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 뇌둔술 >
“없던 일로 해주실 수는 없으시겠습니까?”
사내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부탁하자, 준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갤 끄덕였다.
전력이 급속도로 떨어진 가문, 더군다나 그 이유가, 가문의 손님에게 강도질을 하려다 실패한 것 이라는 게 알려진다면, 이들 가문에 미래 따위는 없었다.
아니 알려지지 않는다고 해도 장래가 밝진 않았다.
상대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래, 남은 식솔들에게 죄는 없지.”
준혁은 건네받은 하급 공간대를 갈무리하고는 주변에 모여있는 윈드라스 가문의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가볍게 혀를 한번 차고는 비행법기를 꺼내 올라탔다.
그때 멀리서 준혁을 주시하고 있는 한 아이가 있었지만, 그가 신경 쓰기엔 너무 보잘것없는 연기기 초기 꼬마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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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드라스 가문의 터전을 지키고 있던 진법은 이미 파악해 두었기에 나가는 길은 안내가 필요 없었다.
짧은 수결만으로 안개처럼 보이는 통로를 만들어내 윈드라스 가문의 터전을 빠져나온 준혁은 방향을 파악하고는 허공으로 솟구쳤다.
유럽 방면은 처음 방문한 것이기에, 주변 경치를 살피며 움직일 만도 하건만, 해야 할 일이 많았기에 굳이 시간을 허비할 생각이 없었다.
“온 김에 확인하고 가야겠지.”
다만 빠르게 영국에 들렀다가 한국으로 복귀할 생각이었다. 원영기에 오를 당시 느꼈던 마선의 기운. 그녀가 정당한 계약자라면 준혁이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을지도 몰랐기에, 꼭 한번은 만나봐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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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이동한 준혁은 런던 상공에 도착해 영기파동을 약하고 넓게 퍼트렸다.
그 기운은 매우 희미하게 멀리 퍼져나갔는데, 원영기인 제이엘만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준혁이 세심하게 기운을 조절한 결과였다.
잠시 후. 한쪽에서 섬광이 일며 노랑머리의 여인이 빠르게 다가와 다소 복잡한 미소로 준혁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수사. 이렇게 빨리 방문해주실 줄 몰랐네요.”
“가까운 곳에 볼일이 있어, 겸사겸사 들렸습니다.”
가벼운 인사 후 몇 마디 덕담이 이어지자, 제이엘이 몸을 돌리며 길을 안내했다.
“제 거처로 옮기시죠.”
제이엘의 거처는 런던 외곽의 공원이었는데, 꽤 넓은 부지 전부를 사방으로 틀어막아, 그녀의 개인 생활공간으로 쓰고 있는 듯했다.
건물이 아닌 야외에 놓인 테이블로 준혁을 안내한 제이엘은 허공에 박수를 두 번 치고는 자리에 착석했다.
잠시 후, 아름다운 외국 여성 두 명이 차를 가지고 와 준혁과 그녀 앞에 내려놓고 다시 물러갔다.
“이번에 비경에 갔다 우연히 구한, 영차(靈茶)예요. 몸을 정화해주는데 뛰어나니 맛 좀 보세요.”
준혁은 찻잔을 들어 입술에 대는 척만 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수사께선 제가 왜 왔는지 아시겠지요?”
“... 혹시 마선 때문인가요?”
한참을 망설이던 제이엘이 대답하자, 준혁은 긍정하며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혹시 괜찮다면 제가 만나볼 수 있겠습니까? 아! 우선 제 친구를 소개하지요.”
준혁은 말을 하다 말고 공간대에서 귀원패를 꺼내 허공으로 던지며 말했다.
“귀 수사. 잠깐 나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잠시 후. 귀원패에서 거북이 환영이 귀찮음이 가득한 얼굴로 솟아나더니 제이엘의 등 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순간, 제이엘의 어깨가 짧게 떨리며, 그녀의 등 뒤로 2미터가량 돼 보이는 거대한 수염이 달린 장어 한 마리가 나타났다.
“누군가 했더니, 장구수(長具鬚)셨습니까?”
수염 장어는 귀원패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보아도 싫어하는 티가 역력했다.
“거북황이었군. 당신은 여전히 그 생각을 고쳐먹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직도 동화체를 얻지 않은 걸 보면.”
“다 부질없는 일인 것을···. 무엇 하러 그 고생을 할까요?”
귀원패의 너스레에 잠시 침묵하던 장어가 준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찾아오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장어의 질문에 준혁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살짝 고개를 돌려 귀원패를 바라보았다.
“저자는 97번째로 태어났습니다.”
귀원패의 말에 준혁은 장어와 제이엘을 번갈아 보다 본론을 꺼냈다.
