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 청룡가 (1) >
이동하는 중 화령은 아무 말이 없었다. 궁금한 것이 있을 법도 한데,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설마 여 가주가 찾던 그 보물 때문인가? 범인을 원영기로 만들어주는 보물이라고?’
등 뒤에서 화령이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는 동안 준혁 역시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가 떠올리고 있는 건 산들바람. 정확히는 산들바람이 사용했던 천년화의 힘.
‘분명 나완 달랐다. 처음엔 천년수와 천년화의 차이라고 생각했지만, 둘은 같은 힘.’
순수한 달의 정기를 사용할 수 있는 준혁과 달리, 산들바람이 사용하는 힘은 달의 정기의 열화 판 느낌이 강했던 것.
솔직히 말하자면 열화 판 보다 더 수준이 낮았다. 설토족 수사였던 뢰비의 음한기보다 살짝 우위에 있는 정도였지, 월광지력과 동류라고 하기엔 너무나 부족했다.
고민에 빠져있던 준혁이 내린 결론은 결국 하나.
‘다른 원영기의 도움. 그것 차이야. 극음에 가까운 달의 정기를 이겨내기 위해 원영기가 만들어내는 극양의 기운으로 몸을 보호해 주는 것. 그게 차이를 만들어 낸 거야.’
애초에 천년화는 남의 도움을 받아 편하게 원영기에 올라야 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 달의 정기가 가진 극음의 기운을 이겨내야 했던 것.
아마 지금껏 영수족들이 그렇게 하지 않은 건 십중팔구는 천년화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 나갔기 때문일 것이었다.
준혁은 생각에 잠기다가 여전히 얼음 구슬을 가지고 노는 원영을 들여보았다. 그리곤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순수하게 행복해 보이는구나.’
원영은 티 없이 맑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긴 이제 태어났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그러는 사이 세 사람은 서울 상공에 다다르고 있었고, 준혁의 품 안에선 새끼 백호가 아무 걱정 없이 기분 좋은 듯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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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따란 대전 안.
가장 상석엔 여공천이 앉아있었고, 그 앞으론 수많은 인물이 도열한 채 서 있었다.
“그래서 아직이라고?”
차가운 여공천의 말에 자리한 인물 중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도대체 3년간 무얼 했단 말이냐!! 그 빌어먹을 놈이 두 호법을 보란 듯이 죽이고, 일곱 문파의 포위망까지 뚫고 달아났거늘 지금까지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여공천의 언성이 높아지자 대전엔 긴장감이 맴돌았다. 청룡가에서 그는 무소불위의 정점. 말 한마디에 모든 이들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때, 왼쪽 구석진 자리에 앉아있던 사내가 말문을 열었다.
“여 가주. 두 호법의 일은 안타깝긴 하나, 그게 어디 그놈 혼자만의 짓입니까? 통유대문의 손녀도 끼어들었다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통유대문에 연락을 해놓은 지 오래입니다. 대답을 회피하는 건지 아무 말도 없더군요. 그나저나 가 수사. 설악산을 계속 비워두고 이곳에만 있어도 되겠습니까?”
여공천의 질문에 도율의 둘째 제자인 가라온이 입술을 이죽거리며 차게 웃었다.
“그놈이 비경 입구에서 청룡가 수사들을 참살할 때, 제 제자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스승의 도리로 제자들의 복수를 할 때까지 다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가라온의 대답에 싸늘하게 웃어 보인 여공천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동맹이라고는 하나 그다지 가깝지도 않은 가라온이 청룡가에 머무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준혁의 행방을 누구보다 빨리 알고 싶다는 것 하나뿐.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누구보다 여공천은 잘 알고 있었다.
‘감히 내 인지경에 욕심을 내? 어림도 없다. 헌데 가심악 이자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3년 전 비경 입구에서 최준혁이 나타나고 청룡가의 호법을 비롯한 축기기 수사들과 가라온의 제자들까지 몰살을 당했었다.
목격자들에 의하면 가심악은 별 피해 없이 살아남았다고 했거늘, 그날 이후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 찾을 수가 없었다.
‘설마 겁을 먹고 도망친 건 아닐 테고···. 그렇게 말없이 떠날 위인은 아닌데···.’
가심악은 본래 청룡가 인물이 아니었기에 언제든 떠날 수 있다고는 하나, 재물 욕심이 많은 그가 그동안 성과에 대한 대가도 받지 않고 떠났다는 건 이상한 일.
분명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콰쾅!
그때 대전 밖에서 미약한 폭발음 같은 것이 들렸다.
건물 전체에 소음을 방지하는 진법이 펼쳐져 있다는걸 감안한다면 꽤나 큰 폭발음에 속하는 것.
다음 주제로 넘어가려던 여공천은 조금 전 소리가 신경 쓰이는지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명령했다.
“밖에 무슨 일인지 알아보거라.”
