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 여서령 (2) >
삿포로의 요테이산에서 서울까지 단숨에 날아온 준혁은 가심악의 말이 떠올라 청룡가 본가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비경 입구를 막고 있던 청룡가 수사들의 공간대에서 정보가 적힌 옥간들이 나왔지만, 여서령의 현재 위치에 대한 정보는 없었던 것.
통이문을 통해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지만, 여러 과정을 거쳐야 했기에 빨리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그렇다고 청룡가 본가를 들쑤셔 전투가 일어난다면, 시간을 낭비해야 할 수도 있기에, 준혁은 기감으로 주변을 살폈다.
청룡가 본가에 머무는 자들 중, 최소한 축기기만 되더라도 여서령의 행방에 관한 정보쯤은 알고 있을 거란 판단.
그런 준혁의 기감에 예상 못 한 것이 감지됐다.
“이런 식으로 재회하게 되는군.”
준혁은 사늘하게 웃다가 기감에 잡힌 이를 향해 빠르게 하강했다.
그리곤 단숨에 목표물의 목을 잡아챘다.
“커억!”
“이런 우연이 있나. 그리운 얼굴을 이곳에서 봅니다. 여공자.”
준혁의 차가운 말에 상대방은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면서 차마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여방만은 너무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황급하게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사, 살려주십시오!”
준혁은 그런 여방만은 본 체도 하지 않고 목을 잡고 있던 여동수를 가까이 당겼다.
벌벌 떨고 있는 여동수의 반응에 몸에서 발산하던 기운을 누르자, 그제야 여동수는 숨을 터트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허억! 컥.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네놈이.”
“꽤 시간이 흘렀거늘, 여공자는 수행이 그대로입니다?”
“무슨 사술을 사용한 거냐?!”
여동수는 단숨에 사로잡힌 상태에서도 완전히 기가 죽지 않았는지, 준혁을 향해 악감정을 그대로 내비쳤다.
그런 그의 모습에 준혁은 무미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사술이라···.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오랜 담소는 나누지 못할 것 같으니 자세한 얘기는 이걸 붙이고 하시지요.”
준혁이 말을 하다 말고 부적 한 장을 꺼내 들자 여동수가 눈을 부릅뜨며 몸을 잘게 떨었다.
겉으로는 강한척해도 결국은 준혁의 손아귀 안에 잡혀있다는 것에 겁먹고 있었던 것.
“저, 정신부! 그, 그걸 사용하면 본가에서 널 가만히 둘 것 같으냐?”
준혁은 대답 없이 깃발 세 개를 꺼내 진법을 발동시키며 수결과 함께 여동수의 이마에 부적을 붙였다.
이마에 붙은 정신부가 발동하자, 그는 두 눈이 흐릿하게 변하더니 초점이 사라져 버렸다.
“여서령의 현재 위치는?”
“천산···. 칠황문이 지키는 산수들의 땅···.”
칠황문은 드넓은 천산산맥에 자리한 일곱 문파로, 천산에 들어간 산수 출신 수도자가 축기기에 오르면, 그 재능에 맞게 일곱 문파 중 하나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세력을 유지하고 키우는 곳이었다.
“여서령을 잡기 위해 가문에서 내린 명령은?”
“도난당한 최나연의 생사가 최우선···. 이며···. 서령이의 목숨도 되도록 해치지 않게 노력···.”
“현재 상황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일 호법과 이 호법이···.”
여공천의 오른팔 왼팔이라는 호법들이 천산으로 향해있으며, 그의 제자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되도록 여서령을 살려서 데려오라는 명이 떨어졌지만, 여의치 않을 땐 최나연의 생명이 최우선이었다.
‘인지경에 대한 욕심이 정말 과하구나. 그래도 자기 핏줄이거늘.’
어쩌면 수련 속도를 올리는 것뿐 아니라, 전투 중 영기 총량을 늘리는 것마저 여공천이 알고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또한 얼음으로 봉인해둔 술법은 지속적인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동으로 해제될 수도 있기에, 빠르게 여서령을 잡기 위해 일곱 문파에 도움을 청하고 있다고 했다.
준혁은 필요한 정보를 더 물은 뒤에 손을 가볍게 쥐어 정신부를 터트려 버렸다.
화르륵-
안 그래도 강제로 정신부가 발동되며 충격을 받은 여동수의 뇌는 부적이 타오르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네놈을 죽이는 건 여반장이지만, 그럴 수는 없지. 평생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라.”
여동수를 바보로 만들어버린 준혁은 바닥에 엎드려 벌벌 떨고 있는 여방만을 보고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러자 영기 뭉치가 준혁의 손에서 벗어나 여방만의 관자놀이에 직격했다.
퍽-
죽지는 않겠지만, 기억 뭉텅이를 통째로 날려버렸다.
+++
서해를 지나 중국 국경을 넘은 준혁은 아무 방해 없이 목표지로 향했다.
