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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111화 (111/408)
  • < 111화. 목족의 대지 (1) >

    찌릿찌릿-

    적마를 타고 봉인지를 벗어난 준혁은 온몸에 이는 통증을 내리눌렀다.

    봉인지 결계에 틈이 생기고, 천균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나, 까마득한 수행을 지녔었던 기목청이 만든 ‘영역’은 여전히 준혁의 경지로는 아무렇지 않게 넘나들 수 없는 수준.

    고통을 느끼며 한편으론 기대감과 열망이 생겨나기도 했다.

    ‘나 역시 화신기를 넘어 소천경(小天境))에 이르면 이런 영역을 만들 수 있을 테지.’

    아무리 소천경에 이른다 해도 기목청이나 천균이 만들어낸 영역의 수준은 불가능한 것. 하지만 그래도 영역이란 것을 만들 수 있는 건 사실이었으니, 준혁의 기대처럼 될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봉인지 밖으로 나온 준혁은 주변에 수사들의 기운이 느껴지자 빠르게 기감을 펼쳤다,

    그때 이미 눈앞까지 치닫고 있는 이가 있음을 느꼈고, 그가 오래전 자신을 무력하게 만들었던 자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손쉽게 당해줄 수는 없는 일.

    그자에게 공격에 성공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든 후, 화신목영의 목둔술을 이용해 자리를 벗어났다.

    “어찌 우리 목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술법을.”

    상대가 준혁의 한 수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사이.

    슈욱-

    “절대 도망 못 간다!”

    어느새 반대편에 세르게이를 단숨에 무력화시킨 수사까지 날아들며 준혁을 양쪽에서 포위했다.

    ‘그땐 몰랐는데···. 이자는 완영기 초기였구나.’

    예전엔 보이지 않던 상대의 수행이 훤히 느껴졌다. 다만 아마르곤이라 불렸던 사내의 수행은 여전히 까마득하게만 느껴질 뿐 아무것도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 상황이 두렵거나 하진 않았다. 인지경으로 영력을 충당하며 상대한다면, 승리를 장담하진 못해도, 최소한 도주할 자신은 있었기 때문.

    준혁이 해온 50년 가까운 고된 수련의 시간은 겨우 원영기 초기와 완영기 초기라는 수행 차이뿐이 아니었다.

    수행을 넘어선 공법과 진법, 술법에 이르는 모든 것이 예전과 깊이가 달라진 상태였다.

    그렇게 여유롭게 두 수사를 살피던 준혁은 몸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깜짝 놀라며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이건!’

    이미 자신의 원영은 무언가를 준비하는 듯 좌정한 채 의지를 정갈하게 정돈하는 모습이었다.

    ‘설마···.’

    살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펴본 준혁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점차 영기의 질이 진해지고 있다는걸 느낄 수 있었다.

    ‘이럴 수가! 완영기에 오르는 과정이 끝나지 않았단 말인가?’

    그랬다. 지금 준혁이 느끼고 있는 것은 결단기와 원영기에 오르며 경험했던 몸속 기운이 하늘과 동조해 영기를 불러 모을 때의 현상.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준혁은 정혈을 단(丹) 주위로 모아 원영과 단을 통째로 둘러싸 기운을 막아버렸다.

    아직 눈앞의 목족 수사 일을 처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영기구름을 불러오는 건 극도로 위험한 일. 어떻게든 상황을 미뤄야만 했다.

    도주를 하거나 전투를 진행하는 건 절대 피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속으로 맹렬하게 생각을 거듭하며 고심에 빠진 것과 달리 겉으로 드러난 준혁의 태도는 여유가 넘쳐흘렀다.

    “인족이 어찌 화신목영을 사용하는 것이지?”

    “그야, 천균 수사께 사사하였기 때문이지요.”

    천균이란 말에 두 목족 수사의 눈에 불신의 빛이 흘러나왔다.

    “말도 안 돼. 그분께서 아직도 살아있단 말이냐.”

    ‘역시! 이들이 천균의 힘과 고서를 받았구나!’

    대충 예상하던 바가 들어맞자 준혁은 상황을 벗어날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았다.

    이미 천균을 통해 그가 밖으로 보낸 고서의 내용을 대충 알고 있는 준혁은 살며시 미소 지으며 상황을 주도했다.

    “물론입니다. 게다가 그분께선 이곳의 상황도 얼추 알고 계십니다. 당신들이 자신의 힘을 이어받았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보며 실망하고 계셨습니다.”

    “흐으음···. 믿을 수 없다. 그분께서 남기신···.”

    아마르곤이 침음을 삼키며 말을 이으려 하자, 준혁은 쐐기를 박듯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생명이 다했으니 후인들에게 지목족의 영광을 재현하라 하셨지요. 구름관을 얻어 하늘정원에 올라 지목족의 왕이셨던 그분께서 남기신 후예들을 거두고 궁전에 들어가 지목족의 염원이 담긴 물건을 회수하라고 말입니다.”

    준혁의 말이 끝나자 아마르곤의 눈빛은 더 이상 불신이 아닌 경악으로 바뀌어 있었다.