하지만 여공천의 명령에 누군가 움직이기도 전. 굳게 닫혀있던 대전이 벌컥 열리며, 정문을 지키고 있던 방계 수사 하나가 얼굴이 창백해진 채 모습을 드러냈다.
여공천의 눈살이 찌푸려지고, 대전에 모여있던 모든 이들이 고개를 돌릴 때, 그자의 입에서 상상도 못 했던 말이 터져 나왔다.
“가, 가주님!! 최, 최준혁! 최준혁이 나타났습니다.!! 두, 두 가지를 받아 가겠답니다!”
방계 수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여공천과 가라온이 동시에 몸을 일으켰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대전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수많은 청룡가 수사들도 곧장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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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자락에 도착한 준혁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청룡가를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본관 앞 널찍한 연무장으로 바로 내려갈 거란 다른 이들의 예상과는 달리, 준혁은 담장 밖, 대문 앞에 내려섰다.
그동안 수많은 고민을 거듭했던 준혁은 자신을 절제하고 여서령이 원하는 대로 복수를 진행하기로 결심했다.
다만 그럼에도 상대방이 안면몰수하고 나온다면 어떠한 선처도 베풀 생각은 없었다.
준혁과 화령 그리고 나설헌이 갑작스레 대문 앞에 내려서자, 문을 지키고 있던 연기기 수사 두 명이 화들짝 놀라며 한 손에 쥐고 있던 하급 법기를 위협하듯 내밀었다.
“누, 누구냐! 여긴 청룡ㄱ···. 최, 최준혁!”
위협적으로 소리를 내지르던 문지기는 준혁의 얼굴을 단번에 알아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한걸음 물러났다.
그 옆에 서 있던 또 다른 문지기도 얼굴색이 새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들어가 너희 주인에게 일러라.”
여전히 겁에 질린 표정으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문지기들을 차가운 눈으로 직시하며 준혁이 말을 이었다.
“두 가지를 받아내기 위해 최준혁이 왔다고.”
두 문지기는 준혁의 말이 끝나도, 겁을 먹은 건지 잔뜩 굳어 경계하는 자세를 풀 줄 몰랐다.
그에 준혁은 살짝 턱짓했고.
콰쾅!
그 순간, 문지기들 뒤에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던 오랜 역사의 청룡가 대문이 산산조각이 나며 터져나갔다.
“어서 가지 않고 뭐 하는 거지?”
그 모습에 문지기 중 하나는 다리가 풀렸는지 그대로 주저앉았고, 다른 한 명은 얼굴이 창백해진 상태로 급히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준혁 일행은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박살 난 대문 잔해를 지나 담장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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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혁이 연무장 겸 마당으로 쓰는 공터를 삼분지 일쯤 지나왔을 때, 여공천을 선두로 수많은 인물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중 결단기급은 몇 없었고, 대부분은 축기기 중기 초기.
몇몇은 연기기 후기들도 끼어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 무리를 제외하고도 곳곳에서 연기기 초기 중기 수준의 하급 수사들이 속속들이 나타났고, 몇몇은 심부름을 하는 일반인들도 끼어있었다.
모두 정문이 박살 나는 소리에 놀라 나온 듯했다.
대전에서 튀어나와 준혁을 확인한 여공천은 순간적으로 입꼬리가 올라가다 원래로 돌아왔다.
“알아서 찾아와 주다니,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제 발로 걸어온 걸 참작해 목숨만은 살려주도록 하마.”
여공천의 말은 개가 짖기라도 한다는 듯, 한 귀로 흘려버린 준혁의 입에서 무덤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 가주, 말은 들으셨습니까?”
여공천은 곧바로 응대 하지 않고 한 손을 살짝 들어 짧게 신호를 보냈다. 그의 신호에 따라 대전에서 나온 수사들이 넓게 포위망을 형성하자, 그제야 말문을 열었다.
“무엇을 말이더냐?”
“나는 오늘, 두 가지를 받아 갈 것입니다.”
준혁의 태도에 여공천이 낮게 코웃음을 치더니 턱을 앞으로 살짝 올렸다.
“아주 기고만장하구나. 그래 말해보거라. 무얼 받아 갈 것이지?”
여공천의 내려다보는 눈빛을 보며, 준혁은 여전히 무덤덤하게 말했다.
표정 변화마저 일절 없었다.
“하나, 여 가주 당신의 목, 둘, 청룡가의 가주위.”
순간, 준혁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변에 잠시 적막이 찾아왔다. 직후 몇몇이 조소를 흘렸고, 여공천은 대놓고 비웃음을 흘렸다.
“뭐라? 내 목과 가주위? 나를 죽이고 서령이를 가주에 앉히겠다 이런 뜻이더냐? 설마 결단기에 오르더니 보이는 게 없는 건가? 아니면 네놈 뒤에 서 있는 통유대문의 손녀를 믿는 것인가?”
평소 차갑고 냉혹했던 여공천은 입가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깨닫고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한데 서령이는 어디 있는 거지? 설마 아직도 네놈 동생을 보호하고 있는 건가?”
