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 천년화 (2) >
지하 깊은 곳으로 파고든 준혁은 부적의 유효시간이 지나기 전 빠르게 수결을 맺어 주변에 일정 공간을 만들어냈다.
땅속에서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지둔술(地遁術)을 익히지 못한 준혁이 사용한 건, 단발성으로 끝나는 지둔부(地遁符).
여태껏 공간대 안에 있었지만, 사용할 일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그 이유는 지둔부가 가진 명확한 한계 때문.
둔술이라 함은 대부분 숨거나 도망가는 데 힘을 발휘하는데, 다른 둔술 부적과 마찬가지로 지둔부도 술법이 발휘되는 시간이 극도로 짧았다.
즉 도망이 목적이지만 단발로 끝나버리는 것. 그나마 풍둔부(風遁符)나 목둔부(木遁符) 같은 것은 부적을 사용하고 난 후 다음 행동을 이어갈 수 있는 반면, 땅속으로 파고드는 지둔부는 부적 유효시간이 지나면 다음 행동을 하기가 불리했던 것.
다행히 준혁은 땅속에 숨어드는 게 목적이었기에 적절하게 사용할 수가 있었다.
땅속으로 파고든 다음에는 곧바로 기척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마음먹고 기척을 숨기면 원영기 수사도 자신을 감지하지 못한다는 걸 알았기에 시도할 수 있는 방법.
그렇게 땅속에 숨은 준혁은 신목이 위치한 방향을 가늠하고, 지상에서 파악한 거리를 계산하며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인간이든 영수족이든 수행이 올라갈수록 가장 크게 하는 실수 중 하나가 바로 기감에 모든 걸 의존한다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기감은 영력으로 영기를 파악해 사물을 식별하거나 분별하는 능력이기 때문에 수사가 하는 모든 일은 기감에 걸리기 마련.
하지만 예외도 있었다.
준혁처럼 모든 영기를 차단하고 손으로 직접 땅을 판다면, 땅의 진동을 느끼거나 직접 보지 않은 이상 절대 파악할 수가 없는 법.
수사들이 가진 가장 큰 맹점을 파고드는 준혁이었다.
물론 신통을 가졌거나 특별한 능력을 갖춘 자가 있을 수도 있었지만, 그런 자는 흔한 게 아니었고, 다행히 설토족엔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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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였던 전직을 활용해 4일간 꾸준하게 땅을 파고 들어간 준혁은 어느새 신목의 일부로 보이는 뿌리까지 도착했다.
그 후론 뿌리를 타고 위로 올라가다 일정 부근에 당도한 후 행동을 멈췄다.
이제부터는 무한 잠수에 들어갈 예정.
바람꽃과의 대화에서 준혁이 파악한 바로는 천년화가 깨어나면 모든 병력이 방비를 철저히 함과 동시에 원영기 수사는 두 자매를 암중으로 견제하리라는 것.
그 말은 가장 위험한 원영기의 시선은 신목이 아닌 적호족의 영토로 향할 거라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개화한 후 10일간의 기간 동안, 경비가 가장 약해진 틈이 생길 때를 노려 천년화를 가지고 탈주하려는 계획이었다.
만약 경비에 틈이 생기지 않는다고 해도, 혈둔술과 풍둔술을 연달아 사용한다면 적호족의 영토까지는 무사히 도망갈 수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상대방도 더는 쫓지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다만 아쉬운 건, 영석산으로 향한다고 했던 그 날이 설토족의 방비가 가장 강화되는 천년화가 깨어난 마지막 날이었기에, 완벽하게 달의 정기를 받아들이지 못한 꽃을 꺾어야 한다는 것.
그렇다고 해도 수행을 엄청나게 올려줄 거란 건 뻔히 예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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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혁이 천년수 뿌리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을 무렵.
지상에선 살얼음 같은 감시와 함께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성인 수십 명이 둘러도 맞잡을 수 없을 만큼 두꺼운 천년수 앞.
손바닥만 한 아홉 빛깔을 가진 꽃이 피어있었고, 주기적으로 오색 빛을 뿌리며 신비감을 조성했다.
그 주위로는 강한 기운이 밀집된 말뚝이 수십 개나 박혀있어 다른 이들이 가까이 올 수 없게 막고 있었고, 그 앞엔 결단기 수행을 지닌 다섯 이족 보행 토끼가 매의 눈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살벌한 천년수 주위완 다르게 외곽으로 벗어날수록 수많은 토끼가 음식과 선주들을 나르며 주변에 나눠주고 있었고, 수많은 이들이 다가올 영광의 날을 기원하며 소리높여 종족의 미래를 기원하고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그 순간, 하늘 높은 곳에 걸려있던 달이 점점 크기를 키워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천년수 앞에서 빛을 뿌리며 자리하던 천년화가 차가운 기운을 사방으로 퍼트리며 활짝 펴진 꽃잎 안에서 무언가가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설토족에게 영광을!”
