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 삼청조 (2) >
준혁이 준비를 마치고 나오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어느새 준혁의 움막 앞엔 산들바람, 그리고 갈미를 포함한 세 명의 결단기 수사가 준혁과 함께 바람꽃의 명령만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가자.”
바람꽃은 1분 1초가 아깝다는 듯 임무에 대한 설명도 없이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고, 나머지 인원들도 각각의 술법으로 그 뒤를 따랐다.
‘비행 법기를 이용한다면 편하게 날아갈 수 있을 텐데’라는 뜬금없는 생각을 하던 준혁은 풍둔술로 다른 이들과 적당히 속도를 맞췄다.
준혁이 움막에서 나올 때 안고 있던 새끼 백호는 어느새 산들바람의 품속으로 돌아간 후, 품 안의 허전함을 느끼며 앞서 날아가는 갈미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그 옆의 결단기 수사를 바라보았다.
‘그땐 수행이 흐릿하더니, 결단기 후기였구나.’
처음 설토족의 호수에 나타났을 때 앞을 가로막았던 결단기 수사. 결단기 후기에 오르고 나자 그자의 수행이 훤하게 보였다.
그자 옆 또 다른 결단기는 갈미와 비슷한 수준.
그렇게 대화 없이 빠르게 이동하던 일행은 어느덧 제법 높은 산을 마주하고는 멈춰 섰다.
영석산이라 불리는 영산은 산세에 비해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세 봉우리가 중심 봉우리를 보호하듯 둘러 있었고, 가운데 중심 봉우리는 첨탑이라도 되는 듯 혼자 우뚝 솟아나 있었다.
그리고 산 아래로는 깊은 숲이 펼쳐져 있었는데, 나무들이 하얀색을 띄고 있어 눈이라도 내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바람꽃은 산을 빠르게 훑더니 중심 봉우리를 감싼 세 봉우리 중 한 곳으로 이동했다.
“토끼 놈들이 눈치챌 수도 있으니, 빠르게 이동할꺼야. 문이 열린 순간 지체하지 말고. 큰둥이는 내 옆으로 와.”
바람꽃의 명령에 준혁은 그녀와 산들바람 사이로 이동했다.
누가 보아도 도망가지 못하게 포위하려는 행태.
준혁은 고개를 살짝 돌려 산들바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듯 보였다.
준혁이 고분고분 움직이자, 바람꽃은 입안에서 노란 돌을 꺼내 봉우리로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돌을 바라보다 어느 순간 입김을 불자, 눈앞 봉우리가 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들어가!”
그녀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아무것도 없는 봉우리에 희미한 빛의 비틀림이 나타났고, 바람꽃은 준혁을 밀어 넣듯 이동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결단기 수사들이 발을 떼자, 그들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빛의 비틀림도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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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비틀림을 통과하자 어느새 널찍한 토굴 안으로 이동해 있었다.
‘광산 아래로 연결된 이동 진법이었구나.’
준혁이 주변을 살피며 서 있자, 바람꽃이 그를 재촉했다.
“안으로 가면 돼. 시간이 없으니까 우선 이동부터.”
“네.”
그녀의 재촉 때문인지 일행은 빠르게 동굴을 이동했고, 하나의 공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도착한 순간.
준혁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걸 알 수 있었다.
‘진짜 그곳이었어···.’
바람꽃에게 처음 설명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저 보물이 숨겨진 유적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봉인된 무언가를 잡으러 간다는 바람꽃의 말에 혹시나 청룡가와 설악산에서 발견한 신비경과 비슷한 건 아닐까 생각했었다.
애초에 신비경에서 각종 보물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았어도, 무언가 봉인된 생명체를 발견했다는 건 소문으로도 접하지 못했었기 때문.
‘와보길 잘했구나.’
원계획은 이곳에서 문제를 일으켜 안전하게 탈출하는 것이었지만, 천년수의 기연으로 결단기 후기에 오르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무리한다면 바람꽃과 산들바람의 추격을 뿌리치고 도주에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물론 승부가 아닌 도망이지만.
하지만 이곳이 자신이 생각하는 신비경이 맞는다면, 그리고 그 안에서 잡아야 할 게 백팔마선 중 하나라면 굳이 만통방을 얻지 못해도 식검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넓은 원형 공동, 한쪽에 놓인 제단과 그 위에 놓인 3가지 법기. 거기에 더해 천장에선 별빛처럼 보이는 빛무리가 쏟아지고 있는 모습.
정확히 준혁이 경험했던 신비경들과 같았다.
