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 결계속으로 (2) >
눅눅한 냄새가 코를 간지럽히는 느낌에 준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찢어지는 통증과 함께 영기 고갈 상태라도 된 것처럼 온몸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성공 한 건가···.”
눈을 뜬 준혁은 주위를 빠르게 확인했다.
십여 평쯤 돼 보이는 석실이었고, 자신이 쓰러져 있는 자리엔 전송진으로 의심되는 진법이 새겨져 있었다.
주변 환경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기에, 준혁은 도박과도 같았던 탈출이 성공했음을 깨달았다.
“귀 수사. 성공한 것 같습니다. 전부 수사 덕···. 귀 수사?”
결계를 통과하기 전, 처음 계약을 맺는 순간 그와 심상이 연결되며 강렬한 끈을 느꼈었다. 그건 마치 누군가와 마음이 연결되는 것 같은 기분.
하지만, 정신을 차린 후엔 계약으로 연결되었던 기분이 거짓이었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귀원패.”
준혁은 내심 아니기를 바라며 귀원패의 법명을 불렀다.
그 순간, 눈앞 허공이 갈라지며 육각형 모양의 녹색 옥패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정신을 잃고 있는 사이에···.’
그와의 약속은 의도하지 않는 사이에 이미 진행돼 버린 모양이었다.
준혁은 손바닥 위로 식검을 소환해 귀원패에 쏘아 보낸 후 공명시켰다.
그러자 녹색 옥패 뒤로 익숙한 거북이 환영이 나타났다. 다만 예전과 다른 게 있다면, 거북이의 동공은 인지괴나 적마와 같이 텅 빈 것처럼 아무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결계를 통과하는 데 성공한다면, 귀원패를 다시 한번 설득해보려 했던 준혁은 안타까운 눈빛을 했다.
“귀 수사···. 부디 원하시는 길이었길 바랍니다.”
기묘한 상실감을 느끼며 준혁은 쓰게 웃음 지었다. 한편으론 진심으로 귀원패 본인이 원했던 안식에 접어들었기를 바랐다.
귀원패의 상태를 확인한 준혁은 그다음으로 석실을 꼼꼼히 살폈다. 다행히 석실 자체는 그저 평범한 석실이었다.
석실 한쪽엔 작은 돌문이 있었는데, 기감으로 살펴보아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밖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니 회복이 우선이다.”
이미 몸은 만신창이, 최소한 뒤틀린 기혈과 바닥난 영기라도 회복을 해야 다음 행보를 이어갈 수 있을 듯싶었다.
생각을 정리한 준혁은 공간대에서 진법 깃발을 꺼내 석실 입구에 보호진과 외부의 충격에 폭발하는 진법을 설치한 후 자리에 앉았다.
그때 허리에 차고 있던 옥대에서 신호를 느낀 준혁은 옥대에 손을 가져갔다.
“미안하구나. 허나 어쩔수가 없었단다.”
준혁의 손이 옥대를 스치자, 옥대에서 새끼 백호가 튀어나오며 곧바로 준혁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말은 하지 못하고 ‘끼잉 끼잉’ 거리기만 했는데, 너무 괴로웠다고 하는 느낌이 심상으로 전해졌다.
영수대나 공간대 역시 공간의 힘에 간섭하는 물건이라 그런지, 준혁을 압사시켜버릴 정도의 압력에도 부서지지 않고 원형을 보존했다.
하지만 아무리 옥대 자체의 힘과 준혁의 보호를 받았다 한들, 새끼 백호 역시 압력에 노출되기는 마찬가지, 어찌 보면 살아있는 게 용하다고 할 정도였다.
“내 것을 지키기에도 나는 아직 너무 미약하구나···.”
지구 내 수사들 중 정점을 찍고 있었지만, 비경 안에서 목족의 강자들을 접하고, 목숨을 건 도박을 통해 결계를 통과한 준혁은 마음가짐이 또 한 번 변하고 있었다.
잠시 후, 혀를 찬 준혁은 가부좌를 한 채 천천히 정신을 집중하며 혈단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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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의 봉우리 정상.
슬픈 소식을 전하려는지 짙게 드리운 검은 구름은 당장이라도 비를 흩뿌릴 것처럼 섬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봉우리 정상에서 그런 구름을 바라보고 있던 사쿠라는 손안에 나무를 깎아 만든 것 같은 새 조각상 하나를 쥔 채 서쪽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그때 봉우리 아래서 비행 법기를 탄 사내가 빠르게 다가와 사쿠라 등 뒤로 떨어져 내렸다.
“사쿠라님. 영석 채집이 시작됐습니다요. 가 호법께서 보관할 장소를 지정해 달랍니다요.”
