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 < 천년화 (3) >
투명 결정체에서 시작된 달빛은 일정 공간을 잡아먹으며 눈으로는 파악할 수 없을 만큼의 강렬한 광원을 발출했다.
잠시 후엔 그 빛에 따라 몸속 달의 정기가 움직였고, 준혁의 전신에 가득 차 있던 기운은 점점 피부 쪽으로 모여들며 달빛을 잠식해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달의 정기로부터 자유로워진 준혁의 단(丹)에서 한줄기 영기가 피어올랐고,
그것이 전신을 돌아 하나의 원을 만든 순간.
화아악-
또 한 번 달빛이 터져 나와, 준혁이 갇혀있던 땅속 공간을 중심으로 파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 파동은 땅을 넘어 지상 위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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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뢰비 수사 방금 느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500년 전 경험했던 반응과는 많이 다르군요. 그때보다 매우 격렬한 것 같습니다.”
뢰비의 대답에 상대방이 허허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축하드립니다. 반응이 격하다는 것은 천년수의 기운이 그만큼 많이 옮겨진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게 그렇게 되는 겁니까? 하하.”
두 사람이 덕담을 나누며 웃고 있는 사이 천년수는 조금씩 줄어들었고, 하늘에서 내리던 달빛은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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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혁이 정신을 차린 건 피부를 덮고 있던 투명한 결정체가 전부 녹아 사라질 때쯤이었다.
‘성공한 건가?’
오직 살아야 한다는 열망으로 초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 결과로 의식이 남아있다면 죽음의 고비는 넘겼다는 말.
여전히 달의 정기가 이동하는 통로에 갇혀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이젠 고통스럽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시원하다는 느낌과 함께 무언가가 전신에 차오르는 고양감이 느껴졌다.
준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내면으로 들어가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야 했다.
‘이럴 수가! 이미 중기를 넘어섰다!’
수행을 확인한 준혁은 어느덧 자신이 중기를 넘어 후기에 진입하려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신을 잃었던 동안 일어난 일에 대해 파악하자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광신체령투선공이 받아들인 달의 정기.
거기에 반발하듯 움직이는 혈단법의 원기.
같은 달의 정기를 받아들이고 있음에도 내부에선 혈단법이 일어나 달의 정기를 원기와 탁기로 나누어 흡수하고 있었고, 외부에선 달의 정기 그대로 피부에 스며들고 있었다.
광신체령투선공은 엄연히 강체공이었기에 신체가 단련되며 기운이 증폭하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나, 어째서 혈단법과 동시에 반응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정말 기이하구나.’
더 이상 줄어들 수 없을 만큼 쪼그라들었던 단(丹)은 예전보다 더 단단해진 상태로 혈단법의 원기와 달의 정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두 기운은 서서히 하나가 되었다가 다시 흩어지며 분리되기를 반복했는데, 그럴 때마다 내부는 혈단법의 기운으로 들끓었고, 외부는 달의 기운으로 차갑게 식었다.
그리고 그런 현상을 자세히 관찰한 준혁은 한 가지를 깨달았다.
‘서로를 자극하고 있다!’
그렇게 천년수가 내뱉은 엄청난 기운들은 준혁을 한번 거친 후 천년화로 몰려가 또 하나의 꽃망울을 터트리기 위해 응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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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족 수사가 천년수의 기운을 쪽쪽 뽑아가는 것도 모른 채 설토족인들은 여전히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이제 이틀만 지나면 천년화가 완성되고, 그 후엔 새로운 원영기 수사가 탄생하는 일.
앞으로는 설토족의 영광만이 남았기에, 마을을 빈틈없이 방어하면서도 흥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들썩거렸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결국 일은 터지고 말았다.
“서쪽에 결단기 수사가 침입했습니다! 인족입니다!!”
다른 영수족도 아닌, 인족이라는 말에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그들과 함께 신목을 지키던 결단기 중 두 명도 자리를 이탈해 마을의 서쪽으로 향했다.
아무리 영수족끼리 전쟁을 일삼고 죽고 죽이는 관계라고 하나, 인족에 대한 적대감은 모든 영수족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
그때 서쪽으로 몰려가는 설토족의 등 뒤로 또 다른 이의 외침이 들렸다.
“마을 동쪽에 결단기 침입!! 인족이라 판단됩니다!!”
또 다른 침입 소식에 신목을 지키던 결단기 중 또 다른 두 명이 둔광을 일으키며 동쪽으로 날아갔다.
결국 5인의 설토족 결단기 중 한 명만이 신목 앞에 남아 하늘을 향해 입김을 불었다.
“어리석은 인족놈들. 성동격서란 말이냐? 뢰비님과 그분이 있는 한 꿈도 꾸지 말아라.”
결단기 수사의 혼잣말이 어수선해진 주위 탓에 조용히 파묻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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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혁은 몸속에 차오르던 기운이 한순간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동시에 엄청난 고양감을 느꼈다.
‘후기!’
그릇이 재확장하면서 그 전까지의 기운이 더욱 편하게 느껴지며 받아들여지는 것.