“영원한 종족의 부흥을 위하여!!”
수많은 함성과 기원에 힘입듯, 천년화는 마침내 활짝 피었고, 그 순간 달이 축복을 내리듯 엄청난 월광이 꽃잎으로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미동 없이 우뚝 서 있던 천년수가 급속도로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어딘가로 기운을 빼앗기기라도 하는 듯 쭉쭉 줄어들기 시작했다.
한편 신목에서 멀리 떨어진 설토족과 적호족의 경계 지점.
멀리서 천년화가 개화하며 펼쳐지는 이상 현상을 관찰하던 자들 중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자가 말을 꺼냈다.
그자는 인간과 똑같은 외형이었는데, 특이하게 머리 위로 토끼귀가 뻗어 나와 있었다.
“드디어 개화 하는군요.”
토끼귀 사내의 말에 녹색 피부에 노란 눈동자를 한 자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뢰비 수사.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제 도움 없이도 족인들을 지키실 수 있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제 이대로 돌아가신다는 말로 들립니다. 저는 수사와 영원한 친구가 될 줄 알았거늘.”
설토족 원영기 수사인 뢰비의 말에 상대방이 흐뭇하게 웃음 지었다.
“저 역시 돌아가 보아야지요. 사형이 목이 빠져라 기다릴 겁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자주 왕래할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니 이제 약속하신 물건을 주시지요.”
“크흠!”
뢰비는 무언가 못마땅한 듯 한껏 헛기침을 한 후에야 입을 벌리고는 그 안에서 똑같이 생긴 칼 세 자루를 꺼내었다.
“하나만 묻고 싶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경의 아홉 종족에게 전해지던 이 법기···. 이것에 따로 용도가 있는 것입니까?”
뢰비가 들고 있는 외관이 같은 법기들은 영기 흡수를 도와 수행을 늘리는 데 큰 도움이 되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원영기인 상대방이 수백 년간 도움을 주면서까지 얻으려 하기엔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생각이 들진 않았다.
“모르십니까? 언제부터 영수족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는지는 모르나, 예전부터 전해 오던 말이 있지요.”
“아홉 종족이 하나로 모이면 문이 열린다···. 말씀이십니까?”
“아시는군요.”
“그건 그저 구전으로 전해지던···. 설마 이것이 열쇠라고 여기시는 겁니까?”
뢰비가 세 법기를 들어 올리자 노란 눈동자가 빠르게 그것을 훑었다.
“동일한 법기를 아홉 영수족이 똑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차가운 미소를 내보인 노란 눈의 수사는 빠르게 법기들을 회수하더니 입안으로 삼켜버렸다.
“흐음···.”
“걱정 마십시오. 만약. 이것의 숨은 비밀을 알게 된다면. 설토족을 나 몰라라 하지 않을 테니.”
노란 눈의 수사의 말에 뢰비가 짧게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헌데 나머지는? 혹시 강제로 빼앗을 생각입니까?”
뢰비의 물음에 노란 눈의 수사가 고개를 저었다.
“수사가 건넨 것이 설토족과 비월족, 그리고 마후족의 물건이라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 저희가 보관하던 것을 더하면 총 네 개. 나머지 물건 중 하나는 적호족에게 받아오면 됩니다만 아쉽게도 나머지 네 부족은 이미 이것들을 잃어버린 지 오래지요.”
“흠···.”
“그렇다고 너무 실망하진 마십시오. 다행히 비경 밖 인족 수사가 한 쌍을 가지고 있는 걸 확인했으니.”
“설마?! 인족과 거래를 한단 말입니까?!”
“후후. 우리의 비밀을 풀어낼 수도 있는 것을···. 그깟 인족과의 거래가 문제겠습니까? 그리고 거래를 끝낸 후 그놈이 살아나가는 것은 차후의 문제지요.”
대화가 거듭될수록 뢰비는 고개를 끄덕였고, 노란 눈 수사의 눈엔 살기가 더해갔다.
“나머지 두 개의 행방만 알아내면 됩니다. 이제.”
그렇게 두 원영기 수사의 대화가 마무리될 무렵 천년수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던 기운은 극에 달해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가는 듯 보였다.
다만 준혁이 이들의 대화를 엿보았다면 매우 놀라고 말았을 것이다.
이들이 말한 아홉 영수족의 보물.
그중 네 개가 준혁의 공간대 안에 고이 잠자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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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화려한 개화식, 축제와는 다르게, 땅속에 숨어있던 준혁은 반쯤은 죽어가고 있었다.
‘으윽, 도저히 이대로는 안된다.’
