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 결계속으로 (1) >
귀원패의 말에 준혁은 한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절대 100년을 기다리기 힘들어 제안하는 것이 아니니 수사는 오해 말았으면 합니다.
이어진 귀원패의 말에 그제야 준혁은 생각을 정리하고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수사께서 저를 진심으로 걱정해 말하는 것이라 생각하겠습니다. 다만 수사가 고려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식아를 통해 능력을 흡수하면 평소엔 절반의 능력밖에 사용하지 못합니다. 온전한 힘을 사용하려면 식아와 공명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적마와 귀 수사 둘 중 한 명의 능력밖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분광소를 포함한 다른 법보들은 힘의 규격을 파악하기가 힘들었기에 준혁이 절반이라 말한 것은 인지경을 기준으로 하는 말이었다.
-저라고 왜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방법이 있습니다.
잠시 후 귀원패에게 그 방법이란 걸 전해 들은 준혁은 쓰게 웃으며 혀를 차고 말았다.
귀원패가 말한 방법이란, 식검은 적마와 공명을 하고, 귀원패 자신은 결계 돌파 도전 직전, 정식 계약을 통해 힘을 빌려주겠다는 것.
대신 결계를 통과하는 데 성공해, 도주에 성공한다면 그 즉시 자신을 식검으로 잠들게 해주라는 것이었다.
‘그럴 거면 그냥 계약 후 함께해도 되는 것 아닙니까?’
-수사. 저는 평생 세운 신념을 저버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보상이 전혀 없다면 굳이 나설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런 제안을 하는 것도···. 수사는 약속을 지킬 사람이란 걸 믿고 있어서입니다.
믿음을 논하며 말문을 닫아버린 귀원패를 손으로 꽉 쥐며, 준혁은 장고에 들어갔다.
결국 앞뒤 상황만 바뀌었을 뿐, 귀원패의 요구는 예전에 했던 말을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다만 준혁으로선 예전과 다르게 절실해져 있다는 것만 다를뿐.
사실 고민하고 말고 할 이유가 없었다. 100년간 가끔 필요한 지식에 대해 도움을 받는 것과 목숨을 저울질할 수는 없는 일.
당연히 귀원패가 말한 방법을 택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럼에도 준혁이 고민하는 건 귀원패를 은연중 동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옥대 안에 숨어있는 백호가 새끼 때부터 돌보고 있는 애완동물의 느낌이라면,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수많은 얘길 나누고 함께한 생명체는 준혁의 수도 생활 중 귀원패가 처음이자 유일한 것.
대화할 때마다 귀찮다는 듯 툭툭 쏘고, 휴식을 빙자해 자신의 말을 무시할 때도 수두룩했지만, 준혁은 처음으로 생긴 동료라는 느낌에 그를 잡아먹고 위기를 모면하는 것에 거부감이 들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으니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없었다.
‘귀 수사. 정말 영원히 잠들길 원하시는 겁니까? 식아에게 잡아먹힌다는 것이 수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수사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신 적이 있나 보군요. 그들의 영혼이 의식을 가진 채 식아의 어딘가에 갇혀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귀원패의 물음에 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오래전 손목 문신으로 변한 공천령이 반응을 보인 적이 있었다. 준혁은 그때 혹시나 자신의 말에 반응을 보인 건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었던 것.
그것뿐 아니라, 식검과 이어져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그랬으면 하길 바라는 것인지는 모르나, 왠지 식검에게 잡아먹힌 자들이 전부 살아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지요. 결국 선택은 제가 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수사는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결국, 마지막 귀원패의 말에 준혁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각자 자리를 잡고 연구를 하는 척 도망갈 방안을 마련하기 시작한 지 5일.
5일간 귀원패와 수많은 얘길 나눈 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결계통 밑으로 이동했다.
귀원패는 자신이 원하던 삶의 마지막이라고 여겼는지,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이 아는 지식을 푸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결계통 아래 자리 잡은 준혁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멀리 떨어진 곳의 목족 수사를 잠시 바라보다, 공간대에서 전음부 석 장을 꺼내 아직까지 칩거 중인 원영기 수사들을 향해 쏘아 보냈다.
