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수련 (3) >
“사형? 좀 쉬면서 하는 건 어때? 갑자기 변하니까 무서워.”
“사매가 그랬잖아. 더는 꼼수 부리지 말라고.”
“그건 그렇지만···.”
준혁은 최하급 화목단을 만드는 데 성공한 이후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영단을 만드는 데만 집중했다.
우선적인 목표는 원영기 수행에 적합한 3품 화목단을 만드는 것.
첫 연단에 성공한 화목단이 겨우 7품이었기에, 아직까진 갈 길이 한참이나 남았다.
노인이 3년 안에 3품 화목단을 만들라고 한 것도 사실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요구 조건임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 정도 천재가 아니면 자신의 비전을 알려줄 생각이 없다는 뜻이겠지.’
준혁은 새로운 지유목을 꺼내 허공에 띄운 채 영기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연단을 시작하며 유일하게 준혁이 걱정한 것은 연단 재료를 무한정 사용하다 보면, 환영들이 그것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다행인지 아니면 수련 용도로 만들어진 환영이라서 인지. 그들은 ‘수장 어른께 조달받나?’ 정도의 의문만을 남긴 채, 크게 신경을 쓰진 않았다.
그 후로 준혁은 눈치 보지 않고, 영천수와 지유목을 끊임없이 소비하며 연단에만 힘썼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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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후.
건물 입구에 선 준혁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공간대 안에 지유목은 남아있지만, 영천수가 떨어진 것.
요린은 이미 연단술 기초만 배운 후, 다른 것들을 배우기 위해 자리를 이동했기에 연단 재료의 수급은 준혁에게만 필요했다.
‘나간 후 다시 반복하느냐, 아니면 진법과 공법, 환시화까지 전부 기초를 배운 후 다시 연단을 시작하느냐 인가?’
고민을 거듭하던 준혁은 결국 재료 수급을 위해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배움의 기회가 반복된다면, 여러 가지를 익히기보다는 한 가지를 확실하게 마무리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
특히나 노인에게서 배울 수 있는 비전은 화목단의 효능을 증폭시킬 수 있는 것이었기에 우선하여 확보해야 할 것 중 하나였다.
잠시 후, 건물 입구 근처에 서성거리던 미남자에게 인사한 준혁은 건물을 나섰다.
환영은 깨어지고 모든 게 처음으로 돌아갈 테지만 전혀 아쉬움은 없었다.
건물을 나선 준혁은 곧장 호수로 향했다.
“어딜 간 거지?”
호숫가에 백호가 보이질 않자, 기감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그때 등 뒤에서 다가오는 기운을 느끼고는 몸을 돌리자, 백호가 날아들 듯 품속으로 쏙 들어왔다.
그리고는 예상치 못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주인님!”
백호의 말에 준혁이 깜짝 놀라 하며 품 안에 있던 백호를 꺼내 들었다.
“영성이 트인 것이냐?”
“네. 얼마 전부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일반적인 영수가 10년 내외로 영성이 트여 말을 할 수 있는 걸 생각하면, 백호는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 종족과 다른 인간의 언어를 곧바로 사용하는 걸 보면 느리다고 판단하기에도 조금 모호했다.
준혁은 기감으로 백호를 훑어보고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곧 축기기에 오르겠구나.”
“여기 호수가 큰 도움이 되었어요.”
“하하, 그래. 좋구나! 좋아.”
문득, 영성이 트인 영수는 이름으로 불러야 친밀감이 빠르게 오른다는 걸 생각해낸 준혁은 백호를 잠시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네 녀석은 귀밑에 푸른 털이 나 있으니, 앞으로 청호라 부르겠다. 이름이 마음에 드느냐?”
“청호···.”
자신의 이름을 되뇌던 백호가 몸을 한번 회전시키며 준혁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리고는 준혁의 품속으로 쏙 들어가며 말했다.
“맘에 들어요.”
준혁은 품 안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청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어엿한 수사의 길에 들어섰거늘, 아직도 아이처럼 그 안에 들어가 있을 것이냐?”
준혁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청호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주인님 품에선 좋은 냄새가 나는걸요···. 기억나진 않지만···. 엄마의 품처럼 기분 좋아요. 특히 여기 두근대는 심장 소리가 너무 좋아요.”
“녀석. 네가 어릴 때부터 그 안에 있어서 그럴···.”
