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 윈드라스 가문 (2) >
준혁이 머무는 성인봉을 마주 본 위치의 관모봉.
사쿠라는 관모봉을 깎아 너른 공터를 만든 후, 그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제자들을 시켜 간단한 오두막을 만들었다.
그리곤 오두막에 앉아 반대편에 솟아있는 성인봉을 보며 발을 까딱거렸다.
“이제 어떡해야 하나~”
이제 준혁과 가까이 있을 수 있게 되었으니, 기회를 보아 자주 만남을 가질 것이고.
남녀가 자주 만나다 보면 자연스레 마음이 간다는 게 사쿠라가 믿고 있는 자연의 이치였다.
어떻게 해야 이른 시간 안에 준혁과 가까워질까 고민하고 있던 사쿠라를 그녀의 첫 번째 제자이자, 의자매를 맺고 있는 사유리가 불렀다.
“언니,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어요.”
“뭐가? 금제?”
“네···.”
“훗.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지. 걱정 마. 그리고 알잖아? 우리는 남들과 다르다는 거?”
“그렇긴 하지만···. 어. 저기?”
말을 하던 사유리가 성인봉 쪽을 가리킨 순간, 사쿠라 역시 기감 안에 잡힌 무언가를 느끼고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나무로 만든 손바닥만 한 새였다.
조막만 한 나무새는 빠르게 날아오다 사쿠라 근처에 다가오자 속도를 줄이더니, 천천히 그녀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뭐지? 법기인가?”
그때 품 안으로 날아온 나무새의 입이 뻐금뻐금 움직였다.
-사쿠라 수사. 미뤄두었던 일이 있어 빠르게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3일 정도 자리를 비울 것 같으니, 가 호법이 돌아오면 그에게 광산 업무를 전담시키시면 됩니다. 진법에 조회가 깊어 무리 없이 일을 진행할 수 있을 겁니다.
나무새를 통해 들려오는 준혁의 목소리에 사쿠라는 화들짝 놀라야 했다.
“최 수사예요? 이건 뭐죠?”
-통신 기능의 법기입니다. 다만 항시 운용할 순 없기에 자정에만 발동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저에게 연락할 일이 생기면 그때 말씀하시면 됩니다.
“신기해!”
사쿠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조막만 한 새를 관찰하려 할 때, 나무새의 주둥이가 또 움직였다.
-사쿠라 수사,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섬 내의 일반인들에게 기공 치료 좀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네? 기공 치료요? 제가요?”
기공 치료란 몸속에 영기를 강제로 주입해 병을 고치는 행위. 잔병은 물론이고 영력이 높은 자가 시행하면 웬만한 병은 전부 낫게 할 수 있는 치료였다.
다만 그것은 연기기 초기 중기 때나 먹고살기 위해 하는 것이지, 고위수사에게 부탁할만한 일은 아니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다시 뵙죠.
준혁이 말을 끝마치며 법기의 운용을 멈췄는지 나무새는 입을 오므리더니 조용해졌다.
준혁의 통신이 끝나자 사유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불만을 쏟아냈다.
“말도 안 돼요! 결단기 후기 수사에게 그런 하찮은 일을 시키다니! 이건 모욕을 주려는 거라구요!”
하지만 씩씩대는 사유리와 달리 사쿠라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부탁이었기에, 사쿠라는 준혁이 자신에게 부탁한 일의 진짜 의미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 평판을 위해서구나···.’
일본 내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쿠라의 평판. 과거 무자비한 살육의 결과로 만들어진 평판이 이곳에선 다르게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꾸 이러면 내가 못 참겠잖아.’
진실이 어쨌든 사쿠라는 좋은 방향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진실이기도 했다.
+++
눈앞에 떠 있던 삼청조를 공간대에 집어넣은 준혁은 귀원패가 해준 이야기를 상기했다.
원래 삼청조의 능력은 상시 통신. 즉 삼청조가 눈뜨고 있는 시간 안에는 세 마리의 분신을 세상 어느 곳에나 보내 계약자와 대화를 할 수 있게 하는 것.
선계의 강자들이 믿을 수 있는 수하와 계약시키고 싶어 하는, 앞 순위를 다투는 마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식검에게 잡아먹힌 삼청조는 여전히 세 마리의 분신으로 변할 수 있긴 했지만, 준혁이 강제 발동하지 않은 이상 상대방이 먼저 대화를 걸 방법이 없었다.