    “진정 그분을 만났단 말인가?”

    비경 목족 수사 중에서도 최강자라 불리는 세 명만이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기에, 고서의 내용을 아는 준혁의 말을 신뢰할 수 밖에 없었다.

    “만나기만 했겠습니까? 스승님께선 고서에 미처 담지 못한 화신목영의 진수를 전해주고, 지목족의 기초 공법과 천주문을 일러주어 목족의 영광을 다시 한번 재현시키라 명까지 내리셨습니다.”

    준혁의 말에 아마르곤의 표정이 한없이 심각해졌다.

    ‘저자의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모두 우리가 아쉬워하던 것들 아닌가···.’

    고서를 통해 지목족의 많은 것들을 이어받긴 했지만, 그 깊이가 매우 얕았다.

    당연하게도 천균이 준비한 것은 그들이 고서를 통해 최소한의 기본을 갖춘 후 봉인지 안에서 수행을 쌓는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아마르곤이 심각하게 고민을 거듭하며 눈앞 인족의 말의 진위를 생각하던 그때. 평소 다혈질에 행동파였던 호하는 아마르곤과 달리 전신에 기운을 끌어올리며 외쳤다.

    “인족 따위가 감히 우리의 영광을 논해?! 저건 전부 거짓일 겁니다! 결계 안에서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를 얻고는 지금 흉계를 꾸미는 게 분명합니다! 인족 놈들이 얼마나 간교한지 아시지 않습니까? 저놈을 잡아다가 머리통을 열어봅시다! 그럼 저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테니!”

    흉흉한 기세가 주변을 휘감았고, 결계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다른 목족 수사들도 그것에 감응하는지 당장이라도 튀어 오를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공격을 할 것 같은 모습과 달리 호하는 아마르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마도 그의 명이 있지 않는 한 돌발행동을 하진 않을 것처럼 보였다.

    준혁은 그 모습들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전언을 전했다.

    “그리고 연단 비술을 전해 후인들의 수행을 올리는 데 도움을 주라 하셨는데···. 믿지 않으시겠다면···. 어쩔 수 없지요. 그럼 저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말을 끝마친 준혁이 씨익 웃음 짓자, 그의 머리 끝부분에서부터 옅은 분홍빛 꽃잎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아마르곤이 다급히 손을 내밀며 외쳤다.

    “잠깐!! 기다리게!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 혼자 판단할 문제가 아니야! 잠깐이면 되네!”

    준혁이 머리끝에서부터 지워지듯 사라지려 하다 꽃잎이 뭉치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자, 아마르곤은 민들레 씨앗을 만들어 후우~ 불면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진지한 얼굴로 준혁에게 말했다.

    “우리의 왕께서 직접 보자고 하십니다. 같이 가줄 수 있겠습니까?”

    어느덧 말투도 하대가 아닌 존대로 바뀌어 있었다.

    +++

    “목족의 대지라 불리는 곳으로 가자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여왕께선 사정이 있어 모습을 드러내기 힘드시니, 그곳에 가셔서 다시 얘기를 나누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마르곤의 말에 준혁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분의 태도를 보십시오. 제가 수사를 따라간다면 살아나올 수 있겠습니까? 수사라면 그런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준혁이 살짝 시선을 옮겨 호하를 바라보며 단번에 거절하자, 아마르곤의 표정도 살짝 꿈틀거렸다.

    “그럼 어쩌시길 원하시는 겁니까? 그분의 전언대로 우리에게 지식을 전해주실 거면···. 함께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안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제 말을 듣고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준혁이 바로 말을 잇지 않고 뜸을 들이자, 아마르곤이 재촉하는 눈빛을 쏘아 보냈다.

    그의 눈빛에서 무언의 압박을 느낀 준혁은 여전히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수사를 한번 흘겨보고는 아마르곤을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수사께서 저와 종속의 인을 맺으시지요? 어떠십니까? 그렇게 해주신다면 그대를 따라 목족의 대지로 들어가겠습니다.”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하지만 아마르곤이 아닌 호하의 목소리였다.

    “이 미친놈을 보았나! 감히 인족 따위가 우리에게 종속의 인을 걸겠다고! 미치지 않고서야 감히 우리 앞에서 그따위 말을 꺼내!!”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한 호하는 아마르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준혁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손끝에서 나타난 잎사귀가 순식간에 거대해지며 순식간에 준혁을 감싸버렸다.

    “호하! 이게 무슨 짓인가!”

    “언제까지 저딴 놈의 혓바닥에 놀아날 생각이십니까? 겨우 원영기에 불과한 놈에게 이 무슨 수치···!!”

    분노를 표출하던 호하는 말을 하다 말고는 놀란 눈을 하며 자신이 날려 보낸 잎사귀를 바라보았다.

    순간 잎사귀가 쩍쩍 갈라지더니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져버렸고, 그 충격에 호하는 순간 비틀하더니 겨우 중심을 잡았다.

    잎사귀를 흔적도 없이 날려버린 준혁은 여전히 생글거리는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성미도 급하십니다. 제 조건이 어떠십니까? 수사도 알겠지만, 종속의 인의 한계 때문에 수사께서 손해 볼 것도 없지 않습니까?”

