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 비경 밖으로 (2) -무료 마지막- >
뢰비의 시야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준혁은 곧장 수결을 맺어 인형을 회수했다.
“위험했구나. 휴···.”
가성비 최악의 인형답게, 그동안 모아온 영석을 전부 투입했음에도 두 인형의 동력은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만약 뢰비가 조금만 더 시간을 끌었다면, 인형들은 힘을 잃고 쓰러졌을 테고, 계획이 틀어졌을 수도 있었다.
월광지력을 무리하게 내뿜어 뢰비를 위축되게 만들었으나, 도움을 줄 결단기가 있으므로 그에게 심적 부담을 가중시켰을 테니까.
작게 한숨 쉰 준혁은 인형을 공간대에 넣고는 사쿠라 가슴에 손을 댔다.
그러자 죽은 듯 처져 있던 사쿠라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수사를 치료하려는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잠시 후 준혁이 영기를 불어넣어 가슴에 대고 있던 손을 점점 위로 올렸다.
쇄골을 지나 목까지 사쿠라의 몸을 천천히 어루만지다가 한순간 영기를 발산하자, 그녀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피를 토해냈다.
“커억.”
그 순간 준혁은 그녀의 핏속에 숨어있던 뢰비의 정혈을 찾아내 빠르게 흡수해 버렸다.
정혈 정제법으로 기운을 흡수해 버리고는 약간의 고양감을 느끼며,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풍둔술을 시전했다.
+++
며칠 뒤 내경 초입 부근에 마련돼있던 은신처로 돌아온 준혁은 기운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진법을 설치하고는 그 안에 사쿠라를 넣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 진법을 해제하자,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한 채 좌정하고 눈을 감고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여전히 얼굴은 창백하고 눈 밑은 퀭했지만, 이제는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사쿠라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진법이 사라지자 천천히 눈을 뜨더니 준혁을 향해 크게 고개를 숙였다.
“수사, 감사해요.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사쿠라의 반응에 준혁은 고갤 저었다.
“귀원패 때문이었으니 그럴 필요 없습니다.”
사쿠라는 귀원패라는 말에 공간대에서 육각형 문양이 가득 박힌 원형 녹색 옥패를 꺼내 건넸다.
준혁은 기감으로 옥패를 확인해 보고는 손으로 만지지도 않고 허공을 격해 공간대 안에 넣어버렸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했다.
“둔술은 사용하실 수 있겠습니까?”
“네. 무리하지만 않는다면 가능할 것 같아요.”
“그럼 빠르게 이동하시지요. 설토족이 쫓아올 가능성은 낮으나, 내경 정세가 어찌 변할지는 알 수 없으니.”
“네, 수사. 헌데···. 제가 어찌 불러드려야 할지.”
예전 껄렁껄렁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한없이 공손한 태도의 사쿠라 때문에 준혁은 피식 웃어 보인 후 공간대에서 얼굴 가리개를 꺼내 착용했다.
“초면도 아닌데 편하게 부르시지요.”
그 모습에 사쿠라의 눈은 더할 나위 없이 동그래졌다.
“마, 말도 안 돼···. 수사께서 그때 그 어리숙한···. 아니 그분이셨단 말입니까?”
준혁이 말없이 웃어 보이자, 사쿠라는 땅에 이마가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였다.
“죄송해요. 원영기 선배님이신 줄도 모르고, 제가 무례를 범했어요.”
“별게 다 죄송합니다. 정 그러시다면 나중에 야마기 수사 좀 소개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야마기···. 말입니까? 혹시 무슨 일 때문인지 알 수 있을까요?”
자세는 바로 했지만, 여전히 공손한 모습을 한 사쿠라의 질문에 준혁이 답했다.
“그대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상급 공간대는 야마기 수사와 친분이 있어야 구할 수 있다고.”
“아···!”
준혁의 대답에 사쿠라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공간대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준혁에게 내밀었다.
“수사. 야마기는 항시 한곳에 머무르는 일이 없기에 언제 만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대신 이것을 드리겠습니다.”
