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87화 (87/408)
  • # 87 < 윈드라스 가문 (1) >

    성인봉에 자리하고 머문 지, 삼 개월.

    자신의 지나온 행보를 하나씩 되짚어본 준혁은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대부분 일은 자신의 신념에 맞게 행동했으나, 어떤 일들은 그렇지 못한 것도 있었던 것.

    “자주 이런 시간을 가져야겠어.”

    과거를 되짚으며 마음 수양을 쌓는 일은 생각보다 더 큰 도움이 되었다.

    수행이 증가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가볍고 정신이 맑게 느껴졌다.

    “좋군.”

    정명하게 빛나는 눈을 갈무리한 준혁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손을 가볍게 저었다.

    그러자 주위를 덮고 있던 진법들이 한 번에 걷히며 깃발들이 전부 준혁의 공간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진법으로 가로막혀있을 때부터 주위에서 느껴지는 기척들을 감지하고 있던 준혁은, 한쪽에서 떼지어 날아오는 수사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잠시 후, 준혁 앞에 내려선 수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 오랜만에 뵈어요.”

    “원영기에 오르신 걸 감축드리옵니다.”

    사쿠라와 동시에 인사말을 건넸던 가심악은 ‘내 귀가 이상한가?’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급하게 준혁에게 시선을 옮겼다.

    준혁은 그런 두 사람을 잠시 쳐다보다, 그 뒤로 고개 숙인 자들을 전부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가심악을 직시했다.

    “가 수사.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선도에 올라서신 걸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제가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염치 불고하고 선배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서입니다. 비록 처음 만남이 좋지 않았다고는 하나, 제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으니···. 기회를 주신다면 앞으로 선배님께 크게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도움이 된다라? 혹 제 휘하에 들어오고 싶다는 말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허락해주신다면 선배님의 손발이 되어 함께 하고 싶습니다. 원영기에 오르셨는데 수련에만 전념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실 터, 잡다한 일에 신경을 쓰셔서야 하겠습니까?”

    말을 마친 가심악이 희미한 미소를 띠며 기대감이 잔뜩 담긴 얼굴을 했다.

    그 모습에 준혁은 별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한 가지만 수락한다면 제 사람으로 받아들여 주지요.”

    “감사합니다! 어떤 조건이든 괜찮습니다!”

    두 주먹을 꽉 쥐며 ‘됐다!’라는 표정을 하는 가심악을 보며, 준혁은 입에서 진한 피 한 방울을 뱉어냈다.

    그리고는 가심악의 얼굴 앞으로 천천히 날려 보냈다.

    “내 정혈을 이용해 금제를 가하겠습니다. 괜찮습니까?”

    무슨 일이든 할 것 같던 가심악은 금제라는 말에 흠칫 떨더니 말을 잃었다. 연기기 축기기 수사도 아니고, 고위 수사인 결단기 수사에게 금제를 걸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

    결단기 수사는 어디를 가나 환영이었고 높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기에, 그 누구도 그런 불합리한 조건을 받아들이면서까지 일하고 싶어 하는 자는 없었다.

    “원하지 않는다면 무르셔도 됩니다. 딱히 불이익은 없을 테니.”

    “...하겠습니다.”

    “정말이십니까?”

    “예. 선배님께서 목숨을 살려주신 후 오랫동안 두문불출하며 지냈습니다. 앞으로 수련에만 힘쓰며 세상에 나오지 않으려다 큰맘을 먹고 나온 것! 제가 아는 선배님이시라면 이유 없이 저를 괴롭히거나 해 하실 분이 아니란 걸 알기에 받아들이겠습니다.”

    말을 마친 가심악은 정혈을 조심스럽게 두 손가락으로 잡더니, 입안에 쏘옥 넣어버렸다.

    잠시 후 가심악의 식도를 타고 넘어간 정혈이 심장 부위에 안착하자, 그는 자신의 심장을 몇 번 쓰다듬어 보고, 수결을 맺어 몸 상태를 확인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

    “나도 잘 부탁드리겠소. 가 호법.”

    가심악이 금제를 받아들이자 준혁은 그를 휘하로 인정하고 바로 말투를 바꾸었다. 호칭까지 수사에서 호법으로 변해있었다.

    준혁의 반 하대에 가심악은 크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더니 옆으로 물러나, 마치 오랫동안 보필했던 사람처럼 한쪽에 시립 했다.

    그 모습에 사쿠라가 흥 하고는 말을 꺼냈다.

    “저 역시 저기 저자와 같은 이유로 왔답니다. 허락해주신다면 수사의 가신이 되고 싶어요.”

    사쿠라의 발언에 그 뒤를 따르고 있던 남녀 결단기 수사들이 가볍게 이맛살을 찌푸렸고, 준혁 역시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쿠라 수사. 수사는 저와 수행 차이도 크지 않거늘···. 제 가신이 되겠다고요? 조금만 노력한다면 원영기에 이르지 않겠습니까?”

