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81화 (81/408)

# 81 < 원영기 (3) >

어느덧 하늘을 가득 채운 영기구름의 마지막 조각까지 소용돌이로 변해 사라졌다.

하늘엔 태양 빛이 가득했고, 상공엔 작은 눈송이조차 없이 그 어느 날보다 깨끗했다.

“이제 어떤 자인지 알 수 있겠군.”

영기구름이 사라진 자리를 보며 제이엘이 혼잣말하자, 나설헌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선배님. 어떤 뜻인지 알 수 있을까요?”

나설헌의 말에 제이엘은 별것 아니란 듯 여전히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법기 현상은 알겠지?”

“그럼요. 법기를 만들 때 사용된 재료와 영기가 상호작용해, 재료의 본질적인 모습이 영기파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요.”

“그래, 영기파동으로 이루어진 본래의 모습. 그리고 그건 법기뿐만이 아니다.”

“네? 그게 무슨···.”

“원영이 만들어질 때, 인간 역시 강대한 영기를 퍼트리며 파동을 일으키고,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그 사람 본연의 기운이 방출되지.”

“맞습니다. 스승님께선 외모는 흐릿했지만, 강인한 여전사의 느낌이 났었습니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제자가 끼어들며 제이엘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그 말을 들은 나설헌은 순간 머릿속에 물음표가 그려졌지만, 집중하는 제이엘의 모습에 더는 묻지 않았다.

그때였다.

화악-

준혁이 있을 거라 의심되는 장소에서 강렬한 영기 파동이 터져 나오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저, 저건···.”

그리고 파동의 중심지인 그곳엔 어느새 거대한 백호 형상이 은은한 푸른빛과 함께 나타났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백호 환영은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흉포한 모습이었는데, 보이는 모습과 달리 풍기는 기운은 전혀 위협적이거나 사납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하고 온화함이 느껴졌다.

그 모습에 제이엘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영수 관련 공법을 익힌 자인가?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아 나쁜 이는 아니군.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포섭···.”

말을 하던 제이엘은 이어진 현상에 경악이 담긴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럴 수가! 이건!”

화악-

제이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백호가 사라진 장소에서 또 한 번의 영기 파동이 터져 나왔고.

그 자리엔 두 눈이 동그란 순진한 꼬마 아이의 환영이 자리하고 있었다.

거대한 꼬마 아이 환영은 백호 환영과 다르게 바로 사라지지 않고,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정확히 제이엘을 주시한 채, 혀를 날름하며 입맛을 다신 후 자취를 감췄다.

꼬마 환영이 기이한 표정을 하며 사라진 순간.

제이엘은 자신에게 경고를 보내는 목소리에 흠칫 떨어야 했다.

-제이엘. 방금 마선기가 느껴졌다. 저자 역시 계약자가 분명하니 조심하길 바란다.

뇌리로 직접 전해오는 소리에 제이엘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

얼음 대지 지하.

원영 응결에 성공한 준혁은 내부를 천천히 관조하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마음대로 안 된다고?’

단(丹) 속에서, 식검으로 의심되는 손톱만 한 검과 얼음 구슬을 가지고 노는 원영은 준혁의 의지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혼자서 재미난 장난이라도 하는 듯 식검을 던졌다 받았다 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구슬을 손 주위로 빙빙 돌리며 놀았다.

결국 한참 동안 원영을 뜻대로 움직여보려 시도한 준혁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는 조용히 움직임을 관찰만 했다.

‘혹시?’

그러다 손바닥 위로 식검을 소환했다.

쑤욱-

식검은 예전처럼 자유롭게 소환되기에 준혁은 다시 원영을 살펴보았다.

‘이런 식이구나.’

단(丹) 속에서 혼자 잘 놀고 있던 원영은 얼음 구슬만을 든 채, 고개를 좌우로 두리번거리며 사라진 식검을 찾는듯했다.

‘내 자아임에도 나와 소통이 되지 않는다니. 이제 막 응결에 성공해서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는 천천히 알아보아야겠구나.’

귀원패를 불러 물어보면 간단한 문제였지만, 대답해 줄 리가 없었기에 애초에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때 머릿속에 만통방의 존재가 떠오른 준혁은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일이 끝나면 만나러 가봐야겠군.’

지식의 창고라는 만통방이라면 그 이유를 분명 알 수 있을 테고, 왕웅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배우는 것도 있을 게 분명했다.

통제할 수 없는 원영은 내버려 둔 채, 준혁은 혈단법과 광신체령투선공을 한 번씩 운용해보고 몸의 상태를 점검했다.

원영이 막 응결될 때처럼 영기가 눈에 보일 정도로 진하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결단기 때와 비교한다면 정말 천지 차이라 할 정도로 차원이 달랐다.

