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92화 (92/408)
  • # 92 < 버뮤다 삼각비경 (1) >

    여인의 말에 두 사람은 대화를 멈추고, 일단의 무리를 맞이했다.

    제이엘의 허락에 공원 내부로 들어선 자들은 총 세 명의 사내였는데, 전원이 눈빛에서 살기를 띠고 있었다.

    그중 가장 앞서있던 자는 요란스러운 삐쭉 머리를 하고 눈가가 살짝 충혈된 것이 무언가 분에 찬 듯 보였다.

    세 명의 사내는 제이엘 앞까지 빠르게 다가와 정중히 몸을 숙였다.

    “선배님을 뵙습니다.”

    “무슨 일이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제이엘이 근엄한 말투로 묻자, 삐죽 머리 사내가 품에서 절반쯤 타버린 부적을 꺼내 내밀었다.

    “저와 피로 맺어진 윈드라스의 다니엘이 죽었습니다.”

    갑작스러운 부고에 제이엘이 살짝 동요를 보이다가 신색을 바로 했다.

    “그게 나를 찾은 것과 무슨 상관이지?”

    제이엘의 물음에 사내는 준혁에게 시선을 주다가 말을 이었다.

    “선배님 옆에 계신 수사분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수사?”

    삐죽 머리는 예를 다하듯 공손하게 묻고 있었지만, 말속에는 가시가 잔뜩 박혀 있었다.

    한편 준혁은 이상함에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다니엘의 죽음이 알려지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이유와 과정 따위가 사람들에게 알려져 봐야 윈드라스 입장에서는 좋을 게 없는 법.

    그들이 굳이 눈앞의 사내에게 말을 전했을 리는 없다 여겨졌다.

    그리고 그 의문은 금세 해결되었다.

    준혁과 제이엘의 시선을 의식한 듯, 삐죽 머리 사내가 손을 가볍게 저어 수인을 맺더니 입김을 후우~ 불었다.

    그러자 그의 오른쪽 눈이 빨갛게 변하다가 금세 푸른 광채를 내뿜었다.

    그 모습에 제이엘이 가볍게 탄식했다.

    “영안차력···. 두 사람이 그 정도로 가까웠는지는 몰랐군.”

    “저 역시 이능력을 사용할 일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영안차력(靈眼借力).

    신체에 제약을 가하는 술법 중 하나로 두 사람, 혹은 다수의 사람이 자신의 시야를 상대방에게 공유하는 술법이었다.

    최초의 발전은 누군가를 감시하기 위해 생겨난 술법이었지만, 작금에 이르러서는 서로의 신뢰를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술법이기도 했다.

    “오래전 다니엘이 제게 준 부적에 이상이 생겨, 확인해본바. 여기 계신 수사분께서···.”

    삐죽 머리는 준혁을 쏘아보며 말을 하다 이를 악물며 제이엘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건 마치, ‘이놈에게 복수를 해야겠으니 끼어들지 말아달라’라고 말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런 삐죽 머리를 보며 사실관계를 떠나, 제이엘은 당황스러움을 금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가까운 친우가 죽었다 한들, 결단기급이 원영기 수사에게 복수하러 나타나다니.

    그리고 눈앞에서 당장이라도 공격할듯한 기세를 내뿜는 것까지.

    절대 상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광경.

    그런 의문에 이상함을 느끼려는 찰라, 제이엘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나는 경험을 하고 말았다.

    원영기에 오른 이상 기감에 매우 민감해지는 게 보통. 그랬기에 제이엘은 굳이 준혁의 수행을 훑어보거나 관찰하지 않았었다.

    더군다나 만남의 순간이 매우 짧았긴 했지만, 직접 원영기에 오르는 걸 보았으니 그의 수행이 ‘딱 이정도’라며 얼추 지레짐작하기도 했었던 것.

    하지만 지금, 결단기 후기 수사의 도발 아닌 도발에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준혁을 빠르게 훑어본 제이엘은 너무 놀라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무 기운도 느껴지지 않아···. 말도 안 돼.’

    이미 원영기 중기에 올랐기에, 초기인 준혁의 수행이 파악되지 않는 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혹시나 술법이나 법기를 이용해 수행을 감춘 건 아닌가 싶었지만, 그 어떤 영기파동도 느껴지지 않은 걸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제야 제이엘은 눈앞의 사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말리지 않는다면, 복잡한 친분으로 얽혀 있는 유럽연합은 꼬리에 꼬리를 물 듯 덤벼들 것이고, 그 끝이 어떨지는 너무나도 뻔해 보였다.

    “죠제프.”

    “네. 선배님.”

    “이분은 내가 초청한 손님이다. 다니엘의 일이 안타깝긴 하나 이유가 있을 터. 앞으로 그 일에 대한 언급은 금지한다.”

    “그게! 어찌 그런 명을!”

