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84화 (84/408)
  • # 84 < 청룡가 (3) >

    “박가훈 수사!!”

    한 명이 갑작스레 도주하자 나머지도 움찔하며 쇄도하던 속도가 살짝 줄었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

    여공천을 시작으로 나머지 두 사람도 이를 악물며 각각의 법기를 발출했다.

    여공천에게선 금은색으로 만들어진 쇠사슬 두 개가 쏘아져 나왔고, 결단기 수사들은 각각 기다란 장도와 톱날이 박힌 륜을 던졌다.

    쇠사슬 법기는 공격뿐이 아닌 구속기의 기능도 있었기에, 여공천이 가장 자주 사용하는 수법.

    그 뒤를 따르는 기다란 장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푸른빛이 강해지며 무엇이든 절삭 해버릴 것 같은 기운을 내비쳤고, 톱날이 박힌 륜은 닿는 것은 모조리 갈아버릴 것처럼 미친 속도로 회전한 채 날아갔다.

    “여 가주의 인망이 그리 두텁지는 않았었나 봅니다.”

    준혁은 빠르게 멀어져가는 도주자를 보고는 짧게 수결을 맺은 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순간 분광소가 준혁 앞에 재소환되며 수십 자루로 순식간에 증식했다. 그리고 증식과 함께 빛살처럼 쏘아져 날아갔다.

    풍둔술을 사용해 당장 잡아 오는 일은 여반장이었지만, 어차피 여공천의 하수인을 자처하던 졸개중 하나일 뿐.

    그리고 동시에 준혁의 손바닥에서 빠져나온 식검은 눈 깜짝할 사이에 머리 위로 치솟으며 인지경을 삼켜버렸다.

    파앙-

    그 순간 준혁은 온몸에 영력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는 걸 느끼며 속으로 식검과 인지경의 조합에 감탄하고 말았다.

    ‘원영기에 오르니, 또 다르구나.’

    하지만 감탄도 잠시, 어느덧 눈앞까지 다가온 공격에 싸늘하게 웃으며 주먹을 앞으로 내질렀다.

    쾅!

    주먹이 내질러진 순간, 주먹 주위로 달빛이 터져 나오며 눈앞을 하얗게 물들였다.

    동시에 빛들이 뭉친 구체가 생겨나며 여공천의 쇠사슬을 막아섰고, 구체가 터져 나오며 발생한 빛무리가 옆으로 퍼져나가 장도와 륜까지 막아섰다.

    까강-

    차르르르-

    두 결단기 수사는 공격이 막힌 순간, 자신들의 법기도 빼앗길까 봐, 빠르게 조종해 법기를 불러들였다.

    다만 여중천은 신속하게 수결을 맺으며 쇠사슬을 회전시켰다. 동시에 부적 두 장을 꺼내 날려 보내자 쇠사슬에 서리가 생겨나더니 어느덧 금은빛을 띠던 쇠사슬이 시리도록 차가운 한기를 동반하며 푸른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 순간 여공천이 재빨리 수결을 바꾸자, 쇠사슬이 뱀처럼 움직였다.

    그리고 그 한 수는 기가 막히게 먹혀들어 가, 준혁이 만들어낸 구체들을 벗어나더니, 준혁의 온몸을 순식간에 휘감아 버렸다.

    “아무리 좋은 보검을 들고 있다 한들! 어린아이에게 쥐여주면 어디다 쓰겠느냐!”

    가진 힘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고 준혁을 우롱하는 여공천.

    “멈추지들 마시오! 틈을 주지 않는 것이 중요하오! 내가 단단히 잡고 있을 동안 저자를, 이게 무슨!”

    자신의 한 수가 먹혔다는 생각에, 다른 결단기 수사들을 재촉하던 여공천은 바로 다음에 벌어지는 일에 두 눈을 부릅떠야 했다.