한마디로 반쪽짜리 통신 법기였다.
“귀원패의 말대로라면 이들은 전부 봉인된 것이라 했으니, 언젠간 부활시킬 수 있겠지.”
아쉽긴 했지만, 당장 방법이 없는 일에 매달린 순 없는 일.
생각을 정리한 준혁은 빠르게 날아가는 도중 자비에가 건네준 철궤 속에서 옥간 하나를 꺼내 그의 본가 위치를 파악했다.
철궤 안에는 여러 가지 물품들과 옥간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지도였고, 나머지 하나는 가주에게 보내는 구구절절한 편지였다.
당시 자비에의 권유로 편지와 전음부등 가문에 전하는 내용을 전부 확인했었었다.
자신을 살리는 것이 가문을 살리는 것이라고 장황하게 설명해놓은 편지를 떠올려보며 준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편지에까지 ‘신용의 자비에’란 말을 몇 번이나 들먹였기에 한층 더 웃음이 났던 것.
그러다 그들이 사는 지역에 관한 생각이 떠올랐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다시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 단어 아비뇽과 윈드라스.
프랑스 남부, 아비뇽.
그리고 영수족을 섬기는 윈드라스 가문.
과거 교황의 도시라 불리는 곳의 제일 가문이 영수를 섬기는 가문이라니, 준혁은 참으로 부조화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고개를 젓고는 고도를 올리고 더욱 속도를 높였다.
부조화든 어쨌든, 자신은 그저 약속을 지키고, 보상을 받으면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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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 남부, 알삘르 바위산.
바위산 아래 넓은 평원지역을 통치하고 있는 것이 자비에의 가문, 윈드라스 가문이었다.
인근에 도착한 준혁은 기감으로 주변을 파악하고는 평원 전체에 미세하게 펼쳐진 방향 상실용 진법을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아마 수도자를 상대하기 위한 것이 아닌, 일반인들의 접근을 원천 봉쇄하기 위한 용도로 보였다.
“참으로 고고하구나.”
아무리 수도자라 한들 일반인들의 도움 없이는 살 수가 없었다. 당장 수련에 필수적인 영석을 캐는 것만 하여도 일반인들의 도움은 필수.
그럼에도 자신들과 일반인들 사이에 장벽을 만들고 계급을 논하듯 거리를 두는 수도자들이 서양에는 너무나 많았다.
“하긴···. 우리도 선민사상을 가진 수도자들이 적지 않으니···.”
서양 수도자들보다 적긴 하지만 동양에도 그런 자들이 있다는 걸 떠올린 준혁은 가볍게 혀를 찰 뿐이었다.
생각을 날려버린 준혁은 주변을 파악해 입구로 여겨지는 곳을 발견한 후, 곧장 그곳으로 날아갔다.
그리고는 전음부를 꺼내 입술을 달싹여 몇 마디를 남긴 후 허공으로 손을 휘익 저었다.
전음부는 준혁의 손을 떠나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날아가더니, 어느 순간 그물에 걸린 것처럼 멈칫하다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희미한 안개가 솟아나더니, 그 안에서 평범한 갈색 곱슬머리의 축기기 초기 수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축기기 수사는 준혁을 보고 움찔하더니, 빠르게 신색을 되찾고는 정중하게 물었다.
“어디서 오셨을까요?”
“윈드라스 가문의 차남, 자비에 수사의 부탁을 받고 물건을 전해주기 위해 왔습니다. 가주를 직접 뵈어야 하니 안에 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자비에 공자님이요? 자, 잠시만요!”
사내는 공간대에서 전음부를 꺼내더니 입술을 달싹이고는 안개 속으로 전음부를 날려 보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안개에서 덩치가 커다란 축기기 후기 수가 하나가 귀찮다는 얼굴을 한 채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내가 방해하지 말, 어? 누구야?”
덩치 큰 사내는 준혁을 발견하고는 투덜거림을 멈추고 자세를 바로 했다.
“자비에 공자님의 부탁으로 방문하셨답니다.”
“둘째 공자님? 수십 년간 연락도 없으시더니 이제야 소식을 전하시는 건가? 그런데···. 어? 잠깐!”
덩치 큰 사내는 준혁을 살피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자 깜짝 놀라 하며 다급히 물었다.
“호, 혹시···. 결단기 선배님 되십니까?”
사내의 질문에 준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혁의 반응에 덩치 큰 사내는 축기기 초기수사를 향해 버럭 소릴 질렀다.
