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83화 (83/408)

# 83 < 청룡가 (2) >

모두가 준혁의 무위에 말을 잃고 있을 때, 바닥에서 꿈틀대던 가라온이 힘겹게 말을 꺼냈다.

“수, 수사···. 저는 청룡, 컥. 청룡가와 무관합니다. 도율님의 제자인 가라온이라 합니다. 부디 관용을···.”

가라온이라는 이름에 준혁의 시선이 옮겨졌다.

“누군가 했더니, 강만학 스승의 사형이셨군요. 사백이라 불러드릴까요?”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설악산도 한번 방문할 계획이었던 준혁은 가라온을 바로 처리하지 않고 유보하기로 마음먹었다가, 무언가가 떠올라 입을 열었다.

“가 수사. 당신은 강만학이 ‘명왕의 시험’이란 이름으로 산수들을 끌어모아 그중 재능있는 자들을 선별해 인체실험을 진행 중인 걸 알고 있었습니까?”

준혁의 질문에 가라온의 몸이 흠칫 떨었다. 그걸 본 준혁은 답변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알고 있었군요. 혹시 수사도?”

“... 그, 그것이···. 강 사제의 수행이 너무 빨리 오르는 것 같아 알아보았지만, 직접 시행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에 관련한 자료는 전부 가지고 있습니다. 수사께서 원하신다면 전부 바칠 테니 목.”

뎅강- 툭-

혹시나 재고의 여지가 있나 하고 살려두려 했던 마음이 싹 바뀌어 버렸다. 가라온은 말을 채 끝맺지 못하고 사늘하게 식어가야 했다.

“결국 동참한 것과 무엇이 다르더냐. 모르면 몰랐을까···. 너희 도율의 제자 놈들은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

준혁이 시선을 앞으로 하며 손을 살짝 젓자, 가라온의 공간대만 회수돼 준혁의 공간대 속으로 쏘옥 들어가고, 사체는 붕 떠서 담장에 처박혀 버렸다.

가라온을 날려버린 준혁은 화령과 나설헌에게 물러나 있으라 말한 뒤, 백호를 품에서 꺼내려다 말았다. 그전부터 준혁의 품속에 머물길 좋아했지만, 원영기에 오른 후엔 그 정도가 더 심해진 것.

준혁은 영기를 내뿜어 새끼 백호를 보호하고는 발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아갔다.

이미 전의를 상실했는지, 여공천을 필두로 누구도 움직이질 않았다.

어느덧 연무장 겸 공터의 중심으로 이동해 복잡한 얼굴을 한 여공천을 불렀다.

“여 가주. 가만히 서서 무얼 하십니까?”

“...... 정녕 내가 아는 그자가 맞단 말···. 입니까?”

어느새 존대로 바뀐 여공천의 말투에 준혁은 피식 웃더니, 눈짓으로 머리 위를 가리켰다.

그러자 허공이 갈라지며 준혁의 머리 위로 인지경이 나타나 빙글빙글 돌았다.

“여 가주가 그토록 찾던 인지경입니다. 가져가시지요.”

당연하게도 여공천은 인지경을 보고도 마른침만 삼킬 뿐이었다.

지금 여공천의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

자신이 알던 준혁의 수행은 잘해줘야 결단기 초기, 대략 12년 전쯤에 결단을 맺는 데 실패했단 정보를 입수했기에, 정말 높게 쳐줘야 최근에 결단을 맺었을 거라 판단했다.

사실 그것도 일반적인 경우와 비교하자면 정말 말도 안 되는 확률. 아니,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비경 입구에서 결단기 초기 호법이 쉽게 죽어 나간 건 갑작스러운 기습 때문일 거라 의심했고, 여서령을 구해갈 땐 통유대문의 힘을 빌렸을 거로 의심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결단기 중기 수사인 가라온이 반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죽어 나가자 모든 예상이 산산조각 나는 걸 느꼈다.

결단기 후기 끝자락에 다다르고 있던 여공천 역시 가라온을 힘들지 않게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여기긴 했지만, 이토록 일방적이진 못할 것 같았으니까.

그렇다고 도망갈 수도 없었다.

자신의 근거지인 이곳을 벗어나 도망간다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주위에서 준혁의 무위에 겁을 먹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다른 수사들 역시 가라온처럼 바로 도망가지 못한 이유는 같았을 것이다.

여공천의 눈이 심하게 흔들리며 말이 없자, 준혁은 무심히 말을 꺼냈다.

“식솔들의 생명을 손안에 쥐어 넣고 주물럭대던 그 사람은 어디에 갔습니까?”

“......”

피식-

처음으로 입가가 움직이며 비웃음이 섞인 헛웃음을 내뱉은 준혁이 말을 이었다.

“여 가주, 살고 싶으십니까? 그럼 오늘 내 말을 정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모든 식솔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하고, 죄를 뉘우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습니다. 단 앞으로 수도계는 떠나야겠지만.”

