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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80화 (80/408)

# 80 < 원영기 (2) >

눈으로 뒤덮인 하얀 대지에는 어울리지 않는 석탑.

대략 성인 서너 명은 충분히 기거할 수 있을 것 같이 생긴 석탑은 냉기가 몰아치는 바깥과 무관하게 기이한 열기를 뿜으며 자리하고 있었다.

석탑 안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게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 안엔 나설헌이 좌정한 채 생각에 잠겨있었다.

얼굴 가리개를 걷어낸 그녀의 모습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눈매가 너무 차가운 나머지, 쉽게 다가가긴 어려워 보였다.

그런 그녀의 눈썹이 꿈틀하며 움직였다.

“그 아이를 잊기 위해 노력하는 건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

처음 최준혁이란 인물의 첫인상은 별로였다.

우연히 만나 마음이 갔기에 적극적으로 도와줬던 여서령, 그 아이의 마음은 활화산 같은 애정이었지만, 최준혁이란 자는 그러지 않았던 것.

죽어가는 여서령을 살리기 위해 필사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는 끝까지 눈물도 흘리지 않았었다.

그 모습에 원래부터 사내를 싫어했던 나설헌은 준혁이 더 밉게 보였다.

그러다 그에 대한 평가가 바뀐 건 북극에 도착한 후였다.

동생을 확인한 후 당장이라도 복수를 하기 위해 떠날 줄 알았던 그가, 여서령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자 시간을 보내겠다는 말에 사람이 달라 보였다.

감정을 내비치지 않은 모습은 신중함으로 느껴졌고, 무표정한 얼굴은 절제력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런 평가가 또다시 바뀌고 있었다.

북극에 온 지도 벌써 3년.

최준혁이란 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칩거에 들어갔고, 궁금함에 방문했던 나설헌은 텅 빈 이글루만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말없이 떠날 사람은 아니라 판단했기에 수련하며 기다렸다.

“설마 그 수행에 얼어 죽은 건 아닐 테고. 도대체 어딜 간 걸까? 안 되겠어. 다시 찾아봐야지.”

나설헌은 결국 주변 땅을 다 파헤쳐서라도 준혁의 흔적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그녀는 미묘한 영기 변화를 눈치챘다.

“뭐지?”

깜짝 놀라 석탑에서 튀어나온 나설헌은 이내 믿지 못할 광경을 보고는 두 눈을 치켜뜨고 입을 벌리고 말았다.

눈송이들이 입속으로 들어갔지만 느낄 수도 없을 만큼 놀랐다.

“설마!”

하늘엔 엄청난 먹구름이 부피를 키워가고 있었고, 먹구름 속에선 각종 오색 빛이 터져 나오며 뇌전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결단을 맺을 때와 비슷한 영기 구름이 뭉치는 현상이었는데, 그 크기나 규모가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콰르릉!

나설헌이 잠시 넋 놓고 있는 사이, 영기 구름은 엄청난 속도로 퍼져나가며 주변을 뒤덮었고, 순식간에 얼음 대지에는 거대한 그늘이 만들어졌다.

“도대체 누가?! 설마! 최 수사?! 3년간 원영기에 오를 준비를 한 거라고?”

나설헌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다가 이내 세차게 고갤 흔들었다.

원영기가 옆집 강아지 이름도 아니고, 준비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결단기 후기에 올라 수행을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하게 만든 후, 심신을 완벽하게 다스려 천지의 기운을 불러들이는 행위.

천지의 기운을 불러 원영에 도전하는 것은 1~2년 한다고 해서 가능한 게 아니었다. 당연히 3년이라 해도 턱도 없이 부족한 시간.

나설헌이 알기로 중국의 왕웅은 원영기에 오르겠다고 천명한 뒤 무려 50년을 노력해 천지 영기를 불러낼 수 있었다고 했다.

애초에 원영기란 몸 안에 가득 찬 기운을 감당하지 못해 새롭게 단(丹)이라는 저장공간을 만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영기로 이루어진 새로운 자아를 만드는 일.

“진짜 원영기에 도전하는 것이라면 내가 보호해줘야 해.”

나설헌은 석탑 법기를 회수해 공간대에 집어넣고는 바로 둔광을 일으키며 허공을 갈랐다.

+++

하늘을 뒤덮으며 퍼져가는 영기구름.

나설헌은 영기 구름의 중심인 준혁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곳으로 향하다 이내 멈춰서고 말았다.

‘압박이···.’

일정 거리에 접근하자 공기 중에 떠 있는 영기가 온몸을 짓누르기 시작한 것.

눈에 보이지 않았기에 몰랐을 뿐. 하늘 높은 곳의 영기구름 뿐 아니라 이미 일대 지역이 영기 폭풍 속에 진입한 것 같았다.

그녀는 더 이상 접근할 수 없음을 깨닫고 크게 물러났다가, 시간이 지나자 재차 뒤로 거리를 벌려야 했다.