    “또한 연합회에 알려라. 회원 중 그 누구라도 여기 계신 최 수사께 칼을 든다면, 나 제이엘이 먼저 나설 거라고.”

    일방적으로 준혁을 두둔하는 제이엘의 말에 삐죽 머리는 말을 잃고 말았다. 사실 유럽연합이라는 것 자체가, 원영기 수사인 제이엘 밑에 모여든 자들이 만든 모임.

    그녀의 말은 곧 법이었다.

    제이엘의 말에 삐죽 머리는 원통하다는 듯 눈에 핏발이 섰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수긍하며 대답했다.

    “명 받겠습니다···. 그게 제이엘 님의 뜻이라면···.”

    잠시 후, 삐죽 머리 일행이 사라지자, 처음과는 달리 제이엘과 준혁 사이엔 어색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왜냐고 묻지 않으시는군요?”

    “이유가 있으셨겠죠. 스스로 당당하지 못했다면 저를 찾아오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제이엘의 태도에 준혁은 사실을 전부 말해주려다가 말을 아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일이었으니, 변명하는 게 구차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도 두 사람은 수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지만, 처음보다는 그 열기가 식어있었고, 결국 다음을 기약하며 만남을 정리했다.

    +++

    “의외군, 어디선가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더니.”

    제이엘을 떠나온 준혁은 자신의 예상과 달리 인근 어디에서도 연합회원들이 모습을 드러내질 않자 가볍게 헛웃음을 흘렸다.

    떠나기 전 눈빛만 봐서는 분명 기습이라도 할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들은 제이엘의 명을 어길 정도로 강심장은 아닌 듯했다.

    사실 준혁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 한국이나 유럽이나, 원영기라는 건 하나의 상징과 더불어 범접할 수 없는 절대 권력과 같은 것이었다.

    “알아서 조심해 주겠다면 나쁠건 없지. 돌아가자.”

    +++

    유럽을 벗어난 준혁은 괜한 시빗거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 고도를 높여 중국을 통과했다.

    다음날, 울릉도로 돌아오자 반갑게 맞이해주는 사쿠라와 인사를 나눈 후에, 바닷속에 진법을 설치하고 있는 가심악을 찾아갔다.

    순조롭게 광맥 개발을 시작한 가심악에게 일의 전권을 맡긴 후, 청룡가에서 건너온 일반인 광부들을 만나러 이동했다.

    그들은 하늘 같은 존재가 돼버린 준혁을 보자마자 땅에 머리를 박았다.

    “장씨 아저씨. 일어나세요.”

    “어, 그, 그래도···.”

    “수도자도 아니신데, 수도계의 예를 따를 필요가 있습니까? 예전과 같진 않겠지만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어요.”

    오래전 친분이 있던 이들을 만난 준혁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눈 후, 그들을 전부 광산의 관리자로 임명하고 청명에게 보냈다.

    청명은 여러 잡일을 맡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아직까지 맘에 드는 연기기 수사들을 선별하지 못했는지,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정신이 없어 보였다.

    덩달아 그를 따라온 도적 수하들도 갑자기 변해버린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지 얼굴이 꺼멓게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뒤로하고 화령을 만나 몇 가지 일을 지시한 준혁은 그 후로 천천히 섬을 돌며 여유를 즐겼다.

    그리고는 며칠 후 성인봉에 임시 거처가 만들어지자, 나설헌이 오면 소식을 전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거처로 들어가 버렸다.

    어느새 성인봉 주위엔 진법들이 설치되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완벽하게 가려주고 있었다.

    +++

    제이엘을 만나고 온 후, 준혁이 가장 먼저 시행한 것은 그동안 모아온 공간대의 정리였다.

    눈꽃 비경을 나선 후부터 정리하지 못하고 쌓아왔던 하급 공간대들.

    대부분은 저급 수사들의 물건이라 크게 기대할만한 것은 없었으나, 그 양이 적지 않았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힘들었다.

    그중 영석과 재료들은 전부 한곳에 치워놓고, 하급 법기와 하급 비행법기, 그리고 쓰지 않을 하급 공간대만을 따로 모아 수북이 쌓았다.

    “작은 것도 모으면 산을 이룰 터이니.”

    눈앞에 쌓인 하급 무구들을 세어보고는 진법 깃발을 꺼내 쏘아 보내며 수결을 맺었다.

    수결이 끝나자 준혁을 중심으로 금빛 진법이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그것을 신호로 하급 무구들의 원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원영기에 올라 그릇 자체의 크기가 변해버린 준혁에게 하급 법기의 원기가 엄청난 효과를 가져다줄 정도의 영향력을 끼치진 못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준혁의 입장.

