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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101화 (101/408)

< 101화. 결계속으로 (3) >

같은 말을 반복하는 환영을 무시한 채, 준혁은 대전 끝에 마련된 제단 형식의 단상 앞으로 다가갔다.

단상 옆에는 작은 통로가 마련돼있었고 위치상으로 본다면 산으로 연결되는 계단으로 향하는 곳처럼 보였다.

준혁이 재차 발걸음을 옮기자 처음 나타났던 환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더니, 통로 옆에서 또 다른 환영이 나타나며 허공에 손날을 들이민 채 고개를 저었다.

“공자, 그깟 수행으론 관문에 도전할 자격조차 없소이다. 본 관에선 공자 같은 분을 위해 공부를 제공하니, 공자가 속한 무리의 수장께 아뢴 후, 다시 방문하길 바랍니다.”

새로 나타난 환영을 잠시 바라보던 준혁은 재차 기감을 쏘아 보냈다.

‘정말 특이하구나. 설마 진법으로 이루어진 환영이 아니란 말인가?’

수행이 부족하다면 진법의 특성을 파악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특수한 재료로 제작된 건물뿐 아니라, 영기로 이루어진 환영 자체가 기감을 튕겨 내버리는 건 준혁으로선 듣지도 보지도 못한 현상.

“하하, 공자께선 참으로 재밌으십니다. 용기는 가상하지만 절대 불허합니다. 정 원하신다면 최소한 원영기에는 이른 후에 오십시오. 그럼 이곳을 통과하게 해 드리지요.”

새롭게 나타난 환영은 누군가를 타이르듯 몇 마디 말을 더 건넨 후, 처음에 했던 말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준혁은 한참이나 환영을 관찰하다가 대전 양옆에 붙어있던 방 중, 가장 가까운 방으로 향했다.

왼쪽 가장자리에 있던 방은 간소한 진열장이 놓여있었고, 방 중앙엔 작은 탁자와 방석이 여러 개 놓여있었다.

방에 놓인 진열장과 주위엔 서책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는데, 서책 안 내용은 처음 접하는 형태의 문자였다.

준혁은 혹시라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있나 서책들을 하나씩 확인해 보았다.

“목족의 문자인가? 이것들만 알아볼 수 있어도 큰 도움이 될 텐데···.”

서책 전부를 훑어보아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자, 진열장을 조사한 후, 방 곳곳을 살펴보았다.

문득 이곳은 대전과 달리 환영이 나타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혹시?”

준혁의 시선이 방 중앙에 놓여있는 탁자와 방석으로 향했다.

대전에서도 일정 위치에 이른 후에야 환영이 나타났고, 단상 옆 통로 앞에서도 특정 위치에서만 환영이 나타났다는 걸 떠올린 준혁은 방 중앙으로 걸어가 방석 위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맞은편 방석 위로 환영이 나타났고, 혀를 차며 말했다.

“이놈아! 천주문(天註文)을 알지 못하면 하늘의 이치를 깨우칠 수가 없는 법이라고 몇 번을 말하지 않느냐!”

준혁 맞은편에 나타난 환영은 고풍스러운 옷을 입은 학자 차림의 노인이었는데, 수염이 허리까지 자라있었다.

“허어, 그래도 말대꾸를! 네놈이 그리 생각하는 건 지금 수행이 형편없어서 그렇다. 그 짧은 견해로 무얼 판단한단 말이냐! 잘 듣거라, 이제 다시는 말하지 않을 테니. 진이란 것은 결국 하늘을 속여 방위를 옮기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 천주문을 모르는 상태에서 진을 운용하는 건 결국 뻔히 들통날 일을 눈속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얼굴에 노기를 띤 채 준혁을 쏘아보던 노인은 흥- 하고 비웃더니 입가를 비죽였다.

“뭐? 참으로 요즘 어린 것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좋다. 한번 펼쳐 보거라. 무슨 진이든 내 앞에서 일 초라도 버틴다면 네 말이 맞는다 인정하겠으니.”

준혁은 노인이 마지막 말을 끝으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했던 말을 반복하지도 않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공간대에서 진법 깃발을 꺼냈다.

그리고는 손을 가볍게 저으며 방음진을 설치했다.

아니 설치하려고 했다.

하지만 숨 쉬는 것보다 쉽게 펼칠 수 있던 방음진은 준혁을 중심으로 퍼진 깃발을 시작으로 운용되려던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에 눈앞의 노인은 어떠냐는 듯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보았느냐? 네놈의 그 허접한 진이 어떤 식으로 해제되는지? 이것이 천주문을 익힌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다. 알아먹었으면 다시 집중하거라.”