그렇게 삼일이 또 지나자 세 명의 원영기 수사가 비장한 표정을 한 채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후, 준혁을 중심으로 품(品)자를 이루고 섰다.
“다들 준비는 되셨습니까?”
준혁의 물음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잘 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허나 제 계산이 맞는다면 분명 틈은 만들어 낼 수 있을 터, 각자 최선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결과가 어떻게 되든 서로 원망하지 말기로 합시다.”
준혁은 리차드, 왕웅, 제이엘까지 한 번씩 시선을 마주친 후, 고개를 들어 결계통에 시선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귀원패를 꺼내 들어 눈앞에 띄운 후, 적마도와 식검을 꺼내 각각 손에 쥐었다.
준혁이 행동을 개시하자, 다른 수사들도 각자의 법기를 꺼내 들어 영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제이엘의 등 뒤로는 장어 환영이 나타나 그녀의 몸을 먹구름으로 뒤덮고 있었고.
왕웅은 차고 있던 허리띠에서 황금빛이 뿜어나오며 그의 전신을 완벽하게 가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리차드는 품에서 단약 4알을 꺼내 먹었는데, 그건 준혁이 본 적 있던 폭혈단이었다.
+++
세 사람이 준비가 끝난 것 같아지자, 준혁은 그들과 다시 한번 시선을 마주친 다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귀원패에 영력을 집중했다.
동시에 입을 벌려 정혈을 뱉어냈다.
준혁의 입에서 나온 정혈은 귀원패에 닿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순간, 귀원패의 기운이 폭발하더니 거대한 거북이 환영이 나타나며 영기파동을 일으켰다.
그 모습에 목족 수사 아마르곤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준혁을 주시했다.
거북이 환영은 주변을 한번 쓰윽 둘러본 후 아마르곤과 시선이 마주치자, 한번 씨익 웃더니 준혁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준혁의 몸과 닿은 그 순간.
화아악-
엄청난 영기파동을 퍼트린 거북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준혁의 피부가 육각형 타일 모양으로 변하며 거북이가 내뿜던 기운을 그대로 내뿜었다.
준혁은 피부뿐만이 아니라 신체 내부 전체가 육각 타일이 벌집 형태로 변하는 걸 느끼며 기이한 고양감을 느꼈다.
그건 마치 절대 부서지지 않을 단단함. 무엇에도 지지 않을 것 같은 완전함이었다.
“하아- 이것이 진정한 계약자의 힘.”
자신을 바라보는 제이엘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어간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준혁은 곧바로 양손에 쥐고 있던 적마도와 식검을 하나로 모았다.
파앗-
그 순간, 준혁 앞엔 시뻘건 핏빛 갈기를 자랑하는 붉은 말이 나타났다.
준혁은 지체없이 말 위로 올라타더니 시선을 위로 옮기며, 크게 외쳤다.
“지금!!!”
쾅!!
준혁은 외침과 동시에 파앗- 하며 모습이 흐려지며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결계통이 미칠듯한 진동과 함께 강렬한 파동을 동반했다.
그리고 주위에 있던 수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방사형으로 퍼지며 날아갔다.
날아가는 그들은 하나같이 온몸에서 무언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그들의 몸에 붙어있던 보이지 않는 민들레 씨앗이었다.
세 사람이 동시에 흩어져 도망가자, 아마르곤은 싸늘한 표정으로 입가를 움직였다.
“도망갈 수 있다고 여기다니, 어리석긴···. 이 행동을 후회하게···. 이럴 수가!”
가볍게 손을 휘저어 민들레 씨앗들을 모은 아마르곤은 당장이라도 허공으로 치솟으려 하다가, 결계통에 나타나는 이상을 눈치채고는 제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엄청난 진동과 함께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반응은 분명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모습.
그 순간 고민하던 아마르곤이 손으로 원을 만들 듯 크게 수인을 맺으며 다시 가슴 앞에 손을 모아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그의 모습이 잘게 떨리더니 바로 앞에 50㎝가량의 민들레 씨앗 뭉치들이 나타났다.