    영단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호흡법으로 주변의 기운을 흡입하는 다른 수도자들 처지에서 봤을 땐, 준혁이 하급 무구에서 뽑아가는 기운만 해도 어마어마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쌓아두었던 법기를 전부 처리하는데 칠주야를 보낸 준혁은 다음으로, 필요 없는 옥간들을 전부 정리한 후, 중급 법기와 상급 법기들을 한데 모아 담았다.

    마음 같아서는 나머지도 전부 흡수해 버리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중급 법기 세 개를 가지고 실험해본 결과, 안에 담긴 힘을 완벽하게 흡수하지 못하고 법기만 망가지는 현상을 초래한 것.

    그랬기에 완벽한 효율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찾든, 혹은 수행을 더 올린 후에야 중급 법기에 손을 댈 생각이었다.

    +++

    한동안 쌓아왔던 공간대 정리가 끝나자 준혁은 다니엘에게서 얻은 물건 중 허리에 차는 옥대를 꺼내 들었다.

    늑대가 튀어나왔던 법기.

    바로 영수를 보관할 수 있는 영수대였다.

    “상급인가?”

    다니엘에게서 수거해온 영수대는 아무 무늬도 없는 옥으로 만들어진 허리띠 모양.

    다만 영기를 주입해 보면 희미한 푸른 물결이 옥대 주위에 흐른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영험한 기운이 흐르는 모습과 달리 영수대는 다른 법기처럼 바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종속의 인으로 맺어진 살아있는 영수를 보관해야 했기에, 길들이기 작업이 필수로 선행되어야만 했던 것.

    준혁은 공간대에서 영수대 관련 내용이 적힌 옥간을 꺼내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그에 필요한 재료들을 꺼내 주위에 종류별로 늘어놓았다.

    그리고는 옥대를 눈앞에 띄운 채 영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한참 동안 영기를 주입받은 옥대가 신호를 보내듯 부르르 떨기 시작하자, 준혁은 빠르게 수결을 맺은 후, 마지막 수인을 맺고는 손가락 끝으로 옥대를 가리켰다.

    순간 옥대에서 환한 빛이 나오며 마치 표백이라도 되는 듯, 푸른 물결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준혁이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움직이자, 주변에 놓여 있던 재료들이 빨려 들어가듯 날아가, 옥대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져버렸다.

    동시에 준혁의 입에서 정혈 한 방울이 빠져나와 옥대에 닿았다.

    부르르-

    강렬한 떨림과 함께 정혈을 이용해 길들이기 작업을 끝마친 준혁은 품 안에서 새근거리며 자고 있던 백호를 꺼내 들었다.

    “일어나 보거라.”

    준혁의 부름에 서서히 눈을 뜬 백호는 무슨 일인지 알고 있다는 듯 조그마한 입을 벌렸고, 그 안에서도 붉은 피가 빠져나와 옥대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그리고 옥대에 닿은 백호의 핏자국이 완전히 사라진 순간.

    파앗-

    준혁 앞에 있던 백호가 옥대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하지만 몇 분이나 흘렀을까?

    끼잉끼잉-

    무언가가 앓는 소리에 준혁은 피식 웃으며 옥대의 기운을 풀어버렸고, 자신을 잡고 있던 옥대의 기운이 사라지자 백호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털을 세우며 준혁의 품속으로 쑥 하고 들어가 버렸다.

    “영수대 안은 싫은가 보구나. 그래 될 수 있으면 안에 머물게 하지 않으마.”

    +++

    3년 후.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망망대해.

    서너 명은 앉을 수 있을 것 같은 마차 위에 올라탄 결단기 중기 수사 두 명이 시선은 전방에 둔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에서 ‘구름’이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되는 걸 보면, 예전 제이엘이 말했던 비경 안 장소와 관련된 대화가 분명했다.

    비단 그런 대화는 이들뿐이 아닌 수많은 곳에서 이뤄지고 있었는데, 그건 준혁이 머무는 울릉도 상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푸른 하늘에 노랑머리 여인과 흰 수염을 늘어뜨린 장어 한 마리가 유유히 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이엘, 다시 한번 경고한다. 그자를 조심하라. 지금껏 내가 만나 봤었던 다른 계약자들과는 다르다.

    머릿속에 직접적으로 전해지는 충고에 제이엘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는 말없이 한참 동안 섬을 내려다보다, 갑자기 눈을 빛내더니 허공을 박차며 아래로 쏘아졌다.

    “다행히 시간을 맞춰 나왔네. 더 늦는다면 신호를 보내려고 했더니.”

    쿵!

    순식간에 떨어져 내린 제이엘이 지상에 발을 내딛자, 주변에 여러 겹으로 펼쳐져 있던 진법들이 전부 사라지며 준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준혁은 제이엘이 나타날지 알고있었다는 듯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우며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수련 중 고심하던 것이 있어, 뜻하지 않게 기다리게 했습니다. 지금 바로 떠나실 겁니까? 버뮤다 삼각비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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