비행 법기를 사용한다면 좀 더 편하고 안락하게 갈 수 있었지만, 자신이 가진 중급 비행법기로는 속도가 나질 않았기에 여전히 섬광을 일으키며 날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날아가던 도중 기감에 무언가가 느껴지자 준혁은 바로 멈추어 선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상에서 쏘아져 날아오던 무언가는 준혁이 멈춰서자 조금은 놀란 눈으로 경계하며 다가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한국에 도율이 아닌 원영기가 있···. 아니 결단기인가? 말도 안 돼, 어찌 이런 영력을 소유할 수가 있···. 설마 그건 인지경?”
상대는 준혁의 머리 위에 떠서 빛기둥을 내리고 있는 거울을 보더니, 얼굴에서 놀라움을 지우지 못했다.
“여공천이 인지경을 쫓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었다니···.”
갑자기 나타난 원영기 수사를 보며 준혁이 물었다.
“왕웅 수사 되십니까?”
“그렇소이다. 내가 바로 왕웅이오. 그런 그대는 누구요? 내 알기로 인지경을 가지고 달아난 자는 축기기 수사라고 들었거늘.”
“소문은 왜곡되기 마련이지요.”
왕웅에게선 아무런 위협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준혁은 적마도를 소환하며 등 뒤에 띄우고는 말을 이었다.
“헌데 저를 왜 막아서신 겁니까?”
준혁의 행동에 왕웅은 손을 저으며 난처한 듯 웃음을 흘렸다.
“아아, 오해십니다. 그저 제가 관리하는 구역 상공에서 엄청난 기의 움직임이 감지되길래 급히 나선 것입니다. 다른 원영기 수사들은 한 번씩 만나본 적이 있어, 제 구역 내에선 조심해주시기로 약속들 하셨으니까요.”
“그러십니까?”
준혁이 못 믿겠다는 듯 바라보자 왕웅은 연신 ‘허허’하며 입맛을 다셨다.
“수사. 괜찮으시다면 제 궁에 가셔서 담소라도 나누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수련 욕심은 없지만···. 친우를 만드는 데는 매우 관심이 많습니다. 하하.”
“저도 그러고는 싶으나 지금은 곤란하겠습니다. 다음에 들리도록 하지요.”
“하하, 그러십니까?”
준혁이 초대를 단번에 거절하자, 왕웅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 모습에 준혁은 아무도 없는 허공을 슬쩍 바라보다, 말을 꺼냈다.
“후일 들리게 된다면, 수사의 만통방을 구경해볼 수 있겠습니까?”
만통방이라는 말에 왕웅의 표정에 득의 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수사께서도 만통방에 관심이 있으신가 봅니다. 물론입니다. 대가만 지불한다면야 누구에게든 빌려주는 것인걸요.”
“빌려주신단 말입니까?”
“응? 모르고 하신 말이십니까? 저는 충분한 대가만 낸다면 누구에게나 만통방을 내어줍니다. 다만 대가에 따라 기한이 다를 뿐이지요.”
희대의 보물이라는 만통방을 빌려준다는 말에 준혁은 의문을 가졌다.
‘실력에 자신이 있어서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내경에서 외경으로 이동하는 도중 사쿠라에게 들은 얘기로는 만통방의 주인인 중국 원영기 수사 왕웅의 실력은 형편없다고 했었다.
결단기 후기 수사인 사쿠라가 마음먹고 목숨을 도외시한 채 덤빈다면, 이길 수는 없겠으나 지지도 않을 자신이 있다고 말할 정도.
그랬기에 준혁은 왕웅의 말에서 한가지 추론을 세울 수 있었다.
‘설마? 백팔마선 법보들처럼 소환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설마 그들 중 하나?’
만약 그렇다면 가지고 도주할 위험을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충분히 말이 되었다.
“대가라는 게 영석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영석도 물론 좋지만, 작은 부탁하나 정도 들어주는 거로 족합니다. 하하.”
아무 일도 없었다면 마음이 동했을지 모르나, 동생 걱정이 앞서있던 준혁은 왕웅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조만간 한번 찾아뵈겠습니다.”
“정말 그냥 가시렵니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 준혁은 곧바로 날아가던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다행히 왕웅은 그런 준혁을 막아서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잠시 후, 준혁이 점처럼 작아져 보이지 않게 되자 왕웅 주변으로 세 명의 결단기 중, 후기 수사들이 나타났다.
“스승님. 저자가 바로 그 최준혁 아닙니까? 그냥 보내주시는 겁니까?”
“인지경을 얻을 기회가 아닙니까?”
나타나자마자 준혁을 잡아야 한다고 성토하는 제자들을 보며 왕웅이 쓰게 웃으며 고갤 저었다.
“멍청한 것들. 너희들이 숨어있다는 걸 알면서도 작은 동요조차 없었다. 그게 무엇을 뜻하겠느냐?”
제자들이 몰래 가까이 다가온 순간 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준혁의 눈가에 살기가 비쳤다 사라지는 걸 왕웅은 보았다.
그건 분명 경계의 눈빛이 아닌 살기였다. 그랬기에 왕웅은 제자들에게 신호를 보내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막았었다.
