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94화 (94/408)
  • # 94 < 버뮤다 삼각비경 (3) >

    석 달 후.

    모래사막을 지나, 사막의 장벽이라 불리는 폭풍을 돌파한 준혁은 목족의 대지에 들어서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산맥을 타고 이동했다.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 최대한 비경 안쪽으로 이동해서인지, 수백이 넘는 괴수들을 만났고, 개중에는 결단기급 능력을 갖춘 괴수들도 여럿 있었다.

    특이한 것은 괴수들은 분명 뛰어난 신체 능력과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이능을 발휘하긴 했으나 수행 자체의 고하는 없었다는 것.

    “정말 특이하긴 하군. 수행 능력으로만 보자면 분명 결단기급인데···. 몸 안에 영기를 응축시킨 흔적이 없다니.”

    후두둑-

    눈앞에서 절반으로 갈라지는 두 눈이 시뻘건 멧돼지를 바라보며 준혁은 분광소를 회수했다.

    괴수라는 존재가 삼각비경 안에 가장 많이 서식하는 걸 생각해 보면 한 번쯤 이유를 알아보는 것도 유익할 것 같았다.

    “늦진 않았지만, 서두르자.”

    바닥에 널브러진 사체 뒤로 수십 미터에 이를듯한 나무들이 빼곡히 서 있는 숲이 들어왔다.

    제이엘과 만나기로 한 ‘보이지 않는 숲’.

    어느덧 약속장소에 도착한 준혁은 가볍게 땅을 박차며 숲의 입구로 생각되는 장소로 몸을 날렸다.

    +++

    보이지 않는 숲은 삼각비경 내에서도 특이한 장소 중 하나로, 수많은 수사가 설왕설래하는 곳 중 하나였다.

    숲 밖에서 관찰했을 땐 수많은 나무가 빼곡히 들어서 있는걸 볼 수 있는 것과 반대로, 숲 안에 들어서면 나무는 온데간데없고 고즈넉한 그늘진 산길만 놓여있는 것.

    그렇다고 나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투명한 상태로 나무는 존재했다. 오직 기감으로만 판별할 수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뿐이었다.

    누군가는 그것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진법의 일부라고 말했고, 다른 이는 아직 밝혀내지 못한 비경의 신비일 뿐이라고 말했다.

    입구에서 기다리던 제이엘을 만나, 함께 숲속으로 들어온 준혁은 기감엔 분명 느껴지는 수많은 나무가 눈에 보이질 않자 신기해하며 허공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앞서 걷던 제이엘에게 물었다.

    “굳이 이 숲을 거쳐 가는 이유가 있습니까?”

    처음 숲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할 때만 하더라도, 목적지를 앞에 두고 미리 만나기 위함이라 여겼다.

    하지만 제이엘은 준혁과 만나자마자 급한 일이 있다는 듯 숲 안으로 그를 끌고 들어온 것.

    보이지 않는 숲을 통과해 목적지에 이를 수는 있으나, 숲 외곽을 돌아가는 게 시간상으로는 더 이점이 있다는걸 알고 있었다.

    “숲 중심에 이르면 연안과(軟顔果)를 구할 수 있거든요.”

    연안과란 여인들이 주로 찾는 과실로 젊음을 유지 시켜준다는 효능이 있었다. 오직 삼각비경에서만, 비경 안에서도 꽤 깊은 곳에서만 구할 수 있었기에 돈이 있다고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 그러셨군요.”

    “실망하셨나요?”

    평소 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새초롬하게 바라보는 제이엘의 모습에 준혁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실망이라기보다는 이해가 가지 않을 뿐이었다.

    불로장생을 꿈꾸며 고행을 쌓고 수행을 올리는 수도자. 그런 자들이 외적인 모습 하나만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게 준혁에겐 모순처럼 느껴졌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것이겠죠.”

    “수사에게도 여동생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

    “아마 연안과를 구해다 준다면 대우가 달라지는걸 느끼실 거예요.”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제이엘이 여동생에 대한 얘길 꺼내자, 준혁은 고개만 살짝 끄덕여 상황을 넘겨버렸다.

    ‘그러고 보니···. 단약을 만드는 일이 내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구나.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구색초를 이용해 만드는 단약이 만들기 까다로운 상급 단약이라고는 하나 1~2년이면 될 줄 알았지만, 비경으로 떠나오기 전까지 나설헌에게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때 앞서 걷던 제이엘이 갑자기 멈춰서자 준혁은 상념을 날려버렸다. 멈춰선 그녀는 멀리 어딘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서 이상을 느낀 준혁도 기척을 완전히 지우면서 천천히 그녀 옆으로 이동했다.

    “목족이에요.”

    작게 소곤거린 제이엘이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멀리 떨어진 곳엔 어린 여자아이가 땅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는데 그녀의 손끝에서 나무 뿌리 같은 것들이 자라나 지면과 하나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면과 연결된 나무줄기 사이에 사과처럼 보이는 탐스러운 과실들이 주렁주렁 열려있었다.

