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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96화 (96/408)

# 96 < 구름이 낳은 땅 (2) >

겉으로 보이는 병약한 모습과 다르게 분지에 나타난 세르게이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곧장 결계통 아래로 이동했다.

애초에 남들에게 허락을 구하는 말을 하긴 했으나, 그건 그저 예의상 건넨 말일 뿐이었다.

결계통 아래 도착한 세르게이가 목족 아이를 내려놓고, 깃발들을 꺼내 수결을 맺기 시작할 때, 왕웅이 주위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한 목소리로 탄식했다.

“목족의 대지가 그리 멀지 않거늘···. 어찌···.”

그리고 그런 왕웅의 목소리를 들은 세르게이는 수결을 끝낸 후, 손안에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상태로 작게 비웃음을 던졌다.

“참 겁도 많으십니다. 어차피 목족의 대지라 불리는 비경 중심에 꼭꼭 숨어서는 이종족을 그리 두려워하시다니요?”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는지, 누구에게나 친근한 척 다가가던 왕웅이 발끈 화를 냈다.

“목족엔 완영기를 넘어서는 자가 있다는 걸 모르십니까? 다들 다른 비경에서와 달리 이곳에선 모두 조심하고 있거늘! 지금 수사의 행동은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행동입니다!”

“이 넓은 비경 안에서 그런 자를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괜한 걱정 하지 마시죠? 아하, 아니면 혹시 제가 결계를 풀어낼까 그러십니까?”

“이익! 저자가!”

왕웅이 이를 악물며 한 발 내딛으려 하자, 제이엘이 그런 그를 말렸다.

“왕웅 수사.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저 역시 염려스러운 부분이 큽니다만···. 다들 한 번쯤은 생각했던 것 아닌가요? 실천에 옮기지 못했을 뿐.”

제이엘의 말대로 오래전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의견이기도 했다. 목족의 대지를 중심으로 삼각형 구도로 흩어져있는 세 가지 신비 장소.

그것들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목족에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혹은 그 세 가지 비밀장소를 지키는 게 목족은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

“끄응. 수사가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하지만 수긍하는 말과는 달리 왕웅은 공간대에서 황금빛이 번쩍이는 허리띠를 꺼내 착용했다.

“수사 그것은···.”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겁이 많다 웃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아닙니다.”

제이엘은 웃음 짓더니, 공간대에서 부적 한 장을 꺼내 영기를 불어넣더니 가슴에 부착했다.

그리고는 왕웅과 시선이 마주치더니 씁쓸하게 웃음 짓다가, 준혁에게 말을 건넸다.

“수사도 혹시 모르니···.”

그때였다.

세르게이가 검은 기운이 넘실대는 두 손으로 목족 아이의 몸을 잡아 뜯으려 할 때, 상공에서 엄청난 압력과 함께 무언가가 미칠듯한 기운을 내뿜으며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마치 거대 운석이 떨어지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엄청난 위압감과 중압감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는 다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감히!! 내 딸에게 손을 대다니!!! 이 버러지 같은 인족놈들!! 싸그리 죽여버리겠다!!”

모두가 압도적인 기운에 전신에 기운을 끌어올리려는 찰나, 상공에서 빠르게 낙하하던 사내의 등 뒤로 수십 미터는 넘을 것 같은 거대 잎사귀가 나타났다.

잎사귀는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잎을 돌돌 말더니, 생긴 것과 다르게 엄청난 중량을 싣고 세르게이를 향해 떨어졌다.

동시에 분지를 빙 둘러싸고 있던 수사들 발아래에서 수백이 넘는 줄기들이 위로 솟구치며 지면에 발을 대고 있던 수사들을 그대로 꿰뚫을 듯 치솟았다.

하지만 목족의 고위 수사로 의심되는 사내가 힘을 발휘한 순간. 이미 원영기급 수사들은 세르게이를 제외한 전원이 땅을 박차며 쏘아져 나가고 있었다.

“저 빌어먹을 세르게이!”

왕웅의 악에 받친 목소리만이 뒤늦게 분지에 퍼질 뿐이었다.

몇몇 반응이 느린 결단기 수사들이 나무줄기에 꿰뚫리는 사이, 거대 잎사귀는 결계통은 없다는 듯이 무시하고는, 어느새 세르게이 앞에 당도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 순간 세르게이가 검게 물든 손을 위로 뻗으며 돌돌 말린 잎사귀를 강타했다.

콰앙!!

“으윽.”