    “그렇다 해도 상관없어요. 저는 수사와 함께하고 싶어요.”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말하는 사쿠라 때문에 준혁이 오히려 난감함을 표했다.

    “혹시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설마 비경에서의 일 때문입니까?”

    “네. 그것도 있고···. 최근 왕웅을 시작으로 많은 이들이 일본에 손을 뻗쳐오고 있었어요. 제가 수사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아마 저지력이 생길 것이라고 여겨요. 울릉도와 일본은 바로 지근거리. 제가 수사의 휘하에 들어간다면 많은 이들은 수사가 일본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여길 테니까요.”

    사쿠라의 말이 끝나자 준혁은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다가 말을 이었다.

    “허나 사쿠라 수사. 수사가 결단기 후기라고는 하나, 아니 그대가 후기 수사이기 때문에 더더욱 금제를 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만약 금제 없이 바로 근접거리에서 마음먹고 기습을 한다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준혁은 굳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물론이에요. 저는 상관없답니다.”

    “언니!!”

    “스승님!”

    사쿠라의 대답에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결단기 초기 수사들이 동시에 소릴 질렀다.

    하지만 준혁의 앞이란 걸 깨닫고 급하게 고개를 숙여 사죄하고 눈치만 보았다.

    “혹시 저에게 따로 바라는 것이 있습니까?”

    “가끔 수련을 도와주세요.”

    수련이란 말에 한참을 고민하던 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입을 벌려 정혈 한 방울을 뱉어냈다.

    “좋습니다. 나로서도 결단기 후기 수사의 도움은 가볍지 않은 것. 그대의 수련을 돕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결단기 초기와 결단기 후기는 같은 등급에서도 겨우 두 단계 차이.

    하지만 대부분의 수사가 결단기 초기 중기를 넘지 못한다는 걸 고려하면, 그 차이는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준혁처럼 말도 안 되는 기연이 거듭되며 모든 수련 과정을 뛰어넘어버린 자가 아니라면, 결단기 후기에 이르는 길은 수백 년의 인고와 그에 걸맞은 재능이 필요한 일이었다.

    게다가 일본에서 가지는 사쿠라의 위상과 인맥을 생각한다면, 준혁에겐 엄청난 도움이 될 건 분명했다.

    당장 최고의 상급 연기사인 야마기와의 친분만 고려해도 그녀의 존재감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잠시 후 사쿠라가 잠시의 주저도 없이 정혈을 삼키자, 그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결단기 수사도 앞으로 나서며 요구했다.

    “스승님이 선배님을 모시기로 했으니, 저희 역시 금제를 받고 이곳에 남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사쿠라는 그렇게 될 줄 알았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준혁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 그대들의 스승인 사쿠라 수사가 나와 함께하기로 했으니, 그대들 역시 이미 나의 사람. 또한 스승에 이어 제자들까지 금제로 억압하는 건 내가 사쿠라 수사를 의심하고 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 너희들의 관리는 전적으로 그녀의 책임이니 너희들이 금제를 받을 필욘 없다.”

    시선을 옮긴 준혁은 사쿠라를 향해 말을 이었다.

    “사쿠라 수사께 부도주 자리를 드리겠습니다. 원하는 곳에 터를 마련하시고, 제자들에 관해선 일절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준혁의 말은 일정 자유권을 주겠다는 말.

    사쿠라가 깊게 허리를 숙였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도주.”

    “제가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준혁이 마주 인사를 해오자, 사쿠라가 배시시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을 본 사쿠라의 제자들만이 못 볼 걸 봤다는 듯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사쿠라와 가심악에 대한 일이 마무리되자 다음으로 청명과 그의 부하들을 섬 전체의 경비와 관리를 맡겼다.

    뒤늦게 준혁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을 듣고 나타난 화영에겐 청룡가와의 연락을 전담시켰다.

    당연히 그녀에게도 금제를 가하는 걸 잊진 않았다.

    어찌 보면 냉혹해 보일 수도 있으나, 모든 일에 준혁이 일일이 관여할 수도 없는 일. 중요한 일을 맡기려다 보면 사람을 믿을 수 있어야 했고, 가장 쉽게 믿음을 주고받는 건 목숨을 담보하는 것이었다.

    결단기 이상은 모르겠으나, 축기기 이하는 오히려 정혈로 금제를 받고 온전한 신임을 받는 걸 다행이라 여기기도 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

    원영기인 준혁과 축기기인 화령.

    세력이라 부를 수도 없던 조합에 결단기 4명이 합류하자, 어엿한 하나의 세력이 돼버렸다.

    하지만 사람이 늘어난다는 건 책임져야 할 일이 많아진다는 뜻이었고, 책임을 진다는 건 돈이 들어간다는 말이었다.

    청룡가 5할의 수익을 주기적으로 가져오긴 하겠지만, 준혁의 애초 목적은 그 자원으로 수련 경지를 올리려고 했던 것.

    준혁은 잠깐 생각을 정리한 후 명령을 내렸다.

    “가 호법. 이것 받으시오.”

