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 위명 (2) >
나설헌이 떠나가자 조용히 시립 해 있던 화령이 입을 열었다.
“선배님. 이제 어디로 가는 겁니까?”
화령의 질문에 잠시 고민에 빠져있던 준혁은 예전에 얻은 지도 한 장을 떠올리고는 입가를 살짝 끌어올렸다.
“조용하고 적당한 장소가 있으니 그곳으로 갑시다. 타세요.”
준혁이 카펫 비행 법기를 꺼내 오르자, 화령이 조심스럽게 위에 안착했다.
“저기···. 그런데 선배님.”
“??”
준혁이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돌리자, 화령이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말씀 편하게···.”
“아! 알겠네. 그럼 앞으로 편하게 대하지.”
“감사합니다.”
원영기인 준혁이 축기기에 불과한 자신에게 존대하자, 대화할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던 화령은 이제 다행이라는 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준혁은 피식 웃고는 비행 법기를 출발시켰다.
+++
북한산에서 동해 방면으로 날아가던 준혁은 설악산 인근에 멈춰서더니 잠시 고민하는 얼굴을 하다, 화령만을 남겨둔 채 지상으로 쏘아져 날아갔다.
“잠시 기다리게.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설악산 자락으로 빠르게 날아간 준혁은 서너 시간 정도를 허비하더니, 처음과 똑같은 상태로 유유히 날아왔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말했다.
“가지.”
무표정하게 동해 쪽을 바라보는 준혁의 모습을 보며 화령만이 속으로 벌벌 떨 뿐이었다.
‘아까 소리들···. 그리고 저 검은 연기···.’
화령은 분명 들었었다. 준혁이 산자락으로 내려간 직후, 사방에서 들려오는 고함과 비명을. 그리고 무언가 불타고 있는 연기와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
생각보다 수도계라는 곳은 심심한 곳이었다.
기본적으로 수십 년씩 수양하고, 수백 년을 넘어가는 일도 허다했으니, 사람들의 이목을 단번에 집중시킬만한 사건·사고가 쉽게 생겨나지 않는 것.
물론 수도자들은 하루에도 수십씩 죽어 나가고 또한 새로운 수사들도 계속 생겨났지만, 그건 그냥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기에 관심거리는 될 수 없었다.
그나마 최근에 가장 유명한 사건이라면 경기도에 나타난 보물. 하지만 그것마저도 결국 시일이 지나며 시들해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런 때에 세 가지 소문이 떠돌기 시작하면서 작은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문들은 곧이어 세계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첫 번째 소식은 한국의 한 가문의 소식이었다.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 그리고 그 근방 경기도의 한 축을 담당하던 청룡가 가주 휘하 결단기급 전부 사망.
보통 한 나라의 수도라고 해봐야 수도자들에게 특별히 관심이 갈만한 곳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은 이상하리만큼 수도에 영산들이 몰려있었고, 근방에 수많은 영석 광맥이 묻혀있었던 것.
한국에서도 노른자 중 노른자가 수도였다.
그런 수도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던 청룡가가 거의 쓸려나가다시피 힘을 잃어버려, 지방의 수많은 문파가 침을 흘리며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두 번째 소식은 한국의 유일한 원영기인 도율의 소식.
정확히는 도율이 차지하고 자리한 설악산 일대 강원도에 관한 소식이었다.
청룡가에서 일이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단기급인 도율의 제자들마저 전부 사라졌는데. 그 과정에서 참혹한 사실이 터져 나왔다.
도율은 이미 실종된 지 100여 년이 넘었고, 그의 제자들은 ‘명왕의 시험’이라는 명목으로 산수들을 끌어모아, 인체실험을 자행하고 있단 게 들통나 버린 것.
그 사실이 밝혀진 건 어느 고인 때문인데, 그는 인체실험 현장을 목도하고는 분노와 함께 도율의 직계 제자들을 전부 죽이고, 인체실험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불태워 버렸다고 했다.
그리곤 설악산과 인근 산들에 기거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산수들에게 명을 내려, 만천하에 도율 제자들의 참상을 알리게 했다.
그동안 한국의 기둥이라 불리었던 도율에게 사람들은 실망했고, 한국의 위상은 나락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모두들 생각했다.
하지만. 세 번째 소식은 그런 모든 걸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한국의 새로운 원영기 탄생.
그 소식은 한국인들의 코를 우뚝 서게 만들었다.
세계 최초로 두 명의 원영기를 보유하게 된 한국은 명실상부 수도계 국가 중 선두에 서게 된 것.
이제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국력을 가진 초강 국가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었다.
다만, 그 당사자인 새로운 원영기가 그 의견에 동의할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
자신에 대한 소문이 천천히 싹트기 시작한다는 걸 모르는 준혁은 화령과 함께 울릉도 상공에 도착해 있었다.
오래전 울릉도주에게 얻은 독도의 광맥지도가 생각나 방문해 보니, 울릉도는 생각보다 준혁의 마음에 쏙 들었다.