잠시 후 씨앗 뭉치들은 크기만 작았지, 아마르곤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는 빛살처럼 변하며 도망간 세 원영기 수사의 뒤를 쫓았다.
자신의 분신을 쏘아 보낸 아마르곤은 어느덧 결계통 가까이 이동했고, 그 안에 무언가가 나타나는 걸 보고는 경악에 찬 눈빛을 했다.
“말도 안 돼!! 결계를 해제하지도 않고 통과했단 말인가!”
+++
준혁은 적마를 이용해 결계를 통과할 계획을 세운 후, 즉시 세 명의 원영기에게 전음부를 통해 몇 가지 말을 전했다.
그 내용인즉 자신에게 목족 수사의 관심을 끌 만한 방법이 있고, 그 방법으로 잠시나마 다른 이들이 도주할 틈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말.
그리고 세 명이 도주하는 데 성공하면 필히 목족 수사가 어떤 방식으로든 세 명을 쫓을 테고, 그 후엔 준혁 자신이 약해진 감시를 뚫고 도망치겠다는 계획.
얼핏 보면 혼자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계획이었기에 다른 수사들의 의심을 살 수밖에 없었고, 준혁은 그들에게 살아나갔을 경우 막대한 보상을 요구 조건으로 걸어 자신의 계획을 믿게 했다.
사실 조건까지 걸어가며 그들을 설득해 도주 계획을 세운 건, 제이엘과 왕웅 때문이었다.
제이엘에게 내건 조건 중 하나는 준혁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고, 왕웅은 만통방 때문에 꼭 살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
그리고 계획을 실행에 옮긴 그때.
적마의 능력으로 공간 이동하며 결계에 부딪힌 순간, 온몸을 짓누르는 고통에, 준혁은 자신의 계획 중 제이엘을 도망치게 만든 것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죽···.’
귀원패가 경고했던 공간압력이라는 힘은, 준혁이 상상하고 예상했던 모든 걸 뛰어넘는 무자비한 힘이었다.
귀원패의 능력으로 절대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이 강화되었던 몸이 찌그러지고 눌어붙기 시작했다.
결계를 통과하는 그 순간은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준혁은 그 찰나가 영원처럼 느껴질 만큼 의식이 모조리 타버리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고통이 끝났다고 느낀 순간,
툭-
어디로 이동되었는지 분간도 못한 채, 준혁은 무릎 꿇었고, 곧이어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직후, 환한 빛이 자신을 감싸고 있었지만, 준혁은 이미 정신을 잃은 후였다.
+++
아마르곤은 눈앞 결계 너머에 인족 수사 한 명이 나타나자 두 눈을 부릅뜬 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너무 놀라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지만, 결계는 마치 없는 것처럼 아마르곤의 손을 통과시켜버렸다.
“다른 자들과 다르다고는 느꼈으나, 설마 결계를 무시하고 들어가 버리다니···.”
잠시 후, 전송진이라 예상했던 결계통은 예상이 맞는 걸 보여주겠다는 듯, 환한 빛과 함께 인족 수사를 삼켜버렸다.
그리고는 강렬한 진동과 함께 결계통 전체가 파앗- 하며 사라져버렸다.
“고서에 기록된 것이 사실이었어···.”
말을 내뱉던 아마르곤은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빠르게 손을 움직여 입술을 훔치며 허공에 무엇인가를 써 내려갔다.
그리고는 허공에 문자가 나타나는 걸 확인도 하지 않고 펑 하고 터지더니 이내 민들레 씨앗 뭉치로 변해 주변으로 흩어져 버렸다.
몸체가 터지고 사라지는 게 얼마나 빨랐던지, 그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목소리만이 남아 주변에 울렸다.
“이놈이 무슨 수로 결계를 통과했는지 그것들은 알 테지! 한 놈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목소리가 사라진 후, 허공에 나타난 문자들은 땅으로 떨어져 내리더니 주변에 있던 나무에 흡수돼 사라져 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