그전까지는 그저 ‘영기라는 기운이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마치 투명하고 무거운 기운이 세상천지에 만연한 느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흐으읍-

준혁은 크게 심호흡하면서 아직 짙게 남아있는 천지 영기의 기운을 흡수하며 명상에 잠겼다.

원영기에 올랐다고는 하나, 몸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하나씩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다.

다만 결단기 때처럼 단을 안정시키기 위해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는데, 원영은 이미 완벽한 하나의 생명체였기 때문이다.

+++

3일 후.

모든 기운을 갈무리하고 주변에 설치한 진법을 회수한 준혁은 얼음벽을 깨부수며 공중으로 치솟았다.

쾅!

주변에 수많은 인기척이 느껴졌기에 기감으로 한번 훑어본 후, 나설헌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곳엔 나설헌을 비롯해 여러 명의 수사가 있었는데, 어떤 이는 준혁을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어떤 이는 존경의 눈빛, 또 다른 이는 두려움을 내비쳤다.

그중 가장 앞서 있던 노랑머리 여인은 호기심과 경계가 뒤섞인 얼굴로 준혁의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준혁은 그녀를 보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백팔마선의 계약자!’

여전히 단(丹) 속에서 원영의 손에 쥐어져 있던 식검이 부르르 떨며 신호를 보내왔던 것.

“최 수사! 아니. 최 선배님. 원영기에 오르신 걸 축하드려요.”

나설헌이 앞장서 인사하자 뒤에 있던 처음 보는 인물들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감축드립니다. 선배님.”

준혁은 그들의 축하 인사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준 후 노랑머리 수사를 바라보았다.

준혁이 자신을 직시하자, 제이엘은 온화한 미소를 띠며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제이엘이라고 해요. 원영기에 오르신 걸 축하합니다.”

한없이 딱딱할 것 같던 제이엘의 말투가 어느덧 바뀌어있었다.

“제이엘! 영국의 원영기 수사셨군요. 저는 최준혁이라 합니다.”

“이렇게 강대한 천지 현상은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군요. 다시 한번 감축드려요.”

“감사합니다. 수사께서 주변을 정리해주셔서 편하게 경지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처음 보는 저를 위해 귀찮음을 수고해주신 것 잊지 않겠습니다.”

땅속에서 경지를 올렸다지만,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를 수가 없었다.

“별말씀을요. 응당 해야 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근데, 정말 산수 출신이십니까?”

제이엘의 질문에 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쉽게도 이렇다 할 보금자리가 없었군요.”

준혁의 대답에 순간 제이엘의 눈동자가 똥그래졌다.

“최 수사. 초면에 알게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 극한의 땅에서 우연히 수사를 만난 것도 인연이라 생각이 듭니다.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니 곡해 듣지 말고 들어주셨으면 해요.”

“말씀해 보시지요.”

“혹여나 앞으로 종문을 세우실 건가요?”

종문이란 말에 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말대로 처음 만난 사이가 묻기에는 적절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러다 생각나는 것이 있어, 준혁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제게 수사가 소속된 곳에 귀의할 생각이 있는지 물으시려는 겁니까?”

“단번에 의도를 파악하시다니! 맞아요. 원영기에 오르고 나면 그전까지 와는 차원이 다른 영단과 수행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혼자 하려 한다면 수련은커녕 비경만 전전하고 다녀야 하지요. 만약 수사께서 저희 가문이 속한 연합에 들어오신다면, 앞으로 수련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제이엘이 지금까지와 달리 조금은 들뜬 모습으로 설명하자, 준혁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해야 할 일도 있고, 아직 어딘가에 소속될 생각이 없습니다.”

지원이라는 말은 듣기 좋은 꿀이었지만, 세상만사 일방적인 도움이란 없는 것. 결국 지원을 받은 만큼 무언가를 베풀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아! 당연히 당장 대답을 듣고 싶어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수사께 제 의견을 말하고, 한 번쯤 생각해 봐주시라 한 거지요.”

“그렇다면 수사의 말대로 한번 고려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이에요!”

준혁의 대답에 제이엘은 기쁜 듯 활짝 웃었다. 연합에 소속시키지 못한다고 해도, 최소한의 인연은 맺었다고 여기는 것.

그때 주위에 넓게 퍼져있던 수사들이 속속들이 날아와 일정 거리에서 멈춰 서며 크게 인사했다.

“선배님! 원영기에 오르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원영 응결에 성공하신 걸 감축드립니다. 선배님! 저는 서안에 위치한 강지문(强指門)의 장로 장태휘라고 합니다! 언제 저희 강지문에 들러주신다면···.”

