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천균 (3) >
애초에 ‘영역’으로 만들어낸 봉인지에 틈을 만들기 위해 밀실 수련을 시작한 준혁으로선 허망한 말이었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큰 고생 없이 밖으로 나갈 수 있었으니 나쁜 건 아니었다.
준혁 역시 고개를 들어 허공에 흐릿한 공간의 틈이 생긴 걸 바라보다 천균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현상이 얼마나 지속되는 겁니까?”
“길어야 반나절도 못 갈걸세.”
“그럼 잠시 준비를 끝낸 후 돌아오겠습니다.”
밖으로 나가기 전 청호를 데려와야 했기에 준혁은 계단 아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잠깐. 그전에 할 말이 있네. 이걸 받게.”
돌아서는 준혁을 불러세운 천균은 품 안에서 하얀 가면 하나와 구름 문양이 박힌 월계관을 꺼내 내밀었다.
“이건···.”
물건을 전해 받은 준혁은 영기를 흘려보내 물건들을 확인했다. 가면은 무슨 용도인지 알 수 없었지만, 월계관은 자신이 쓰고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자네가 쓰고 있는 건 내가 만들어낸 가짜. 그것이 진짜라네. 우리 지목족이 오랫동안 간직해온 영보(靈寶)라네.”
“영보가 무엇입니까?”
“허어. 영보를 모르는가? 법보와 보패의 장점만을 모아 만든 최상급 법보를 일컫는 말일세.”
최상급 법보라는 말에 준혁은 월계관을 다시 한번 자세히 살폈다. 하지만 특별한 힘이 느껴지거나 하진 않았다.
“보패가 법보와 달리 연화를 하지 않고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알겠지? 영보 역시 마찬가지네. 단 영보식(靈寶識)을 익혀야 하지.”
설명을 이어가던 천균은 ‘지목’이라는 문자가 적힌 나무패를 건넸다.
“영보식은 스스로 익히게. 그리고 그 가면···. 그것은 자네가 봉인지에 틈을 만들어냈기에. 남은 내 힘을 담은 것일세. 언젠가 크게 도움이 될 일이 있을 것이네.”
물건들 하나하나가 보물 중에서도 보물급이란 걸 안 준혁은 조금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약속을 이행하라는 무언의 압박 같은 걸 느꼈다
“이렇게 하지 않으셔도 약속은 지킬 겁니다.”
“알고 있네. 그저 한 가지 더,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
부탁이 평범하지는 않을 거라 여긴 준혁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물건들을 공간대에 집어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해 보시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들어드리겠습니다.”
“어렵지 않은 일이니 그런 표정 짓지 말게나. 내가 예전에 말한 적이 있지. 하늘정원에 그분의 뿌리를 숨겨두었다고. 기억나나?”
“물론입니다. 기목청님의 기운이 담긴 뿌리를 말하는 것 아닙니까?”
“맞네. 부탁은 그것일세. 훗날 화신단을 가지러 갈 때···. 그때 그 뿌리들을 거두어 발아시켜 주게.”
천균에 말에 준혁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작 뿌리를 거둬 발아시켜 주라니?
그러다 문득 생각이 확장되며 무언가를 눈치챘다.
“설마···. 그 뿌리가 기목청님의 분신이나. 후예 같은 겁니까?”
“그렇네. 그분이 남긴 흔적이지.”
어째서 그토록 대단한 보물을 건네주며 부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지목족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기목청. 그런 자의 힘을 이어받아 태어나는 족인이라면, 다시 한번 지목족의 영광을 되찾을 후보들이나 다름없는 자들.
천균은 그런 자들을 준혁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어렵지 않은 일이네. 영기가 충만한 곳에서 영천수에 담아 천년 정도만 두면 스스로 발아할 것이네.”
‘천년이라니···.’
천균의 말에 준혁은 어안이 벙벙해짐을 느꼈다.
비록 완영기에 오르며 준혁의 수명이 2천 년이 넘게 늘어나긴 했지만, 준혁이 살아온 시간은 아직 100년도 넘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천년이라는 시간은 ‘길다’라고 말할 엄두조차 나지 않을 엄청난 기간이었다.
“천···. 년 말입니까?”
“그렇지. 매우 짧지 않나? 우리 같은 수도자에게 천년은 순식간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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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균과의 거래를 끝마친 준혁은 곧장 계단을 내려와 호수로 향했다.
오랜만에 만난 청호는 축기기 후기에 올라있었고, 벌써부터 풍둔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계단에 오르기 전까진, 준혁이 옥간을 이용해 틈틈이 많은 걸 전수해주고 있었기에, 수련경지가 올랐을 거라 판단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만족스러운 성장을 한 상태였다.