준혁은 기감으로 상자를 살펴보고는 안에 내용물을 확인했다.
“이건? 상급 공간대?”
“조만간 동생에게 축하할 일이 생길 것이기에 선물로 준비해 놨던 것입니다. 나중에 다시 구하면 되니···. 그건 수사께 드리겠습니다.”
“이 귀한 걸 그냥 주겠다는 겁니까?”
“그냥이라뇨. 제 목숨을 구해주셨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수사가 아니었다면 이 물건들은 제 손에 돌아오지도 못했습니다.”
고개를 든 사쿠라는 반짝이는 눈으로 준혁을 직시했다.
순간 준혁은 지금 이 상황에서 매우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인지경이 식검에 잡아먹힌 상태에서 능력이 발휘됐기에 법보를 알아보진 못했을 것이지만, 과연 자신의 얼굴까지 몰라봤을까?
“수사, 혹시 제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준혁의 질문에 한참 동안 침묵하던 사쿠라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네. 최준혁 수사가 아니신가요?”
“흠.”
“귀원패를 알고 계신 걸 보면 경매장에서 제가 수사를 수배했다는 것도 아실 테니···. 사실대로 말씀드릴게요.”
사쿠라는 공간대에서 옥간 하나를 꺼내 준혁에게 건네고 말을 이었다.
옥간에는 준혁의 인적 사항과 초상화, 그리고 사용하는 무구에 대해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오래전 여가주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수사를 찾는 데 도움을 주라 하더군요. 가문의 보물을 훔쳐 갔다고 하길래 크게 고민 없이 수락했습니다. 하지만 선배님의 수행을 확인한 순간 그 모든 게 거짓이란 걸 깨달았답니다. 아마 선배님의 물건을 욕심낸 여공천 그자가 거짓으로 저를 움직인 것이겠지요. 하여 비경을 나서면 곧장 한국으로 찾아갈 생각입니다. 저를 이용하려던 걸 가만히 둘 수는 없으니까요.”
준혁은 옥간을 내려놓으며 그 안에 내용이 떠올라 웃으며 말을 건넸다.
“이 내용대로 10년 전엔 제가 축기기 초기였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순간 사쿠라의 표정에 어처구니없다는 기색이 어리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선배님···. 농담이 지나치세요. 그 어떤 영약과 보물이 있다 한들 10년 만에 원영기에 오르다니요.”
실제로 사쿠라는 자신의 예상이 확실하다고 믿고 있었다. 준혁의 보물에 욕심난 여공천이 직접 빼앗을 능력이 없으니 자신을 움직였다고 말이다.
당장 준혁의 수행을 파악할 수 없는 사쿠라는 설토족에서 자신을 구해낸 역량을 생각해 눈앞의 상대가 당연히 원영기 선배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사쿠라의 반응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준혁은 훗- 하고 웃어 보인 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얼굴 가리개와 옥간을 공간대에 넣어버린 후 백호를 품에 넣고 진법 깃발을 회수했다.
“얘기는 나중에 더 나누고, 우선 떠납시다.”
“네, 선배님.”
+++
내경을 빠져나와 빠르게 이동하려던 준혁은 사쿠라 때문에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호언장담하던 모습과는 달리, 둔술을 사용하는 걸 힘에 겨워했던 것.
할 수 없이 카펫 형식의 비행 법기를 꺼낸 준혁은 사쿠라를 태운 채 하늘 높이 쏘아져 날아갔다.
그렇게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길 20여 일, 준혁은 중경 초입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번 확인을···.’
중경 초입이 보이자 방향을 선회해 자비에를 만난 협곡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협곡에 도착한 준혁은 이맛살을 찌푸려야만 했다.
‘청명이 진법을 파괴했구나.’
웅장한 황토색 절벽이 마주 보고 있던 협곡은 그 입구가 어딘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준혁은 기감으로 무너진 협곡을 살피고는 가볍게 혀를 찼다.
‘하긴. 살아있다면 안에 갇혀있을 리는 없지. 그리고 죽었다면···.’