    상급 법기중에서도 구속기능으로 나름 최고등급이라 여겼던 자신의 쇠사슬이, 몸에 붙은 날파리라도 되는 듯 손쉽게 뜯겨 나가고 있었던 것.

    투툭- 툭-

    그리고 마치 지푸라기라도 되는 것처럼 툭툭 끊어지며 영기가 흩어지고 있었다.

    +++

    식검과 인지경이 공명을 일으킨 순간,

    정확히는 그전부터 세 사람을 압도할 수 있었던 준혁이 그렇게 하지 않은 건, 압도적 우위와 함께 적들에게 절망감을 심어주기 위한 것.

    달의 정기에 비하면 미온수도 되지 않을 한기. 그런 차가운 기운을 머금은 쇠사슬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 웬만한 한기나 음기는 월광지력을 이겨내고 자신에게 영향을 줄 수 없었던 것.

    다만 그것이 온몸을 옥죄자 준혁은 속으로 자신을 크게 나무랐다.

    ‘내가 또 수행에 잡아먹히고 있었구나···. 어떠한 경우라도 최선을 다하고 방심하지 말자고 다짐한 것이 언제인데. 또 이렇게 우쭐해 있다니. 부족하다 부족해.’

    오래전 적마를 상대할 때의 감정이 떠오르며 준혁은 스스로 부끄러운 듯한 감정이 들었다.

    내심 원영기에 올랐기에 이 넓은 지구에서도 8번째 강자가 되었다는 자부심과 식검과 인지경을 사용하면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감.

    그리고 앞으로도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는 기대감.

    그런 것들이 뭉쳐 어느새 자신을 자만하게 만들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화신을 넘고, 신선이 된다면 그땐 마음 수양이 다를까? 아니다. 그런 수양을 지녀야 다음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거겠지···.’

    전투가 진행 중인 극도로 짧은 순간, 준혁은 자기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어쩌면 이 깨달음마저도 상대방의 실력을 얕잡아 보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것.

    그것마저 깨달은 준혁은 찬물로 정신을 일깨운 것 같은 느낌에 전율했다.

    ‘나는 아직 부족하다. 원영기? 원영기를 넘어 완영, 연형, 화신기에 이른다 해도 마음 수양이 따르지 못하면 모든 게 의미 없는 것. 잊지 말자. 오늘의 다짐을.’

    기나긴 수행의 시간에서 이제 겨우 원영기일 뿐인데도 이럴진대, 만약 수천 년, 수만 년을 살아간다면 과연 어떨까?

    ‘몸이 단단해진 만큼, 마음이 따라야 한다. 오늘 나의 행동은 자신이 아닌 자만일 뿐임을 기억하자.’

    오늘 준혁이 깨달은 자기반성은 천년화를 이용해 운이 좋게 원영기에 오른 것보다 더한 기연이라 할 수 있었다.

    자고로 심기체(心氣體)가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면 언제나 심마(心魔)라는 괴물에게 잡아먹힐 수 있는 것.

    그렇게 준혁은 다시 한번 진일보했다.

    파앙-

    그리고 깨달음을 얻은 순간, 준혁의 몸 주위로 영기파동이 터져나가며 눈빛이 변했다.

    어느덧 몸을 구속한 쇠사슬들을 잡아떼며 처음의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대로 해봅시다!”

    마음가짐이 바뀐 준혁은 즉시 월광지력을 온몸으로 뿜어내며 땅을 박찼다. 원격으로 무구를 조종하는 것보단, 강체공의 특징인 근접전을 살리려는 것.

    그리고 준혁이 움직인 순간, 그의 등 뒤로 적마도가 나타나며 붉은 광채를 흩날렸다.

    팟-

    땅을 박찬 순간 여공천의 오른쪽에 위치한 결단기 수사 등 뒤에 나타난 준혁이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가벼운 손놀림과 다르게 그 안에 담긴 거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 온몸을 에일듯한 한기가 몰아쳤고, 동시에 상대방의 움직임을 굼뜨게 만들었다.

