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89화 (89/408)
  • # 89 < 윈드라스 가문 (3) >

    한편, 바위산 깊은 곳.

    빛을 발하는 구체 하나가 둥둥 떠, 넓은 공동을 비추고 있었다.

    그곳엔 제각각 외형을 가진 사람 다섯이 길쭉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는데, 모두 하나같이 거대한 늑대를 한 마리씩 옆에 두고 있었다.

    그중 가장 상석에 앉아있던 자, 한쪽 얼굴에 깊은 상처가 있는 험상궂게 생긴 사내가 입을 열었다.

    “모두 둘째가 보내온 편지는 읽어 보았겠지?”

    “네! 가주!”

    “예! 형님!”

    자비에의 아버지이자 윈드라스 가문의 수장인 다니엘은 형님이라고 대답한 사내를 한번 째려보고는 말을 이어갔다.

    “그놈이 오랜만에 훌륭한 일을 했어. 백호 청혈을 구하다니. 거기에 더해 이렇게 훌륭한 선물을 보내주고. 흐흐.”

    다니엘의 말에 빼빼 마른 사내가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요. 가주. 청혈을 흡수하는 데 성공한 몸이라니. 거기다 백호족의 무구와 각종 영단까지. 이제 우린 프랑스를 넘어 유럽 연합에서도 영향력을 넓힐 수 있을지 모릅니다요.”

    “그래. 다만 그 녀석이 경고한 만큼 조심해야 한다. 결단기 초기 수사이긴 하나, 일반적인 수사들과는 다르다고 하지 않았더냐. 갑자기 수행을 증폭시키기도 하고.”

    대화 도중 가주가 어울리지 않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자, 덩치가 커다란, 형님이란 말로 눈총을 받은 사내가 말을 이었다.

    “형님! 그건 둘째가 수행이 낮으니 그리 보이는 겁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수행을 제대로 파악해내지 못하면 괜히 더 움츠러드는걸?”

    “하긴 그건 그렇지. 그래도 혹시 모르는 것이니. 좋아! 그럼 계획을 세워보자꾸나. 어찌하면 좋겠느냐?”

    “우선 자비에가 보내온 정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시죠? 그 안에 놈의 약점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아니면 강점 같은 건 피하는 게 우리에게도 좋고.”

    가문의 결단기 수사이자 동생의 말에 다니엘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품에서 준혁이 가져온 옥간을 꺼냈다.

    하지만 덩치 큰 사내가 불만인 듯 투덜거렸다.

    “거참, 초기 수사라면 아무리 강해 봐야 형님 혼자서도 거뜬히 처리할 텐데, 계획은 무슨.”

    “아르노. 내가 예전에도 말하지 않았느냐! 수사들끼리는 상성이란 게 있어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것이라고. 사자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것을 모르는 거냐?”

    “사자가 토끼 사냥하는 걸 본 적이 없구만···.”

    덩치 큰 사내가 계속해 투덜거리자, 다니엘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후···. 언제 철들는지···. 그리고 청혈을 실험하기 위해선 생포하는 게 최선이다. 그러니 쉽게 생각하지 말아라. 알겠느냐?”

    몇 번이나 혀를 찬 다니엘은 시선을 돌려 조금 전 꺼낸 옥간을 공중으로 띄웠다.

    그리곤 옥간에 푸른 돌을 가져다 대더니, 가만히 눈을 감고 주변 영기를 반응시켰다.

    “진실의 소리로 다름을 보여라.”

    다니엘의 입에서 주문이 흘러나오자, 평범한 모양의 옥간이 푸른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준혁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자비에가 건넨 옥간은 윈드라스 가문에서 특수제작한 물건 중 하나.

    옥간 속에 또 다른 옥간을 숨겨 내용을 이중으로 기록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전음부에 준혁에 관한 얘기와 보상을 언급하고, 철궤 안 옥간에는 가주께 구구절절한 편지를 적어 준혁이 절대 의심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선.

    실상은 준혁이 가진 물건들과 준혁의 수행 등을 상세히 적고, 모든 물건을 하나도 빠짐없이 회수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고 있었다.

    만약 원영기에 오른 후 준혁이 다시 한번 그것들을 자세히 확인했다면, 이상한 점을 파악할 수 있었을 테지만, 굳이 편지를 여러 번 확인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 수법이 있을 거라곤 짐작도 못 한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자비에가 그려놓은 큰 그림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다만 그 그림을 끝까지 그릴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겠지만.

    +++

    준혁이 동굴에서 참선하며 기다린 지도 반나절.

    동굴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며 다섯 명의 인물이 안으로 들어섰다.

    가장 앞선 인물은 얼굴에 흉터를 가진 윈드라스 가주, 결단기 후기의 다니엘이었고, 그 옆엔 소식을 전하러 갔던 축기기 수사. 뒤로는 결단기 초기 수사 세 명이 따르고 있었다.

    다니엘은 준혁을 발견하고는 어깨에 손을 올리며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희 가문을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못난 아들을 위해 이렇게 애써 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상대방의 인사에 준혁도 고개 숙여 마주했다.

