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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108화 (108/408)

< 108화. 천균 (1) >

적마를 타고 음살진 밖으로 나온 준혁은 혈단법으로 정혈을 터트렸다 다시 만들며 내부를 정비했다.

천주문을 이용해 진법 일부를 무력화시켰다고는 하나, 상위 수사가 만든 진법을 강제로 통과하다 보니 조금의 후유증이 남아있었던 것.

물론 미약한 내상 같은 것이라, 순식간에 회복할 수 있었기에 크게 걱정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봉인지에 처음 들어설 때 죽다 살아난 것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때 준혁의 기감에 무언가가 감지됐다.

‘이건?’

하지만 사방을 살펴도 아무도 없었고 미약한 기운이 산 정상 부근에서 느껴졌다.

‘위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구나.’

+++

아홉 번째 관문.

다른 관문들과 달리 풀 한 포기 없이 삭막한 풍경이 준혁을 반겼다.

특이한 건 수십 미터에 이르는 계단뿐만 아니라, 계단에서 바라보는 산과 멀리 보이는 풍경까지도 전부 메마른 것처럼 삭막함이 전해져왔다.

마치 봉인지 전체가 죽은 것처럼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계단의 끝부분에 살랑이는 바람이 일더니, 바람과 함께 푸른 매화 꽃잎이 흩날리다 한곳에 뭉치며 사람 형상으로 변했다.

사람 형상은 사내였는데,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창백한 피부를 하고 있었다. 생김새도 매우 아름다워 얼핏 스쳐본다면 여인이라 착각할 수 있을 정도.

다만 눈빛엔 만인을 내려다볼 것 같은 위엄이 서려 있어 쉽사리 다가가기 어려운 풍모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천균. 아니 후인이라 해야 할까?”

조금 떨어진 곳에 홀연히 나타난 사내의 한마디에 준혁은 전신이 긴장감으로 바짝 곤두섰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다. 너의 정체가 뭐든 우리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이곳에 왔을 테니. 그렇지 않나?”

사내의 짧은 말에서 지금까지 환영들과는 다른 느낌을 받은 준혁은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도했다.

“염원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하늘정원에 올라 그분을 만나 뵙기 위해 왔습니다.”

준혁의 말에 사내의 입가가 길게 올라갔다.

“조심성이 많다는 건 나쁜 것이 아니지. 네 이름을 들어볼까?”

“천균이란 걸 알고 있지 않습니까?”

천균이란 말에 사내는 또 한 번 미소를 짓더니 계단 끄트머리로 걸어가 아래로 보이는 풍경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천균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겠느냐. 이곳에 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인연이 시작되었음을 말해주거늘.”

‘!!!’

사내가 무심히 내뱉은 말에 준혁은 화들짝 놀랐지만, 다행히 겉으로 내색하진 않고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러자 사내는 손자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처럼 담담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이미 우리 종족은 그자의 눈 밖에 난 후였다. 정확히는 그분이 그자와 반목하기 시작했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었기에, 준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분은 누구고 그자는 누구입니까?”

“긴 이야기이니 그냥 듣게. 궁금한 것은 나중에 알려주지.”

“......”

그렇게 시작한 사내의 이야기는 한 종족의 비극에 관한 것이었다.

선계의 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지목족(地木族).

그리고 그들의 왕인 ‘기목청(技木菁)’

기목청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가던 그들은 선계의 수많은 목족 중에서도 손꼽히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세력이 넓어지는 만큼 반목하는 자들이 많아졌고, 급기야 선계 최강 세력 중 하나라는 법문(法門)과 척지게 된다.

법문이 요구하는 건 단 하나.

종족의 왕인 기목청이 법문에서 정한 자와 계약을 맺고, 법문의 수장에게 충성을 맹세하라는 것.

당연히 지목족은 반발했고, 그것은 기나긴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시작이었다.

‘법문? 말하는 내용만으로 보자면 귀원패가 말한 천신라나 마규보···. 둘 중 하나의 세력이 분명하다.’

