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95화 (95/408)
  • # 95 < 구름이 낳은 땅 (1) >

    제이엘의 등장에 수많은 수사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는 그 옆에 서 있던 준혁은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지나갔다.

    하지만 왕웅은 달랐다.

    그는 사람들의 관심이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준혁 곁으로 다가오며 인사했다.

    “선도에 발을 내디딘 걸 축하드립니다. 수사.”

    “감사합니다. 왕웅 수사. 그렇지 않아도 한번 찾아뵈려 했는데. 이곳에서 보게 되는군요.”

    준혁이 화답하자, 왕웅은 자신이 들은 소식이 진실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동시에 준혁과 친분을 다져야겠다는 마음이 앞서 그의 옆에 착 달라붙어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제이엘이 눈살을 찌푸렸으나 말리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는 사이 분지 안의 시간을 계속 흘러갔고, 준혁과 제이엘이 도착한 지도 나흘이 지나고 있었다.

    +++

    나흘간 준혁을 질리게 만들어버린 왕웅은 어느 정도 친분이 형성됐다고 믿는 것인지, 준혁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최 수사. 한가지 궁금증을 해소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말씀하시지요.”

    “왜 원영 응결식을 진행하지 않으셨습니까?”

    왕웅의 말에 준혁은 피식 웃었고, 제이엘은 관심이 가는지 귀를 쫑긋 세웠다.

    원영 응결식이란 원영기에 오른 수사가 만천하에 자신의 경지를 알리는 행위로 보통 수십 일에서 많게는 백여 일이 넘는 기간 동안 진행되는 거대 잔치였다.

    왕웅은 무려 1년간 응결식을 열어 자신의 인맥을 과시하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었다.

    “딱히 이유가 있진 않습니다. 다만···.”

    “다만?”

    “시간이 없었습니다.”

    준혁의 대답에 왕웅이 ‘무슨 해괴한 소리를 하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고, 제이엘은 ‘고작 그런 이유였어?’라는 표정을 지었다.

    제이엘은 준혁이 항상 기운을 완벽하고 가리고 다니기에 특별한 이유가 있어 원영기에 오른 사실을 비밀로 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부리는 사람들에게도 소문을 내지말라 명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사실 준혁도 울릉도에 자리를 잡은 후 청명, 사쿠라를 포함한 주위 사람들에게 원영 응결식을 치르자는 제안을 들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 첫 번째가, 굳이 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였다.

    처음 수도계에 입문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보물로 인해 도망을 다녀야 했던 준혁 입장에선, 굳이 자신의 경지를 널리 알리는 행위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수행이 만천하에 드러난다는 건 어떻게 본다면 약점을 내비치는 것과도 같은 것.

    의도하지 않게 퍼져나가는 소식을 전부 틀어막을 필요까진 없었으나, 반대로 일부러 소문을 내 자랑을 하고 싶은 마음 자체가 없었다.

    두 번째로는 응결식에 오는 손님 처리 문제였다.

    응결식 기간 동안 불특정 다수에게 축하 인사와 선물을 받게 되고, 원영기에 오른 자는 선배 된 도리와 선물을 받은 감사 인사로 상대방에게 수행상 도움을 주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다른 원영기와 다르게 준혁은 너무 짧은 시간 안에 원영기에 올라버렸다. 그랬기에 깨달음이나 공부가 부족했고, 상대방의 수행에 대한 조언을 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을 제외하고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결론은 굳이 안 해도 될 것은 안 한다라는 게 준혁의 생각이었다.

    “허허, 최 수사. 어차피 준비는 아랫사람들이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수사는 그저 손 몇 번 흔들어주고 덕담 몇 마디 건네면 될 것을···. 시간이 없다니···.”

    그때, 조용히 준혁과 왕웅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제이엘도 끼어들었다.

    “왕웅 수사의 말이 맞아요. 원영 응결식은 그저 원영기에 올랐다는 의미뿐 아니라, 균형의 의미도 있어요.”

    “균형 말입니까?”

    “원영기 수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분쟁이 줄어드니까요···.”

    두 사람이 연이어 응결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자, 준혁은 돌아가 생각해보겠다는 말로 마무리 지어버렸다.

    준혁의 반응이 미지근해 보이자, 왕웅은 재차 응결식의 중요성에 대해 성토하려고 했다.

    그때, 하늘에 거대한 적란운이 생겨나며 모든 이들의 시선을 빼앗아 갔다.

    “시작된다!”

    누군가의 외침이 시작을 알리기라도 한 듯, 거대한 적란운이 천천히 하강하더니 어느새 분지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

    구름이 분지 안에 가득 차며, 순간적으로 모든 이들의 시야를 빼앗아 갔다. 준혁 역시 다르지 않았기에 기감을 사방으로 퍼트리며 수사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시작돼요.”