“선배님이 오셨는데 우선 안으로 모셔야지! 이 무슨 실례인가!”
“죄, 죄송합니다.”
“사람 보는 눈이 이렇게 없어서야···. 아이고 제가 선배님 앞에서 민망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안으로 드시죠. 잠깐만 기다리시면 바로 가주님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전해드려야 할지···.”
준혁은 상대가 자신을 의식해 일부러 화를 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공간대에서 자비에가 준 전음부와 철궤에서 꺼낸 옥간을 건넸다.
“가주께 전해주시면 됩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안으로 드시죠.”
사내는 옥간과 전음부를 품 안에 넣더니 안개가 솟아난 곳을 향해 정중하게 손짓했다.
준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안개 근처로 다가가며 기감으로 위험이 없는지 살피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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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 모습은 말 그대로 상상 불허였다.
바위산 아래 너른 평원. 그곳에 여러 건물이 진법으로 감춰져 있을 거란 예상과 달리.
진법 안엔 구멍이 숭숭 뚫린 거대한 바위산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평원과 바위산뿐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너른 평야 한가운데 3층 정도 되는 높이의 교회 비슷한 건물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설마 전부 동굴 생활을 한단 말인가?’
기감으로 확인해도, 눈을 현혹하는 또 다른 진법이 보이진 않았다.
‘아무리 영수족을 섬긴다지만, 영수보다 더 원시적으로 산다는 건가?’
준혁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잠시 생각해보니 이들만의 문화라고 생각하면 그저 수긍하고 지나칠 수 있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때 준혁의 의문을 알아차렸는지, 사내가 설명을 시작했다.
“혹시 자비에 공자께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바람 늑대 일족을 모십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생활풍습도 그대로 따르고 있습죠. 저쪽에 보이는 바람 신전을 제외하곤 일반적인 건물은 없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고행이 많으십니다.”
“하하. 대부분 이해 못 하겠다고 말씀하시던데···. 저희를 이해해 주시는군요?”
“좋은 방법이라 여깁니다. 공법이나 영력이라는 건 결국 기운의 질을 파악하는 게 중요한 만큼, 생활을 그대로 따라간다면 크게 이득을 얻진 못할지라도 분명 효과는 있을 테니까요.”
준혁의 말에 사내가 친우라도 만난 듯 활짝 웃어 보였다.
“맞습니다!! 수사께선 정확히 알고 계시는군요! 어떤 자들은 이걸 이해 못 하고 저희를 금수 취급하던데.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내를 보며 준혁은 살포시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잠시 후 너른 평야를 지나 바위산 앞에 도착하자, 사내는 하단에 뚫린 가장 큰 동굴 안으로 준혁을 안내했다.
“이곳에서 기다리시면 최대한 빨리 가주께 다녀오겠습니다. 그럼!”
동굴 안으로 친절하게 안내한 사내가 빠르게 사라지자, 준혁은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수백 명이 기거해도 될 정도로 거대한 동굴이었지만, 돌을 통짜로 잘라 만든 의자와 식탁만이 보였고, 그 외에는 딱히 집기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다.
‘평생 이렇게 산다는 것 자체가 수련이겠구나···.’
준혁은 쓰게 웃으며 돌의자에 앉았다.
누군가는 수도자의 삶이 구름 위를 걷는 신선들의 삶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찌 보면 진실은 지금 이 동굴 속 상황이 말해주고 있는 현실에 가까운 것.
수행을 높여 불로장생하는 것 하나만을 목표로 무던히 노력하고 나아가는, 어쩌면 고독하고 무미건조한 삶일지도 몰랐다.
수행에 방해가 되는 섭식을 중지하였기에 입으로 즐기는 행복도 없음이고, 누군가에게 자신을 뽐내는 일은 화를 불러올 수 있기에 항상 절제하는 자세도 취해야 했다.
더군다나 가족과 주위 친우들이 모두 영근을 타고 나는 건 아니었기에, 어떤 인연은 소중함에 비해 너무나 짧게 스쳐지나 가버리기도 했다.
준혁은 텅 빈 동굴을 둘러보다 괜히 생각이 많아지는 걸 느꼈다.
“이미 목표를 정한바, 앞만 보고 가면 된다.”
고개를 저어 상념을 날려버린 준혁은 앞으로 일들을 떠올리며, 동시에 물건을 전해준 후 돌아가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다른 동굴에선 은밀한 모의가 이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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