선계에 활동 중인 마선들을 회유하고, 거대세력의 수장들을 자신들이 보유한 마선들과 계약시켜 세력을 키워간다던 두 세력.

정확한 명칭은 몰랐지만, 분명 귀원패가 말한 마선들 중 최강자라 불리는 천신라나 마규보의 세력임이 분명했다.

“처음부터 결과는 정해져 있었지. 어찌 선계의 강자들만 모여있는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었겠나. 결국 우리는 삶의 터전을 등진 채, 소수의 인원만이 남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쳐야 했네.”

하지만 도망친다고 끝나지 않았다. 결국 대부분의 족인들이 죽고, 기목청은 자신을 희생해 일부 지역을 봉인시킴으로써 살아남은 족인들을 보호해야 했다.

“소수의 인원만 살아남은 후에야 진실을 알게 되었지. 법문이 그분을 휘하에 넣으려던 진짜 이유를.”

기목청에겐 극소수의 목족만이 가진다는 혈맥의 힘이 있었고, 법문이 원하던 건 기목청이 아닌 바로 그 혈맥의 힘 자체.

그랬기에 기목청이 죽은 후에도 법문의 공격은 계속되었고, 결국 기목청이 죽기 전 만들었던 봉인지마저 파괴되는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당연히 봉인지에 숨어있던 지목족의 전멸과 함께.

“그럼 설마 이곳이?”

“그렇네. 오래전 그분께서 족인들을 살리기 위해 외부로부터 완벽하게 단절시켰다고 여겼던···. 그곳이지.”

이야기가 끝맺음 돼가자 사내는 아련한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다 시선을 돌려 준혁을 쳐다보았다.

“어떤가? 내 이야기가? 궁금한 것이 있나?”

사내의 질문에 준혁은 침음을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당신이···. 천균···. 입니까?”

준혁의 질문에 사내가 기분 좋은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그렇네. 내가 바로 천균. 법문의 무자비한 공격 속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지목족의 생존자. 정확히 말하자면 천균이 죽고 난 후 남은 잔혼이라 할 수 있지.”

“그럼 이 환영을 만든 게···.”

사내는 다시 시선을 돌려 봉인지를 둘러보고는 말했다.

“이곳 말인가? 자네도 이제 눈치챘겠지? 맞네. 이곳은 죽기 전 내 기억을 기반으로 만든 진법 안일세.”

처음 천주문을 배울 때부터 일부분 예상했던 일이기에 준혁은 크게 놀라진 않았다.

다만 이곳을 만든 의도가 궁금할 뿐이었다.

그때 산 전체가 잘게 진동하기 시작했고, 잠시 후, 천균의 잔혼을 제외한 모든 것이 일그러지더니 곳곳이 부서진 황폐한 산과 처참한 주변 환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준혁이 오랜 기간 수련했던 건물도 그 흔적만 겨우 남아있었고, 계단을 포함한 산 전체가 반파되어 있었다.

유일하게 지유목 숲과 호수만이 온전하게 보존된 상태였다.

‘설마 이게 본모습?’

진법의 효과가 사라지고 진짜 봉인지의 모습이 드러나자, 이곳이 치열한 격전의 현장이었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후 또 한 번 산이 진동하더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떤가? 제법 잘 만들었지?”

“이곳을 만든 의도가 무엇입니까? 설마 진법의 도움으로 수행을 올려 지목족의 복수를 바라시는 겁니까?”

사내의 너스레에 준혁은 궁금했던 바를 바로 물어보았다. 그러자 사내가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나? 삼경을 넘어 진선경에 이른 그분께서도 어쩌지 못한 것을···. 이제 수도의 길에 들어선 자네 같은 이에게 복수라니.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나 보군.”

사내는 시선을 돌려 산 아래 지유목 숲과 호수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봉인지 밖으로 보낸 고서를 보았다면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을 텐데?”

‘고서?’

만약 그런 게 있다면 틀림없이 비경의 목족이 가지고 있을 터였다.