‘종족 특성인가. 결단기에 오르지 않았는데도 둔술을 저리 능숙하게 사용하다니.’
청호를 보고 기분이 좋아진 준혁은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이제 이곳을 나가야 하니, 지유목을 전부 캐내거라. 뿌리가 다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명령을 내린 준혁 역시 분광소를 최대한으로 증식시키며 날려 보냈다.
영천수야 밖에서도 구할 수 있는 것이지만, 지유목은 절대 구할 수 없는 자원 중 하나.
밀실에서 나온 이후 천균의 기운이 조금 이상하다는 걸 느낀 준혁은, 이곳에 다시 올 수 없을 거란 예감에 최대한 많은 지유목을 챙겨갈 작정이었다.
1품 화목단은 지구의 어떤 연단사에게서도 구할 수 없는 단약. 아니 3품 화목단만 해도 지구에선 돈으로 살 수 없는 무가보의 영약이었다. 그러니 지유목은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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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목을 상급 공간대가 터지기 일보 직전 상태까지 밀어 넣은 준혁은 가지고 있던 하급 공간대까지 꺼내 전부 채워 넣었다.
결국 지유목 숲을 초토화한 준혁은, 허리뿐만 아니라 어깨와 몸통에까지 공간대를 주렁주렁 달고는, 청호를 달래 영수대에 집어넣고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오기 전 천균의 조언에 따라 가짜 월계관 위에 지목족의 영보인 월계관을 덧쓰자, 신기하게도 환영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숲을 초토화 시켰군···.”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선 수행을 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훗. 잘했네. 그럼 내가 약해진 공간의 틈에 충격을 줄 테니, 자넨 흑효수로 만든 밀실에서 나왔을 때처럼 밖으로 나가면 되네. 준비됐는가?”
모든 준비가 끝났기에, 준혁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식검과 적마도를 꺼내 들었다.
그러다 천균을 바라보며 손을 정수리에서 가슴 앞까지 천천히 이동시키며 몸을 살짝 숙였다.
“천균 수사. 저는 지금껏 약조를 어겨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부탁하신 일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떠나기 전 갑작스럽게 준혁이 예를 다한 인사와 말을 건네자, 천균은 무언가를 알아차렸다는 듯 살포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자네···. 기감이 매우 좋은 편이군. 혹시 내 상태를 알아 차린 건가?”
“......”
“어린 수사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군.”
“다시 이곳에 온다 해도 수사를 뵙진 못하겠지요?”
“아마 그럴 것이네. 영역을 조절할 힘을 제외하곤, 내가 준 물건에 모든 힘을 담았으니···. 자네가 이곳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전부 사라지겠지.”
“...꼭 이행하겠습니다.”
천균의 자조적인 말에 달리 할 말이 없던 준혁은 다시 한번 강조해 약속을 언급했다.
준혁의 마지막 말에 천균은 너털웃음을 짓다가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자넨 타생지연(他生之緣)이란 말을 아는가?”
지구에서도 있는 말이라 준혁은 손목에 감긴 붉은 실을 한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뿐 아니라 후생도 마찬가지지, 지금은 이렇게 끝나나, 언젠간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네. 그땐 자네와 술 한잔할 수 있는 인연이 되었으면 좋겠군.”
“저 역시 바라는 바입니다.”
천균이라는 환영의 역할을 하며 수십 년을 살아온 준혁은 그가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스승이었던 네 명의 노인과 잔소리가 심한 사매, 거기에 천균의 오랜 친구였던 통로를 지키던 자까지.
모든 이들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고, 가까운 동료처럼 느껴졌기에, 천균마저도 그렇게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그런 마음을 알아챘는지, 천균 역시 준혁을 남다르게 여기는 듯 했다.
“이제 그만 나가보게나. 시간이 지날수록 틈이 작아질 테니.”
“알겠습니다. 아! 하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처음 건물에 들어섰을 때 여섯 번째 방에서 보았던 그자는 누구입니까?”
유일하게 준혁이 수련하며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분일세.”
“아···.”
“그럼 이제 시작하겠네. 준비하게.”
더는 시간을 끌지 않으려는 듯 천균은 허공의 틈을 향해 돌아서더니 천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그러다 두 손을 뻗으며 손가락을 겹쳐 세모 형태를 만들어 허공의 틈을 가리켰다.
그 순간, 천균의 몸에서 엄청난 양의 매화 꽃잎이 흩날리더니 허공으로 솟구쳤고. 잠시 후 준혁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영기파동이 퍼져나가며 허공에 거대한 파문이 발생했다.
“지금이네!”