동시에 조금씩 손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몸은 자유를 되찾았고, 광신체령투선공을 극한으로 운용한다면, 그 순간만큼은 예전보다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다만 계속해서 수행이 올라가고 있었기에 가만히 기운을 흡수할 뿐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다른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5일이 지났다. 하루 만에 깨어났다면 6일 차겠지만···. 어쩌면 이제 막바지에 이른 건지도 모를 일.’
아직 자신과 심령으로 이어진 새끼 백호나 식검에서 아무 느낌이 들지 않은 걸 보면 기한이 지난 건 아닐 테지만, 슬슬 벗어날 준비를 해야 했다.
달의 정기를 받아들여 꿀단지를 통으로 들어 마시는 경우라고 해도, 더 이상 욕심을 내다간 난처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었다.
아무리 준혁이 결단기 후기로 진입했다고는 하나 원영기 수사와 맞붙는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법.
더군다나 바람꽃의 말대로라면 한 명이 아닌 두 명일 수도 있는 일.
‘이제 슬슬 이곳을 벗어나 꽃만 채취한 후 달아나야 한다.’
그때. 준혁은 땅속 멀리서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걸 느꼈다.
‘지둔술!! 누구지?’
그 존재는 일정 거리에 다가오더니 급속도로 방향을 선회해 천년화를 향해 대각선으로 파고 들어갔다.
‘나뿐이 아니었구나!’
그 존재가 자신처럼 천년화를 훔쳐 가기 위해 나타난 인물이란 걸 깨달은 준혁은 급하게 온몸으로 광신체령투선공을 일으켰다.
발아래로 기운을 폭발시키며, 동시에 주먹에 달의 정기를 모아 대각선으로 휘둘렀다.
쾅!
콰쾅쾅!
기운을 일으킨 즉시 준혁 역시 천년화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만 반대편에서 날아오는 이와 다른 게 있었다면, 그자는 지둔술을 이용해 지면을 자유롭게 통과하는 거였다면, 준혁은 눈앞의 지면을 통째로 날려버리며 무식하게 쏘아져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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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파헤치듯 무너트리며 전진하던 준혁은 상대방보다 늦을 걸 직감했다.
천년화와의 거리는 자신이 압도적으로 가까웠지만, 땅속에서 마음대로 움직이는 둔술보다 빠르게 도달할 수가 없었던 것.
결국 천년화를 눈앞에 두고 상대방이 꽃을 잡아채 가려는 걸 구경만 해야 할 상황이 와버렸다.
어느새 상대방도 준혁을 눈치챘는지, 속도가 더 빨라졌다.
‘이렇게 뺏길 수는 없지!’
준혁은 앞으로 나아가던 추진력에 더해 전신의 기운을 한점으로 모았다. 그리곤 천년화를 축으로 일부 지면을 통째로 날려버릴 생각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콰앙!
내질러진 준혁의 주먹은 눈 부신 빛에 휩싸여 있었고, 마치 손으로 물을 떠 올리듯, 천년화가 심겨 있던 지면이 통째로 갈라져 나가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충격파가 터져 나가자 설토족 결단기 수사가 즉각 반응했다.
“누구냐!!”
외침과 동시에 푸른 기운이 뭉친 구체들이 생겨나 천년화에 근접했던 인물에게 쏘아졌고, 그자는 급하게 지둔술을 풀며 손을 교차했다.
순간 어디서 피어났는지 꽃잎들이 폭풍처럼 휘날리며 천년화 도둑을 감쌌다.
그 모습에 터져 나간 지면 사이로 솟구치던 준혁은 내심 놀라야 했다.
‘사쿠라!!’
하지만 놀라는 마음과는 다르게 지상으로 빠져나온 준혁은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허공으로 솟구치고 있던 땅의 일부, 천년화 바로 앞에 나타났다.
그리곤 공간대에서 자단목함을 꺼내 빠르게, 하지만 조심스럽게 천년화를 채취했다.
화아악-
천년화는 준혁의 손길이 닿는 순간, 눈 부신 빛을 뿜어대며 사방으로 칼날 같은 달빛을 뿌려댔다.
그 모습에 사쿠라를 막고 있던 결단기 수사가 호기롭게 외쳤다.
“멍청한 놈들! 천년수의 정기를 받은 그것을 쉽게 가져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저자는 이제 전신이 찢겨, 말도 안 돼!!”
사쿠라와 준혁이 같은 인족 동료라고 생각했던 설토족 결단기 수사는 한껏 비웃음을 내뱉다가 두 눈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모든 걸 찢어발길 것 같던 천년화의 달빛 칼날은 준혁에게 아무 피해도 주지 못했던 것.
아니 오히려 도움을 주려는 듯 그의 피부에 맞닿은 순간 자연스럽게 흡수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달빛 칼날이 전부 사라지자 천년화는 어느새 눈 부신 빛을 띠는 구체가 되어 준혁의 손에 머물렀다.
‘이것이 원영기에 이르게 해주는 힘.’
