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하늘정원으로 가는 길 (2) >
귀원패가 식검과 결합해 온전한 능력을 발휘하지 않는 한, 인지경이 발동되며 전해주는 영기의 총량을 넘어설 순 없는 일.
시험의 의도완 달리, 준혁은 영력을 마음껏 발산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궁금증에 귀원패를 조절해 벌레 한 마리를 보호막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의 말대로 이 정도면 최소한 원영기 이상은 되어야 함은 맞지만. 실패한다면 살아나갈 수 있을까?”
다섯 번째 관문 전까진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목숨에 지장이 없는 것처럼 말했기에, 준혁은 벌레를 영기로 감싸 증식할 수 없게 만들고는 천천히 살폈다.
“아! 이런 것이었구나.”
보이는 것과 달리 벌레는 진짜 벌레가 아닌 목족의 신체 일부가 만들어낸 분신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벌레의 이빨에서 흘러나오는 액체를 확인하고는 벌레가 생각과 달리 안전하다는걸 알 수 있었다.
흉악한 생김새와 달리, 벌레는 시험에 드는 자를 마비시키는 용도로 만들어져 있었던 것.
궁금증이 해결된 준혁은 보호막 밖으로 벌레를 내보내고는 여유롭게 한 계단 한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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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번째 계단부터 준비된 세 번째 관문은 틈이 없는 장미 덩굴을 통과하는 시험.
조건은 장미 덩굴을 훼손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
신체를 덩굴과 동화시켜 통과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쉽군.”
준혁은 적마도를 꺼내 연달아 발동시키며 마흔 번째 계단까지 아무 방해 없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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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관문은 기본을 확인하는 최종 관문이란 듯, 쉽지 않은 시험이 준비돼 있었다. 계단 중심에 죽은 듯이 말라버린 거대 나무를 되살리는 일.
관문을 진행하는데 시간제한은 없었고 방법에 대한 제한마저도 없었다.
거대 나무 가까이 다가가 살펴본 준혁은 시험이 의미하는 걸 단번에 깨달았다.
‘생명력을 공유해 되살리는 거구나.’
나무를 살리기 위해선 공법에 통달해야 했고, 자기뿐만 아니라 타인의 기운마저도 완벽하게 조종할 수 있어야 했다.
게다가 생명력이라는 근원의 힘을 움직여야 했기에, 자칫 잘못한다면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준혁에겐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애초에 목족이 아니었기에 목기(木氣)를 움직여 상대방과 생명력을 공유할 방법 자체가 없었던 것.
그건 그들 종족의 특성이었지, 공법이나 술법 따위로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닌데···.’
시험 과정을 설명한 후, 줄기 사내가 홀연히 사라져 버리자 준혁은 한동안 고민에 빠져있다가 공간대에서 단약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생명력이 사그라든다는 건 결국 몸 안으로 스며드는 영기의 양보다, 잃는 영기가 많다는 뜻.
준혁은 연형기에 먹기 위해 남겨두었던 1품 화목단 하나를 꺼내 삼키고는 죽은 듯이 말라가던 거대 나무에 손바닥을 가져갔다.
‘깨진 항아리에 물을 채워야 할 땐, 단숨에 채워버리는 게 최선이지. 조금씩 부어봐야 의미가 없다.’
정확히 어느 정도의 기운을 북돋아야 관문을 통과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1품 화목단의 기운을 넘지 않을 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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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이곳까지 도달할지는 몰랐습니다.”
단번에 죽은 나무를 살리고, 다섯 번째 관문에 오르자, 줄기 사내가 나타나며 진심 어린 사과를 전했다.
“솔직히 말해. 놀랍습니다. 지금껏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이곳까지 다다른 이는 공자가 처음입니다. 특히 네 번째 관문은 저라도 수백 일을 소비해야 하거늘···. 은연중에 공자를 무시한 것,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줄기 사내가 고개 숙이는 모습에 준혁은 가볍게 웃어 보이며 대답을 대신했고, 사내는 사과를 끝내며 한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이번 관문은 제 공격을 한 번만 막아내시면 됩니다. 어떤 수단을 써도 인정되나 피하는 건 금지입니다. 원래라면 한 번쯤 포기하길 권유하지만···. 공자껜 그것마저 실례라는 생각이 들어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자 그럼 가겠습니다!”
‘피하지 말라고?’
말을 끝마친 사내는 들어 올렸던 손으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움켜잡더니, 준혁을 향해 무언가를 뿌리듯 손을 휘저었다.
그 순간, 대기가 요동치며 영기파동이 퍼져나갔고, 동시에 사내의 등 뒤로 성인의 허벅지만 한 나무줄기들이 수십 가닥 솟아나더니 허공으로 높이 솟구치다가 준혁을 향해 쇄도했다.
쇄애액-
수십 가닥의 나무줄기가 찔러오는 찰나의 순간.
“귀원···.”
준혁은 다가오는 나무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오래전 목족 수사의 공격에 귀원패로 만든 보호막이 산산조각 났던 게 머릿속에 떠오른 것.
‘혹시 피하지 말라는 뜻이?’