어느새 하늘은 온통 먹구름 천지였고, 그 안에서 비치는 오색 빛깔과 뇌전들만이 시야에 가득했다.

번쩍-

콰르르릉-

‘도대체 언제까지 커지는 거야?’

준혁을 보호하려 했던 나설헌은 또다시 영기 압박이 거세지자 혀를 내둘렀다. 결단을 맺을 때와는 수준이 다른 영기 압박에 결국 또다시 물러나야 했다.

그때 나설헌의 기감에 강대한 기운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천지 현상을 보고 오는 이라면 좋은 의도일 리가 없기에 그녀는 자신의 법기를 꺼내 들고 다가오는 기운을 향해 날아갔다.

“멈추세요!”

“응?”

천지 현상의 중심지로 다가오던 자들은 1남 1녀였는데, 사내는 결단기 초기였고, 여인은 축기기 후기였다.

나설헌을 발견한 사내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놀라워하는 얼굴을 했다.

“어떤 보물이 나타났나 했더니···. 누군가 수행을 올리는 중입니까?.”

“그래요. 더 접근하신다면 손을 쓸 수밖에 없어요.”

나설헌은 위협하듯 세검들을 움직이며, 보여주기식 영기를 발출했다.

순간 사내의 표정이 급변했다.

“아, 아닙니다. 그저 이런 외지에서 누군가 수행을 올릴 거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당연히 보물이 나타난 거라 여겼습죠. 그럼 확인했으니 물러가 보겠습니다.”

사내는 나설헌의 수행을 확인하고는 같이 온 여인의 손을 잡더니 빠르게 멀어져갔다.

그때 나설헌의 기감에 또 다른 존재들이 들어왔다.

“또! 이런, 한두 사람이 아니야.”

+++

나설헌이 도착한 곳엔 이미 몇몇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있었다.

그중 확연히 돋보이는 밝은 노랑머리를 한 여수사 한 명이 멀리 영기구름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고, 그녀 주위엔 비슷한 옷을 걸친 제자로 보이는 이들이 여러 명 있었다.

또 다른 곳에도 몇몇 무리가 있었지만, 그들은 노랑머리 수사를 의식하는지 영기구름을 향해 다가가지 않고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설헌은 단번에 노랑머리 수사가 평범한 자가 아님을 깨닫고 그곳으로 날아갔다.

그곳에 도착해, 심유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노랑머리 수사를 보며 나설헌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평소 할아버지의 이름을 파는 것을 싫어했지만, 지금만큼은 그런 걸 따지지 말아야겠다는 마음과 함께.

“처음 뵈어요. 저는 통유대문(通流大門) 나한 문주의 손녀 나설헌이라고 해요.”

나설헌의 자기소개에 노랑머리 여수사는 그녀를 위아래로 슬쩍 훑더니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놈이 손녀 자랑을 그렇게 하더니. 자랑할 만하군. 나는 제이엘이다.”

제이엘이라는 말에 나설헌이 두 눈을 번쩍 떴다.

도무지 수행을 파악할 수 없었기에 자신보다 윗줄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원영기 수사일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나설헌은 급하게 허릴 숙였다.

“선배님! 뵈어서 영광이에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나설헌의 태도에 만족한 듯, 제이엘은 입가를 살짝 올리더니, 시선을 영기구름 쪽으로 옮기며 말했다.

“저기 원영기에 도전하는 자가 지인인가?”

“네!”

“새로운 원영기라···. 혹시 출신을 알 수 있을까?”

“한국···. 산수 출신이에요.”

산수라는 말에 제이엘이 놀랍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산수라고? 그게 정말인가?”

“제가 알기론 그렇게 알고 있어요.”

“흠.”

나설헌의 말에 이마를 매만지며 생각에 빠진 제이엘은 무언가를 결정한 듯 표정을 바꾸며 뒤에 서 있던 자들을 불렀다.

“주위를 돌며 수사들에게 경고하거라. 이곳은 제이엘이 지키고 있으니 혹여라도 허튼짓은 하지 말라고.”

“예! 스승님.”

잠시 후 제이엘의 제자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여러 곳에 무리 지어 있던 수사들은 흠칫 놀라 하며 전부 멀리 달아났다.

하지만 멀리 떨어진 상태를 유지하며 완전히 돌아가지 않는 걸 보면, 관심을 거두는 것 같진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점점 규모를 키워가는 영기구름에 비례해 다양한 수사들이 점점 몰려들고 있었다.

+++

3일 후.

눈과 하얀 대지밖에 없던 북극엔 쉬이 규모를 짐작할 수 없는 먹구름이 주변을 잠식하듯 뒤덮고 있었다.

그 크기가 얼마나 큰지 어림잡아도 수 킬로미터는 될 것 같았다.

번번이 구름 사이에서 치는 뇌전 때문에 땅은 파헤쳐졌고, 영기 폭풍 때문에 눈보라는 흩어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이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뒤에 시립 한, 제자를 향해 말했다.

