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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112화 (112/408)
  • < 112화. 목족의 대지 (2) >

    아마르곤의 말에 준혁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 전에 확인해봐야 할 게 있습니다. 오래전 제가 결계를 뚫고 들어갈 때···. 그때 다른 수사들이 전부 도망치는 걸 보았습니다. 그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준혁의 질문에 아마르곤의 낯빛이 살짝 변했다.

    “동료분들을 말하시는 거군요. 흠···. 이 문제로 서로 간에 앙금이 생기지 않길 바랍니다. 그때 호하 수사의 딸에게 몹쓸 짓을 한 자는 현재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 중입니다. 그자를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의 수사는 조용한 곳에 따로 모셔두고 결계를 연구하고 있으십니다.”

    모셨다고 표현했으나 아마 어디선가 노예처럼 부려지고 있을 건 뻔한 일이었다.

    “두 명이라면···. 혹? 노랑머리를 한 여 수사도 포함입니까?”

    여수사란 말에 아마르곤의 표정에 잠시 짜증 비슷한 감정이 올라오다 빠르게 사라졌다.

    종속의 인으로 인해 서로 간의 감정이 일부 비쳤기에, 준혁은 제이엘이 무사히 도망갔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자는 뇌둔술을 사용하더군요. 그렇다 해도 제 손에서 벗어나긴 힘들었을 테지만···. 운까지 좋았습니다. 쫓기던 도중 공간 폭풍을 만나 사라져 버렸으니 아마 이곳을 벗어났을 것입니다.”

    아마르곤의 말에 준혁은 큰 짐을 내려놓은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구나. 그럼 나연이는 이미 치료가 끝났겠어.’

    “궁금한 게 풀리셨으면 이제 가시겠습니까?”

    한시라도 빨리 종족의 염원을 풀고 싶었는지 아마르곤이 다그치듯 말했다. 종속의 인이라는 굴욕적인 양보까지 했으니, 조금이라도 빨리 자신의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준혁에겐 또 다른 시급한 문제가 있었기에 호응할 수가 없었다.

    “그전에 잠시 제게 정비할 시간이 필요한데···. 진 밖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설마 이제 와서 다른 마음을 품은 건 아니시겠지요?”

    아마르곤이 미심쩍다는 듯 바라보자, 준혁은 자신의 심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피식 웃어 보였다.

    “미약하지만 서로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

    보호진 밖으로 나온 아마르곤은 호하와 나란히 서, 준혁을 감싸고 있는 진법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르곤 수사. 정녕 그렇게까지 하셨어야 했습니까?”

    “더 얘기를 꺼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자의 말대로 우리에겐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게다가 태도를 보아하니 결계 안에서 우리에게서 쉽게 벗어날 방법도 찾은 듯 보였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봐야 원영기일 뿐인데···.”

    호하의 투덜거림에 아마르곤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호하 수사. 저자를 쉬이 보지 마십시오. 정말 그저 그런 원영기 수사였다면 수사의 한 수를 그리 쉽게 무력화시켰을 것 같습니까?”

    “그건···.”

    “현재 어느 경지에 도달했는지, 어떤 방법으로 수행이 드러나지 않게 만들고 있는지는 모르나, 분명 우리가 생각지 못한 한 수가 있는 자입니다.”

    사실 호하는 준혁을 얕보는 게 아니었다. 오래전 준혁을 무시하다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었기에, 오히려 다른 이들보다 준혁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아마르곤이 대화를 통해 일을 해결하려는 게 못마땅했고, 자신이 모르는 수에 또 당하기 전, 어떻게든 준혁을 처리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있었던 것이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어울리지 않게 사과하는 호하를 보며 아마르곤의 얼굴엔 결연한 의지가 떠올랐다.

    “저자가 진정 우리의 염원을 이뤄줄 수 있다면···. 그깟 종속의 인. 수천 번도 해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수사께선 저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수사···.”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가르듯 하늘에서 번쩍이는 뇌전과 함께 굉음이 울려 퍼졌다.

    번쩍- 콰과쾅-

    그리고 뇌전을 시작으로 하늘 곳곳에서 오색 빛을 머금은 먹구름이 생겨나 몰려들더니, 순식간에 크기를 키워가기 시작했다.

    “이건!”

    “수사! 설마 저자가 지금 이곳에서 수행을 올리려는 겁니까?!”

    하늘 가득 채울 정도로 아득하게 모여들던 먹구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직경 수십 킬로가 넘게 커져 있었고, 그 기세가 가히 땅과 하늘을 뒤집을 것처럼 엄청난 영기 파동을 퍼트렸다.