    그때, 옆에 있지만, 존재감이 희미해지고 있던 제이엘의 목소리가 들렸고, 거의 동시에 안개처럼 시야를 막던 구름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준혁이 눈에 들어온 것은 마치 솜사탕처럼 하늘에 수놓아져 있는 구름 모양의 결계와 그 안에 놓인 원형 통이었다.

    원형 통의 크기는 수십 미터가 넘을 정도로 거대했는데, 얇은 기막이 수십 겹 겹쳐져 있어서인지 정확히 어떤 용도의 물건인지는 쉽게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저것이 제이엘 수사가 말한 그것입니까?”

    “맞아요. 저 통을 감싸고 있는 결계를 제거하고 안에 들어가는 게 저희의 목표예요.”

    “설마. 저것이 전송진이라 생각하는 겁니까?”

    그때 왕웅이 끼어들었다.

    “생각하는 게 아니라 확실한 겁니다. 만통방에 나와 있기로는 주로 화신기 수사들이 임시로 사용했던 전송진과 거의 비슷합니다.”

    결계가 약해지는 땅이라길래, 준혁은 거대한 봉인지를 떠올렸었다. 하지만 눈앞의 물체는 땅이라기보다는 그냥 통이라 불러야 맞을 것 같았다.

    그냥 전송진이라 불러도 될 것을 왜 ‘구름이 낳은 땅’이라는 말을 붙였는지 의문이 생겨났다.

    그리고 준혁이 의문을 가지는 사이, 결계 통을 중심으로 산개해 있던 수사들 중 갈색 포마드 머리를 한 사내가 공간대에서 거대한 깃발 다섯 개를 꺼내 들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역시 이번에도 시작은 리차드군요.”

    왕웅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하자, 옆에 있던 제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이 최고 미국이 우선이라는 사상이 머리 깊숙이 박혀있으니까.”

    “언제 적 미국인지. 영석 광산도 얼마 없는 허허벌판밖에 없는 나라 주제에.”

    ‘저자가 미국의 원영기인 리차드.’

    이미 왕웅을 통해 정보를 얻은 준혁은 리차드의 모습을 예의주시하면 바라보았다.

    잠시 후, 리차드는 허공에 떠 있는 결계통 아래에 자리 잡더니, 양손을 가볍게 움켜쥐며 바닥을 발로 쓰윽 훑었다.

    그러자 바닥에 바람이 불며 거대한 진법이 저절로 새겨지기 시작했다.

    리차드는 바닥에 진법이 완성되자 공간대에서 영석 무더기를 꺼내 사방으로 뿌렸고, 동시에 거대한 깃발 다섯 개를 허공으로 쏘아 보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소리 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뜻 모를 말을 읊조리던 그가 마지막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끝맺음하며, 양손을 모아 허공에 떠 있는 결계통을 가리켰다.

    “감싸라!”

    순간, 리차드의 명령에 반응하듯 다섯 개의 거대한 깃발이 세차게 휘날리며 크기를 키워갔다. 잠시 후엔 깃발 한 장 한 장이 수십 미터에 이를 정도로 커지더니, 그것들이 한데 모여 결계통을 감싸 버렸다.

    결계통이 깃발들로 완벽하게 덮어지자, 리차드는 입을 벌려 피 한 방울을 뱉어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동그랗게 뭉친 핏방울을 툭 치며 강렬한 영기파동을 발생시켰다.

    파앙- 화악-

    그 순간 결계통을 감싸고 있던 거대 깃발이 동시에 화르륵 불타오르며 분지를 통으로 태워버릴 것 같은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제이엘이 가볍게 평가했다.

    “무식하네요.”

    “그렇습니다. 10년 전엔 빙결술이더니. 이번엔 그 반대라니. 저 머리로 어찌 원영을 응결했는지.”

    준혁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결계를 단순한 영기의 힘만으로 해제하려 드는 것은 진법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는 사람의 행동이었다.

    잠시 후 거대한 불꽃이 잠잠해지며, 열기가 사라지자 리차드는 아쉽다는 표정을 한 채 물러났다.

    +++

    리차드가 결계를 해제하는 데 실패하자, 다들 차례를 지켜가며 한 명씩 도전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두 명 혹은 세 명이 무리를 지어 시도했으나 결과로만 놓고 보자면 누구 하나 결계에 작은 틈조차 만들어내지 못했다.

    준혁이 기감으로 살펴본 결과, 통을 감싸고 있는 결계는 수십 겹이 넘었으니 애초에 이들은 불가능한 것에 계속해 도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제이엘이 가까이 다가오며 주술문이 가득 적힌 금속패 두 개를 건넸다.

    “저희도 도전하죠. 제가 신호를 보내면 패를 발동해주시면 돼요. 꽤 많은 영기가 빠져나갈 테니 놀라지 마세요.”

    준혁은 금속패에 영기를 살짝 흘려보내 어떤 용도인지 확인해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분지를 빙 둘러있는 수사들의 시선을 받으며 제이엘은 품 안에서 금속패 두 개를 꺼내 허공으로 던졌다.