딱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공동 중앙의 금빛 진법은 이미 발동된 상태였고, 그 안엔 닭 크기의 분홍색 새 한 마리가 노란 부리를 뻐금거리며 하품을 하고 있다는 것.
‘이미 봉인은 풀렸지만, 법기를 회수하지 않아 갇혀있는 거구나.’
준혁이 적마에게 얻은 정보에 의하면 공동중심의 봉인진은 제단에 놓인 세 가지 법기중 하나를 제거한 순간부터 해체가 시작된다 했었다.
그렇게 준혁이 사방을 둘러보며 상황을 정확히 머릿속에 주입할 때, 바람꽃과 산들바람 그리고 세명의 결단기 수사가 준혁을 포위하듯 감쌌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우린 저 새를 잡으러 온 것 아니었습니까?”
준혁의 질문에 산들바람은 시선을 피했고, 바람꽃은 녹색 엉겅퀴같이 생긴 풀잎을 꺼내더니 준혁이 움직이지 못하게 팔다리를 구속했다.
풀이 몸을 감싼 순간 준혁은 몸 안의 기운이 잠잠하게 가라앉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건 인간들이 사용하는 구속 법기의 효능과 비슷했다.
“바람꽃님?”
“큰둥아 미안. 우리가 거짓말을 했어.”
바람꽃은 사정을 설명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그녀의 말이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 공동 중앙 봉인 안에 갇혀있던 분홍 새가 말을 했다.
“그자가 제물?”
새의 말에 바람꽃은 표정을 바꾸며 고갤 움직였다.
“그래.”
“뭐지? 내가 분명 인족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그랬지. 하지만 이자의 몸속엔 인족의 정혈이 들어있어. 그거면 충분하지 않아?”
“아 그래? 하긴 그것만으로 계약이 가능하긴 하지.”
분홍새는 기분이 좋은지 날개를 파닥거렸지만, 날개가 너무 작아 몸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우릴 도와줄 거란 약속은 지킬 거지?”
“내가 말하지 않았나? 그건 해봐야 안다고? 그건 너희들의 가설이지 내 능력이 아니야.”
“... 알겠어. 대신 협력하겠다는 약속은 꼭 지켜.”
분홍새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날개를 파닥거리며 바닥에서 콩콩 뛰었다.
“나 삼청조야. 몰라? 나는 거짓을 말할 수 없어.”
“그래. 만약 약속을 어기면 죽여버릴 테니까.”
바람꽃은 장난스럽게 행동하는 삼청조를 잠시 응시하다 한쪽에 마련된 제단 위 단상 앞으로 움직였다.
그리고는 무언가 고민에 빠진 듯 가만히 생각에 잠기다, 수사들 사이에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준혁에게 시선을 옮겼다.
“큰둥아. 나도 산들이도···. 너와 함께하면 좋겠어. 하지만 우리 적호족의 미래···. 아니 어쩌면 우리 영수족의 미래가 바뀔 수도 있는 일. 미안해. 흰둥이는 우리가 잘 키울게. 걱정 마.”
말을 마친 바람꽃은 흔들리던 눈빛을 날려버리고는 굳은 결심을 한 듯 단상 위에 놓인 세 가지 법기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지체없이 나머지 법기들도 전부 치워버렸다.
쿠우웅-
그러자 공동이 잘게 떨리며 공동 중앙 봉인에 갇혀있던 삼청조가 소릴 질렀다.
“드디어 자유다! 이 지긋지긋한 곳도 이제 안녕이야!”
“산들아!”
금빛 문자로 이루어진 봉인이 사라진 순간 삼청조가 조그마한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고, 산들바람은 어느새 신비경 입구로 이동해 흉포한 기운을 방출했다.
그 기운은 준혁과는 달랐지만, 차가운 한기를 품고 있다는 것은 비슷했다.
“삼청조!”
“참나. 내가 도망갈까 봐 그래? 오랜만에 자유의 몸을 찾아서 잠시 날아본 거라고. 나 삼청조야 삼청조.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삼청조라고.”
봉인에서 풀려난 삼청조는 자신의 말처럼 진정 자유를 느껴보려는지, 공동을 수십 바퀴 돌다가 준혁 앞으로 날아왔다.
그 모습에 안심한 바람꽃이 준혁 가까이 움직였다.
“내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하지? 인간과 계약을 한다고 해도 바로 동화되진 못해. 이 녀석의 의지력에 따라 동화체(同化體)가 되어가는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으니까. 그러니 완전히 몸을 빼앗을 때까진 닦달하지 마. 알겠지?”
“그래. 처음부터 약속했던 거니까.”
“그리고 완전한 동화체가 되기 전에 이놈이 스스로 도망가면 나도 어쩔 수 없어.”