“돌아가자. 만통방에 관심이 있는 자이면 결국 올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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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중국 원영기 수사를 만난 걸 제외하고는 아무 방해 없이 신강에 도착한 준혁은 곧장 천산으로 향했다.
동서로 1,700㎞에 이르는 천산산맥은 거대한 크기에 걸맞게 영기가 짙은 영산으로도 유명했고, 7개의 문파가 산맥을 나눠 관리한다고 해서 칠황산맥이라고도 불렸다.
각각 고유의 특징을 가진 7개의 문파는 외부로부터 천산에 거주하는 산수들을 보호했고 육성을 도왔다.
그렇게 수행이 올라간 산수들은 축기기에 이르러 7개의 문파 중 하나를 골라 들어갈 수 있었기에, 이곳 천산은 산수의 천국이라 불리었다.
준혁은 천산에 도착하자마자 사방으로 기감을 흩뿌리며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여서령이 모두의 눈을 피해 어딘가에 꼭꼭 숨어있다면 다행이지만, 여동수의 말대로 칠황문이라 불리는 7개 문파가 그녀를 찾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면, 그건 쉽지 않은 일.
산수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곳이라 숨어들었겠지만. 이젠 그 수많은 산수가 감시자가 되었을 테니까.
‘응? 이건?’
한참을 날아가며 수색 작업을 하던 준혁은 기감에 무언가가 걸려들자, 빠르게 그곳으로 내려섰다.
몇몇 수사들이 시비가 붙은 듯한 모습에 기운을 숨기고 백호둔영으로 기척마저 완전히 감춰버렸다.
그런 후 천천히 접근하자 소란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창의문(昶意門)이 언제부터 우리 산수들을 이리 핍박했단 말입니까?”
“아니, 누가 누굴 핍박했다고 그러나? 우리 창의문이 인근에 산수들과 얼마나 가깝게 지내는 것을 알면서. 우리 문주님도 이곳 산수 출신인 걸 모르시나?”
“그래서 하는 말 아닙니까?! 그런 창의문이 어째서 내 내자를 조사하겠다는 겁니까?!”
얼굴을 천으로 칭칭 감싼 여인 앞에선 사내는 당장이라도 덤빌 것처럼 흉흉한 기세를 내뿜었다.
오히려 그 앞에서 검문하던 창의문 수사들이 곤혹스럽다는 듯 힘들어하고 있었다.
“아니, 그러니 이렇게 부탁하는 것 아닌가. 우리도 죽을 맛이네. 지금껏 산수들의 행동에 그 어떤 제약도 가해본 적 없거늘, 갑자기 상부에서 웬 여인을 찾으라 하지 않은가? 한 번만 도와주게.”
“크흠.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알겠습니다. 다만 제 내자는 어릴 적 얼굴에 화상을 입어 타인에게 모습을 보이는걸 꺼려합니다. 그러니 한 분만 이쪽으로 와서 확인하십시오.”
흉흉하던 사내가 한발 양보하자, 창의문 수사는 기쁜 마음으로 다가갔다.
“고맙네! 정말 고마우이. 한데···. 수행을 확인해 봐도 되겠나? 확인만 하고 나면 두말하지 않고 바로 떠나겠네.”
“...알겠습니다.”
사내의 허락에 창의문 수사는 천으로 둘러싼 여인의 얼굴을 힐끔 확인하고는, 손목으로 영기를 불어넣어 그녀의 수행을 자세히 파악했다.
그리고는 두 손을 포개며 허리 숙여 인사했다.
“고맙네. 협조해주어 고마워. 우리 창의문은 늘 산수와 함께하는 걸 잊지 말아 주시게나.”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봐도 되겠지요?”
그때였다.
휘이익-
연인인 남녀수사의 조사를 마친 창의문 수사 앞으로 어디선가 노란 부적이 날아왔다.
사내가 별일 아닌 듯 부적을 잡아채자 부적이 화르륵 타오르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동오산 계곡 아래에서 목표물 발견. 관으로 의심되는 상자를 매고 있는 거로 보아 확실하다고 여깁니다. 소문과 다르게 혼자가 아닌 결단기 수사가 보호하는 중. 목표물에 접근하지 말고 인근 포위망에 참여하라는 명령입니다.
“허이참. 오 분만 일찍 전해주지.”
창의문 수사는 겸연쩍은 얼굴로 자신이 수색한 남녀 수사에게 허리를 숙이고는 다시 한번 미안하다고 말하며 돌아섰다.
그리곤 뒤에 서 있던 수하들에게 말했다.
“다들 들었지? 우리는 포위조로 합류한다. 이동하자.”
하지만 말과는 달리 창의문 수사들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고 바짝 얼어붙어야만 했다.
어느새,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자가 갑작스레 눈앞에 나타나, 흉험한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동오산이 어딘지 안내해주셨으면 하는군요.”
예의 바른 말투와 다르게 사내의 목소리에선 한기가 느껴졌다.
좋은 의도로 방문한 것이 아님은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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