처음 꽃이 개화하기 시작하면서 기운을 방출한 천년수는, 뿌리부터 시작해 기운을 응축하더니 땅속에 연결되어있던 천년화 안으로 모든 것을 쏟아 보냈다.
그 기운의 양은 준혁이 일찍이 경험해 본 적 없는 어마무시한 양으로, 결단기에 오를 때 겪었던 영기구름은 비교가 불가했다.
문제는 준혁이 숨어있던 자리가 천년수에서 천년화로 기운이 이동하는 통로. 딱 그 위치였다는 것. 애초에 이런 현상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준혁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천년수의 기운에 휩쓸리고 말았다.
거대한 기운의 이동에 휩쓸린 순간부터 준혁은 계속해서 기운을 빼앗기고 있었고, 아무리 몸부림을 쳐봐도 막을 수가 없었다.
준혁이 알지 못했던 한 가지.
지상의 엄청난 방비와 다르게 설토족이 땅속을 크게 신경 쓰지 않은 건, 바로 땅속에선 생명체가 버틸 수 없었기 때문.
땅뿐만 아니라 천년수의 상공 역시 거대한 기운에 휩싸이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사실은 500년 전 지둔술로 적호족의 천년화를 훔치려고 하다 크게 혼이난 설토족의 족장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설토족의 족장은 준혁처럼 중심이 아닌 멀리 떨어진 곳에서 타격을 받고 줄행랑을 쳤을 뿐이었다.
‘으으···.’
어느새 준혁은 달의 정기에 정통으로 두들겨 맞아 기운을 탈탈 털리며 너덜너덜한 상태가 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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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남에 따라 준혁은 점점 메말라 갔다.
몸속 영기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빠져나가며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고 있었던 것.
실제로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준혁의 피부위로는 투명한 옥 같은 결정체들이 잔뜩 만들어지고 있었다.
‘달의 정기라는 게 이렇게 강렬한 음기였다니···. 달···. 달?’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악을 하던 준혁은 순간 뇌리에 떠오르는 공법이 있었다.
설악산에서 강만학에게 받았던 월하현적체공과 차경수에게서 얻은 광신체령투선공.
그중 광신체령투선공은 달의 기운을 직접 흡수할 수 있는 월령지체가 조건이었고, 월하현적체공은 달빛 아래서 수련하는 강체 공법이었다.
준혁은 월령지체가 아니었지만, 지금 상황은 달의 응축된 정기가 말 그대로 온몸을 통과하고 있는 중.
‘월령지체가 조건인 이유는 달빛을 직접 흡수할 수 있다는 것 하나뿐이다. 가능할지도 몰라.’
다만 난감한 것은 이 난관을 헤쳐나갈 돌파구일지 모르는 방법을 떠올리긴 했지만,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두 공법을 전혀 익히지 않았던 것.
준혁은 이를 악물고 덜덜 떨리는 손끝을 공간대로 조금씩 움직였다.
만약 공법이 적힌 옥간을 바깥으로 꺼내 들었을 땐 영기로 새겨넣은 문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공간대에 손끝만 가져가 옥간 속 내용을 파악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 비효율적이고 느렸다.
이마에 가져가 확인한다면 순식간에 읽어낼 수 있는 옥간 속 내용이 정신을 집중해 손끝으로만 읽어내려고 하니 그 시간이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도 준혁의 몸 위로는 점점 두꺼운 결정체들이 쌓이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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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을까? 혹은 아주 짧은 순간일 뿐이었을까?
준혁은 온몸이 얼어 죽어가고 감각을 상실했다는걸 알 수 있었다. 광신체령투선공법은 충분히 숙지했지만, 이젠 공법이 운용되기 전에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한다! 반드시 한다! 여기서 이렇게 죽을순 없어.’
철저하게 조사하지 않고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할 수도 있지만, 준혁에겐 지금 후회도 사치.
단 1초라도 서둘러야 했다.
‘온몸을 달의 빛으로 물들여 투선(鬪仙)이 된다.’
이미 온몸엔 달의 정기가 가득했기에, 준혁은 기운을 끌어올 필요도 없이 전신에 가득 차 있는 달의 정기를 그대로 이용하며 공법을 운용했다.
...
하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법이라는 것이 영기만 가득하다고 뚝딱 운용되며 힘을 발휘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준혁은 포기하지 않고 모든 의지를 한 가지로만 모았다.
‘온몸을 달빛으로 물들여···.’
‘온몸을 달빛으로···.’
‘온몸을 달···.’
‘온···.’
그렇게 준혁이 마지막 희망을 부여잡고 모든 의지를 불태우던 심지가 완전히 사라지고 투명한 결정체만이 남은 순간.
그 순간.
화악-
준혁을 완벽하게 감싸고 있던 엄청난 두께의 투명 결정체들이 눈 부신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건 말 그대로 달빛,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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