여공천의 질문에 준혁의 눈빛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말없이 손만 들어 올린 준혁의 행동에 주위가 소란스러워질 때쯤 여공천이 반문했다.
“...죽었다고?”
“가주께서 여중원과 여중연을 보내 그녀를 죽이라 명해놓고 저에게 묻는 겁니까?”
“흐음···.”
짧은 신음을 끝으로 여공천이 입을 닫자, 주위 청룡가 사람들도 그의 눈치를 보며 말을 아꼈다.
사실이 어쨌든 간에 괜히 여공천이 자리한 곳에서 왈가왈부 대화를 나눌 간담이 청룡가 사람들에겐 없었으니까.
그때 여공천이 손을 들며 신호를 보냈다.
“이딴 낭설로 동요를 일으키고 싶었나 본데? 어림도 없는 일이지! 사실 여부는 네놈을 잡고 알아보겠다!”
그의 신호에 사방으로 포위한 채 서 있던 청룡가 수사들이 동시에 수결을 맺자 준혁을 중심으로 기압이 변하기 시작했다.
기운으로 보아 상대를 압박하는 용도의 진법이 발동하려는 움직임.
하지만 그 순간 준혁이 크게 발돋움하자, 무언가가 생성되려다 파앙- 하고 터져 나가버렸다.
동시에 몇몇 축기기 수사들이 피를 울컥하며 뒷걸음질 쳤다.
“나는 오늘 여 가주 한 명의 목만 벨 것이다! 하지만!! 내 행사를 방해하는 자!! 그 누구도 살려주지 않겠다!”
영기를 가득 담은 준혁의 목소리가 퍼져나가자 청룡가 식솔들이 전부 몸을 떨었다.
“자신의 목숨은 자신이 결정하라! 지금부터 움직이는 자!!”
한 호흡 쉰 후 마저 말을 끝냈다.
“내일 아침을 맞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크아아앙!”
강렬한 백호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며 준혁을 중심으로 반경 100m 정도가 영기 파동에 휩쓸렸다.
파동이 휩쓸고 지나가자 연기기 수사들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축기기급 수사들은 전부 한쪽 무릎을 꿇거나 아예 주저앉아 버렸다.
그나마 일반인들은 다리를 벌벌 떨면서도 간신히 서 있었는데, 그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준혁이 영력을 극도로 세심하게 조종했기 때문이었다.
준혁의 사자후에 모든 병력이 무력화되자, 여공천은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결단기 후기라고 해도, 이 정도 위력은 낼 수 없는 것. 어느새 그 자신의 손끝도 떨리고 있음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그걸 깨달은 자는 여공천뿐이 아니었다.
가라온은 준혁의 사자후가 주변을 휩쓸고 지나간 순간, 바닥을 박차며 하늘로 치솟았다.
하지만 얼마 이동하지도 못하고는 갑작스레 날아온 단검 무리에 도망길이 막혀버렸고.
“이익!”
움직임이 멈춘 순간, 가라온은 사늘한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움직이면, 아침을 볼 수 없다 했을 텐데.”
“아! 아니오! 수사! 내 뜻은 그런 것이 아니 컥!”
준혁은 도망치려던 가라온의 목을 단숨에 잡아채며 다른 손엔 월광지력을 모아 명치를 가격했다.
퍼억-
“커억!”
주먹이 명치에 닿는 순간 하얀 빛무리가 칼날처럼 새어 나오며 가라온의 온몸을 파고들었고, 그 순간 그의 몸은 한기에 침식당해 버렸다.
몸이 얼어붙기 시작하자 가라온이 급하게 수결을 맺으며 반항하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주위로 소환된 분광소가 그런 그의 양 손목을 절단하며 스쳐 지나갔다.
스걱-
온몸이 얼어붙는 충격과 더불어 양 손목까지 날아가자 가라온은 정신이 나간 듯 흰자위가 번뜩거렸다.
그리고 그가 한순간에 무력해지며 의지를 잃는 것 같아지자, 준혁은 단숨에 목숨을 빼앗지 않고 목을 잡은 그대로 지상으로 하강했다.
슈우욱-
쾅!!
가라온을 끌고 처음 자리로 돌아온 준혁이 바닥에 처박은 그의 목을 놔주며 천천히 일어났다.
강한 충격에 생겨났던 먼지가 가라앉자, 처참해진 가라온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여공천과 몇 안 되는 결단기 수사들은 두 눈이 찢어지다 못해 뻘겋게 터져나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마, 말도···. 안돼···. 겨. 결단기 주, 중기 수사를···.”
누군가 모두를 대변하듯 말을 내뱉자.
그에 답하듯 준혁의 목소리가 한 번 더 주변을 울렸다.
“분명 말하지 않았습니까? 움직이는 자. 내일 해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광신체령투선공 덕분인지 목소리는 한층 더 차가워지고 그의 몸 주위로 한기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동행인 화령과 나설헌마저 자신들도 모르게 살짝씩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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