‘내 행동이 더해져야 진행되는 환영이라니···. 도대체···.’

준혁이 놀라는 사이 노인은 천주문에 관한 설명을 이어가다가, 다시 처음에 했던 말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바로 일어나지 않고 기다린 준혁은 몇 가지 진법을 더 실험해보고는 그것들 역시 방음진처럼 쉽게 무력화돼버리자, 놀란 마음을 부여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주문이라···.”

+++

첫 번째 방을 나온 준혁은 지체없이 다음 방으로 들어갔다.

두 번째 방은 첫 번째 방보다 넓었는데, 벽면에 초상화로 보이는 족자들이 잔뜩 걸려 있었고, 방 한쪽엔 그림을 그리기 위한 도구들과 빈 족자들이 쌓여있었다.

초상화를 보며 왠지 익숙한 느낌을 받은 준혁은 벽면으로 다가가 그림을 살펴보았다.

‘이건! 백호 유적에서 얻은 것들과 똑같다.’

준혁은 공간대에서 족자 하나를 꺼내 펼친 후, 벽에 걸린 것과 비교했다.

‘족자의 재질뿐 아니라 그림에서 느껴지는 기운까지 비슷해.’

족자가 법기는 아닐지라도 어떤 쓰임새가 있다고 판단한 준혁은, 유적을 나온 뒤 시간이 생겼을 때 몇 번 확인을 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영기를 불어넣어 봐도, 강제로 훼손해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 그동안 관심에서 지운 채 공간대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던 것.

준혁은 왠지 족자의 비밀을 알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에, 그림 도구들이 놓여있는 탁자 앞, 배움을 받는 자리로 생각되는 방석 위로 냉큼 이동했다.

준혁이 방석 위에 앉자, 예상대로 첫 번째 방에서 본 노인과 비슷하게 생긴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허, 공자는 환시화(幻示畵)에 재능이 있는 것 같구려. 이렇게 빨리 붓에 환(幻)의 묘리를 담다니. 좋습니다. 좋아요. 그럼 이번엔 환시를 불러오는 걸 배워보도록 하지요.”

말을 마친 노인은 양손을 모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다가 손가락을 ‘딱’ 하고 부딪혔다.

‘환시가 무엇인지는 모르나, 분명 족자를 사용하는 방법이다!’

준혁이 예상한 순간, 벽에 걸린 초상화와 똑같이 생긴 족자 하나가 노인의 등 뒤로 나타났다.

족자는 나타남과 동시에 부르르 떨더니 테두리에서 푸른 광채를 내뿜기 시작했다.

광채와 동시에 족자 안에 그려져 있던 인물이 살짝 움직였고, 준혁이 족자 안 인물이 움직였다고 느끼며 몸에 긴장감을 올린 순간,

화악-

족자의 푸른 광채가 짙어지며 족자 안에 그려져 있던 인물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슈욱-

그리고 튀어나온 순간 손이 반투명하게 변하며 엄청난 기운과 함께 노인의 맞은편에 앉은 준혁의 정수리를 향해 쏘아져 갔다.

“이런!”

다행히 건물에 들어온 후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던 준혁은 족자 안 환영이 날아온 그 짧은 순간에 적마도를 발동시키며 방 입구로 이동해 버렸다.

파앗-

그리고 준혁이 방석을 벗어나자 노인의 환영과 족자 환영의 공격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진 후였다.

“그냥 환영이 아니었다. 분명 가만히 있었다면 쉽게 넘어가지 못했을 거야.”

조금 전 일어난 일을 되새겨본 준혁은 족자에서 튀어나온 공격은 분명 실제라고 판단했다.

지금껏 모호한 기운을 가진 것들과 달리 족자에서 튀어나온 공격은 분명 실체가 있는 술법처럼 느껴졌었다.

+++

두 번째 방을 재차 확인해 보려던 준혁은 생각을 바꾸고 세 번째 방으로 향했다.

어떤 이유로 이곳이 만들어졌는지는 모르지만, 각 방마다 분명한 주제가 있었기에 우선 전체를 둘러보고 세부적으로 하나씩 알아보려 마음먹은 것.

그렇게 세 번째 방에 들어선 준혁은 연단에 관련된 것들을 마주할 수 있었고, 네 번째 방에서는 공법에 관한 것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연단술과 공법 전부 사람에게 적용되는 방식이 아니었기에, 환영이 전해주는 얕은 지식만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았다.