“선도(仙道)에 올라선 걸 감축드리옵니다. 선배님!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저희 양조문(洋朝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저희 문주께서 아끼시는 삼백 년 된 매화선주를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저희 양조문의 아이들이 하나같이 미색이 뛰어나···.”

축기기 수사들은 말을 걸 엄두도 못 내는지 한쪽에서 조용히 눈치만 보고 있었고, 결단기 수사들만이 앞다투어 준혁에게 인사를 건네며 얼굴도장을 찍기 위해 애썼다.

중국 수사부터 시작해, 러시아 수사, 개중에는 유럽 출신의 인물들도 있었다.

준혁이 그들의 인사에 일일이 반응을 보여주자, 몇몇은 감격한 눈빛으로 어깨를 살짝씩 떨기도 했다.

하지만 한동안 계속되던 인사 세례를 받아주던 준혁의 표정이 미미하게 변하는 걸 발견한 수사들은 결국 아무 성과 없이 눈치를 보며 모두 물러가야 했다.

마지막으로 준혁에게 크게 인사한 그들은 더는 자리에 머물지 않고 빠르게 하늘을 가르며 흩어졌다. 다들 하나같이 머릿속엔 한가지 목적뿐.

바로 새로운 원영기의 탄생을 자신이 속한 곳에 최대한 빨리 알리는 것.

그리고 그 수사가 산수 출신이란 걸 말이다.

+++

아직도 멀리서 힐끔거리는 몇몇 축기기 수사들을 제외하고, 수사 대부분이 사라지자 준혁은 자신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나설헌에게 물었다.

“나 수사. 이곳에 온 지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겁니까?”

“수사가 칩거한 지 3년이 흘렀어요.”

나설헌의 말에 준혁이 말을 잇기도 전, 제이엘에게서 경악성이 튀어나왔다.

“3년이란 말입니까?! 말도 안 돼. 정녕 그 말이 사실인가?”

놀란 그녀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나설헌이 말했다.

“제가 어찌 선배님들께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여기 최 선배님께서는 분명 3년 만에 원영을 응결하셨습니다.”

“허어···.”

준혁도 자신이 꽤나 빠른 시간 안에 원영기에 올랐다는 걸 알았기에 제이엘의 반응을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건 아마 천년화의 힘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수사 본연의 기운을 응축시켜 천지 현상을 불러낸 것이 아닌, 천년화의 힘을 이용해 강제로 반응을 끌어낸 것.

어찌 보면 결단기를 맺을 때처럼 본인의 순수한 수행이 아닌, 강제로 일을 진행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제이엘이 허망한 표정을 하는 건 무시하고 준혁은 자신이 할 말을 했다.

“나 수사, 이제 가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같이 가실 겁니까?”

“물론이죠! 따라가겠어요.”

“그럼 화 수사를 부르겠습니다.”

말을 마친 준혁이 전음부 한 장을 꺼내 짧게 수결을 맺자, 전음부가 쏘아져 나가며 동쪽으로 날아갔다.

잠시 후, 비행 법기를 탄 화령이 날아왔고, 그녀는 준혁이 원영기에 올랐다는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껌뻑이기만 했다.

다른 이들처럼 축하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은 듯했다.

사실 화령 역시 천지 현상을 목도했었지만, 자신이 보았다면 인근 수사들도 전부 보았다는 말.

축기기에 불과한 자신이 홀로 움직이다 괜히 봉변을 당할까 봐, 다른 이들과 다르게 거처에 꼭꼭 숨어 나오지 않았던 것.

당연히 준혁이 원영을 맺는다고는 눈곱만치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다들 모였으니 갑시다. 화 수사는 제 법기에 같이 타시면 됩니다.”

“예. 최 선배님.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준혁이 결단기에 올랐다고 했을 때도, 예전 관계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화령은 이제 그 누구보다 공손해져 있었다.

준혁은 고개를 한번 끄덕여 준 후, 비행법기를 꺼냈고, 화령은 빠르게 올라타 공손한 자세로 앉았다.

“아 참 제이엘 수사.”

막 법기를 움직이려던 준혁이 제이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말씀하세요.”

“우린 해야 할 대화가 남은 것 같으니,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찾아와 주시겠다면 영광..”

화색을 띠며 준혁의 말에 답하려던 제이엘은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듯 말을 멈췄다.

개인적인 친분을 쌓기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몸속에 숨어있는 다른 이 때문이란 걸 알아차린 것.

자신의 계약자가 상대방의 기운을 느꼈다면, 반대로 상대방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뜻.

제이엘이 말을 잇지 못하자, 준혁은 가볍게 미소를 남기며 법기를 조종해 하늘로 치솟아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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