이제는 진짜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기에, 준혁은 지체없이 식검과 적마도를 공명시키며 붉은 말을 소환했다.
그리고는 말 위에 올라타며 허공의 틈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가자!”
그 순간.
파앗-
준혁의 모습은 적마와 함께 사라졌고, 허공의 틈에선 무언가 지지직거리며 강렬한 충격파를 만들며 주위로 퍼져나갔다.
그 모습에 천균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설마···. 들어올 때도 저런 방법으로 들어왔단 말인가···. 허허. 참으로 무모한 자였구나.”
+++
버뮤다 삼각비경 안, 구름이 낳은 땅이 위치한 분지.
높은 산맥이 첩첩이 둘러싼 분지 안에는 열만화와 빙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어 가히 절경이라 불릴만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운 풍경엔 관심이 없다는 듯 몇몇 수사들은 분지 가운데 떠 있는 통처럼 생긴 결계를 바라보며 인상만을 쓰고 있었다.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아직 나타날 때가 되지 않았거늘 결계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다니···.”
“이 근방에 엄청난 영기 폭풍이 나타나지 않았었습니까? 그것이 전부 사라지고 난 뒤부터 모습을 드러낸 것 같습니다.”
“흐음···.”
호탕하게 생긴 사내의 말에, 눈이 가늘어 표정을 짐작기 어려운 사내가 생각에 빠진 듯 턱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손끝에 피어있던 민들레 씨앗이 턱에 부딪히며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혹시 그때 영기 폭풍이 결계와 관련된 게 아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그 인족 놈들을 데려다 수를 써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눈이 가는 사내는 호탕하게 생긴 사내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한 놈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의식을 들여다볼 수 없었지만, 나머지 두 놈은 이미 충분히 살펴보았습니다. 그것들은 저 결계를 해제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럼 그때 그자는···.”
“그자가 특별한 것뿐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인족들이 활개 치는 걸 두고 본 이유도, 그런 자가 나타나길 기다린 것인데···. 안타깝게 놓쳐버렸으니···.”
대화를 나누는 두 사내.
그들은 비경 안 목족 수사.
러시아 원영기 수사를 단숨에 때려잡은 호하와 준혁을 가볍게 사로잡은 아마르곤이었다.
아마르곤의 말에 호하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그럼 이 특이현상을 그냥 보기만 하실 겁니까? 우리가 이곳을 찾은 지 수천 년 만에 처음 있는 일 아닙니까?!”
“그럼 달리 방법이 있습니까?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는 결계에 작은 간섭조차 하지 못하거늘.”
아마르곤은 호하의 행동에 자조 섞인 말을 내뱉고는 복잡한 시선으로 결계통을 바라보았다.
그때 아마르곤의 가는 눈이 번쩍 떠졌다.
“저건!!”
결계통의 한쪽에서 강렬한 영기파동이 퍼져나가더니, 다른 곳과 달리 은은한 분광을 퍼트렸다.
그리고는 이내 무언가 깨져나가는 파열음과 함께 붉은 말과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화 역시 결계통에 생긴 이상 현상을 느끼고는 안력을 집중하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인영을 보고는 깜짝 놀라 하며 외쳤다.
“그놈입니다!”
그리고 호하가 놀람에 찬 말을 내뱉고 있었을 땐, 아마르곤은 이미 인영이 나타난 곳으로 이동한 뒤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분광이 터져나간 결계통 앞으로 이동해 온 아마르곤은 혹시라도 상대를 놓칠까 봐 잠시의 여유도 주지 않고 손을 뻗었다.
동시에 손끝에 피어있던 민들레 씨앗들이 푸른 기운을 내뿜으며 흡착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스으윽- 턱-
어느새 상대방의 목줄을 쥔 아마르곤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이렇게 다시 만나니 반갑군요. 최준혁 수사라고 불리시던가요? 그동안 참으로 오래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아마르곤의 손에 목이 잡힌 준혁은 그를 향해 피식 웃어 보이더니 마주 인사를 건넸다.
“그렇군요. 헌데 반가운 거 치고는 너무 과격한 거 아니십니까?”
목줄이 잡혀있는데도 너무 태연한 준혁의 태도 때문이었을까? 아마르곤은 순간 이상함을 감지하고 주변으로 민들레 씨앗을 흩뿌렸다.
하지만 씨앗이 채 퍼지기도 전.
퍼엉-
준혁의 몸이 터져나가더니 옅은 분홍 꽃잎으로 변해 흩어졌고, 서너 호흡 할 정도가 지나자 조금 떨어진 곳에 꽃잎이 뭉치며 다시 원래의 형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아마르곤은 처음으로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뜨고 있었다.
“화신목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