다시 품속으로 들어가 심장이 위치한 가슴부위에 얼굴을 비비는 청호를 보며 입가를 끌어올리던 준혁은, 순간 예전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건 어쩔 수가 없었잖아. 우리 종족의 미래가 달린 일이었는데. 혹시 그 녀석을 좋아하게 된 거야?
-응? 아니···. 근데. 이상하게 큰둥이한테는 좋은 냄새가 나.
-좋은 냄새?
-응. 말로 설명할 수 없는데···. 가까이 있으면 편안해져. 마치 엄마의 품처럼···.
‘산들바람이 말한 그 냄새인가?’
그때 그들의 이야기를 훔쳐 들을 땐, 별 의미가 있다 생각하지 않고 흘려들었지만, 청호가 같은 소리를 하자 정말 다른 이유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고민한다고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준혁은 상념을 날려버리고는 청호에게 집중했다.
“청호야. 내 잠시 너의 몸을 확인 좀 해봐도 되겠느냐?”
영성이 트인 청호는 어엿한 한 명의 수도자였기에, 준혁은 그와 ‘종속의 인’으로 묶여있을지언정, 종을 부리듯 하지 않고 의견을 물었다.
“주인님이 원하시면 당연하죠.”
청호의 대답에 준혁은 손안에 영력을 집중해 청호의 이마에 가져갔다. 그리곤 청호의 몸 구석구석을 조사했다.
‘흠···. 혹시나 했더니, 역시 풍영근과 뇌영근이 혼합된 상태이구나.’
“청호야. 내 너를 유적에서 데려올 때, 네가 복용할 수 있는 영단도 함께 얻어왔단다. 하지만 아직 네 몸이 그걸 받아들이기가 힘들 터이니, 우선은 내가 만든 영단으로 수행을 올리거라.”
“네, 주인님.”
유적의 영단을 사용하기 위해선 최소한 청호의 수행이 축기기 후기나 결단기 초기는 돼야 했기에, 준혁은 최하급 화목단의 기운을 약화시켜 연기기나 축기기가 먹을 수 있는 영단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리고 청호의 수행을 빠르게 올리려는 이유는 꼭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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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달 후.
영단의 도움으로 축기기에 오른 청호를 데리고 건물 앞으로 온 준혁.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준혁은 청호를 혼자 두고 건물로 들어갔고, 한참이 지난 후 건물 안에서 전음부 한 장이 하급 공간대와 함께 날아왔다.
청호는 미리 지시받은 사항이 있었기에 입김을 후우 불어 전음부를 끌어당겨 발동시켰다.
-청호야. 공간대에 영천수를 가득 담아 가져오거라.
전음부가 말을 전하며 타버리자, 청호는 공간대를 물고는 땅을 박차며 호수로 이동했다.
잠시 후 공간대에 영천수를 가득 채워 돌아온 청호가 입김을 내 불어 영기로 공간대를 감싼 후에 건물 안으로 쏘아 보냈다.
그러자 다시 한번 건물 안에서 전음부와 하급 공간대가 날아왔다.
-이번엔 지유목을 이 안에 담아오너라.
전음부에서 새로운 명이 떨어지자, 청호는 바로 숲으로 날아가 앞발에 바람의 기운을 뭉쳐 나무를 캐기 시작했다.
그리곤 지유목 세 그루를 캐내 공간대에 담고는 다시 건물로 이동해, 건물 안으로 물건을 넣어주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건물에서 준혁이 걸어 나오며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혹시나 했더니 이것이 가능하다니. 잘했다 청호야. 네 덕분에 끊임없이 수련을 지속할 수 있게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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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호를 통해 물건을 조달받을 수 있다는 걸 확인한 준혁은 다시 호숫가로 돌아와 영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축기기에 오른 청호가 한동안 걱정 없이 먹을 양을 전부 만들어 놓은 후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옆에선 청호가 그런 준혁을 보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청호야. 내가 준 옥돌 속 내용은 전부 확인해보았느냐?”
“아직이요···.”
“그건 너희 백호족의 술법이 담긴 것이니, 필히 완벽하게 익혀야만 한다. 그리고 이것도 받거라.”
준혁은 옥간 하나를 건넸고, 청호는 빠르게 그것을 받아와 이마에 가져갔다.
“그 안엔 내가 적호족에게서 배운 것들을 기록해 두었으니,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도 받아 두어라.”