강렬한 충격파가 터지며, 주변엔 분진이 일었다.

단숨에 압사돼버릴 것 같던 세르게이는 조금 힘겨워 보일 뿐, 목족 수사의 공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언뜻 보아서는 원영기 초기인 세르게이가 갑자기 나타난 목족 수사의 공격을 수월하게 받아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버러지가!!”

하지만 잎사귀를 따라 곧바로 지상에 도착한 사내가 낙하하던 힘 그대로 세르게이를 눌러버리자, 둘 사이의 격차가 그대로 드러나 버렸다.

쾅!

이어지는 단 한 번의 공격에 세르게이의 몸이 가슴 아래까지 땅속에 처박혔고, 그 순간 땅속에서 가시가 잔뜩 박힌 넝쿨이 생겨나더니 그를 완전히 감싸버렸다.

“으아악!”

눈 깜짝할 사이에 세르게이를 무력화시켜버린 사내가 분지 한쪽에 가만히 서 있는 사내를 향해 소리쳤다.

“아마르곤!!! 당신은 내 딸이 인족 놈들에게 유린당하는 꼴을 지켜보고만 있단 말이니까?!! 아무리 결계의 비밀을 푸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나! 이런 상황을 그분께서 좌시할 것 같습니까!!”

모두가 도망쳐버린 분지 안.

혼자남은 눈매가 가는 사내가 목족 수사의 말에 처음으로 가느다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그러겠습니까? 당신이 가까이 있는걸 알고 있으니 지켜보았을 뿐입니다. 쯧쯧 그나저나 이번엔 좋은 결과가 생기나 했더니···. 다 망쳐버렸군요.”

“끝까지!”

“노여워 마십시오. 정말 제가 지켜보기만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르곤은 정말 아쉽다는 듯 입맛을 살짝 다셨다. 그리고는 입가를 살짝 비죽이더니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 순간. 그의 이마가 살짝 벌어지며 노란 테두리에 파란 눈이 나타났다.

파란 눈이 나타나 괴이한 기운을 흘리기 시작하자, 아마르곤은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그의 머리 위로 직경 수 미터는 될법한 기운이 뭉치기 시작하더니 어느덧 새하얀 민들레 씨앗 뭉치로 변했다.

하얗고 동그랗게 뭉쳐있던 수 미터의 민들레 씨앗 뭉치는 아마르곤의 눈과 공명하더니 점차 색이 푸르게 변했다.

그리고는 펑- 터지면서 바람에 흩날리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데려와라.”

+++

압도적인 기운, 원영기인 자신의 어깨를 내리누르는 중압감.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에, 준혁은 목족 수사가 나타난 순간, 제이엘과 동시에 서로에게 눈짓했고, 그와 동시에 부챗살처럼 퍼지며 도주를 선택했다.

상대방이 진짜 완영기에 오른 고위 수사라면 원영기 수사들이 생각하지 못한 둔술을 사용할 수도 있었고, 그렇기에 최대한 떨어져 산개하는 게 그나마 살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준혁과 제이엘뿐만이 아니었는지, 왕웅과 리차드, 그리고 수많은 결단기 수사들도 분지를 중심으로 넓게 퍼지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같은 무리를 이루고 온 자들도 본능적으로 조금이라도 살 확률을 올리기 위해 제각각 떨어져서 움직였다.

겨우 몇 호흡 만에 수 킬로를 도망친 준혁은 곧장 인지경을 꺼내고는 풍둔술을 극한으로 발동했다.

그러자 그의 몸 주위로 바람이 유형화되듯 아지랑이처럼 뒤로 흩날리기 시작했다.

‘방심하면 죽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수많은 자들이 방사형으로 도망쳤으니 모두를 쫓을 순 없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방심하다가는 비경이 무덤이 될 수도 있는 법.

그때 준혁의 시야로 이상한 장면이 목도 되었다.

“저게 무슨!”

분지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 도망가던 수사들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더니 다시 분지를 향해 미칠 듯한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

그 현상은 분지에서 빠르게 도망가지 못한 수사들부터 시작해, 점차 멀리 떨어진 자들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들 중 정확히 제이엘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던 준혁은 그녀 역시 날아가던 방향을 갑자기 선회하자 의문에 휩싸였다.

잠시 후엔 왕웅과 리차드로 느껴지는 기운마저도 방향을 돌렸다.

“도대체 왜?”

준혁은 순간적으로 의문과 함께 호기심이 동하는 걸 느꼈으나, 빠르게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날려버렸다.