    준혁이 공간대에서 옥간 하나를 꺼내 던지자 가심악이 공손하게 받더니 이마에 가져갔다.

    순간 가심악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이!! 이것은!”

    “가 호법은 지금 화령을 데리고 청룡가로 가시오. 그리고 광맥을 개발할 수 있는 지원을 받아오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후일 지급 받을 상납금에서 제한다고 하면 될 것이오.”

    준혁의 말에 가심악이 놀랍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도주···. 설마 이곳 지하에 이런 것이 숨겨져 있다는 걸 알고 자리를 잡으신 겁니까?”

    “당연한 것 아니겠소?”

    이제 막 원영기에 오른 준혁이 오롯이 수련에만 매진하기 위해, 조용한 곳을 선택해 자리 잡았다고 여기던 가심악은 내심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나는 정말 그를 쉽게 생각했구나···. 인지경의 도움으로 말도 안 되는 수행을 쌓았다고 여겼거늘···. 어쩌면 그것이 아닐 수도 있겠어.’

    아무리 노력해도 결단기 초기를 벗어나지 못했던 가심악은 준혁에게 편승해 그의 도움으로 수행 상승의 기회가 오길 기대했다.

    어차피 원영기에 오르지 못한다면 죽게 되는 건 마찬가지. 그랬기에 금제를 받아들이면서까지 수하를 자처한 것.

    하지만 그의 언행과 태도, 행동을 보면서 어쩌면 자신이 잘못 판단한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이 좋아 원영기에 오른 것이 아닌, 정말 원영기에 오를 실력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 하는 의심.

    그런 마음이 들자 가심악은 마음속에 불꽃이 이는 걸 느꼈다.

    ‘반드시 그의 마음에 들어 수행을 올리고 말 테다! 나는 더 살고 싶다!’

    가심악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준혁은 화령에게 광산에서 일할 인부 중, 장씨 아저씨를 비롯한 자신이 아는 일반인 광부들을 전부 데려오라 말했다.

    오랫동안 함께 일했기에 그들의 성실함을 알고 있었고, 전부 관리자로 채용할 생각이었다.

    잠시 후 가심악과 화령이 청룡가로 떠나자, 준혁은 청명에게 연기기 수사들을 뽑으라 명했다.

    그리고는 공간대 하나를 던져 주었다.

    “이, 이게 무엇입니까요?”

    “기초 공법들이다. 재능있는 산수들을 불러 모으는데 그만한 것이 없을 터. 잘 활용해 보거라. 우선은 잡다한 일을 병행해야 할 테니 최소한 연기기 후기로 된 자들만 선별하고, 후일 섬이 안정되면 그땐 그저 재능만 보고 뽑으면 된다.”

    기초 공법이란 말에 청명과 그의 부하들의 눈이 반짝였다.

    “어르, 아니, 도주 어르신. 혹시 저도···.”

    피식-

    준혁은 청명의 태도에 한 번 웃어준 후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너와 저 녀석들이 먼저 익혀야 산수들을 지도할 것 아니냐. 화령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아 바쁠 터이니 이 섬에 축기기는 너희 여섯뿐이다. 청명 네가 책임지고 관리해야 한다. 알겠지?”

    “예!! 맡겨만 주십시요!!”

    “그리고 김춘수를 찾아오거라.”

    “그 영석 버러···. 말입니까요? 네, 넵!”

    그 어느 때보다 기분 좋은 얼굴로 크게 대답하는 청명.

    준혁은 마주 웃어주며 손을 저어 축객령을 내렸다.

    공법서가 든 공간대를 들고 희희낙락한 표정을 사라지는 청명을 보며 준혁은 잠시 설악산을 떠올리다,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가져오길 잘했군.’

    기초 공법서뿐 아니라 기초 진법서와 수련에 필요한 많은 것들을 전부 담아왔었다.

    그랬기에 강만학을 비롯한 도율의 제자들을 처리하고도 꽤나 시간이 오래 걸렸던 것.

    다만 인체실험에 관한 건 그 어떤 것도 챙기지 않고 전부 불태워버렸다. 수련에 도움이 될 정보가 있을 수도 있었지만 이미 마음먹고 있었기에 단 하나도 아깝지는 않았었다.

    청명이 가고 사쿠라마저 제자들과 사라지자 준혁은 다시 진법으로 주변을 막고 명상에 빠져들었다.

    이제 거처를 마련했고, 동생 일은 나설헌이 오면 해결할 수 있을 터.

    뜻하지 않게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겼지만, 그만큼 해야 할 일도 늘어났기에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정리하고 있던 무렵.

    준혁은 아! 하는 표정으로 공간대에서 철궤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것이 있었구나.”

    철궤는 백호 유적에서 나오기 전 자비에가 부탁한 물건이었다.

    유적을 막 나와선 살아남기 바빴고, 그 후엔 동생 일로 쉴 새 없이 달리느라 전혀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던 일.

    준혁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래, 굳이 미뤄둘 필요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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