시체가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기감을 유형화시켜볼까 하던 준혁은 내심 안타까움을 지우며 등을 돌렸다.
잠깐의 짧은 만남이 인상 깊긴 했지만, 그렇다고 친우처럼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던 것.
“여긴 왜···.”
“아닙니다. 가시지요.”
준혁은 다시 카펫에 올라타며 사쿠라에게 눈짓하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올라앉으며 양손을 살포시 무릎 앞에 포갰다.
그 모습에 준혁은 속으로 고개를 저어야만 했다.
만약 경매장 등에서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사쿠라가 천생 여자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
협곡을 벗어난 준혁은 빠르게 외경과 중경을 가르고 있던 산맥을 넘어 외경에 진입했다.
이제 사쿠라를 보내주고 외부의 정보를 얻은 후, 바로 청룡가로 갈지, 천년화를 이용해 원영기에 도전할지 결정하려 했다.
그때 준혁의 눈에 익숙한 광경이 펼쳐졌다.
어처구니없어 말을 꺼내기도 전, 등 뒤에서 요조숙녀처럼 앉아있던 사쿠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외경에 수명과라니? 누가 장난을 치나?”
그랬다. 내려다보이는 시야 아래로 조금 넓은 공터가 있었고, 그 가운데엔 오래전 본 적 있던 커다란 나무가 홀로 서 있었던 것.
준혁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행법기를 회수하며 공터에 내려섰다.
사쿠라도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부스럭-
그때 어설프게 기척을 감추고 있던 자들, 총 다섯 명의 인원이 수풀에서 포위하듯 튀어나왔다.
그중 가장 앞에 서 있던 자가 호기롭게 외쳤다.
“크하하, 또 한 놈 걸려들었수아!”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준혁은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면서 반갑기도 함에 웃음을 흘렸다.
어느새 다섯 명의 인원이 준혁과 사쿠라를 완벽하게 포위하자,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잔뜩 비웃음이 담긴 얼굴로 외쳤다.
“머저리 같은 놈들! 외경에 수명과가 있을 것 같으냐!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이지. 푸하하.”
사쿠라는 어느새 비릿한 웃음을 내뱉으며 손을 들려 하다가, 뒤에서 들리는 전음에 영력을 회수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가만히 있자. 신이 난 도적 대장이 손을 번쩍 들었다.
“얼어붙었구먼! 애들아! 쳐라!!”
도적 대장의 신호에 주위를 둘러싼 축기기 초기 수사들이 움직이려는 찰나.
준혁이 한발 크게 이동하며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또 도적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냐?”
준혁의 말에 움찔한 도적 대장은 빠르게 수하들을 저지시키더니, 의심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또? 누, 누구냐? 나를 아는 것이야?”
“네 목숨줄을 쥐고 있는 자를 잊은 것이냐?”
준혁의 반문에 도적 대장 청명은 생각나는 것이 있어 두 눈을 번쩍 떴다.
“설마! 대인?!!”
준혁의 가리개 없는 얼굴을 처음 본 청명은 ‘정말인가?’ 하는 표정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정말 대인이십니까요?”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는 청명을 보며 준혁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을 꺼냈다.
“협곡을 아주 시원하게 날려버렸더구나.”
“대인!! 대인! 정말 살아계셨군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요. 그 망할 자비에 놈 따위에게 당할 리 없다 여겼지요.”
청명은 사쿠라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한걸음에 다가오더니 준혁에게 큰절을 올렸다.
그리곤 준혁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 빠르게 입을 열었다.
“대인! 그동안 심부름도 꼬박꼬박 했습니다요. 그 김충순가 개춘순가 하는 씨, 아니 그 영석버러지 같은 놈에게 꼬박꼬박 영석도 지급했고 말입니다요.”
청명에 말에 이번엔 준혁이 꽤나 놀란 얼굴을 했다. 정말 단 한 번도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정말인가?”
“그러믄요. 누가 시킨 일인데 말입니까? 제가 그 김춘순가 아무튼 그놈에게 영석을 지불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기 싫은 도적질도 억지로 할 수밖에 없었단 거 아니겠습니까요. 정말 힘들었습니다요. 대인.”