    호하의 질문에 아마르곤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조금 전까지 우리와 대적하고 있던 자입니다. 원하는 때에 이렇게 수행을 올릴 수 있다니요?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구름의 질을 보십시오.”

    아마르곤의 말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리던 호하는 이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손을 마주쳤다.

    “아! 그렇습니다. 완영기에 오른다기엔 영기의 질이 너무나 낮습니다! 그럼 이건 다 무슨 일이라 생각하십니까?”

    궁금하다는 듯 되묻는 호하의 질문에 아마르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역시 그것이 궁금했기 때문.

    ‘저자는 정말···. 종잡을 수가 없구나. 아무리 나와 종속의 인을 맺었다고는 하나, 이곳은 적진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수행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면 이토록 강대한 영기구름을 불러오는 건 보물을 만들어낼 때 가끔 일어나는 현상이거나, 아니면 고위 수사가 깨달음을 얻을 때나 보일 현상이었다.

    물론 아마르곤이 생각했을 때, 두 가지다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보물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고, 깨달음을 얻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잠시 후 준혁이 위치한 진법을 중심으로 강렬한 돌풍을 동반한 채 밀려들던 영기구름은 바닥에 구멍이 뚫린 호수처럼 구름이 소용돌이치며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현상만 보자면 분명 수행을 올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도대체 무슨 일인지. 한번 확인해 보는 건 안 되겠습니까?”

    “모든 걸 망치고 싶다면 시도해 보십시오. 다만 우리도 준비는 합시다.”

    호하의 도발적인 언행을 말린 아마르곤은 손바닥 위로 거대한 민들레 씨앗 뭉치를 만들어 주위로 퍼트렸다.

    그 모습에 호하 역시 무슨 의도인지 알아차리고는 바닥을 세게 쾅! 밟았고, 그러자 호하를 중심으로 나무줄기 같은 것이 땅속 깊이 박혀 들어가며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준혁은 혹시라도 바깥에 있는 두 사람이 방해할까 봐 조바심을 느끼면서도 할 수 없이 몸속 기운과 하늘이 동조하려는 걸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목족의 대지를 다녀올 때까지 막아보려 했지만, 종속의 인을 맺으며 강대한 정신력을 가진 아마르곤의 무의식을 강제하다 보니 그만큼 심력을 낭비해야 했다.

    그리고 그 틈에 정혈로 막아두었던 기운이 풀어져 버리고 만 것.

    한번 풀어 헤쳐진 기운은 즉시 하늘의 기운을 불러 모았고, 준혁은 아마르곤이 눈치채기 전 빠르게 혼자만의 시간을 만들어야 했다.

    하늘 가득 몰려드는 기운이 몸속으로 빨려 들어오기 시작하자, 결단기나 원영기에 이를 때와는 확연히 다른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땐 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영기가 밀어닥쳐 몸의 그릇을 키웠었는데, 이미 봉인지에서 그릇이 커져 있었기 때문인지, 오색광채를 내뿜는 영기구름은 그저 비어있는 그릇을 채운다는 듯 준혁의 몸속에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고양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준혁은 봉인지에서 완영기에 올랐을 때, 그릇이 확장되며 기감이 엄청나게 예민해졌음을 느꼈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부족했던 영기를 받아들이자, 그때 느꼈던 것은 말 그대로 시작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아아···.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몸속에 있던 원영도 어느새 정수리 위로 올라와, 영기구름을 직접 받아들이며 기운을 쌓았다.

    사실 이런 현상은 극히 드문 현상으로 하늘이 준혁을 도운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원래 수행을 올리기 위해 몰려든 영기구름의 양이 부족하거나 무언가에 강제로 가로막혀 받아들이지 못했을 경우엔, 수행을 올리는 데 실패하거나 기혈이 어긋나 오히려 수행이 퇴보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번처럼, 부족했던 기운으로 기본만 다진 후, 다시 한번 영기가 충전되는 일은 극도로 희박한 가능성을 가진 그야말로 천운이라 불릴만한 일이었다.

    그것을 모르는 준혁은 그저 진공상태의 병이 공기가 가득한 곳에 떨어지자 자연스럽게 공기가 몰려들어 진공상태를 메워가는 것처럼, 자신도 그릇이 텅 비어있는 상태로 영기가 충만한 비경 안으로 이동해 왔기에 영기구름이 몰려와 자연스럽게 채워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먼 훗날 이날을 회상해 보고는 자신이 수도계를 활보하며 얼마나 운이 좋았었는지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

    영기구름이 사라진 지도 어느덧 한 달.