“정식 계약자가 어떤 식으로 힘을 쓰는지 한 수 배워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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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혁의 발언에 제이엘이 살짝 황당해하는 얼굴을 하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정식 계약자요? 그럼 최 수사는 이분의 계약자가 아니란 말인가요?”
대답은 준혁이 아닌 장어가 했다.
“그렇다. 저자는 여기 거북황과 어떠한 연결의 흔적도 없다. 하지만 예전에 내가 느낀 건 분명 계약자의 힘···. 다른 이와 계약을 맺고 있겠지.”
“맞습니다. 다만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으나···. 불안정한 상태라 제이엘 수사가 마선의 힘을 사용하는 걸 보며 무언가 배울 게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흐음. 참으로 곤란한 부탁을 하시는군요.”
준혁의 말은 한마디로 제이엘이 기운을 운용하는 방법을 보고 싶다는 말. 다른 이가 이런 말을 했다면 바로 목에 칼이 날아올 정도로 무례한 말이었다.
다만 마선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제이엘은 바로 좋다 싫다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도 지금껏 수백 년을 살며 다른 마선을 보는 건 처음. 수백 년을 함께했던 장구수의 말에 따르면, 선계에서도 마선들끼리 만나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라 했다.
그 정도로 그들은 희귀했고 특별한 존재라고 말했다.
“바로 답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간은 충분하니 저는 기다릴 자세가 되어있습니다.”
당연한 일이었기에 대답을 하지 못하는 그녀를 보고 준혁은 실망하지 않았다. 대신 어떤 방법으로 그녀를 설득할 수 있을까? 하고 머릿속을 맹렬히 회전시켰다.
하지만 의외로 대답은 바로 튀어나왔다.
“좋아요. 해드릴게요.”
제이엘의 대답에 오히려 준혁이 화들짝 놀랐다.
“정말이십니까?”
“대신 조건이 있어요.”
“말씀해 보십시오. 크게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전부 받아들이겠습니다.”
준혁이 적극적으로 나오자 제이엘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3년 후 저와 버뮤다 삼각비경에 같이 가주세요.”
“버뮤다 삼각비경···. 말입니까? 출구가 없다는 그곳?”
버뮤다 삼각비경.
그곳은 북대서양에 위치한 버뮤다제도를 정점으로 마이애미와 푸에르토리코를 삼각형 모양으로 잇는 거대한 바다 공간을 말했다.
다른 비경들과 다르게 버뮤다 삼각비경만의 특별한 점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출입이 무작위라는 것.
삼각비경 구역 안에 속하는 바다 어느 곳으로 진입하든 경계에 닿는 순간 누구든, 무엇이든 비경 안으로 전송돼 버렸다.
하지만 나올 때는 그렇지 않았다.
비경 내에 가끔씩 생겨나는 공간 소용돌이를 만나야만 밖으로 나올 수가 있었는데, 어떤 이들은 1년 만에도 수십 번 만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수십 년간 한 번도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말 그대로 밖으로 나오는 것은 무조건 운.
학자들은 그것마저 조건이 있을 거라 했지만. 여태껏 아무도 조건을 밝혀내지 못했으니, 조건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때요? 허락해 주실 건가요?”
입가에 미소를 띤 제이엘이 대답을 촉구하자, 준혁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반문했다.
“무슨 일인지는 알려주셔야 결정을 하지 않겠습니까?”
“아! 제가 실수했네요.”
짧게 헛기침으로 자신의 실수를 날려버린 제이엘은 삼각비경에 가려는 목적을 얘기했다.
“삼각비경 안, ‘구름이 낳은 땅’이라는 곳이 있어요···.”
그녀의 말은 이랬다.
10년에 한 번씩 결계가 약해지는 ‘구름이 낳은 땅’이라는 곳이 있는데, 지금껏 누구도 그 안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는 것.
사람들은 그 안을 궁금하게 여겨 만통방을 뒤졌지만, 그에 관한 정보는 없었다.
다만 선계에 비슷한 종류의 결계가 자주 사용됐다는 걸 알아냈는데, 그 결계의 주목적은 화신기 이상의 고위 수사들이 자신의 창고를 관리할 때 자주 쓰던 방식이라는 것.
그걸 알게 된 수많은 수사는 눈이 뒤집혔고. 10년마다 삼각비경으로 몰려가 안에 들어가기 위해 갖은 방법을 썼다.
하지만 모두 실패.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고위 수사만이 찾는 곳이 되었고, 아마 이번에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원영기 수사들과 결단기 후기급만 모일 거라는 얘기였다.
모든 얘길 들은 준혁은 흔쾌히 허락했다.
그녀의 부탁은 결계를 뚫고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는 것이 아닌, 그곳까지 함께 해주라는 것.