    “아닙니다. 전음부 내용을 들으셨으면 아시겠지만, 저와 자비에 수사는 유적에서 3년간 동고동락하며 의기투합했으니, 동료나 마찬가지. 당연히 와봐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까? 하하.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자리를 옮기시죠.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만찬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만찬이란 말에 준혁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만찬이요? 설마 섭식을 의미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하하. 오해하게 만들 뻔했습니다. 이 지역이 선주로도 매우 유명한 곳 아닙니까? 영기가 충만한 적포도를 수백 년간 발효시킨 명주들이 몇 개 남아있습니다. 이런 기쁜 소식을 전해주셨는데 오랜만에 개봉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주라는 말에 준혁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격변의 세상이 오기 전에도 술로 유명한 지역이라 했으니···.’

    “제 입이 호강하겠습니다.”

    준혁이 너스레를 떨며 걸음을 옮기자, 다니엘이 그런 그의 곁으로 다가오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일방적으로 묻는 건 다니엘이었고, 대답하는 건 준혁이었는데. 묻는 내용은 전부 유적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

    동굴 밖으로 나와, 또 다른 동굴로 들어선 일행은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이나 이동해 커다란 공동에 도착했다.

    공동 역시 처음 동굴과 마찬가지로 석재를 통으로 잘라놓은 의자와 식탁이 전부였는데, 다르게 있다면 그 위에는 진한 보랏빛을 띠는 선주로 보이는 것들이 여러 병 올려져 있다는 것.

    그리고 각 의자 앞엔 조그마한 종지 그릇 같은 것이 놓여있었는데, 술을 조금만 따라도 금세 넘칠 것 같이 높이가 아주 낮은 그릇이었다.

    “자 앉으시죠. 저도 아까워서 마시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다니엘의 말에 모두가 자리에 착석하자, 그는 가볍게 손을 젓더니, 마치 영수가 영력을 사용하듯 입김을 후우 불었다.

    그러자 식탁 위에 있던 선주 한병의 뚜껑이 열리며, 그 안에서 보랏빛 액체가 스스로 떠올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또르륵-

    준혁은 앞에 놓인 종지 그릇에 떨어진 보랏빛 액체를 바라보다, 다니엘의 눈짓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 인사를 보낸 후, 그릇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영기를 흘려보내 혹시나 선주에 이상은 없는지 확인했다.

    ‘참으로···.’

    선주를 확인한 준혁은 겉으로는 입가를 끌어올리며 웃고 있었지만, 속으론 씁쓸함을 금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주란 순수한 영기만 가득해야 하거늘, 이 안엔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너무 극소량이라 알아차리기 힘든 무엇인가가.

    ‘비열하구나···.’

    만약 준혁이 결단기 수행이었다면 절대 알아보지 못했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아들의 생사를 알려주기 위해 온 손님을 이리 대하다니···. 내가 전한 편지가 진짜인지 알아보려는 것인가? 아니면 유적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 살려 보내지 않으려는 것인가?’

    자비에가 어떤 장난을 쳤는지 알지 못했던 준혁은 다니엘의 의도를 고민하다 선주를 후루룩 소리가 나게 마셔버렸다.

    그리고는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선주를 강하게 압축해 자신의 정혈로 덮어버렸다.

    “경험이 적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렇게 좋은 술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한잔 더 받으시지요.”

    준혁이 기분 좋게 선주를 받아 마시자, 다니엘은 연달아 술잔을 채워주었다.

    한참 후, 식탁 위의 술병이 전부 비워질 때가 되자 불그죽죽해진 기분 좋은 얼굴로 다니엘이 말했다.

    “그거 아십니까?”

    “??”

    “둘째 녀석은 어릴 때부터 작은 버릇이 하나 있었습니다.”

    준혁이 궁금하다는 듯 가만히 바라보자, 다니엘이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은 거짓말을 할 때면 항상 ‘신용의 자비에’라면서 변명하듯 말하곤 했거든요. 우습지 않습니까?”

    피식-

    준혁은 다니엘의 말을 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려버리고 말았다.

    과거 자비에의 모습이 떠오른 것.

    게다가 자비에가 자신에게 부탁하며 목소리를 담은 전음부. 고마움과 은혜를 잊지 말라며 당부하고 또 당부한 그 전음부에만 신용의 자비에란 말을 도대체 몇 번이나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 말을 입에 달고 살더니···. 그런 뜻이었군요.”

    “흐흐, 선주도 대접해드렸으니, 손님 대접은 끝난 것 같고···. 이제 그만 저희가 받아야 할걸 내놓으십시오.”

    준혁은 다니엘의 말에 잠깐 그를 직시하다가 공간대에서 철궤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이것이 그가 부탁한 물건입니다.”

    다니엘은 철궤를 힐끔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부족합니다. 그것 말고도 백호족의 무구와 영단, 술법서와 각종 장신구들 전부 내놓으셔야지요. 아! 당연히 새끼 백호도.”