    목족 여자아이는 겉으로 보이는 수행이 축기기 후기쯤이라 전혀 위험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제이엘은 안 좋은 기억 때문인지 상당히 굳어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목족은 개체 수가 적다고 알고 있어요. 그렇기에 절대 어린 족인을 홀로 두지 않아요.”

    “그 말은 고위 수사가 근처에 있다는 말입니까?”

    “확실하진 않아요.”

    준혁은 제이엘의 말이 끝나기도 전 숲 전체에 기감을 퍼트렸다. 하지만 투명한 나무들이 방해하는 것처럼 기감은 일정 이상을 나아가지 못했다.

    “흠···. 그럼 돌아가시죠. 굳이 목족과 마주쳐봐야 좋을 것이 없을 테니.”

    준혁은 당연히 제이엘이 수긍할 거라 여겼기에 말과 함께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는 발을 떼지 못한 채 어린 목족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저 아이가 들고 있는 것···. 저게 연안과예요. 게다가 저렇게 많다니···.”

    제이엘은 분명 목족과 만나길 꺼린다는 게 확연히 느껴졌는데, 그완 반대로 눈에선 숨길 수 없는 욕심이 그대로 느껴졌다.

    “제이엘 수사. 수사가 방금 말하지 않았습니까? 굳이 위험을 무릅쓰겠다면 저는 혼자 돌아가겠습니다.”

    제이엘이 섣부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준혁은 확실하게 선을 긋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애초에 ‘구름이 낳은 땅’이란 장소에 동행해 준다는 게 약속. 이곳에서 발을 뺀다고 해도 준혁으로선 마음에 걸릴 일이 없었다.

    준혁의 확고한 뜻을 들었기 때문일까. 잠시 망설이던 제이엘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너무 제 생각만 했군요. 수사 말대로 하겠습니다.”

    제이엘은 준혁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처음과 달리 조금 사무적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

    목족 아이를 멀리서 지켜만 보다가 숲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더는 지체할 일 없이 곧장 목적지를 향해 움직였다.

    목적지인 ‘구름이 낳은 땅’은 비경의 동북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거대한 산맥들이 첩첩이 둘러싼 깊숙한 분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준혁처럼 멀리서부터 오는 경우가 아니라면 운이 좋은 자들은 무작위로 전송된 후 쉽게 도착할 수 있을법한 장소였다.

    다만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맥에 다수의 괴수가 서식했기에, 최소한 괴수들을 처리할 수행은 갖춰야 했다.

    “수사. 이제 목적지에 도착한 것 같으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옆에서 유유히 날아가던 준혁의 질문에 여전히 차가운 말투의 제이엘이 답했다.

    “목적이라니요? 제가 숨기는 것이라도 있다는 뜻인가요?”

    “그럼 정말 동행을 원하신 겁니까?”

    원영기 수사라는 엄청난 인력을 그저 동행인으로 삼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기에, 준혁은 제이엘이 바라는 것이 더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럼에도 처음부터 이번 일을 받아들인 건, 그녀의 능력을 확인하는 일이 그만큼 중요했고, 그녀 처지에서 생각하더라도 능력 일부를 보여줌으로써 잠재적인 약점을 만들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무리라고 판단하지 않는 건 전부 받아들일 자세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사에게 도움을 받게 되면 대가를 치르려고 했어요.”

    본론이 나오는 것 같자 준혁이 편안한 어투로 말을 받았다.

    “말씀해 보시지요.”

    “흠. 그곳에 도착하면 수사들이 번갈아 가며 안에 입장하기 위해 도전할 거예요.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전 저번 방문에 아주 작은 가능성을 알아냈어요.”

    “오호···.”

    “하지만 그건 혼자서는 무리예요. 최소한 원영기 두 명. 혹은 세 명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죠.”

    제이엘의 말에 준혁이 반문했다.

    “세 명? 그렇다면 왜 저만 데려온 겁니까?”

    준혁의 말에 제이엘이 코웃음을 쳤다. 어느덧 숲속에서의 일은 날려버린 듯 말투도 처음으로 돌아와 있었다.

    “최 수사는 원영기에 든지 얼마 되지 않아 모르시겠지만, 사실 각국의 원영기끼리 사이가 좋지 않답니다. 아니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죠. 다들 수백 년을 살며 어떤 인간관계를 맺어왔는지···. 하나같이 남을 믿지 못하죠.”

    마치 자신은 아니라는 듯 말하는 제이엘을 보며 준혁은 살포시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니 어떻게 힘을 모을 수가 있겠어요? 아마 힘을 모아 안으로 들어간다 해도···. 보물 앞에서 피바람이 불고 말 거예요.”