수도계를 떠나게 하겠다는 말은 수행을 폐하겠다는 뜻.

즉 단(丹)을 망가트려 다시는 수행을 쌓을 수 없는 몸을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준혁의 말에 실력 고하를 재며 망설이고 있던 여공천이 폭발했다.

여기서도 침묵한다면, 지금껏 이룩한 자신의 권위가 무너질 수도 있는 일.

“망발이 지나치구나!! 무슨 수로 이토록 빨리 수행을 올렸을지는 모르나! 그게 정상적인 방법일 리는 없는 법!! 네놈이 익힌 사특한 수법을 밝혀내고 청룡가의 위신을 다시 세우겠다!!”

힘껏 말을 내뱉은 여공천은 이내 주위를 둘러보며 다시 외쳤다.

“다들 겁먹고 있는 것이냐?! 저자가 약속대로 모두를 살려줄 거라 생각한 거라면 크나큰 착오다! 청룡가의 재산을 탐해 이곳에 온 저놈이 과연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여공천은 말을 내뱉은 직후, 뒤에 시립 해 있던 세 명의 결단기 초기 수사들을 노려보며 작게 소곤거렸다.

“다른 이들은 살아도, 자네들은 살려줄 리 없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세 명의 결단기 수사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자, 만족한 얼굴로 돌아본 여공천이 공간대에서 빨간 단약을 하나 꺼내먹었다.

그리고는 빠르게 수결을 맺으며 황금 깃이 달린 깃발 수십 개를 주변으로 날려 보냈다.

“네놈의 오만을 바로잡아 주마!”

여공천의 행동에 뒤에 서 있던 수사들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빨간 단약을 꺼내 삼켰다.

준혁이 그런 그들의 행태를 보며 가만히 서 있자, 걱정되는지 나설헌이 말을 걸었다.

“선배님. 저들이 준비하기 전에···.”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아니고···. 아마 저들이 방금 먹은 단약은 저희 조부께서 제작한 폭혈단(爆穴丹)일 거예요.”

궁금하단 표정으로 준혁이 말없이 있자, 나설헌이 설명을 추가했다.

“짧은 순간 기혈을 폭발시켜 수행을 급증시키는 효과가 있어요. 대신 한번 먹고 나면 몇 달간 수행이 돌아오지 않아 요양을 해야 하지만···.”

“조부께서 재밌는 물건을 만드셨군요.”

준혁이 별것 아니란 듯 말하자, 나설헌이 한발 다가오며 전음을 사용했다.

-사실 폭혈단은 실패작이고, 폭혈정단(爆穴正丹)이라는 물건이 진짜예요. 단지 정단이 세력 간의 균형을 무너트릴 수도 있다 여겨, 조부께서 꼭꼭 숨겨두셨거든요.

“왜 그런 사실을 알려주시는 겁니까?”

-그, 그건···.

“나중에 따로 얘기를 나누도록 하죠.”

“네. 선배님.”

준혁은 자신이 원영기에 오른 후 태도가 많이 바뀐 나설헌을 보며 크게 개의치 않다가, 조금 전의 행동으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녀의 조부가 수도계에서도 꽤 유명한 것과 엄청난 단약을 만들 수 있다는 것.

그 두 가지만 조합해 생각해도 그녀의 의중이 쉽게 예측이 갔다.

‘내가 조부의 뒷배가 되길 바라는 것이겠지.’

만약 정말 대단한 연단사라면 한 번쯤 만나볼 의향이 있었기에 그녀의 관심이 나쁘진 않았다.

거기다 나설헌은 아무 조건 없이 여서령을 도와줬고, 그녀가 죽은 뒤에도 계속해 의리를 지켜주었다.

그것만 하더라도 그녀에 대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기에 준혁은 나중을 생각하며 가볍게 웃어주었다.

그러는 사이 여공천을 필두로 한 결단기 수사들은 준비가 끝났는지 각자의 법기를 꺼내 들며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다만 청룡가 축기기급 이하는 그 누구도 준혁에게 대척할 엄두도 못 낸 채 가만히 있었다.

여공천은 그 모습을 보고 그들이 준혁의 압도적인 전투력에 의지를 상실했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백호 혈맥의 힘에 당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나마 결단기급은 디버프 효과로 넘어갔지만, 축기기 이하급은 현재 오금이 저려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

그리고 그건 준혁이 여서령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혈맥의 힘을 최대한 강하게 발출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

전투의 시작은 여공천이었다.

여공천이 꺼내든 시커먼 거대 낫이 준혁을 단번에 베어버릴 듯 날아왔고, 그 뒤로 세 명의 결단기가 날린 장도와 륜, 그리고 푸른 수실이 붙어있는 단검 무리가 사방을 점하며 날아왔다.