하늘을 찌를듯한 영산들에 비해선 영기의 농도가 그리 높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꽤나 좋은 수련 장소였고, 바다 한가운데 있었기에 조용하고 아늑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이곳으로 하시려는 건가요?”
“그래. 이제 원영기에 이르렀으니 적당한 거처를 마련해야지.”
준혁은 화령의 물음에 답해주고는 사방으로 영기를 퍼트리며 지상에서 수련하던 모든 수사들을 자극시켰다.
파앙-
잠시 후, 수많은 수사들이 얼굴을 내밀었고, 개중 축기기 중기 수사 몇 명이 준혁 앞으로 날아왔다.
준혁은 그들이 오래전 울릉도주를 죽일 때, 보았던 자들임을 기억해냈다.
가장 수행이 높아 보이는 축기기 중기 수사가 허리를 숙이며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선배님을 뵙습니다. 혹시 무슨 일로 방문해주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준혁이 원영기 수사라는 건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사내는, 지나가는 결단기 수사가 무언가를 얻기 위해 방문했다고 여겼다.
“나는 최준혁이다.”
“네. 최 선배님이셨군요. 저는 김···. 헉! 최준혁!”
상대방이 놀라거나 말거나 준혁은 할 말을 내뱉었다.
“너희들이 나를 잡으려 도주와 함께 움직였단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청룡가의 부탁 때문에 움직였을 테니 더는 상관하진 않겠다. 다만 오늘부터 이곳 울릉도는 내가 기거할 테니, 너는 모든 이들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거라. 두 시간이면 될 테지?”
“가, 갑자기 무슨···. 외람되오나 한 말쯤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보라.”
상대방은 스승이 준혁에게 죽었음에도 딱히 분노나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진 않았다. 그저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 대한 경계, 딱 그 정도였다.
“저희는 스승님이 하늘로 가신 후, 선배님을 추적하는 모든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다만 청룡가는 아직도 수많은 인원을 풀어 선배님을 찾고 있사온데···. 이곳에 자리한 순간 순식간에 소문이 퍼질 것입니다. 혹여 그것이 저희의 잘못으로 오해하실까 봐 심히 걱정됩니다.”
그러니 이곳에 숨어서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다른 곳으로 가라는 말.
물론 축기기 사내가 진짜로 염려하는 것은 자신들의 안락한 수련 장소 때문, 대한민국 어디를 가도 이곳만큼 수련하기 좋은 곳을 찾기 어려워서였다.
너무 좁은 땅이라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지도 않으면서, 영기는 풍부해 저급 수사들이 수련하기 알맞은 곳.
또한 도주의 제자들은 이곳에서만큼은 왕처럼 행동하며 살았기에, 그 모든 걸 버리고 떠나고픈 마음이 전혀 없었다.
준혁이 청룡가와 싸우든 말든, 분쟁이 일어나든 말든 그런 건 모두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준혁의 말에 사내는 얼이 빠져나가 버렸다.
“걱정할 필요 없다. 이미 여공천은 죽었으니 앞으로 나를 찾는 이는 없을 것이다.”
“네?”
“소식이 느리군. 그럼 두 시간을 줄 터이니 전부 이동시켜라.”
사내가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 준혁은 마지막 명을 내리더니, 어서 가보란 듯 고개만 앞으로 까딱거렸다.
그 모습에 한참 동안 멀뚱거리고 있던 사내는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지상으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주위에 있던 이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빠르게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울릉도 전 지역에서 수많은 수사들이 달리는 것보다 느린 비행법기에 탄 채 종종거리며 섬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
울릉도에 머물던 하위 수사들이 전부 떠나가자, 준혁은 섬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섬 중심에 가장 높이 솟은 곳을 향해 날아갔다.
산 정상에는 ‘성인봉(聖人奉)’이라는 정상석이 세워져 있었다.
“성인(聖人)이라···. 맘에 드는군.”
준혁이 흡족한 미소를 머금으며 주변을 구경하자, 화령은 비행법기에서 내리며 멀리 떨어진 봉우리를 가리켰다.
“선배님, 아니 이제 도주님이라고 불러야겠죠? 도주님. 그럼 저는 저쪽에 자리를 잡겠습니다. 시키실 일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화령이 인사하고 떠나자 준혁은 분광소를 쏘아 보내 정상석을 제외한 인근 공터를 평평하게 정리했다.
산 중턱에 동굴을 판다면 쉽고 간편하게 거처를 마련할 수 있지만, 이제 더는 답답한 굴 안에 있기 싫었던 것.
이제는 넓은 바다와 산세를 볼 수 있는 곳에 집을 지을 계획이었다.
“급한 건 아니니.”
하지만 집보다 더 중요한 건, 여공천과의 전투 도중 깨달은 마음가짐을 다지는 것.
또다시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지고, 초심을 잃어갈지 몰랐기에 준혁은 이번 기회에 시간을 가지고 마음 수양을 쌓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수행을 올리는 데만 급급했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었다.