“내가 원영기에 오르는 걸 지켜봤을 테니 말해 보거라. 얼마나 차이가 있느냐?”

목적어가 빠진 스승의 말에, 제자는 눈치껏 알아채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스승님 때와 비교하자면···. 두 배 이상은 되는 것 같습니다.”

“두 배 이상이라···.”

제이엘은 혀를 내둘렀다. 다른 원영기 수사가 원영을 맺는 걸 지켜본 적은 없었지만, 대부분 비슷한 과정을 거쳐 원영기에 올랐다고 들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원영을 맺고 있는 인물은 벌써 끌어모은 영기만 해도 두 배.

만약 원영을 맺는 데 성공한다면, 어쩌면 그동안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오던 수도계의 판이 뒤집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이엘은 내심 주변의 날파리들을 쫓아내, 원영을 맺는 데 도움을 준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원래는 산수 출신인 상대가 원영기에 오르면 막대한 재물로 포섭할 계획이었지만, 만약 상대가 규격 외의 힘을 가지게 된다면, 포섭이 아닌 좋은 관계만 유지해도 이득이었다.

그때, 끝없이 확장할 것 같던 영기구름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요동치기 시작한 영기구름은 서로를 밀치듯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 순간 영기구름의 중심에서 거대한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소용돌이는 미증유의 거력과 함께 수를 셀 수 없는 뇌전 빛을 동반하며 아래로 하강했다.

그리고 한번 하강하기 시작한 소용돌이는 지면의 한 부분에 닿자, 미칠듯한 영기 파동을 퍼트리며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시작된다.”

꿀꺽-

제이엘의 말에 옆에 서 있던 나설헌과 제자들이 동시에 침을 삼켰다.

그들은 소용돌이로 변해 떨어지는 영기구름을 보며 단 한 번도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새로운 원영기의 탄생.

원영이 만들어지는 과정 중 새어 나오는 영기파동은, 그것 자체만으로 수행에 도움이 되는 평생 가도 마주하기 힘든 기연이기도 했으니까.

+++

얼음으로 둘러싸인 지하 속 공간.

준혁의 몸은 반투명한 얼음으로 덮여있다가 얼음이 녹으며 전신에서 붉은 광채와 함께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지랑이가 얼어붙으며 다시 몸 전체가 반투명한 얼음으로 뒤덮였다.

그렇게 상반된 기운이 번갈아 몸을 지배하며 엎치락뒤치락하길 수년.

정확히 얼마나 오랫동안 좌선을 한 지 모르겠지만, 준혁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시작된다!’

얼음으로 덮인 머리 위 하늘에서 미증유의 기운이 하강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거인이 나타나 손바닥으로 내려치는 것처럼, 형용할 수 없는 압박감을 전해왔다.

‘지금!’

마치 모든 걸 압사시켜 버릴 것처럼 이끌려오던 영기 회오리가 지면에 닿는 순간.

준혁은 내부에서 혈단법을 극성으로 운용하며, 동시에 외부로는 광신체령투선공을 사용했다.

그 순간, 불과 물처럼 서로를 밀어내며 싸우고 있던 두 기운은, 서로를 끌어당기며 하나 되기 시작했고, 어느새 몸 안에서 거대한 폭풍을 만들어냈다.

쩌저정-

순식간에 온몸이 얼어붙으며 전신에서 눈 부신 달빛이 쏟아져 나오다가.

화아악-

투명한 결정체들이 깨져나가며 그 위로 붉은 광채가 퍼져나갔다.

혈단법으로 정제해 왔던 피의 힘과 천년수와 천년화로부터 얻은 달의 힘은 마치 서로를 증폭시키듯 상승효과를 만들며 점점 힘을 키웠다.

그리고 어느 순간.

준혁은 자신의 단(丹) 안에서 무엇인가가 새로 태어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아!’

순식간에 온몸을 가득 채운 고양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황홀했고, 주변에 가득 찬 영기가 그저 느낌이 아닌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단(丹) 안에서 시작된 씨앗은 이내 크기를 키워 갔고, 점점 사람의 형상을 갖춰갔다.

‘아!!’

마침내 단(丹) 안의 씨앗이 새끼손가락 끝마디만 한 크기의 아이 모습으로 바뀌자, 영혼이 성장하는 듯 자신의 존재감이 커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느낌과 함께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양의 영기가 아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2㎝도 되지 않은 아이의 몸에 어떻게 그리 많은 영기가 들어갈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는 모든 기운을 먹어 치우며 점점 몸이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준혁은 관조를 통해 보았다.

몸이 선명해진 아이는 어느새 손바닥 위로 중식도 하나를 올려둔 채 생글생글 웃고 있었고, 반대편 손엔 하얀 얼음덩어리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알몸의 아이 등 뒤엔 붉은 귀밑털을 가진 사나운 백호 문신이 새겨져,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두 눈에 흉흉한 기운을 내비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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