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76화 (76/408)

# 76 < 여서령 (3) >

동오산 아래.

하루를 마감하듯 땅거미가 짙게 들이민 산 아래 공터.

그곳엔 두 명의 여인이 여섯의 사내를 마주한 채 힘겨운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여인 중 한 명은 준혁이 찾고 있는 여인, 자신의 키만 한 관을 등에 멘 여서령.

그리고 다른 이는 반투명한 얼굴 가리개를 한 채 긴 생머리를 휘날리는 결단기 중기 수사였다.

여서령은 방어 법기를 펼쳐 사방을 견제하고 있었고, 그런 그녀 앞에 선 결단기 수사는 가느다란 세검 여러 자루를 허공에 띄운 채 전방을 막고 있었다.

그런 그녀들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서령아!! 정녕 내가 너를 베게 만들 것이냐!”

여서령을 포위한 채 둘러싼 여섯 명 중 정면에 서 있던 사내가 호통치자, 그녀는 파리한 안색으로 힘겹게 말을 꺼냈다.

“중원 아저씨. 어릴적 정을 생각해 물러가 주시면 안 될까요?”

“허허, 가주께서 여의치 않을 땐 너를 베서라도 그 나연이라는 여아를 가져오라 했다. 몰랐더냐?”

“......그 말이 사실이었군요.”

“그런데 계속 반항하려는 것이냐? 거기 수사, 누군지는 모르오나. 가문의 일에 계속 끼어들 작정이오?”

청룡가 일 호법이라 불리는 여중원은 여서령에게서 시선을 옮겨 결단기 여수사를 찌를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힘없는 아이가 남정네들에게 둘러싸여 핍박받고 있는 모습을 어찌 그냥 지나칠까요?”

“보아하니 천산 중심에 위치한 비경에라도 다녀오시는 길 같은데, 지금이라도 물러나시면 그냥 보내드리겠소.”

“이 아이와 함께 보내주신다면 감사하게 물러나죠.”

“정말 말로 해서는···. 다시 생각해 보시오. 지금까지는 서령이의 안전을 생각해서 행동했지만···. 이제부턴 오직 목표만 생각할 것이니.”

“저 역시 모든 걸 보여드린 건 아니니 다시 해보시죠?”

여인의 당당한 태도에 여중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노란 우산 법기를 꺼내 들며 외쳤다.

“중연! 자넨 나와 같이 저자를 처리하세나. 나머지는 서령이를 잡는다. 만약의 경우엔 살수를 허락한다!”

여중원은 외침과 동시에 우산 법기를 허공으로 던지며 수결을 맺었다. 수결에 따라 우산은 허공에서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가느다란 대나무 침을 사방으로 쏘아 보냈다.

그와 동시에 중연이라 불린 사내는 은쟁반같이 생긴 법기 두 개를 날리면서 앞으로 쇄도해 나갔다.

여중원의 명령으로 축기기 제자들 네 명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자,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여서령은 방어 법기를 운용한 채 칼날이 두 뼘 정도 되는 단검을 꺼내 휘둘렀고, 그녀를 돕던 결단기 여수사는 짧게 진각을 밟더니 빠르게 수결을 맺은 후, 두 팔을 쫙 펼쳐 원이 그려지게 시계방향으로 움직였다.

스스악-

순간 여인 앞에 떠 있던 세검 들이 분열하듯 흔들리더니 이내 수십 개의 환영을 만들어내 원형을 그리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세검 환영의 일부는 앞에서 달려오는 여중연에게 향했고, 나머지는 우산 법기를 조종하고 있는 여중원에게 쏘아졌다.

“혼자서 우릴 막을 수 있을 것 같은가!”

수십 자루로 분열해 날아오는 세검을 보며, 여중원은 수결을 바꾸고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다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그러자 허공에서 회전하던 우산이 여인 방향으로 튀어 나가며 수많은 침이 한곳으로 집중돼 쏟아졌다.