결정을 내린 준혁은 어느덧 깨끗해진 공터 주위로 여러 진법을 설치해 누구도 방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곤 동생이 잠들어 있는 옥관을 조심스레 정상석 옆에 내려놓고 월광지력을 미세하게 주입한 후, 또 다른 진법으로 덮어버렸다.
간단하게 일 처리를 끝낸 준혁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다 공터의 중심으로 이동해 가부좌를 한 채 앉았다.
그리고는 여공천과의 전투보다 아주 먼 과거인 처음 수도계에 입문해서 여동수에게 잡혀갔던 일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사건을 되새겼다.
동시에 그 당시 떠올렸던 감정과 다짐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다짐과 다르게 행동했던 자신을 반성하고 새로운 마음가짐을 다졌다.
+++
울릉도 성인봉에서 조금 떨어진 천두산 정상.
그곳엔 여러 인물이 서로 어색한 표정으로 거리를 둔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몇은 무리를 이루고 있었는데, 다들 하나같이 안색은 초조해 보였다.
그들 중 가장 안색이 나쁜 이가 한 명 있었는데, 그는 바로 준혁을 찾아 한국으로 날아온 청명이었다.
청명은 지금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씨부럴, 저 괴물 같은 여자를 여기서 또···. 미치겠네.’
다리가 호달달 떨렸지만, 간신히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던 청명은 살짝 고개를 돌리다가 보지 말아야 할 걸 보았다는 듯 세차게 고개를 되돌렸다.
휘익-
“야, 너 지금 나 야렸냐?”
눈이 마주친 여인의 말에 청명이 침을 꼴깍 삼키고는 말했다.
“아, 아닙니다요. 사, 사쿠라님···. 제가 감히···. 너무 아름다우셔서 저도 모르게 그만···.”
“뭐? 입에 꿀을 발랐네? 한번 봐줬다.”
청명의 태도가 귀엽다는 듯 입술을 할짝댄 사쿠라는 청명 너머로 시선을 옮기며 턱을 위로 톡톡거렸다.
“어이, 가심악. 너는 왜 온 거지?”
사쿠라의 부름에 몇 년간 사라져 행방이 묘연했던 가심악이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최 선배님과 오래전 인연이 있습니다. 좋지 못했던 관계라서 이번에 정식으로 사죄드리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죄? 줄을 바꿔타려는 건 아니고?”
“......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사쿠라 님께서는 일본을 잘 떠나지 않는다 들었는데···. 이곳엔 어인 일이십니까?”
사쿠라의 비아냥에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하던 가심악이 반문하자, 그녀는 기분 좋은 일이 생각났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나? 나는 최 수사한테 목숨을 구원받았거든. 빚지고는 못사는 성미라. 좀 갚으려고.”
“보물이라도 준비하신 겁니까? 최 선배님께서 가지신 것들이 보통 물건들이 아닐 텐데, 꽤나 좋은 걸 가져오신 모양입니다?”
가심악의 말에 사쿠라의 입꼬리가 더욱더 위로 올라갔다.
“흐, 꼭 물건이어야 할 필욘 없잖아?”
“언니!!”
사쿠라가 대답하며 입술을 할짝대는데, 옆에 있던 얼굴 가리개를 한 여인이 버럭 소릴 질렀다. 그에 사쿠라는 움찔하더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우며 원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귀청 떨어지겠다. 장난도 못 쳐? 참나.”
“그런 장난 좀 치지 마세요! 진심은 그렇지 않으면서···. 왜 자꾸.”
여인이 안타깝다는 듯 목소리를 줄여가며 말하자, 사쿠라는 흥 소리를 내며 시선을 옮겨버렸다.
“진심? 그게 뭔데? 너도 잘 기억해 둬. 인간이란 것들은 조금만 잘해줘도 기어올라 머리 꼭대기에 서려 하지. 그러다 자기 뜻대로 안 되면 뒤통수나 쳐대고. 그러니깐 함부로 진심이란 걸 보이지 마. 결국 아픈 건 너니까.”
사쿠라가 어느덧 태도를 바꾸며 진심이 섞인 조언을 건네자, 여인의 눈빛에 걱정이 스며들었다.
“언니···. 그럼 여긴 왜 오신 건데요. 그 사람도 결국 언니가 혐오하는 사람···. 이잖아요.”
“여기? 흐, 최 수사는 다르지. 그는 내가 모든 걸 포기한 절망의 순간에서 꺼내줬으니까, 그러니 상관없어. 뒤통수를 맞는다고 해도 웃어넘길 수 있어. 한 번쯤은 말이야.”
“......언니···.”
그때, 조금 떨어진 성인봉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그 모습에 사쿠라를 시작으로 모든 이들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허공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다만 청명은 그들을 바로 쫓지 못하고 비행 법기를 꺼내 들고 있었다.
“아 미치겠네. 죄다 결단기면 우린 어쩌라고···. 후유···. 우리도 가자, 애들아.”
청명의 뒤엔 청명보다 더 안색이 어두워진 도적 부하들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서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