    결단기 수사가 월광지력에 노출되며 몸놀림이 느려지자, 준혁은 주먹에서 하얀 달빛으로 빛나는 칼날들을 만들어 그의 단전을 가격했다.

    퍽-

    “커억-”

    단 한 수만에 몸이 경직되며 온몸이 얼어붙은 결단기 초기 수사.

    준혁은 지체없이 단전 앞에 있던 손을 그대로 들어 올리며 상대의 목을 잡아채 땅으로 처박아버렸다.

    쾅!

    그리곤 직후 목에서 손을 떼 잠시 들어 올리다가 다시 주먹을 내려쳤다.

    쾅!

    극히 짧은 순간 결단기 초기 수사 하나를 간단히 처리해 버린 준혁은 기감 안에 잡히는 나머지 두 사람의 위치를 파악하고는 바로 몸을 일으키며 쏘아져 나가려 했다.

    그 순간.

    “여 가주! 난 안 되겠소이다!!”

    여공천을 제외한 결단기 한 명이 급히 몸을 돌리더니 공간대에서 탈출용 비행 법기를 꺼내 발동시켰다.

    순간 법기의 끝부분이 터져나가며 상대방은 엄청난 속도로 허공으로 쏘아졌다.

    그 모습에 여공천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지고 있는데.

    파앗-

    준혁은 바로 인지경의 기운을 극대로 끌어올리며 풍둔술을 발동해 위로 솟구쳤다.

    그리고 정확히 열 호흡 만에, 상대의 등 뒤까지 쫓아간 후, 적마도를 이용해 공간을 뛰어넘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설마 탈출용 비행법기까지 따라잡을 거라 예상하진 못했는지, 상대방은 준혁이 앞에 나타난 순간 목숨을 구걸했다.

    툭-

    하지만 그것이 그가 남긴 마지막 유언이었다.

    그때 준혁의 기감으로 아주 멀리서 분광소의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는 수사의 움직임 느껴졌다.

    ‘역시 자만이었구나.’

    결단기 초기 수사는 수십 개로 증식한 분광소로 시간을 충분히 끌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오판이었던 것.

    준혁은 쓰게 웃으며 입에서 정혈 한 방울을 뱉어냈다. 그리고 수결을 맺은 순간.

    파앗-

    붉은 핏방울이 준혁을 삼키며 허공에서 사라져 버렸다.

    +++

    처음부터 도망간 수사를 포함해, 세 결단기를 처리한 준혁은 빠르게 돌아와 여공천 앞에 내려섰다.

    “정말 무시무시하구나···. 어찌 이 짧은 시간에···. 인지경은 도대체 어떤 보물이란 말인가.”

    탄식 가득한 여공천의 말에 준혁은 대답 없이 땅을 박찼다.

    여공천은 자포자기한 얼굴과는 다르게, 아직 포기하지 않았는지 공간대에서 노란 벽돌 하나를 꺼내 준혁에게 쏘아 보냈다.

    벽돌은 여공천의 손에서 벗어나자마자 엄청난 크기로 부피를 키우며 준혁을 깔아뭉갤 것처럼 다가왔다.

    하지만 이미 자만하지 않기로 결심한 준혁은 법기가 제대로 발동하기도 전, 주먹 끝에 월광지력을 모아 내질렀다.

    콰앙- 퍼걱-

    준혁의 한 수에 노란 법기는 반쪽으로 쪼개지며 다시 쪼그라들었고, 그 모습에 여공천의 얼굴엔 낙담이 드리워졌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몸이 맞붙은 순간.

    푸욱-

    준혁은 손날을 세운 채 그대로 여공천의 심장을 뚫어버렸다.

    “으윽···. 원통···. 내가 먼저 찾았더라면···.”

    “죽는 순간까지 대단합니다.”

    “다음 생엔···. 꼭. 화신을 넘어···. 진···.”