아마 거기엔 이유가 있을 터였지만, 굳이 그것까진 묻지 않았었다. 대충 예상이 가는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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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후 버뮤다를 함께 하기로 구두 약속하고 난 뒤, 두 사람은 공원 한쪽에 마련된 거대한 공터로 이동했다.
말이 공터지 푸른 잔디가 수백 미터 펼쳐진 들판이나 다름없는 곳.
들판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마주한 두 사람은 전혀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한없이 깊은 눈으로 제이엘을 바라보는 준혁과 다르게, 그녀는 조금은 긴장한 듯 살짝 흥분해 있었다.
목숨이 오가는 전투는 수백 번도 넘게 치렀지만, 이렇듯 누군가에 보여주는 시연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시작할게요.”
준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전신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동시에 기감을 유형화 직전까지 퍼트리며 주변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파악할 수 있게 영기를 조절했다.
그 순간.
파앗-
제이엘이 수십 미터를 격하듯 공중으로 치솟더니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나머지 손으론 땅을 가리키며 눈을 번뜩였다.
“썬더!!”
파지지직-
그녀에 입에서 ‘썬더’라는 말이 터져 나온 순간, 상공에 집채만 한 검은 먹구름이 나타났고 그 안에서 노란 뇌전이 튀기며 드문드문 뱀과 같은 장어의 모습이 드러났다.
준혁은 그 모습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눈으로 영력을 집중시키며 모든 것을 순간 촬영하듯 머릿속에 강제로 집어넣었다.
‘보인다! 내가 그저 능력을 내 것처럼 사용하는 것과 달리, 저자는 환영이 만들어낸 실체에서 직접적으로 힘을 받아 가고 있어! 이것이 계약의 실체구나!’
그때 먹구름에서 사방으로 튀겨나가던 뇌전이 강렬하게 뭉치는 게 보였다.
그리고 뭉친 뇌전이 번뜩인다고 느낀 순간.
파앗-
뇌전이 준혁의 눈앞으로 내리쳤고, 그 순간의 번뜩임과 동시에 제이엘이 준혁 앞에 나타나더니 잠깐 손을 흔들었다.
“어때요?”
파앗-
그리고 말이 끝나기도 전, 그녀는 뇌전이 사라지듯 홀연히 사라지더니 다시 처음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그 속도는 가히 번개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준혁은 잘 알고 있었다.
“뇌둔술···.”
극악의 확률로 태어나는 뇌영근. 그런 뇌영근자 중에서도 소수만이 완벽히 펼칠 수 있다는 뇌둔술.
속도로는 천하의 그 어떤 둔술로도 따라잡을 수 없다는 바로 그것이었다.
꿀꺽.
속도 면에서는 그 무엇에도 뒤처지지 않는다는 혈둔술을 익히고 있었지만, 뇌둔술에는 한 수 접어줘야 했기에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뇌둔술을 가지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런 마음가짐과 동시에 단(丹)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식검이 부르르 떨며 준혁의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듯 신호를 보냈다.
‘이런! 내가 무슨!’
식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에 준혁은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남의 것에 순간적으로 마음을 빼앗기고 욕심낸 자신을 탓하고는 식검을 안정시켰다.
공중에선 제이엘이 물 만난 물고기처럼 먹구름에서 만들어진 뇌전을 타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고 있었다.
준혁은 조금 전의 감정을 완전히 정리하고는 다시 주의 깊게 그녀를 관찰했다.
‘나보다 효율적으로 힘을 가져온다. 게다가 자신의 영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아. 마치 또 다른 원영기 수사의 도움을 받는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오랫동안 관찰하자 그녀의 단점 역시 도드라지게 보이기 시작했다.
준혁이 본인 의지대로 마선 들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제이엘은 장어가 만들어놓은 일정 지역 안에서만 힘을 발휘할 뿐이었다.
아마 동화가 거의 진행되지 않아서 그럴 가능성이 다분해 보였다.
준혁은 적마도로 뇌둔술을 상대할 수 있을까 실험해 보고 싶은 마음을 누른 채 한참을 관찰했고, 거의 차 한 잔 마실 시간 동안 능력을 보여주던 제이엘이 먹구름을 돌려보내며 준혁 앞에 천천히 내려섰다.
“어떠셨어요? 도움이 되었나요?”
“물론입니다.”
준혁은 제이엘에게 자신이 느낀 감상과 궁금한 것들을 몇 가지 물어보았고, 그녀는 자신이 아는 선에서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렇게 유익한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때, 처음 차를 내왔던 여인이 황급히 날아오더니 제이엘 앞에 반 무릎을 꿇으며 보고했다.
“주인님! 지금 유럽연합 회원들이 밖에서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연합회원들의 방문에 제이엘이 의문이 섞인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슨 일이지?”
그러자 여인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준혁 눈치를 보더니, 자신 없는 어투로 말을 이었다.
“저···. 그게···. 같이 오신 수사분 때문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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