사쿠라는 보고를 위해 나타난 청명을 힐끔 바라보고는 다시 시선을 서쪽 하늘로 향했다.
“알아서 하라고 해. 그런 것까지 내가 신경을 써야 해?”
“그, 그게···. 대인께서 최종 결정은 사쿠라님께···.”
준혁이 거론되자 사쿠라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운 후 명령을 내렸다.
“굳이 멀리 옮기지 말고 독도 바위에 저장 공간을 만들라고 해. 그렇게 말하면 가 수사가 알아서 할거야.”
“네.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요.”
사쿠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청명은 다른 말이 나올까 봐 무서워하는 사람처럼 순식간에 봉우리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그런 그의 행동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사쿠라는 여전히 서쪽 어딘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연락이 없는 거죠? 매일 자정마다 연락하기로 했으면서···.”
섬의 동향이나 기타 보고를 듣기 위해 매일 밤 연락을 하던 준혁이 1주일 전부터 연락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에 사쿠라는 근심과 걱정에 그가 떠난 서쪽을 바라보며 손에 쥔 나무새를 더욱 꽉 쥘 뿐이었다.
+++
어둠만이 가득한 좁은 석실 안.
석실 중앙에 자리 잡은 준혁이 몸을 회복하기 시작한 지도 어느덧 한 달.
그의 몸 주위로 핏빛 광채가 뻗어 나오며 피부 위로 아지랑이를 만들었다.
핏빛 아지랑이는 천천히 피어오르다가 피부에서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면 빠르게 하강해 피부 속으로 스며들어 갔고, 잠시 후엔 또다시 새로운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러던 어느 순간.
파앙-
몸 주위에 아른거리던 광채가 엄청난 빛을 내뿜었고, 잠시 후엔 준혁의 피부와 콧속으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번쩍-
준혁이 눈을 뜨자 그의 눈이 은은한 핏빛을 내비치다가 잔잔한 호수처럼 깊고 투명한 빛으로 바뀌었다.
순간적으로 석실 내부가 붉게 밝아지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후우···.”
깊게 심호흡한 준혁은 내면으로 향해있던 시선을 밖으로 옮겼고, 시야를 회복하며 몸 상태를 확인했다.
대부분의 기혈이 자리를 잡고 내부가 안정됐음에 만족한 미소를 띤 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곤 석실의 입구로 다가가 가볍게 손을 저어 진법 깃발들을 회수하고는, 수결을 맺은 후 석문 앞에 가만히 가져다 댔다.
‘흐음.’
하지만 처음 이동돼 왔을 때처럼 석문 밖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것도 파악이 되질 않았다.
“쉬운 게 없구나.”
준혁은 ‘구름이 낳은 땅’이라 불리던 이곳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 했기에, 석문을 열기 전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먼저 인지경을 띄워 전력을 상승시켰고, 전신에는 광신체령투선공을 운용하며 몸을 단단하게 보호했다. 동시에 귀원패를 소환해 피부위로 육각형 타일을 만들었다.
‘달의 정기가 빠져나가니 강체공의 효과가 미비하구나.’
마지막으론 적마도마저 꺼내 혹시 모를 사태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게 준비를 맞췄다.
잠시 후 긴장한 채 석문에 영기를 주입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석문이 세차게 열리며 눈 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건···.”
갑자기 앞이 밝아지며 시야를 방해하자, 영기로 눈을 보호하며 빠르게 기감을 퍼트려 주위를 살폈다.
“산?”
준혁이 문을 열고 나온 곳은 거대한 산 바로 아래 마련된 석실이었다.
석실 맞은편에는 담장으로 둘러싸인 건축물이 있었고, 건물 뒤로는 계단이 놓여 있었는데, 얼핏 보아도 건물에서 시작한 계단은 산꼭대기까지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특이한 것은 계단 하나하나가 수십 미터는 될 것처럼 높아, 마치 벽을 계단식으로 세워놓은 것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석실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준혁은 다시 한번 기감으로 주위에 누군가가 있나 파악해보고는 허공으로 치솟아 올라갔다.
“윽! 비행 금제!”
하지만 일정 높이 이상 올라가자 몸속 영력이 흩어져버림을 느끼고는 추락할 것처럼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준혁은 곧바로 비행을 멈추며 지상으로 내려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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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나절 후.
준혁은 저공 비행하며 산 주변과 일대를 샅샅이 뒤져보고는 그 규모를 대충 파악했다.
이곳은 직경 10킬로도 되지 않는 공간이었고, 산을 중심으로 일정 거리를 벗어나면 알 수 없는 기운이 몸속으로 침투해 영력을 흩어버렸다.
단순히 영력을 흩어버리기만 했다면 더 멀리 움직여 무엇이 있나 파악했을 테지만, 알 수 없는 기운에 오래 머물다 보면 영력뿐 아니라 체력, 나중엔 의식마저 흐려지는 것이 도저히 뚫고 지나갈 수 있어 보이진 않았다.