    “......”

    할 말을 잃은 듯 준혁이 가만히 있자, 다니엘이 이어서 말했다.

    “하나씩 내놓기 귀찮으시다면 그냥 공간대를 주셔도 괜찮습니다. 물론 청혈을 흡수한 그 몸도 저희에게 주셔야겠지만.”

    +++

    다니엘의 요구가 있고, 잠시동안 말이 없던 준혁이 입을 열었다.

    “제가 드린 옥간에 어떤 장치가 있었나 봅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것들을 그리 자세히 알고 있는 걸 보면.”

    “흐흐, 그렇소이다. 자비에가 모든 상황을 세밀히 적어 보냈으니, 아닌 척 넘어갈 생각은 말아야겠습니다.”

    점점 눈 색깔이 변해가는 다니엘을 보며 준혁이 무미건조하게 물었다.

    “절 살려주시긴 할 겁니까?”

    “흐흐, 조금 전에 무슨 얘길 들은 겁니까? 청혈을 흡수한 그 몸도 필요하다고 했을 텐데.”

    다니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공동 안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 전원의 몸에서 영력이 방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던 공동벽면에 붉은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 처음 보는 문자들이 떠올라 진법이 발동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준혁이 가볍게 냉소하며 앉은 자세 그대로 손을 뻗으며 가볍게 읊조렸다.

    “적마도.”

    그 순간 맞은편에 앉아있던 빼빼 마른 결단기 수사 등 뒤로 붉은 장도가 나타나더니, 스윽 하고 옆으로 이동하며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앉아있던 준혁의 몸이 번쩍 하는가 싶더니 ‘형님’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결단기 수사 뒤에 나타나 어느새 그의 목을 쥔 채 서 있었다.

    “그대들이 시작한 거니, 책임도 그대들이 지거라.”

    뚝-

    준혁의 입에서 말이 끝난 순간, 덩치 큰 사내는 아무것도 해보지 못한 채 목이 옆으로 꺾이며 눈동자가 탈색되어 버렸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목이 부러져 죽었다고 여기겠지만, 그 짧은 순간 준혁의 손바닥을 통해 빠져나온 달빛 칼날이 목 안을 관통한 것이었다.

    “이! 이게!”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두 명의 결단기 초기 수사가 죽어버리자, 다니엘은 반항할 생각도 없이 공동의 벽면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동시에 나머지 결단기 수사 하나와 처음 준혁을 안내했던 자 역시 급하게 몸을 날렸다.

    하지만 이미 다음 수를 생각하고 있던 준혁에겐 너무나 느린 반응.

    축기기 수사는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어디선가 날아온 단검들에 의해 꼬치가 되어버렸고, 하나 남은 결단기 수사는 단검은 피했지만 그 뒤에 이어져 온 준혁의 주먹은 피하지 못했다.

    쾅!!

    술법을 사용할 시간도, 법기를 발동시킬 시간도, 그렇다고 그들이 가장 자랑하는 영수를 사용해보지도 못한 채 덧없이 죽어 나갔다.

    윈드라스 가문의 인물들이 속절없이 죽어 나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가주인 다니엘은 어느새 벽면에 손을 대고 있었다.

    “괴물 같은 놈! 그래도 이미 늦었다!!”

    다니엘은 죽은 동생들 때문인지, 두 눈에 핏발이 선 채로 준혁을 노려보다, 공동에 그려지기 시작한 진법을 이용해 벽면을 통과하듯 쑥 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가 사라지자 준혁은 손을 저어 쓰러져 있는 자들의 공간대를 회수하고는 벽면으로 걸어가 기감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어떤 진법인지, 영기를 전부 튕겨내 버렸다.

    “처음 보는 종류구나.”

    준혁은 벽면의 문자들을 잠시 살펴보다 손을 저어 분광소를 날려 보냈다.

    하지만 분광소는 공동 벽에 작은 흠집 하나 만들어 내지 못하고 튕겨 나오고 말았다.

    그때. 공동에 다니엘의 분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감히 내 동생들을!! 절대 곱게 죽이지 않으마! 실험이 끝나고도 자근자근 씹어 죽일 것이다! 이제부터 바람과 천둥의 결계장 안에서 지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바람과 천둥의 결계장?”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다니엘의 목소리를 들으며 준혁은 가볍게 냉소하고는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손바닥 사이에 틈이라도 있는 듯, 검은 중식도가 쑤욱하고 빠져나와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요동쳤다.

    바람과 천둥의 결계가 어떤 진법인지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경험할 이유는 없는 것.

    준혁은 손을 까딱 움직여 허공에 떠 있던 적마도를 식검으로 잡아먹어 버렸다.

    잠시 후, 적마도와 하나 된 식검이 붉은 털을 휘날리는 말로 변하자.

    준혁은 사뿐하게 뛰어 말 위에 올라탔다.

    “가자. 적마.”

    그리고 준혁의 입에서 명령이 나온 순간.

    파앗-

    붉은 말에 올라탄 준혁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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