무슨 이유가 있든 간에 분지로 돌아가는 건 생명을 담보로 해야 하는 것. 아니 배고픈 호랑이 아가리 속으로 고개를 내미는 꼴. 준혁은 절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마음을 정한 준혁은 다른 이들과 상관없이 계속해서 비경의 외곽 쪽으로 풍둔술을 사용했다.

그러던 중 빠르게 도망치던 준혁은 단(丹)속 원영의 품속에서 가만히 잠들어있던 식검이 움직이는 걸 느꼈다.

식검의 기운은 빠르게 위로 솟구치더니 뇌리에 강렬한 충격을 주며 무언가를 꿀꺽 삼켜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준혁은 깨달을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어느새 자신도 남들과 마찬가지로 분지를 향해 미칠듯한 속도로 날아가고 있다는 것을.

+++

준혁은 날아가던 걸 급하게 멈추며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걸 느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오래전 설악산에 처음 입문했을 때, 식검이 미혼술의 힘을 잡아먹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느낀 것.

그 말은 분지에서 도망쳤던 수많은 수사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원 정신계열 술법에 걸려들었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건 강대한 힘으로 하급 수사를 내리누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강함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설마···. 완영기가 아닌 연형기라도 된다는 말인가···. 아니면···!!”

순간 소름이 돋은 준혁은 재빨리 풍둔술을 펼치며, 재차 방향을 바꿔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정혈을 이용해 혈둔술을 사용하고 싶었지만, 아직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만약 식검의 도움이 있었다 한들 정신계 술법이 완전히 해소된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혈둔술을 쓰는 순간 분지 안에 도착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준혁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단(丹) 속에 늘어져 있던 원영이 가부좌하고 앉더니, 눈앞에 식검을 띄우고는 몸속 기운을 하나씩 빨아들였다가 다시 내뱉기를 반복했다.

그때, 준혁을 제외한 수사 전원이 분지 안으로 향하는 가운데, 분지 안에서 누군가가 맹렬한 기운을 뿜은 채 준혁에게 쏘아져 오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준혁이 사용하는 풍둔술을 월등히 앞섰기에, 둘 사이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지고 있었다.

“이런!”

단(丹) 속에 있던 원영이 아직 몸속 구석구석까지 살피지 못했지만, 다가오는 기운에 준혁은 결국 입을 벌려 정혈을 내뱉고 말았다.

그리고는 핏방울이 화악- 터지며 준혁을 감쌌고, 그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한편, 준혁이 빨간 무언가에 잡아먹히듯 사라져 버리자 그를 향해 맹렬히 날아가던 사내는 이를 바드득 갈더니 빠르게 수결을 맺어 자신의 이마 위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버러지 같은 인족놈, 무슨 수로 아마르곤 수사의 청안(靑眼)을 피했는지는 모르나 어림도 없다! 나 호하가 그리 만만해 보이더냐!”

푸스스-

말을 끝남과 동시에 세르게이를 단숨에 무력화시켜버린 사내의 모습이 먼지처럼 흘러내리는가 싶더니, 바람을 타고 흩어져 버렸다.

+++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빨간 점이 생겨나더니, 순식간에 부피가 늘어나며 준혁이 나타났다.

혈둔술을 사용해 단숨에 먼 거리를 도약한 준혁은 빠르게 내면에 집중하며 식검의 반응을 살폈다.

다행히 식검은 원영의 앞에 뜬 상태로 기운을 내뿜으며 별다른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미혼술에선 벗어난 건가? 하지만 이 정도론 안심할 수 없어.”

그 모습에 준혁은 바로 정혈 한 방울을 더 뱉어냈고, 그와 동시에 다시 모습을 감추며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준혁이 사라진 자리에 나무 부스러기 같은 먼지들이 뭉치더니 어느새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그 모습은 짙은 녹색 눈썹을 한 사내였는데, 러시아 원영기인 세르게이를 단번에 짓눌러버린 목족 수사였다.

“원영기 주제에 이런 둔술을 연달아 사용한다고? 평범한 놈은 아니군.”

말을 내뱉는 목족 수사 호하에게선 상대가 도망갔다는 초조함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분노한 표정 속에 오랜만에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것 같은 기쁨도 숨어있는 듯 보였다.

호하는 멀리 준혁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더니 수결을 맺은 후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래봐야 버러지는 버러지지.”

파앗-

말을 내뱉은 직후, 그의 모습이 먼지처럼 변하다,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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