    “저는 그러지 않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준혁의 물음에 제이엘이 입가를 살짝 끌어 올렸다.

    “그래서 대가를 준비했다고 했잖아요. 거기다 수사와 저는 남들이 모르는 비밀을 공유하고 있지 않나요?”

    제이엘이 은근한 눈으로 바라보자 준혁은 ‘그 말이 맞다’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지만 진짜 이유가 무엇일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다른 원영기 수사와 달리, 준혁은 이제 막 원영기에 오른 상태.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수행을 믿고, 일이 잘못된다고 하더라고 준혁 정도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도움을 받아 보물을 얻을 생각이었을 것이다.

    “자 그럼 가실까요?”

    적절한 설명이 끝났다고 여긴 제이엘은 말과 동시에 허공을 박차며, 멀리 보이는 분지를 향해 날아갔다.

    준혁 역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응시하다 곧바로 그 뒤를 따랐다.

    +++

    높은 산맥이 첩첩이 둘러싼 분지.

    분지 안은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였다. 신기하게도 분지 안엔 한여름에만 피어난다는 열만화(熱萬花)와 얼음 속에서만 꽃이 핀다는 빙소화(氷笑花)가 사방 곳곳에 피어있었다.

    거대한 분지 안에는 이미 수십 명의 사람이 먼저 도착해 있었는데, 머리 색깔부터 눈동자 색까지 다양한 것이 특정 세력에서 온 것이 아님은 틀림없었다.

    그중 한 명은 준혁도 잠깐 만난 적이 있던 중국의 원영기 수사 왕웅이었다.

    왕웅은 뭐가 바쁜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인사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 리차드! 또 오셨군요? 이번엔 준비 좀 하셨습니까?”

    리차드라 불린 사내는 왕웅이 귀찮은지, 인상을 찌푸렸다가 바로 했다.

    “특별한게 있겠습니까? 그런 수사는 그동안 알아낸 게 없습니까? 만통방의 주인이 알지 못하면 세상 누가 정답을 알아내겠습니까?”

    “하하, 그렇긴 합니다만. 수사도 한번 사용해봐서 알지 않습니까? 만통방이란 게 그리 편리한 도구가 아니란 걸.”

    왕웅의 말에 리차드라 불린 사내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럼 전 이만.”

    리차드와 짧은 대화를 마친 왕웅은 자리를 옮겨가며 사람들에게 대화를 걸다, 유독 발산하는 기운이 남들과 다른 사내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이동했다.

    “수사는 처음 뵙는 것 같군요. 저는 중국의 왕웅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지화라고 합니다.”

    눈매가 매우 가늘어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는 사내의 화답에 왕웅은 살짝 실망스러움을 내비쳤다.

    왕웅은 처음 보는 수사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앗! 원영기’라며 화들짝 놀라는 반응을 즐겼는데, 상대방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던 것.

    애초에 왕웅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것 같은 반응이었다.

    “수사께선 이곳이 처음이십니까? 흐음···. 보아하니 결단기 초기 수행이신데···.”

    결단기 초기 수행인데 왜 너는 나를 보고 놀라지 않느냐? 하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눈치가 없는 건지, 왕웅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아닙니다.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왕웅 선배님! 어? 당신은···. 지···. 맞다! 지화 수사?”

    그때 일단의 무리가 끼어들며 왕웅에게 아는 척을 했고, 그자는 지화라는 자도 알고 있는지 가까이 다가와 가볍게 묵례했다.

    “허험. 누군가 했더니 남쪽의 비앙카 수사군요. 이분은 아시는 분?”

    “네. 10년 전에도 뵌 적 있는 분입니다. 아마 제 기억이 맞다면···. 결계를 푸는 것엔 도전하지 않으시고 구경만 하셨던? 맞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제 수행에 욕심을 낼 까닭이 없지요. 그저 다른 분들을 구경하면 그걸로 족합니다.”

    새로 나타난 비앙카와 지화라는 자의 대화를 들은 왕웅은 내심 속으로 비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말이 좋아 구경이지, 기회를 보다 콩고물을 얻어가겠다는 속셈이 눈에 뻔히 보인 것.

    지화라는 자를 제외하고도 분지에 모인 대부분 결단기 수사는 비슷한 마음가짐일 거란 생각에 왕웅의 입가는 살짝 비틀리고 있었다.

    그때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누군가가 빠르게 하강해 분지에 내려섰다.

    “제이엘 수사!”

    왕웅은 새로 나타난 이를 보자마자 반가움에 한달음에 달려가다 그 옆에 자리한 사내를 보고는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분명히 기억하고 있던 사내의 모습.

    ‘인지경의 주인!’

    그리고 최근에 알음알음 퍼져가는 소문도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확인이 안된 소문이었지만, 충분히 믿을만한 정보통을 통해 알게 된 내용.

    그중 가장 중요한 핵심 내용은.

    ‘한국의 새로운 원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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