“선배님! 조심하세요!”

결단기 여인이 우산에서 쏟아지는 침을 막는 사이, 여중연이 날린 은쟁반들이 쾌속으로 회전하며 쇄도했고, 동시에 어디선가 거대한 불덩이가 생성되며 그 뒤를 따랐다.

여서령의 외침에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응답한 결단기 여인이 수결을 바꾸자 사방으로 쏘아졌던 세검 들이 빠르게 그녀에게 돌아왔다.

그리고는 여인을 중심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회전하는 세검에 속도가 붙자 그 모습은 마치 여인을 중심으로 연꽃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연화검(蓮花劍)!! 설마 나설헌?!”

연꽃처럼 피어나 쏟아지던 공격을 전부 막아낸 세검들은 방어가 끝나는 즉시 폭발하듯 터져나가더니 주변을 어지럽혔다.

“나설헌 수사! 정녕 청룡가의 일에 끼어드는 것이 그대의 뜻이란 말이오!”

“자꾸 같은 말을 되묻는 저의가 궁금하네요. 설마 겁을 먹으신 건가요?”

나설헌의 대답에 여중원의 표정이 매섭게 변했다.

“설마 그대의 조부를 믿고 이러는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발을 빼시오.”

“흥! 할아버지의 힘을 빌려야 할 정도로 나약하진 않네요.”

“정 그러시다면.”

대화를 마친 여중원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건 다른 호법인 여중연도 마찬가지.

나설헌의 조부는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서 꽤나 힘이 있는 인물.

물론 수련경지가 아닌 재화로 유명한 인물이었지만, 만약 자신이 가장 아끼는 손녀딸이 핍박받은 걸 알게 된다면, 절대 가만히 있을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짧은 순간에 살인멸구를 결심했다.

그리고 다시 접전이 시작된 순간.

그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 펼쳐졌다.

두 명의 청룡가 호법은 조금의 주저함 없이 살수를 펼쳤고, 그건 나설헌에게 뿐 아니라 힘겹게 축기기 수사들을 막고 있는 여서령까지 포함이었다.

그렇게 되자 여서령을 보호하기 위해 손을 낭비하는 일이 잦아졌고, 나설헌은 순식간에 궁지에 몰리게 됐다.

“이 짐승만도 못한 자들! 어찌 가족에게 칼을 들이댄단 말인가요!!”

푹-

수십 번의 공방이 지나간 후, 결국 여서령의 한쪽 어깨가 여중연의 공격에 관통당하며 방어 법기가 순식간에 해제돼 버렸다.

그 모습을 확인한 나설헌은 자신의 방어를 도외시한 채 세검들을 날렸다.

하지만 그 순간을 노리고 여중원이 쇄도했다.

“잘 가시오!”

결국 나설헌은 여서령과 자신의 목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마지막 선택은 자신이었다.

차마 진심으로 저들이 여서령의 목숨을 끝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 큰 착오.

푸욱-

나설헌이 자신을 보호한 순간, 여서령의 어깨를 관통했던 여중연의 법기가 그녀를 한 바퀴 선회하다 다시 돌아와 심장 부위에 박혔다.

“안돼!!”

그 모습에 나설헌은 충격을 받고 방어를 풀며 다시금 여서령을 구하기 위해 세검들을 날려 보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방어도 공격도 아닌 어중간한 상황을 연출했고, 그걸 놓칠 여중원이 아니었다.

“끝이오!”

틈을 보인 나설헌을 공격하며 여중원이 득의 한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끝이라는 말과는 다르게 그는 다음 행동을 이어나가지는 않았다.

아니 못했다.

“여 수사!!”

난전을 벌이던 그들은 누군가가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고.

그자의 입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을 땐 이미 여중원의 목에 실금이 가더니, 얼굴과 몸통이 사선으로 갈라지는 중이었다.