그들 넷은 눈가의 실핏줄이 터지며 충혈된 눈을 하고 있었고, 그중 여공천은 옷 밖으로 드러난 손에까지 실핏줄이 드문드문 비치고 있었다.

인지경을 사용할 때처럼 대놓고 수행이 급증하진 않았지만, 그들 넷의 호흡을 통해 주위 영기가 급속하게 소모되어 사라지는 게 준혁의 눈엔 보였다.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군.’

여공천을 비롯한 결단기 수사들이 만반의 준비를 하게 내버려 둔 이유.

준혁은 여공천을 편하게 처리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사술이란 말도 나오지 못하게 절망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고, 원영기에 오른 후 첫 개전이라 깊은 인상을 남기려는 의도도 있었다.

마음을 다잡고 있는 사이, 어느덧 여공천의 거대 낫이 사선으로 베어져 오며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쉬에엑-

동시에 준혁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금빛 기둥이 치솟아 올라가더니 거대한 반원의 새장 같은 그물을 만들어냈다.

그물 안은 영기의 흐름이 무언가에 구속된 듯 느리게 흘렀는데, 준혁 역시 자비에에게서 받은 진법서에서 비슷한 걸 익혔기에 단숨에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꽤 훌륭합니다. 광쇄진(光鎖陳)이라니, 허나!”

쾅!

준혁이 비웃음을 흘리며 강하게 진각을 밟자, 발끝에서 시작된 영기파동이 땅을 파고들어 주변으로 퍼져갔다.

그와 동시에 공중으로 치솟아, 전신에 광신체령투선공을 운용하며 손안에 달빛이 머물게 만들었다.

탁-

그리고는 준혁이 하얀빛으로 물든 손을 내밀자, 모든 걸 갈라 버릴 것처럼 날아오던 거대 낫이, 어처구니없게도 원래 준혁의 것이었던 것처럼 그의 손에 얌전히 안착해버렸다.

“이 무슨!”

곧바로 다음 공격을 이어가려던 여공천은 두 눈을 부릅뜨고 멈춰 섰고, 나머지 공격들은 준혁 바로 앞까지 당도했다.

그 순간 인지경이 빛기둥을 내리며, 준혁의 몸 주위로 하얀 보호막이 생겨나 모든 공격을 차단해 버렸다.

그리고 새장처럼 주위를 덮어가던 금빛 그물은 점점 옅어지더니 스르륵 사라졌다.

“이게 다입니까?”

준혁이 허공에서 하얀빛을 내뿜으며 가볍게 냉소하자, 모두가 말을 잃고 침묵에 휩싸였다.

다만, 한순간에 지나간 엄청난 공방 때문에 말을 잃은 이들과 달리, 여공천은 다른 의미로 말을 잃고 있었다.

준혁이 광신체령투선공을 사용하면서 터져 나온 기운. 지금까지 어떤 수행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게 준혁이었다면, 이번엔 전혀 반대 상황.

기운이 너무나 강력해, 자기 수준에서 판별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말하는 건 단 한 가지.

“서, 설마···. 원영을 응결했···. 습니까?”

여공천의 한마디가 불러온 파장은 엄청났다.

뒤에 선 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 세 명의 결단기.

“가주님. 그게 무슨···. 저자가 원영기란 말입니까?”

“여 가주님.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아쉽게도 결단기 초기 세 명은 준혁의 능력을 알아볼 눈조차 없었다.

넋을 잃은 여공천의 모습을 보며 준혁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왜? 그럼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빌 생각입니까?”

준혁의 말에 여공천은 심각한 얼굴로 공간대에서 빨간 단약 세 알을 꺼내 삼켰다.

그러자 결단기 한 명이 급히 그를 말렸다.

“여 가주! 총 네 알이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여공천은 준혁을 직시하며 천천히 수결을 맺었다.

“인지경이 그 정도의 보물이었다니···. 내 수년간 노력해도 닿지 못했던 그곳을···. 다들 잘 들으시오. 아무리 원영기 초기라 하나 폭혈단으로 수행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려 합심한다면 승산이 없지 않소. 만약 부작용으로 수행이 떨어진다면 그 모든 보상을 할 테니 나를 따라주면 좋겠소. 안 그러면 어차피 우린 다 죽는 겁니다.”

말을 마친 여공천이 결연한 표정으로 수결을 마쳤다.

그순간 여공천이 입고 있던 상의가 강대한 기운에 터져나갔고, 그의 피부가 울룩불룩 움직이며 수행이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인지경의 절반쯤 되는 효과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여공천의 행동에 잠시 인상을 쓰며 고민하던 세 결단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공간대에서 각자의 폭혈단을 꺼내 먹었다.

그리고 네 명의 기운이 폭증한 순간!

여공천과 두 결단기 수사는 준혁을 향해 맹렬하게 쇄도했고, 나머지 한 명은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치솟아 사라졌다.

반대 방향으로 날아간 자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피부에 아무런 변화도 보이질 않았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