을 발견했으니, 여왕 역시 이 상황을 알아차리고 먼 거리를 도약해 당장이라도 나타날 수 있다는 말.

    준혁은 호하의 비아냥에 대꾸하지 않고, 즉시 적마도를 소환하며 모습을 감추었다.

    “이 빌어먹을 놈이! 또 도망을!!”

    준혁이 사라지자 호하는 전신의 기운을 폭발시키더니 두 손가락을 이마에 가져갔다.

    당장 준혁이 사라진 방향을 감지해 쫓으려는 행위.

    하지만 준혁은 도망이 아닌 기습을 택했다.

    호하가 정신을 집중하려는 사이. 그의 등 뒤에 나타난 준혁은 월광지력을 최대치로 끌어모으며 주먹을 내질렀다.

    아마르곤이 목족 수사를 만날 경우 손속에 사정을 두라며 부탁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하위 수사들에게나 통용되는 말.

    같은 완영기 수사이며, 언제 여왕이 나타날지 모를 상황이었기에 준혁은 일말의 고민 없이 호하를 단숨에 죽일 듯 힘을 쏟아냈다.

    쩌저정-

    하지만 준혁의 주먹은 허공을 갈랐고, 호하는 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거대한 잎사귀를 소환해 월광지력에서 뻗어 나온 냉기를 해소해버렸다.

    오히려 호하 옆에 서 있던 두 명의 원영기만이 전신이 얼어붙으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호하는 그 모습을 보더니, 악독한 눈빛으로 준혁을 쏘아보았다.

    “역시 비겁하기 이를 데 없구나! 이젠 명 따윈 필요 없다! 죽여주마!!”

    악에 받친 말을 쏟아낸 호하의 주위로 거대한 잎사귀 석 장이 나타나더니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석 장 중 하나의 잎사귀가 준혁에게 날아오며 무시무시한 인력을 발생시키며 준혁을 붙잡았고, 나머지 두 장의 잎사귀는 양옆으로 따라붙으며 당장이라도 준혁을 압사시켜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허공에서 엄청난 영기파동이 느껴지더니,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화사한 꽃들이 피기 시작했다.

    꽃들 하나하나가 엄청난 영기를 품고 있었고, 이내 주위 공간을 압박하듯 기운이 하강했다.

    그리고 꽃들이 만발하며 화관을 이루듯 둥글게 뭉쳐가는 사이, 준혁은 호하가 쏘아 보낸 잎사귀를 향해 쇄도해 나가며 식검과 인지경을 공명시켰다.

    직후, 잎사귀와 준혁의 주먹이 부딪쳤다.

    콰앙-

    잎사귀와 얼음 결정으로 이루어진 주먹의 충격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굉음과 영기파동이 주변을 휩쓸었다.

    그리고 그 순간. 준혁의 입에서 정혈 한 방울이 빠져나오더니, 순식간에 준혁을 집어삼켜 버렸다.

    파앗-

    준혁이 공격을 막다,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자 호하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두 손가락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몸이 흐릿하게 변하는가 싶더니, 준혁과 마찬가지로 파앗- 하며 모습을 감춰버렸다.

    잠시 후.

    두 사람이 사라진 곳 허공엔, 거대한 화관이 완성됐고. 그 중심에서 오망성이 나타나면 기이한 문양이 나타났다.

    쑤욱-

    그리고는 문양의 가호를 받듯, 진법의 중심에서 가슴을 출렁거리는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나타남과 동시에 멀리 동쪽을 바라보았다.

    “감히 봉인지에 가둬둔 채 혼자 도망쳐?”

    그 순간 대기가 요동치더니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마찰음과 동시에 강력한 뇌전들이 그녀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파지지직-

    번쩍- 콰쾅-

    여인은 찌증 섞인 표정으로 한 손을 뻗어 뇌전을 막고선, 나머지 손은 이마에 가져갔다.

    그리고는 또다시 뇌전들이 쏘아져 오는 걸 가볍게 쳐내며, 몸이 흐릿하게 변했다.

    그때, 그녀의 몸이 다시 선명해지더니, 놀란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마르곤! 봉인지를 벗어난 거였어?”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듯 사막 쪽으로 시선을 옮긴 여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뒤, 고개를 돌려 동쪽을 잠시 응시하던 여인은 의미 모를 한마디만 남겨두고, 다시 허공의 진법으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

    “다시 찾아오도록 만들어 주지.”

    +++

    간간이 작은 나무들이 보이는 드넓은 초원.

    연달아 혈둔술을 사용한 준혁은 풍둔술을 극한으로 발동하며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예전과 달리 수행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인지, 호하는 빠르게 쫓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다만 준혁은 여전히 근심을 지울 수 없었다.

    ‘설마 진법에서 멀어지면 쫓지 못하는 건가?’

    목족의 여왕이 당장이라도 뒤쫓아 올 거라 생각했던 준혁은 아마르곤이 그녀를 붙잡았단 사실을 몰랐기에, 당장이라도 정혈을 터트릴 준비를 한 채 풍둔술과 더불어 기감을 극대화하며 날아갔다.

    그러길 한참.

    준혁의 눈에 칼같이 높이 솟아오른 거대한 바위산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곳은 아마르곤이 말했던 외부로 통하는 출구.

    몇 호흡 만에 목적지에 도착한 준혁은 기감을 유형화시켜 바위산 아래로 쏘아 보냈다.

    이곳에 출구가 있긴 했지만, 목족의 봉인술로 깊이 묻혀있는 상태.

    봉인술을 확인한 준혁은 공간대에서 깃발을 꺼내 주변으로 날려 보내며, 빠르게 수결을 맺었다.

    하지만 몇 겹으로 이루어진 봉인의 술법이 단숨에 제거될 수는 없는 법.

    봉인이 제거되었다는 신호가 오기도 전, 머리 위에서 놀람과 의문이 가득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끝을 향해 도망치길래 혹시나 했더니···. 도대체 어떻게 이곳을 알고 있는 거지?”

    아마르곤이 종족의 비밀이나 다름없는 사실을 알려줬다 상상도 하지 못한, 호하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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