‘그랬구나! 그들은 그저 보물을 찾기 위해 봉인지의 결계를 해제하려는 게 아니었어. 처음부터 이곳에 무엇이 잇는지 알고 있던 거였어.’

그때 사내의 창백한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준혁이 한 말을 듣고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했다.

“잠깐. 자네 말을 들으니. 혹 내가 남긴 고서를 해석하여 이곳을 찾은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알지도 못하는 고서의 내용을 가지고 거짓을 말할 수 없었기에, 준혁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아마르곤 수사의 의뢰를 받아 봉인지의 결계를 담당한 진법가입니다.”

준혁의 소개에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마르곤? 자세히 말해보게.”

사내가 들을 준비가 됐다는 듯 뒷짐을 지자, 준혁은 아는 바를 적절하게 섞어 자신을 포장했다.

“자네 말을 정리하자면, 이 봉인지가 하계에 연결돼있고, 다른 목족들은 결계에 접근할 수가 없어 진법가인 그대를 고용했다?”

“그렇습니다.”

분노한 목족 수사가 세르게이를 공격할 때, 봉인을 저항 없이 지나쳤던 걸 기억해 낸 준혁은 빠르게 말을 만들었고 우연찮게 사실을 맞혀버렸다.

“허, 내가 행한 일이 설마 그런 결과를 가져왔단 말인가···.”

+++

법문과의 격전 후.

혼자 살아남은 천균 역시 생명이 다해가고 있었다.

뒤늦게서야 집요하리만치 집착하는 법문의 행동에 이유를 알아낸 천균은 기목청이 남긴 후인들을 위해 숨겨두었던 혈맥의 힘을 회수하려 했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자신이 해결할 수 없게 변해 버렸다.

기목청이 죽기 전 만들어 놓은 영역이 깨져나가며 봉인지가 분리돼버린 것. 다행이라면 생명의 근원까지 바쳐가며 만든 영역이라 깨져나간 상태에서도 본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거기다 무슨 이유인지 봉인지 밖으로는 몸을 빼낼 수도 없었다.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천균은 결국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깨닫고, ‘영역’으로 만들어진 봉인지 안에 또 다른 영역을 만들었다.

그러자 영역 간에 간섭이 일어나며 미세한 틈이 생겨났고, 천균은 자신의 힘 일부와 모호한 글을 남겨 봉인지 밖으로 보냈다.

그리고는 자신이 남긴 힘을 얻고 글을 해석하는 이가 찾아오면, 황금궁전으로 가 혈맥의 힘을 되찾을 수 있게 ‘영역’ 전체에 고도의 환영진을 펼쳐 수련을 돕게 만들었다.

“궁금한 것이 풀렸나? 이것이 내가 직접 황금궁전으로 가 우리의 염원이 담긴 혈맥의 힘을 해방하지 못한 이유네. 그리고 이건 예상이지만, 내가 영역 간의 간섭을 이용하는 틈에 문제가 생겨···. 이 봉인지가 하계로 연결돼 버린 것이겠지.”

‘이자의 힘을 이어받았기에 그들이 그토록 강했던 것인가?’

준혁은 공간을 가르던 목족인들을 떠올렸다.

시간이 지나, 어느덧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게 된 두 사람은 봉인지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결국 황금궁전에 가기 위해선 이곳에서 자격을 얻고, 하늘정원에서 열쇠를 얻어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네. 이제 처지가 바뀌어 자네에게 내가 부탁을 해야겠군. 우리 지목족을 위해 궁전에서 혈맥의 힘을 해방시켜 주겠나?”

사내의 부탁에 준혁은 수십 년을 함께했던 환영들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저 밖으로 나가는 방법을 알기 위해 쉽게 고개를 끄덕여 버리면 그만이었지만, 왠지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준혁은 이어지는 천균에 말에 정신이 번쩍 뜨인다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자네가 내 힘을 이어받아 찾아온 족인도 아니고, 고생을 자처하며 궁전으로 가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니, 내 다른 제안을 하겠네. 혹시 화신단이라고 들어보았나?”