준혁의 손이 공간대를 스치자 이번엔 옥으로 만든 구름 색의 팔찌 4개와 거대한 백호 가죽, 기다란 발톱, 그리고 성인 남성의 팔뚝만 한 이빨이 청호에게 날아갔다.
천천히 날아오는 물건들을 입김을 불어 끌어안은 청호가 고개를 갸웃 하자, 준혁이 설명을 이었다.
“그것 모두 네가 잠들어있던 유적 안에서 얻은 것들이다. 내가 살펴본 바로는 수행이 높은 백호족의 누군가가 아주 오랫동안 몸속에서 연화시킨 신체 일부이자, 인족으로 치자면 법보나 마찬가지인 보물들이지.”
정확히는 팔찌들은 자비에가 함정을 파며 다니엘에게 전해주라 한 물건이었고, 나머지는 유적의 1층에서 얻은 것들이었다.
“아직은 네 수행에 그것들을 연화시키긴 어렵겠지만, 이곳은 너와 나 말고는 아무도 없으니, 안심하고 천천히 살펴보도록 하거라. 어느 것이든 조금이라도 연화에 성공한다면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인간이었다면 최소한 결단기에는 이르러야 몸속에 법보를 담아 연화를 시도할 수 있겠지만, 원래 몸속에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영수인 백호는 운만 좋다면 기연을 얻을 가능성이 있었다.
“감사해요. 주인님.”
“그것 말고도 몇 가지 더 전해줄 것이 있지만, 그건 너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터이니, 훗날 준비가 되었다고 여겨질 때 전해주마.”
아직 공간대 안엔 백호 유적 2층에서 얻은 이빨을 엮어 만든 목걸이와 금으로 만든 머리띠가 있었다.
하지만 원영기에 오른 준혁으로서도 아직 그 법기들의 기능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기에, 청호에게 건네기는 시기상조라 판단했다.
준혁은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청호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연단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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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후.
“주인님. 저도 열심히 수련하고 있을게요.”
청호의 배웅을 받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선 준혁은 곧장 몇 번 반복했던 일들을 다시 되풀이했다.
다시 건물로 돌아온 준혁은 정신적인 피로함이 차오를 때를 제외하곤 잠도 자지 않고 연단실에 틀어박혔고, 주위에선 천균 공자가 미쳤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다만 미쳤다는 것이 정말 미쳤다기보다는, 수련에 미쳤다는 칭찬이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천균, 아니 준혁이 연단술에 매진하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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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후.
깔끔하지만, 후끈한 열기가 멈추지 않는 방안.
한쪽엔 거대한 화덕과 그 옆에 조그만 화로. 벽면엔 지유목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연단실.
연단실은 준혁 혼자만의 개인 실습실이 된 지 오래였다.
그런 연단실에 연단 스승인 노인과 요린,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연단 스승인 노인은 자신의 눈앞에 겸손하게 시립 해 있는 준혁의 어깨를 덥석 잡고는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구나!! 천재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정녕 너는 천단사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이 틀림없다. 하하하, 화목단을 처음 제작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았거늘! 벌써 3품 화목단을 만들어 내다니! 내 약속한바 너에게 우리 가문의 비전 연단술인 ‘화신목영(化神莯英)’과 화목단의 기운을 증폭할 수 있는 ‘화래증폭술(火來增幅術)’을 전수하마!”
준혁은 노인의 말에 정수리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 후, 손을 정수리에서 코끝, 그리고 심장 앞으로 천천히 이동하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것은 이곳에 속한 목족인들이 상대방에게 존경을 표할 때 하는 인사였다.
“모든 것이 스승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하하하! 어찌 이리 마음에 드는 짓만 하는지.”
준혁은 상대방의 웃음에 가볍게 미소 지었다.
사실 준혁이 연단술에 재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노인의 요구대로 3년 안에 3품 화목단을 만드는 건 불가능했다.
그랬기에 준혁은 재료가 있음에도 건물 밖으로 나가 모든 걸 처음으로 되돌리고 다시 수련하기를 반복했고, 백호가 영성이 트인 지 10년이 지나, 네 번째 반복을 경험하며 드디어 3품 화목단을 만들어 냈던 것이었다.
“당장 가자꾸나. 오늘부터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전수해 주마!”
비전을 전수해 준다는 말은 정식 제자로 받아주겠다는 뜻.
노인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