+++

어느새 장중엔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결단기 수사가 무력하게 죽어 나가는 장면은 어디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때 적막을 깨는 목소리가 좌중을 일깨웠다.

“준혁 씨···.”

준혁은 자신을 부르는 여서령의 목소리에 반응을 보인 후, 얼음처럼 경직된 주변 수사들을 훑었다.

그리곤 그들이 다른 행동을 하기도 전, 가볍게 손을 흩뿌려 분광소를 쏘아 보냈다.

준혁의 손 앞에서 튀어 나간 분광소는 순식간에 증식했고, 한 호흡도 되지 않아 여서령을 둘러싸고 있던 축기기 수사 네 명을 무력화시켰다.

여중연은 결단기 수사답게 순식간에 폭사 되어 다가오는 분광소를 쳐내고는 부적으로 보호막을 만듦과 동시에 하늘로 솟구쳤다.

하지만 얼마 도주하지도 못하고, 풍둔술로 쫓아온 준혁을 맞이해야만 했다.

“이익!”

너무나 빠른 준혁의 속도에 도망가기 힘들다고 판단한 여중연은 급히 방어 법기를 꺼내 몸을 보호했다. 동시에 은쟁반처럼 생긴 법기를 준혁에게 날리며 옆면이 한 뼘은 넘을 것 같은 넓적한 도를 꺼내 들었다.

“죽어라!”

넓적한 도는 공간대에서 나온 순간 강렬한 빛무리와 함께 시뻘겋게 변하며 준혁을 베어갔다.

하지만 도가 준혁에 몸에 닿기도 전.

파앗-

환영이 꺼지듯 사라진 준혁은 여중연의 등 뒤에 나타나 있었다.

준혁이 사라진 순간 위험함을 감지한 여중연은 공격을 멈추며, 재빠르게 방어 법기에 영기를 쏟아부었다.

“크아아앙!”

그 순간, 등 뒤에서 터진 사자후에 영력이 흩어져 버림을 느꼈고, 여중연이 다시 몸을 추슬렀을 땐,

푸욱-

기다란 붉은 장도가 등 뒤에서부터 심장을 뚫고 앞으로 튀어나온 상태였다.

+++

준혁은 장내에 내려서자마자 허물어지듯 쓰러져 있는 여서령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에 나설헌은 경계 태세를 갖춘 채 살짝 물러섰다.

“여 수사. 괜찮으십니까?”

“준혁 씨···.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준혁이 울릉도주를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여서령은 믿지 않았었다.

하지만 두 명의 결단기 수사를 쉽게 처리하는 걸 보니 소문이 오히려 축소되었단 걸 깨달았다.

“준혁씨···.”

여서령은 간신히 준혁의 이름을 부르더니 힘겹게 손을 올려 피 묻은 손으로 준혁의 얼굴을 만졌다.

“그때 지켜주지 못해···. 미안···. 했어요.”

“말은 나중에 합시다. 우선 치료부터 해야겠으니.”

여서령의 눈빛이 급격히 어두워지자, 준혁은 빠르게 수결을 맺으며 손끝으로 그녀의 심장 주위를 짚었다.

순간 엄청난 양의 영기가 손가락을 타고 넘어가 그녀의 몸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

심장에 구멍이 뚫린 여서령은 몸속에 들어온 영기를 잡아두지 못한 채 전부 흘려보내고 말았다.

시간이 흘러도 차도가 없자, 준혁은 포기하지 않고 공간대에서 진법 깃발을 꺼내 흩뿌리고는 다시 수결을 맺었다.

하지만 회복 진법 역시 구멍이 난 심장을 치료할 순 없었다.

그때 여서령이 재수결을 맺으려는 준혁의 손을 잡았다.

얼굴은 조금 전보다 혈색이 돌고 편안해 보였다.

“괜찮아요···. 그만해도···.”

“여 수사. 제가 꼭 살려낼 테니 걱정···.”