사내가 했던 말을 되뇌어 본 준혁은 그 말에 담긴 진의를 깨닫고는 보호막을 만들려 던 걸 멈추고는 재빨리 수결을 맺은 후 이마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 순간.
파파팟- 스걱-
수십 가닥의 나무줄기가 준혁의 몸을 꿰뚫어 버렸고, 개중 한 가닥은 정확히 준혁의 이마 정중앙을 관통했다.
아무런 저항 없이 준혁의 온몸이 나무줄기에 꿰뚫린 상태가 되자, 줄기 사내는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통과하실 줄 알았습니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군요.”
사내의 칭찬에 온몸이 꿰뚫린 준혁의 입가가 살짝 움직였다.
그리고 웃음 짓던 그 순간.
준혁의 몸이 퍼엉 하고 터지며 옅은 분홍색 꽃잎을 흩날렸고, 꽃잎들이 한쪽으로 날아가 뭉치더니 온전한 상태의 준혁의 모습으로 변했다.
“혹시나 화신목영의 성취를 알아보는 시험인가 했더니, 제 생각이 맞았나 봅니다.”
온전한 상태로 돌아온 준혁의 말에 줄기 사내가 가볍게 손을 저어 주변을 정리하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화신목영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자는 관문에 도전할 자격조차 없는 것. 이것이 진짜 관문에 도전하기 위한 마지막 시험이었습니다.”
연단 노인에게 배운 비술 중 하나인 화신목영.
화신목영은 비단 노인만의 비술이 아닌 목족 가문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비전 비술 중 하나였다.
다만 이름은 같았지만, 그 기능과 효과가 각 가문마다 달라, 각각 가문의 특색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준혁이 연단 노인에게 배운 화신목영은 목기를 극한까지 끌어올려 몸을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기운으로 바꾸는 것.
그래야만 연단을 할 때 연단 재료에 함유된 기운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었고, 그랬기에 노인이 그토록 화신목영을 먼저 대성하라고 강조했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고유의 능력은 천차만별 달랐지만, 화신목영을 익힌 자들은 공통된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몸 일부를 이용해 분신술을 사용하고, 목둔술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목족의 몸이 아니어서인지, 분신술은 아무리 연습해도 도통 성과가 없는 준혁이었다.
“헌데 이상하군요. 공자의 가문은 눈부신 청매화를 피우기로 유명한데···. 어찌, 혹 다른 가문의 화신목영을?”
“... 그건.”
“아, 아닙니다. 제가 괜한 소리를 했군요. 이제 위로 올라가시면 진짜 관문이 시작될 겁니다. 부디 공자의 발걸음이 하늘정원에 닿아···. 그분을 만나 뵙길 바라겠습니다.”
줄기 사내는 궁금한 것이 있으나 참아보겠다는 듯 말을 아꼈다. 그리고는 한쪽으로 비켜서며 준혁이 다음 계단을 향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준혁은 가볍게 웃음을 내비친 후, 정수리부터 가슴까지 손을 움직여 예를 표한 후 몸을 움직였다.
‘청매화라···.’
천균이라 불리는 자가 속한 가문이 어떤 기운을 가진 것인지는 모르나, 연단 노인에게서 배운 비술은 짙은 붉은색을 가진 연단에 특화된 능력이었다.
하지만 몸을 꽃잎처럼 변화시키는 수련을 이어가던 중, 그것이 사쿠라가 사용한 술법과 일부분 비슷한 것이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고.
익숙하게 보아왔던 사쿠라의 능력을 떠올리다 보니, 그 영향인지 준혁의 기운은 짙은 붉은색에서 옅은 분홍색으로 점차 변화해버렸다.
‘그러고 보니···. 다들 잘 지내고 있으려나.’
문득 울릉도에 있을 사람들을 떠올린 준혁은 삼청조를 불러내 어루만졌다.
어느 곳에 있어도 연락이 가능하다던 삼청조는 이곳에 들어온 후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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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분지 안에 새롭게 세워진 건물 안.
진법으로 첩첩이 싸인 방 주위를 기웃거리던 청명은 전음부를 꺼내 날려 보냈다.
잠시 후. 방을 둘러싸고 있던 진법이 해제되며, 고저 없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해하지 말라고 했는데, 무슨 일이지?”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청명은 급하게 용건을 꺼냈다.
“사쿠라님. 대부분 가호법과 제가 처리했사오나, 중대한···.”
“용건만.”
“큼흠. 그것이 일본의 중진문(中津門)과 한국의 청주한가(淸州韓家) 라는 곳에서 대인의 휘하에 들고 싶다 찾아왔습니다요.”
“중진문이면 나카쓰가와 인근에 있는 곳?”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
중진문이라면 일본에서도 꽤나 세력이 큰 곳 중 하나로 대금당이 법기를 만드는 것으로 유명했다면, 중진문은 고급 연단을 만드는 것으로 이름을 날리는 곳이었다.
“아직 원영 응결식도 하지 않았거늘, 이제 최수사가 원영기에 이르렀다는 걸 모르는 이들이 없나 보군.”