좁은 공간으로 이루어진 이곳은 중앙의 거대한 산을 제외하곤, 산 계단 끝자락의 건물과 석실, 그리고 산의 오른편에 작게 형성된 숲과 영천수로 이루어진 호수가 전부였다.
주변 일대를 전부 파악한 준혁은 석실 앞에 있던 건물로 향했다.
영목으로 이루어진 숲과 영천수 호수는 확인했으니 이제 건물을 조사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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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담장을 가진 평범하게 생긴 석조 건물.
지구에서 많이 보던 양식과 비슷하면서도 재질 면에서는 전혀 다른 건물이었다.
준혁은 기감으로 건물의 내부가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영력을 움직여 담장에 연결된 대문을 열었다.
오래된 대문은 영기가 주입되자 준혁의 입장을 반기듯 활짝 열렸다.
담장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곳곳에 피어있는 꽃들이었다.
“이건 그때 그···.”
꽃들이 피어있는 모습을 본 준혁은 곧바로 얼마 전 만났던 목족 여인을 떠올렸다.
담장 안에 피어있는 꽃들은 마치 그때 허공에 나타났던 공간 이동 진법과 흡사한 구도와 모양을 한 채 건물을 빙 둘러 있었다.
심지어는 꽃들의 종류도 대부분이 준혁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들이었다.
‘분명 그들과 관련이 있는 곳이구나.’
준혁은 한층 더 경계심을 끌어올리고는 기감으로 내부를 살펴보았다. 바닥에 심겨 있는 꽃들이 진법이 아닌 진짜 꽃임을 확인하고는 그제야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건물은 중앙에 넓은 대전을 가지고 있었고, 양옆으로는 작은 방들이 붙어있는 단순한 구조였다.
내부를 확인하기 위해 기감을 퍼트린 준혁은 이내 인상을 찌푸려야 했다. 기감이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전부 튕겨 나와버린 것.
할 수 없이 눈에 영력을 모으며 주변 사물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피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렇게 천천히 대전을 걷고 있던 그때.
부르르-
준혁이 대전 중심에 이르자 한쪽 벽에 미세한 진동이 일더니 수려하게 생긴 미남자가 나타나며 준혁을 향해 가볍게 웃어 보였다.
준혁은 진동을 느낀 순간, 인지경과 적마도를 동시에 발동시키며 당장이라도 귀원패로 몸을 보호할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그런 준혁의 행동이 괜한 걱정이라도 된다는 듯, 갑자기 나타난 사내는 친절한 어투로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본 관을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하께선 어떤 목적으로 이곳을 방문해주셨는지요?”
준혁은 갑작스러운 사내의 등장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경계 태세를 유지하며 짧게 묵례하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수사. 저는 우연히 이곳에···.”
하지만 준혁의 말이 끝나기도 전. 사내는 얼굴에 웃음이 짙어지더니 자신이 할 말만 이어서 말했다.
“그러셨군요. 하지만 외부인이 왕을 배알하기 위해선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을 아시지요?”
“......”
사내의 반응에 준혁은 이상함을 느끼고 곧바로 기감을 쏘아 보냈지만, 사내 역시 건물처럼 기감을 튕겨버렸다.
“오래된 전통이라 저 역시 어쩔 수가 없군요. 모든 관문을 차례로 통과해 스스로를 증명하셔야 하늘정원에 들어가실 수가 있답니다.”
‘하늘정원? 목족의 대지 근처에 나타난다는 신비 장소가 아닌가?’
준혁이 제이엘에게서 얻은 정보를 떠올리고 있을 때 사내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하늘정원에 들어선다고 끝이 아님을 아실 것입니다. 그곳에서 대원의 신분을 지닌 왕족분들의 동의를 얻어내야 비로소 왕을 배알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설명을 이어가던 사내가 자세를 바로 하더니 어깨를 으쓱 하며 얼굴에 미소를 지웠다.
“물론, 동의를 얻어낸다 할지라도···. 황금 궁전에 들어갈 수 있는 건···. 그분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하겠지만요. 어떠십니까? 그럼에도 그분을 뵈러 가실 겁니까?”
사내가 말을 끝내고 한곳을 바라보며 예의 바른 자세로 대기하자, 준혁은 사내의 정체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공간은 그대로인데···. 저 형상만이 환영이다. 이런 식으로 진법을 운용할 수 있다니···.’
그때 사내의 모습이 파앗- 하며 꺼지듯 사라졌다가, 다시 가벼운 미소를 지은 채 나타났다.
“어서 오십시오. 본 관을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하께선 어떤 목적으로 이곳을 방문해주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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