준혁은 손을 가볍게 저어 바닥에 엎드린 청명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청명이 기현상에 두 눈이 똥그래졌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내 크게 사례하겠네.”
준혁의 말에 청명은 우쭐해져서는 손짓으로 수하들을 불러 소개했다.
“얘들아, 인사드려라. 내가 예전에 말한 대인. 그분이시다.”
“뭐야? 허풍 아니었어?”
“진짜야?”
수하들은 평소 청명의 허풍을 자주 보았는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다가와 준혁과 사쿠라에게 짧게 고갤 숙였다.
준혁은 그들의 인사를 가볍게 받아넘기고는 청명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 그래도 8년이라는 시간을 떠나있었기에, 바깥 정보에 목말라하고 있던 시점.
“그동안 모아온 것을 주게나.”
청명이 빠르게 공간대에서 옥간 8개를 꺼내 건네자, 준혁은 기특하다는 듯 칭찬했다.
“두 달마다 얻은 정보를 일 년 단위로 모아놓은 건가? 매우 잘했네.”
“아···. 네. 뭐···. 비슷한 거지요.”
사실은 1년에 한 번씩 정보를 받아온 것이지만, 청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상황을 넘겼다. 다행이라면 마지막 정보를 받은 게 한 달 전이라는 것.
“흠···.”
준혁은 청명이 준비한 옥간을 이마에 대더니 빠르게 정보를 확인했다.
“되지도 않는 일을 벌이는군. 역시···. 흠···. 오호라.”
빠르게 정보를 읽어가던 준혁은 어느새 마지막 옥간을 이마에 가져갔다.
청명이 그런 준혁의 모습에 또 한 번 칭찬받을 기대로 입가가 활짝 핀 순간.
“감히!! 털끝 하나라도 상했다간 누구도 살려두지 않겠다!!”
화악-
극대로 한 준혁에게서 엄청난 영기 파동이 터져 나오자 사쿠라가 움찔하며 한발 물러섰고, 청명과 부하들은 엉덩방아를 찍고 넘어지더니 연신 뒤로 물러나며 벌벌 떨었다.
준혁은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옥간들을 청명에게 건넸다.
“청명, 앞으로도 도적질을 하며 살 셈이냐?”
“아, 아닙니다요! 정말 영석을 벌려고 어쩔 수 없.”
“그렇다면 이곳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오거라. 그리고 사쿠라 수사.”
청명의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린 준혁이 사쿠라를 응시했다.
“네. 수사. 말씀하시어요.”
“외경까지 왔으니 이제 돌아가시면 됩니다. 단, 나를 수배한 것을 해결하십시오. 만일 오늘 이후로 일본인 중 나를 잡으러 오는 이가 있다면···. 내 손이 매정하다 말하지 마시오.”
쾅!
말이 끝난 순간 준혁의 몸이 섬광처럼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곤 하나의 점이 되는 것처럼 보인 순간 번쩍하는 모습과 함께 외경 입구 방향으로, 말 그대로 빛과 같은 속도로 사라져버렸다.
“대, 대인!”
청명이 뒤늦게 불러보았지만, 목소리가 준혁에게 닿진 못했다.
“아씨. 한국 어디로 오라는 거야.”
한참을 투덜거린 청명은 고개를 돌리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사쿠라를 발견, 움찔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한발 물러섰다.
“깜짝이야. 왜 그렇게 보수···. 습니까? 사쿠라 수사님···. 응? 사쿠라? 사쿠라. 사쿠라?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어디서 들었지? 사쿠? 으에엑! 겨, 결단기 사, 사···!!”
얼굴이 창백해져 가던 청명이 벌벌 떨자, 관심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사쿠라가 껄렁하게 말했다.
“그 옥간들 내놔봐. 뭐라고 적혀있는지 좀 보자.”
준혁이 사라진 순간 다소곳하던 모습이 증발하듯 사라져버린 사쿠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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