“그렇습니다요. 최근엔 어찌나 많은 이들이 찾아오는지···. 규모가 작은 곳들은 제 선에서 처리했으나. 이번에 이 두 곳은···.”
청명이 말끝을 흐리자, 방 안에 있던 사쿠라에게서 비웃는 듯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흥! 줄을 대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뻔히 보이네. 청주한가는 뭐로 유명하지?”
“그곳 가주가 결단기 중기 수사이고, 가문은 선주로 유명한 곳입니다요.”
“선주라···. 나쁘지 않네. 우선 내가 맛을 봐보고 결정할 테니 진상품을 보내라고 해.”
“그럼 중진문은···.”
“그곳은 일본에서도 연단으로 유명한 곳이니 받아들여도 나쁘지 않을 터. 알아서 하고.”
사쿠라가 고민 없이 결정을 내리자 청명의 얼굴에서 걱정이 조금 사라진 듯 보였다.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 얼굴이 다시금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알겠습니다요···. 헌데 사쿠라님.”
“또 뭐?”
“그것이···. 성인봉에 있는 그분께서 가져가시는 영석이 만만찮습니다요. 계속해서 지급해드려야 하는 겁니까요?”
드르륵- 쾅!
청명에 질문에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부서질 듯 세차게 열렸다. 동시에 사쿠라가 성큼 걸어 나오더니 깜짝 놀란 청명을 쏘아보았다.
그 모습에 이젠 사쿠라와 제법 가까워졌다고 여겼던 청명의 두 다리가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 그따위 소리를 하는 것이냐?!”
평소 사쿠라답지 않은 말투가 튀어나왔다.
“그. 그것이···.”
“무슨 이유인지는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최 수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셨다고 했다. 게다가 그분께서 십 년이 넘게 이곳에 머물기 시작하면서 대외적으로 우리의 위상이 올라간 걸 모른단 말이냐!”
불같이 화내는 사쿠라의 모습에 청명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십여 년 전 갑작스레 나타난 영국의 원영기 수사.
그녀는 준혁의 거처가 마련돼있던 성인봉에 자리를 잡더니, 마치 주인처럼 행세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준혁이라는 동아줄을 잡아, 울릉도의 주인이라도 되는것인 양 으스대고 다녔던 청명 입장에서는 그녀의 존재가 너무나 거슬렸다.
그렇지 않아도 준혁이 실종된 사실을 사람들이 모르게 하느라 전전긍긍하던 청명은 혹시라도 울릉도를 통째로 빼앗기진 않을까 하는 걱정에 잠도 이루지 못하고 있었던 것.
“죄송합니다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요.”
“알았으면 됐어. 최수사가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사람들이 진상품을 가져다 바치며 모여드는 건 전부 그분 덕분이기도 하니까, 그분께서 가져가는 자원이 아깝다 생각하지 말고.”
“네, 네. 명심하겠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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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청명이 사쿠라에게 깨지고 있던 시간. 준혁은 여덟 번째 관문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계단은 온데간데없고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으며 주변엔 온통 칠흑 같은 안개가 떠다니며 음산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이건 분명 음살진(陰殺陳)이다.’
여섯 번째, 일곱 번째 관문이 각각의 관문을 지키던 목족 환영과 대결하는 것이었기에, 여덟 번째도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계단을 오른 순간 어떤 안내도 없이 주변이 어둠에 가려졌고, 살아있는 생명체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음살진이 펼쳐진 것.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진법을 해제하거나 통과하는 것이 여덟 번째 시험인 걸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잠시 후 음살진이 생명의 기운을 느꼈는지 칠흑 같은 안개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준혁은 공간대에서 깃발들을 꺼내 주변으로 던졌고, 빠르게 수결을 맺어 진법의 천장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느새 준혁의 입가로 비웃음이 걸려있었다.
‘목족 수사를 괴롭히는 데는 이만한 진법이 없긴 하지.’
음살진의 음기는 목족의 목기를 완전히 묶어버리고 반대로 화기를 자극하는 진법. 상성으로 보자면 최악이라 할만한 진법이었다.
게다가 음살진의 가장 큰 특징은 안에 갇힌 생명체의 기운이 강하면 강할수록 진의 위력이 폭증한다는 것.
하지만 준혁에겐 두 가지다 문제가 되질 않았다.
목기가 묶인다 해도 오행을 다루는 인간에겐 큰 문제가 아니었고, 특히나 기운을 완벽하게 갈무리할 수 있는 준혁에겐 더더욱 음살진은 힘을 쓰지 못할 터.
잠시 후 준혁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진법의 천장에서부터 미세한 틈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음살진의 칠흑 같은 안개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 순간 준혁은 적마도와 식검을 불러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힘도 쓰지 못하는 구멍 난 진법으로 나를 가둘 순 없지.”
천주문을 익혀 진법의 일정부분을 무효화 시켜버릴 수 있는 준혁.
그런 그가 적마의 능력을 사용하면, 상급 수사의 진법이라 해도 더는 그를 붙잡아둘 순 없었다.
물론 ‘영역’의 단계에 접어든 수사의 결계라면 여전히 비집고 들어가는 게 불가능 할 테지만, 화신기 이하가 만든 진법이라면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낼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