    띄엄띄엄 말을 내뱉던 여공천은 결국 심장이 뚫린 상태 그대로 우두커니 서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준혁은 그런 그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짧게 혀를 차며 돌아섰다.

    피붙이에 대해 단 한마디 말도 없다니.

    “비정하구나···.”

    +++

    여공천과 결단기 수사들이 깡그리 죽자, 청룡가 수사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준혁은 그런 그들을 한데 모았다.

    “여동현은 어디 있지?”

    준혁의 질문에 서로 눈치만 보던 것도 잠시. 축기기 후기 수사 하나가 빠릿하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별채 뒤편에 있는 지하 감옥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감옥? 왜지?”

    “저 그게···. 서령 아가씨께서 빙제소에서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걸 목격하시고도···. 방치했단 이유로.”

    축기기 수사의 설명이 끝나자 준혁은 짧게 명령했다.

    “데려오라. 그리고 새로운 가주를 세울 테니 청룡가의 모든 인원을 이곳으로 모아라.”

    준혁은 손짓으로 몇몇 축기기 수사들을 지목한 뒤, 전령의 역할을 맡기고 여동현이 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여동현은 예전 그대로 깔끔한 모습으로 준혁 앞에 끌려 나왔다.

    수감생활이라고는 하나, 지위 때문인지 조금 꼬질꼬질해진 것 빼고는 상태가 매우 양호했다.

    여동현은 조금 높은 단상 위에 서 있는 준혁을 올려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정녕···. 그때 그···.”

    “오랜만입니다. 대공자.”

    한참을 대답 없이 멍하게 준혁의 모습을 바라보던 여동현은 잠시 후 무언가 깨달은 듯 급하게 이마를 바닥에 붙였다.

    “선배님을 뵙습니다···.”

    여동현이 고개를 숙이자 준혁은 진법 깃발 세 개를 꺼내 주위에 뿌리며 수결을 맺었다.

    공터 가득 모인 다른 이들이 대화를 듣지 못하게 방음벽을 친 것.

    “고개 드십시오. 그렇게 대화가 가능하겠습니까?”

    청룡가의 수장을 죽이고서도 별 감흥 없는 준혁의 목소리에 여동현은 잔뜩 긴장한 채 고개를 들었다.

    “내 듣기로 대공자께서 서령 아가씨를 많이 아끼셨다고요?”

    “...오라비 아닙니까···. 당연히.”

    “흥. 피붙이를 죽이라 명하는 자도 있거늘, 그게 대수랍니까?”

    준혁의 말에 여동현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가주께서도 보물에 대한 욕심이 앞서 그리 말씀하신 거지. 진심은 아니었을 겁니다.”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여동현을 보며 준혁은 잠시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사실 여동현의 말대로 그것이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아직 듣지 못하셨군요. 서령 아가씨는 이미 하늘로 돌아갔습니다.”

    준혁의 말에 청천벽력이라도 떨어진 듯. 여동현의 안색이 허옇게 변했다.

    “설마!”

    “여공천의 명을 받은 여중연이 그녀를 해하였습니다.”

    “어찌···. 어찌 그런 참혹한 짓을!”

    결국 여동현은 눈을 질끈 감더니 굵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여동현이 진정하는 기미를 보이자, 준혁은 그를 감옥에서 끄집어온 본론을 꺼냈다.

    “대공자, 청룡패의 유효기간은 얼마입니까?”

    준혁의 뜻을 파악하지 못했는지, 여동현은 무슨 뜻이냐는 듯 대답했다.

    “그게 무슨···. 청룡패에 유효기간이 어딨겠습니까···.”

    “그렇군요. 그렇다면 나는 서령 아가씨께 받은 청룡패의 지위를 이용해 새로운 가주를 세우겠습니다.”

    당연히 청룡가의 빈 가주 자리를 준혁이 차지할 거라 여기고 있었기에 여동현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수많은 가솔들을 살려두었겠는가.

    하지만 그런 여동현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이 준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오늘부로···.”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