‘화신단(化神丹)?’

화신단이란 화목단의 상위 단약으로 화신기의 수행을 대폭 늘려주는 목족 고유의 단약이었다.

화신단의 특징으로는 화신기에 이른 수사의 수행도 올려주지만, 화신기에 이르지 못한 수사가 복용할 경우 화신기에 오를 고비를 수월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

그렇기에 수행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보물이나 마찬가지인 물건이었다.

준혁 역시 연단 노인을 통해 제조 방법을 이미 익힌 상태였다. 다만 그 재료라는 것들이 선계에서도 쉽게 찾지 못하는 것들이라 애초에 관심을 두진 않았었다.

준혁의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자 천균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혈맥의 힘을 황금궁전에 숨길 때, 그곳의 기운이 너무 강해, 하늘정원 한쪽에 그분의 기운이 담긴 뿌리들을 따로 숨겨두었네. 그때 훗날을 대비해 화신단 세 알도 함께 두었지. 어떤가? 그대가 혈맥의 힘을 해방해준다고 약조한다면 화신단이 숨겨진 장소를 알려주겠네.”

결국 신중한 태도로 일관하던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약속드리겠습니다. 다만. 제 능력으로 해결 가능하다 판단될 때 이행하겠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물론이네.”

+++

서로 간의 거래 아닌 거래가 끝나자, 봉인지와 진법에 대한 깊은 대화가 오고 갔다.

준혁으로서는 밖으로 나가면 더는 이들의 지식을 얻을 길이 없기에 궁금한 것을 전부 물어보았고, 천균 입장에서도 준혁이 하나라도 많은걸 아는 게 약속을 지키는 데 유리하다는 걸 알았기에 아는 바를 자세히 가르쳤다.

그렇게 또 3년이 지나가자, 천균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준혁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준비가 되었는가?”

“아직입니다. 제 공부가 부족해 아직은 봉인지에 틈을 만들어낼 자신이 없습니다.”

“알고 있네. 그러니 이제 아홉 번째 관문을 시작해야지.”

관문이라는 말에 준혁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설마 아직 남은 게 있단 말입니까?”

준혁의 질문에 오히려 천균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네야말로 무슨 말인가? 처음부터 듣질 못했나? 하늘정원에 이르는 관문은 총 10개라는걸?”

“그것이야 그렇지만···.”

‘그렇다면 애초에 관문이 끝나고 나타났어야지!’라는 생각을 할 때 천균이 입가를 끌어올리며 씩 웃어 보였다.

그 표정은 평소와 다르게 악동 같은 모습이었다.

“혹 내가 나타난 순서가 잘못됐다 생각하는가?”

“그게···.”

“후후. 이게 맞는 순서일세. 이곳에서 나가는 것뿐 아니라, 하늘정원에 가기 위해선 영역에 틈을 만들어야 하고 그건 이론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한 준혁을 향해 두 손가락을 들어 올린 천균은 입에서 녹색으로 뭉친 무언가를 뱉어냈다.

녹색 덩어리는 순식간에 손가락에 닿더니 녹색 불꽃을 이루며 타들어 갔고, 그 순간 주변의 기운이 출렁이더니, 푸른 매화들이 사방에서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준혁이 시야가 급격하게 어두워짐을 느끼며 경계 태세를 갖추려고 할 때, 그가 서 있던 바닥을 중심으로 검은 구체가 만들어지더니 순식간에 부피를 늘려 검은 밀실로 변해버렸다.

찰나의 순간에 만들어진 검은 밀실은 생성됨과 동시에 주변으로 굵은 나무가 자라나 뒤덮었고, 준혁은 밀실에 갇히며 모든 기운이 완벽하게 차단당해버렸다.

그때 밀실 밖에서 천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을 깨고 나온다면 준비가 끝날 테니. 너무 오래 걸리지 않길 바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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