준혁은 자단목함에 빛의 구체를 넣고는 수결을 맺어 기운을 차단해 단단하게 밀봉했다.
“내 것이야!”
준혁이 천년화를 챙기는 모습을 본 사쿠라는 분노한 얼굴로 손을 휘둘렀고, 그녀의 손짓에 따라 바람에 실려 벚꽃잎이 사방에 휘날렸다.
사방에서 흩날리던 벚꽃잎은 어느 순간 하나의 길로 뭉치더니, 준혁에게 쏘아져 나갔다.
하지만 준혁이 피식 웃으며 손바닥으로 허공을 격타하자, 벚꽃이 무언가에 막히며 쇄도하는 방향을 바꿔버렸다.
공격에 실패한 사쿠라가 재공격을 하려고 움직이려는데. 그때 설토족 결단기가 송곳처럼 보이는 수백 개의 얼음덩어리를 쏘아 보냈다.
“죽어라!”
얼음송곳은 가까이에 있던 사쿠라를 먼저 덮쳤고, 직후 준혁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제법 매섭군.”
준혁은 얼음송곳에 포함된 영력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막기보다는 허공으로 솟구치며 전부 피해버렸다.
사쿠라는 너무 근접해 있었던 탓인지, 벚꽃 나무를 소환해 전면을 막으려다가 어느새 얼음송곳으로 만들어진 공격에 갇혀버렸다.
그때 엄청난 기운이 폭사 되듯 다가옴을 느낀 준혁은 재빨리 수결을 맺어 폭발하듯 상공으로 치솟아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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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송곳 폭풍에 갇혀있던 사쿠라는 자신과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나타난 자 때문에 혼란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내가 모르는 후기 수사가 있었다고?’
너무 빠르게 움직이다 보니 얼굴을 확인하진 못했지만, 느껴지는 기운이 너무나 생소했다.
이렇게 차가운 기운을 내뿜는 강체공을 익힌 자는 일절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강체공이란 게 무엇인가? 인간은 영수와 다르게 몸을 단련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랬기에 고위수사 중에 강체공을 익힌 자는 정말 손에 꼽힐 정도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결단기 중기를 넘는 자는 사쿠라가 알기로 단 한 명도 존재하질 않았다.
‘도대체 누구지? 나말고 누가 천년구색초의 존재를 알고 있던 거지? 설마 그놈이 소문을 낸 건가?’
사쿠라에게 천년구색초에 대해 알려준 사람. 믿을 수 없는 놈이었지만, 돈 앞에선 항상 신용을 지켰기에 설마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지고 있을 시간 따윈 없었다.
이곳에서 난리가 났으니, 조만간 이곳 영수족의 원영기 수사가 나타날 터.
무리하더라도 빠르게 천년구색초만 챙긴 뒤 도망가야 했다.
원계획이 망가진 이상, 1초를 머무를 때마다 생명을 잃을 가능성이 1할은 늘어날 게 분명했다.
마을 외곽 양쪽에서 분란을 일으킨 일행들도 계획대로 곧장 도주했을 테니, 시간을 조금만 끈다면 또 다른 결단기 들까지 몰려올 상황.
그때 천년구색초를 가로챈 놈이 허공으로 솟구치며 달아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 서!.”
사쿠라는 수결을 맺어 얼음송곳을 막고 있는 벚꽃나무 앞으로 작은 벚꽃나무를 하나 더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작은 나무를 폭발시켜 전방을 가득 채운 얼음송곳을 날려버린 후 즉시 준혁에게 쏘아져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컥.”
어느새 벚꽃나무를 관통하며 뻗어 나온 손이 그녀의 목을 쥐었다.
“감히 인족 따위가 이곳에서!”
상대를 인지할 틈도 없이 제압당해 버린 사쿠라는 의식이 희미해지는 걸 느끼며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워, 원영기 중···. 아니 후기? 말도 안 돼 이곳엔 원영기 초기 한 명만.’
상대방은 평소에 자신이 깔보던 원영기 초기인 중국의 왕웅과는 비교가 되질 않아 보였다.
게다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원영기 중기 여수사인 영국의 제이엘 수사보다도 압도적인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어느새 영력이 풀려버린 사쿠라는 전신이 추욱 쳐진 채 눈에서 기운이 사라지고 있었다.
자신을 잡고 있는 노란 눈의 수사를 보며 처음부터 계획이 잘못되어있음을 깨달으며 결국 의식을 잃었다.
단 한 수만에 사쿠라를 제압한 노란 눈 수사는 어느새 다가온 뢰비를 향해 허공 한쪽을 가리켰다.
“수사, 저자가 천년화를 훔쳐 달아난 것 같습니다. 서두르시지요.”
쾅-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말이 끝나기 전 뢰비는 이미 섬광처럼 쏘아져 나가며 또 다른 인족 수사가 도망간 곳으로 사라져 버린 것.
“인족 놈들이 참으로 오만하구나. 겨우 결단기 네 명만으로 이곳까지 침투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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