다행이라면 세 번째, 네 번째 방은 두 번째 방처럼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아직 확인하지 않은 남은 두 방을 잠시 바라보던 준혁은 고민 없이 가까운 다섯 번째 방으로 향했다.

“응?”

다섯 번째 방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곳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준혁은 방 구석구석으로 이동해보며 환영이 나타나나 실험했지만, 그곳은 정말 빈방이었는지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동안 방안을 뒤지다 아무런 소득 없이 나온 준혁은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방으로 들어섰다.

다른 방들과 달리 마지막 방은 들어선 순간 환영이 나타났는데, 지금까지 보아왔던 자들과 다르게 매우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만 어린 모습과 달리 두 눈에는 흉포한 기운이 머물러 있어, 눈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력이 소비되는 느낌이었다.

“선사. 준비되셨습니까? 그럼 한 발 더 다가오시지요. 저 역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아이는 심유한 눈으로 준혁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이번에도 상대가 원하는 행동을 해야 환영의 다음 말이 이어질 것이란 걸 파악한 준혁은 발을 움직이려다 멈칫하고는 오히려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아이 환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며 텅 빈 방으로 변해버렸다.

‘방금 안으로 들어섰으면···. 분명 죽었다.’

직감이라고 해야 할까? 준혁은 아이를 향해 발을 내디디려다가 주변의 기운이 갑자기 변하는 걸 느끼며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하고 말았다.

그건 마치 얼마 전 공간이동 진법으로 나타났던 목족 여 수사를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아니 그때의 느낌이 극도의 긴장감이었다면, 이번엔 그 긴장감 안에 희미한 공포도 드리워져 있었다.

잠시 후 심호흡을 통해 안정을 되찾은 준혁은 건물을 빠져나와, 건물 주위에 피어있는 꽃들을 살펴보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 건물과 그 안에 환영은 분명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져 있다.’

대부분이 수행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되는 짧은 지식을 전하는 걸 보면, 그 의도가 무엇인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수행을 거론하며 여러 가지 배움을 준비해둔 걸 보면 분명 실력을 쌓아 계단을 오르라는 뜻. 아마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도 그 방법뿐이겠지.’

준혁은 시선을 들어 산꼭대기로 이어진 계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환영이 전해주는 짧은 내용으론 크게 도움이 되질 않는다···. 도대체 왜 이런 걸 만들어 둔 걸까?’

만약 이곳을 방문한 누군가에게 지식을 전하고 싶었다면, 옥간이나 다른 방법을 통해 지식을 직접 전수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었다.

아니면 백호 유적의 벽화처럼, 아주 낮은 단계에서부터 점차 강도를 올리며 강제로 수행을 쌓을 수 있게 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

하지만, 이곳은 절대 그런 의도로 만들어진 곳이 아니었다.

두 번째 방에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생명의 위협을 느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

‘하긴 고민해봐야 달리 방법이 없는 일인가.’

목족 수사에게서 도망치는 데는 성공했지만, 봉인되었다고 여겨지는 장소에 갇히게 된 준혁은 쓰게 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

생각을 정리한 준혁은 곧장 영천수로 이루어진 호수로 향했다.

그리고는 바로 호수 안에 몸을 담고는 혈단법을 운용했다.

다만 영천수로 이루어진 호수를 단발성으로 흡수해버릴 생각은 없었기에, 영기 자체를 흡수하기보다는 영천수로부터 얻을 수 있는 회복 효능을 받아들이며 내부의 기운을 다듬는 데만 공법을 집중시켰다.

그렇게 며칠간 내부를 다듬는 데 시간을 보낸 준혁은 호수에서 나와 품 안에 있던 백호를 꺼내 들었다.

“지금부턴 너를 보호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 영수대 안에 들어가 있거라.”

영수대란 말에 백호의 표정에 그늘이 지자 준혁은 피식 웃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럼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느냐? 영천수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 만으로도 네 수행이 오르는 데 도움은 될 터이니.”

백호가 준혁의 말에 맹렬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스스로 호수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첨벙-

평소엔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 하던 새끼 백호가 영수대란 말에 질겁하는 걸 보면, 그 안에 있는 것을 진심으로 싫어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 내 실력에 단숨에 끝까지 도달하지는 못할 터. 어떤 것인지 확인만 하고 올 테니 기다리고 있거라.”

계단으로 향하는 통로를 지키던 환영이 했던 말.

최소한 원영기에 오르고 도전하라는 말은, 말 그대로 원영기 이상의 수준이 되어야지만 끝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랬기에 준혁은 단숨에 관문을 통과하기보다는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며 관문이 어떤 것인지만 파악하고 곧바로 빠져나올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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