“알겠으니 빨리 시작해.”
삼청조는 바람꽃의 앙칼진 목소리에 노란 주둥이를 뻐금뻐금하다가 준혁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그리고는 바로 행동하지 않고 빤히 준혁의 눈을 응시했다.
“전혀 겁먹은 눈이 아니네.”
“...저를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너와 나는 하나가 될 거야. 나의 방대한 기억 속에 너라는 놈의 기억이 추가되는 거지.”
“제가 잡아먹힌단 말입니까?”
“아니. 계약은 계약. 너는 나의 주인이 된다. 내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거지.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와 동화되어, 내가 너인지, 네가 나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거지. 너와 나 둘 다.”
“......”
“그러다 수행이 멈추면 우린 또 다른 몸을 찾아 영생을 누리는 거야. 우리 둘 다 말이야.”
말을 마친 삼청조는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준혁의 눈빛을 한참이나 응시하다가 고개를 젓고 말았다.
“신기하네. 정말 아무 동요도 없어. 하긴 왜 그러는지는 하나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
그리고는 앞발 사이로 날아가 손톱만 한 부리를 준혁의 심장에 콕 하고 박았다.
잠시 후, 예상 못 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악!!”
삼청조의 반응에 바람꽃이 성급히 물었다.
“왜? 무슨 일인데? 왜?”
“하늘이 날 돕는다! 심(心)!! 심영근(心靈根)이라니! 어디서 이런 보물을 찾은 거지? 선계에서도 찾기 힘든 이런 보물을 푸하하하, 다른 놈들이 안다면 부러워 미치려고 하겠어. 심영근이라니!”
“심영근? 그게 뭐지?”
“뭐긴 뭐야? 우리가 완벽하게 동화할 수 있는! 인족 중에서도! 아니다 우선 계약부터 하고 푸하하!”
삼청조는 부리를 준혁의 심장에 박은 채 흥이 겨운지 날개를 퍼덕거리며 좋아했다.
그러자 삼청조의 전신에서 분홍색 기운이 일어나더니 준혁의 심장 쪽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한편 준혁은 자신의 심장에 부리를 박고 있는 삼청조를 보며 고민에 빠져있었다.
당장 강체공을 발동하면 풀잎 구속구 따위는 쉽게 제거할 수 있었고, 도망가자고 하자면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는 상황.
하지만 백팔마선의 1인이 분명한 새를 보고 있자니 쉽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지금 마음만 먹는다면 찰나나 마찬가지인 시간에 식검으로 잡아먹을 수 있다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또 정보를 얻을 길이 요원해지는 것.
‘어찌해야 하나···. 그리고 심영근이라니? 나는 무영근자가 아니었나?’
애초에 심영근이라는 것 자체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땅, 불, 바람, 물 등, 자연에 존재하는 원소가 아닌 ‘마음’이라는 영근.
아마 준혁뿐 아니라 그 누구도 처음 듣는 게 분명했다.
그랬기에 준혁의 고민은 깊어졌다.
당장 심영근이라는 정보를 알아낸 것만 보아도 이자를 살려 포획한다면 무궁무진한 정보를 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가만히 두자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술법을 몸에 걸어야 하니 쉽게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삼청조의 말로는 몸을 빼앗는다고 했으니, 정혈을 집어넣어 안전 수단을 확보하려 했던 지금까지의 수법들과는 전혀 다를 터.
그 순간 새가 만들어낸 분홍기운이 몸을 파고들며 심장에 와서 닿았다.
극히 짧은 순간 수천 번의 고뇌를 거듭한 준혁은 결국 삼청조를 식검으로 흡수하지도, 그렇다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술법에 당하지도 말고 우선 유보해야겠다고 결정했다.
이제 곧 이곳에 혼란이 찾아올 것이 분명하니, 조금만 시간을 끈 후에 삼청조를 잡아 탈출하려 생각했다.
‘그래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그자들이 올 테니.’
그 순간이었다.
단(丹)안에 가만히 잠들어 있던 식검이 번뜩 눈을 떴다. 실제로 눈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준혁은 분명히 그렇게 느꼈다.
‘안 돼! 움직이지 마!’
준혁은 식검이 반응을 보이려는 순간 기운을 억누르며 단을 강하게 통제했다.
하지만 먼저 예상하고 막고 있었다면 모를까, 준혁의 의지가 움직이기도 전, 식검은 벼락처럼 움직이더니 준혁의 심장 앞에서 아른거리던 분홍기운을 집어 삼켜버렸다.
그리고 분홍색 기운이 식검 안으로 빨려 들어간 순간.
“으헉!”
파앗-
삼청조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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