다급함 속에 불안함이 깃든 준혁을 보며 여서령은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전엔 아가씨라 불러주더니···. 이젠 여 수사인가요?”

“......아가씨.”

“제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나 봐요···. 설마 저에게 손을 쓸 거라곤 생각 못 했어요.”

자신의 가문을 떠올리는지 여서령이 처연한 표정을 짓자 준혁이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 여전히 계속해서 영기를 불어 넣으며.

“여 수사. 왜 그러셨습니까?”

“??”

힘없이 눈을 깜빡이며 힘겹게 웃음 짓는 여서령을 잠시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왜? 가문을 배신하면서까지 제 동생과 저를 구하려 했냐는 말입니다.”

준혁의 직접적인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여서령은 따뜻한 눈빛을 하며 말을 꺼냈다.

“미안했으니까요.”

“......”

“준혁 씨가 잡혀가던 날, 제가 어떻게 해서든 말렸었어야 했어요. 하지만 무서웠어요···. 제가 가진 지위, 그동안 해온 노력···. 그런 것들은 가주께 반기를 드는 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도 있으니까···.”

여서령은 준혁의 눈을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둘째 오라버니가 준혁씨를 고문하고 있다는 얘길 듣고 후회했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는데···.”

“감금당하신 거군요.”

대공자 여동현이 했던 말이 기억났다. 집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근신하고 있다는.

“네···. 그리고 준혁씨가 도망갔다는 소식을 듣고 결심했어요. 준혁씨가 목숨만큼 소중하게 생각하는 동생을 지켜주기로.”

여서령의 속마음을 듣고 난 준혁은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껴야 했다. 그건 안타까움에 의한 측은지심이었다.

그녀의 행동으로 인해 동생의 안전이 보장되었으니 당연하게도 준혁의 입장에선 너무나 고맙고 잘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 그녀는 가문을 등져야 했고, 지금은 죽음을 앞에 둔 상태였다.

준혁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를 꽉 문 채 고개를 숙이자, 여서령이 그와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준혁 씨. 이 옆에 있는 관은 사실 눈속임이에요···. 동생분은 지금 북극에 있어요.”

그녀의 말에 준혁의 머릿속으로 청명이 모아놓았던 옥간 속 정보가 떠올랐다.

-여서령 도주 중, 심복이었던 화령에게 배신당함.

화령은 처음 인지경을 발견했을 때부터 그녀를 도왔던 여인. 여서령이 언니라고 부르며 가장 가깝게 지내던 인물.

“설마. 제 동생은 화령이라는 분이 빼돌린 겁니까?”

준혁의 말에 여서령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벌써 눈치채셨군요? 맞아요. 결국은 붙잡힐 거라 생각했기에 처음부터 화령 언니가 동생분을 안전하게 숨길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게 목적이었어요. 다만 가주의 집착이 이 정도일 줄 몰랐네요···. 그리고 말이죠.”

“듣고 있습니다.”

“동생분을 얼린 봉인진법의 효력이 다하지 않게 빙정을 사용했지만, 점점 효력이 약해지고 있어요. 그러니 준혁씨가 해결책을 찾아야 해요.”

빙정이란 말에 준혁의 표정이 변했다.

“빙정? 그건 여 수사가 어머님께 받은 유품이 아닙니까?”

빙공의 대가가 만들어낸 빙정은 각종 병으로부터 몸을 지키는 보물로 여서령이 어릴 적 어머니께 받은 물건이라며 알려준 적이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그 물건을 아꼈는지 준혁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네. 빙제소에 펼쳐진 수십 가지의 진법 효과를 대체하기 위해선 그게 필요했어요.”

“어째서···.”

“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신 겁니까?”

가문을 저버리고 어머니의 유품까지. 그건 미안함이라는 감정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준혁의 직설적인 질문에, 여서령은 잠시 망설이다가 슬픈 눈으로 말했다.

“... 제 마음속에 당신을 담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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