    “흐음···.”

    준혁의 말에 아마르곤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침음을 삼켰고, 호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술법이 파훼 된 이유를 찾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런 두 사람의 반응에 준혁은 바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 조건은 저의 안전을 고려한 것뿐이 아닙니다.”

    아마르곤이 무슨 뜻이냐는 듯 의문을 표했다.

    “제가 스승님의 지식을 전달하는 건 차치하더라도 황금궁전으로 가 목족의 염원을 이루는 일을 온전히 저에게만 맡기실 겁니까? 아니면 저와 종속의 인을 맺지 않은 상태로 결계 안으로 함께 가실 수 있다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

    준혁의 말이 끝나자, 호하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아마르곤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청호가 준혁을 따라 봉인지 안으로 갈 수 있었듯, 종속의 인을 맺는다면 하늘정원이나 황금궁전에 함께 갈 수 있는 일.

    그것까지 고려해보지 못한 듯 아마르곤은 크게 깨달은 표정을 했다.

    “선택은 수사께서 하십시오. 저는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수사께서 종속의 인을 거부한다 해도, 후일 다시 이곳에 와 지목족의 염원을 이뤄낼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스승님과 한 약속이니까요.”

    마지막 말이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 한참을 고민에 휩싸여있던 아마르곤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말에 준혁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호하는 소리를 질렀다.

    “아마르곤 수사!!”

    +++

    결계통에서 한참 떨어진 곳으로 이동한 세 사람.

    아마르곤은 무언가를 계산하듯 심각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고, 그 앞엔 준혁이,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엔 호하가 붉으락푸르락해진 상태로 두 사람의 행태를 노려보고 있었다.

    “준비되셨으면 시작하겠습니다.”

    준혁의 말에 아마르곤이 고개를 끄덕였고, 준혁은 공간대에서 깃발을 꺼내 주변으로 던지며 수결을 맺었다.

    깃발은 빠르게 날아가 주변에 박히더니 거대한 절진을 만들었는데, 천주문을 이용한 방음진과 방형진이 뒤섞인 보호진이었다.

    준비를 끝낸 준혁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아마르곤을 잠시 바라보다가, 수결을 맺으며 손가락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오래전 청호에게 종속의 인을 걸 때는 여러 가지 재료를 이용해 어린 백호를 길들이는 작업을 거쳤었다.

    종속의 인을 맺는 이유 자체가, 주인과 종의 위치를 서로에게 각인시키고 술법의 도움을 받아 주인이 종을 강제할 수 있게 만듦과 동시에, 종의 생명을 공유받아 주인이 쥐락펴락 할 수 있게 하는 것.

    하지만 눈앞 목족 수사는 준혁보다 수행이 높았기에 종속의 인 자체가 먹혀들어 가지 않았다.

    그랬기에 평범한 종속의 인을 건다면 종이 주인을 해치지 못하는 절대 명제 빼고는 어떤 기능도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아마 아마르곤도 그걸 인지했기에 순순히 응하고 나선 것이 분명한 것.

    하지만 준혁은 겨우 그 정도로 안전장치가 될 리 없다 판단했다.

    막말로 여왕이란 자가 아득히 높은 경지에 올라 그것마저 해제해 버릴 강자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랬기에 준혁은 일반적인 종속의 인이 아닌, 천주문을 이용해 심상에 직접 인을 새길 작정이었다.

    물론 수행 차이가 컸기에 통하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만약 그렇게 된다면 영기구름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더라도 우선은 도주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잠시후 준혁이 치켜든 손가락 끝에서 인(印)이라는 문자가 만들어지더니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인(印)은 점점 크기를 키워가더니 가만히 준혁을 주시하고 있던 아마르곤에게 날아갔고, 순식간에 그의 이마를 파고들며 사라졌다.

    잠시 후 그의 이마에 인(印)이라는 문자가 새겨지는가 싶더니, 갑작스레 문자가 튀어나오며 준혁의 이마로 날아들었다.

    그리고는 준혁의 이마로 파고든 문자는 심장으로 내려가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더니 다시 준혁의 이마를 통해 밖으로 나와 아마르곤의 이마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한 준혁은 왠지모를 탈력감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일련의 일들이 끝나자 준혁은 눈을 감고 심상을 움직여보았다.

    그러자 자신의 심장과 이마로 이어지는 길목에 다른 무언가가 잡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청호와 심상을 공유했을 때와는 또 달랐는데, 청호와는 서로의 심상이 두꺼운 끈으로 연결된 느낌이었다면, 아마르곤과 연결된 느낌은. 가는 실이 수백 겹으로 나뉘어 서로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마르곤 역시 종속의 인을 행한 것이 끝났다는걸 느꼈는지, 크게 한숨을 내쉰 후 준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종속의 인이란 게 이런 느낌이군요···. 제 평생 이런 순간이 올 줄 몰랐지만, 목족의 염원을 위한 것이니···. 후우···.”

    아마르곤은 재차 한숨을 내쉬다가 준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제 목숨줄을 잡고 계시니···. 저와 함께 왕을 만나러 가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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