    준혁 역시 그녀를 따라 금속패를 던지고는 수결을 맺어 법기를 발동시켰다.

    그 순간 엄청난 양의 영기가 빨려 들어가듯 금속패에 빼앗기자 준혁은 잠시 당황해야 했다.

    제이엘이 미리 말해주었음에도 금속패가 잡아먹는 영기가 예상보다 많았던 것.

    반대편에 마주한 제이엘을 보니 원영기 중기인 그녀도 금속패를 발동하는 게 편하지는 않은지 안색이 살짝 변하고 있었다.

    그러다 공간대에서 단약 두 알을 꺼내 먹더니 그제야 조금은 편안한 얼굴로 바뀌었다.

    ‘장난이 지나치군, 아니 내 역량을 알아보고자 함인가?’

    준혁은 몸 안의 영기가 실시간으로 줄어들고 있음을 느끼며 쓰게 웃음 지었다. 이대로 계속 가다간 낭패를 모면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그 순간, 단(丹) 속에 가만히 잠들어있던 원영이 기지개를 켜더니 새끼손톱만 한 거울을 꺼내 들어 손을 번쩍 들었다.

    그와 동시에 준혁은 온몸에 영기가 가득 차오르는걸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인지경을 소환해 직접 발동하는 것보단 그 농도가 옅었지만, 원영을 통해 법기를 발동하는 것도 효과가 제법이었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준혁이 난처함을 표할 거라 생각했던 제이엘은 금속패를 발동하는 준혁의 표정에 여유가 가득하자, 움찔하고는 법기를 조종하는 데만 정신을 집중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이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와는 상관없이, 영기를 충분히 빨아들인 네 개의 금속패가 소리 없이 날아가 통을 감싸고 있던 결계에 착 달라붙었다.

    우웅-

    결계에 달라붙은 네 개의 금속패는 기묘한 울림과 함께 빛을 만들어냈고, 각각의 금속패가 다른 금속패의 빛을 반사하며 엄청난 진동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우우웅-

    그 순간 준혁은 왜 ‘구름이 낳은 땅’이라는 명칭이 붙었는지 알 수 있었다.

    금속패로 인해 가장 겉면을 감싸고 있던 결계가 희미해지자, 그저 원형 통이라 생각했던 물체에 지면이 생겨나며 황토색 땅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만약 원형통이 진짜 전송진이라면, 그것은 어떤 법기나 물체가 아닌, 전송진이 새겨진 땅 자체를 통으로 잘라 와 결계로 막아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잠시 후 가장 겉면부터 시작해 세 겹의 결계가 제거되자, 제이엘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제 생각보다 영기 소비가 극심해요. 물러나죠.”

    준혁에게 신호를 보낸 제이엘은 금속패를 회수해버렸고, 준혁도 그에 맞춰 전달하던 영기를 끊어버렸다.

    결국 제이엘과 준혁은 힘겹게 제거했던 결계가 복구되는 걸 지켜보다 처음의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

    -제가 계산을 잘못했네요. 최소한 세 명. 혹은 네 명은 필요할 것 같아요.

    자리에 돌아와 전음으로 조심스럽게 말하는 제이엘에게 고개를 끄덕여 화답해준 후 준혁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혹시나 적마를 이용할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어림도 없겠어.’

    기본적으로 자신보다 수행이 높은 자가 만든 결계는 적마로 무력화할 수가 없었지만, 진법 자체에 결함을 만들어 낸 후 인지경의 힘까지 빌린다면 가능성이 조금은 있을 거라 여겼었다.

    하지만 직접 도전해보니 이곳의 결계는 원영기 수준이 해결할만한 일이 아니었다.

    “엇? 저자는?”

    그때 왕웅이 놀라며 하는 말에 시선을 옮긴 준혁은 하늘 한쪽에서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근처에 내려선 자는 찰랑거리는 곱슬머리를 어깨까지 기른 수사였는데, 얼굴색이 창백해 병이라도 걸린 듯 보였다.

    “이번엔 안 오는 줄 알았더니, 세르게이 저자도 결국 왔군요.”

    새로운 원영기의 등장에 왕웅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하는 것과 반대로, 제이엘과 준혁은 동공이 커다래지며 놀라고 있었다.

    그건 이름만 알고 있던 러시아 원영기의 등장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그의 손에 잡혀있는 생명체.

    준혁과 제이엘이 ‘보이지 않는 숲’에서 본 적 있던 목족 아이 때문이었다.

    목족 아이는 세르게이의 손에 잡힌 채 축 늘어져 있었는데, 위험을 느껴서인지 온몸에서 새싹이 피어 올라와 몸을 보호하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아직 결계를 깬 사람은 없겠지요? 그럼 제가 바로 도전해봐도 되겠습니까? 보시다시피 여기 있는 목족의 생혈을 이용해 보려 합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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