    호하의 인내심이 극에 달해 터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가 되었을 때, 준혁은 진법을 거두며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제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습니다.”

    준혁이 모습을 드러내자 아마르곤은 괜찮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호하는 버럭 소릴 질렀다.

    “또 무슨 짓을 꾸민 것이냐?!”

    “호하 수사. 말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이제 우리의 손님 아닙니까?”

    “제가 두 분께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사실 스승님의 도움이 있었으나, 결계를 완벽하게 통과하지 못하고 큰 내상을 입었었습니다. 하여. 스승님이 알려주신 비술로 영기를 강제로 끌어와 몸을 치료했고 말입니다.”

    치료라는 말에 호하를 타박하던 아마르곤이 놀란 눈으로 준혁을 보았다.

    “그런 비술이 있단 말입니까? 혹시 그것도 저희에게 일러주실 겁니까?”

    당연히 그런 비술 따윈 없었지만, 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천주문을 전부 익혀야 하니 시간은 걸릴 테지만···. 전부 알려드릴 겁니다.”

    ‘영기구름을 불러올 정도는 아니지만, 영단을 이용해 치료를 극대화하는 비술은 있으니. 완전한 거짓까진 아니지.’

    속으로 뜨끔한 준혁은 겉으로 티를 내지 않고 그들의 시선을 피하며 멀리 비경의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가보실까요?”

    동생의 안전도 확보했고, 수행과 관련된 영기구름도 해결한 준혁은 아마르곤의 무의식에 연결된 종속의 인을 믿고 있었기에 안심하고 움직일 준비가 끝나있었다.

    +++

    수행을 올리기 위해 비행법기마저 전부 먹어 치운 준혁은 두 목족 수사의 뒤를 풍둔술로 따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준혁이 그들을 불러 세웠다.

    “잠시 들를 곳이 있는데.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그토록 시간을 낭비했으면 됐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

    “호하 수사! 아까 조심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준혁의 말에 반사적으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호하를 말리며 아마르곤이 정중하게 말했다.

    “오래 걸리는 일입니까? 혹 혼자 가겠다는 건 아니시겠지요?”

    “물론입니다. 잃어버린 물건이 있는데, 황금궁전에 오를 때 도움이 될 것 같아 미리 찾아놓으려는 것뿐입니다.”

    “그런 것이라면 좋습니다. 가시지요.”

    호하의 불만을 뒤로한 채 꽤 오랜 시간 이동한 세 사람은 거대한 호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만 호수는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었는데, 호수 중심부에 무언가 강제로 빠져나오며 파괴된 흔적을 제외하곤 호수 전체가 완벽하게 얼어 마치 거대한 빙산을 통째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으드득-

    이빨 갈리는 소리에 준혁과 아마르곤이 뒤를 돌아보자, 호하의 표정이 개똥을 씹은 것처럼 구겨져 있었다.

    그랬다. 이곳은 준혁이 호하에게서 도망치다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던 바로 그 호수.

    원영기에 불과한 준혁에게 일방적으로 당했던 호하의 안 좋은 추억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준혁은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바로 호수의 중심을 향해 쏘아져 내려갔다.

    신기하게도 준혁이 호수 표면에 이르자, 얼음이 녹으며 길을 내주었고, 준혁은 그대로 얼음 사이에 난 통로를 통과해 호수 밑바닥으로 내려갔다.

    ‘다행히 잘 있구나.’

    바닥에 내려온 준혁은 손을 휘저어 물건들을 회수했다.

    어느새 만월강하진 진법 원반과 대라멸진 진법 원반, 그리고 하얀 구슬처럼 뭉쳐있는 달의 정기가 준혁의 손안에 들어왔다.

    영기를 흘려보내 두 진법 원반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준혁은 빽빽하게 찬 공간대에 그것들을 강제로 쑤셔 넣고는 하얀 구슬을 앞으로 띄우며 수결을 맺었다.

    잠시 후 구슬이 우는 것처럼 부르르 떨기 시작하자, 호수를 통째로 얼려버린 얼음들이 서서히 녹아들며, 냉기들이 구슬 안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준혁은 미묘하지만, 예전과 다른 기운이 섞여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더 깊어졌다?’

    당연히 오랜 시간이 지나 달의 정기가 옅어졌을 거라 여겼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강해졌다고 표현하기엔 이상했지만, 더 순수하게 깨끗해져 있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지만, 마치 원래 흰 종이였던 것이 더 하얗게 탈색되어 눈부신 흰 종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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