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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65화 (65/408)
  • # 65 < 천년화 (1) >

    준혁의 일과는 매우 단순해졌다. 해가 떠오르면 소각장에서 혈정단을 가져와 섭취하는 것으로 시작.

    혈정단을 먹고 나면 두 갈래로 나뉘었다. 산들바람이 찾아오는 날은 그녀와 함께 내경 곳곳을 돌아다녔고, 오지 않는 날은 움막 안으로 들어가 백호족의 신통과 각종 술법, 진법을 연구했다.

    그러던 것이 언젠가부터 산들바람의 방문이 뜸해졌고, 그 후론 오직 수련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가끔은 수하들의 술법을 다듬어주었고, 부락 곳곳을 돌아다니며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물론 마을을 구경하는척하며 도망갈 방법을 연구하는 중이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마을을 벗어나는 순간 바람꽃이 알아차렸기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 준혁이 적호족에 합류한 지 4년이 넘어 5년째가 다가오고 있었다.

    +++

    ‘이제 곧 중기에 오를 수 있겠어.’

    소각장 인근의 언덕에 올라 수하들이 시체 나르는걸 바라보고 있는 준혁, 그런 그를 향해 하늘 한쪽에서 무언가가 섬광처럼 다가왔다.

    기감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일.

    “오랜만입니다. 산들님.”

    점점 방문이 뜸해지다, 최근엔 몇 달간 보이질 않았었던 산들바람이 곁에 내려서자, 준혁이 반갑게 맞이했다.

    하지만 반가움과 함께 수다를 뱉어낼 거라고 생각했던 산들바람이 조금은 어두운 얼굴로 말을 건넸다.

    “큰둥아, 미안.”

    “무엇이 말입니까?”

    “그냥, 그런 게 있어.”

    함께한 지 오래되자 산들바람은 때때로 심한 장난도 쳤기에 이번에도 그런 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산들바람의 표정이 펴지지 않더니 급기야 새끼 백호를 품 안에서 꺼내 내밀었다.

    “여기. 임무 수행하러 가기 전까진 같이 지내.”

    “... 무슨 일 있으신 겁니까?”

    아주 가끔씩 만지거나 안을 수 있게 허락해 줬지만, 이렇게 함께 있으라며 새끼 백호를 양보한 적은 처음.

    순간 준혁은 깨달을 수 있었다.

    ‘아! 마치 사형수에게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는 것 같지 않은가···.’

    대충 날을 세어보니 처음 이곳에 온 지 5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준혁은 산들바람이 유난히 어두운 얼굴을 하는 이율 깨닫고는 속으로 피식 웃음이 흘렀다. 그녀가 자신에게 느끼는 감정을 잘 알고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가장 웃어른이 돼버린 산들바람은 족인들에게 떠받듦 당했을 뿐, 여태껏 친구도 사귀어보지 못했었다.

    그런 그녀에게 편하게 대할 수 있는 타 종족 수사가 나타났으니, 유난히 정이 갔던 것.

    더군다나 준혁은 항상 경청과 리액션을 그녀가 좋아할 수준에서 보여주었기에 더욱더 그러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아야 하니 처음으로 내적 갈등이란 걸 겪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혹시 임무가 위험한 겁니까?”

    준혁의 질문에 산들바람이 움찔했다.

    “응? 모, 몰라. 위험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리 약하지 않으니까.”

    준혁이 온화한 얼굴로 바라보며 대답하자, 산들바람은 어느새 울상이 되며 바닥을 차고 허공으로 치솟았다.

    대답 없이 떠나버린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던 준혁도 소각장으로 움직이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구나···.”

    +++

    움막으로 돌아온 준혁은 주위를 진법으로 차단한 후, 새끼 백호를 마주 보고 앉았다.

    “아직 말이 트이려면 시간이 걸리겠지?”

    자비에가 건네준 정보에 의하면 영수족의 말문이 트이는 건 대략 10살 전후.

    영기를 받아들이며 최소한의 수행을 갖췄을 때 비로소 영성이 트이고 말을 할 수 있었다.

    준혁에겐 새끼 백호 전용으로 남겨진 영단도 있었지만, 그것을 사용하기에도 백호는 너무 어리고 약했다.

    준혁은 기감으로 백호를 샅샅이 훑고 나서 영기까지 쏘아 보내 혹시나 금제라도 걸려있는지 자세히 조사했다.

    “다행히 아무 짓도 하지 않았군.”

    조사가 끝나자 오랜만에 백호를 안아 들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바깥에서 준혁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대장님. 대장로께서 부르십니다.”

    조금 전 산들바람이 다녀간 걸 보면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이제 임무에 대해 알려주려는 것인가?’

    준혁은 등위에 새끼 백호를 태우고는 곧장 바람꽃의 거처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

    마을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

    바람꽃과 산들바람이 머무는 곳에 도착한 준혁은 나무 둥치에 앉아있는 바람꽃에게 다가가며 인사했다.

    “부르셨습니까?”

    “응. 왜 불렀는지는 예상하지?”

    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 앞에 겸손하게 시립 했다.

    “예전에 말씀하셨던 임무 때문 아닙니까?”

    “맞아. 이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경청하겠습니다.”

    준혁의 태도에 흡족한 듯 웃어 보인 바람꽃은 절벽으로 걸어가 멀리 떨어진 산맥을 주시했다.

    “저기 보이지? 저 끝에 보이는 우뚝 솟은 영석산 아래에 신비경이 있어. 그곳에 삼청조(三聽鳥)라는 녀석이 봉인돼 있지.”

    “삼청조···.”

    “그 녀석을 사로잡는 일을 돕는 게, 네 역할이야.”

    “알겠습니다.”

    준혁이 아무 말 없이 순순히 대답하자, 오히려 바람꽃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안 궁금해? 그 녀석이 어떤 놈인지, 무슨 능력이 있는지, 포획과정에서 목숨이 위험하진 않은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면 알려주셨겠지요.”

    “흣, 하긴 넌 그런 녀석이었지. 보름 후니까 준비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헌데···.”

    대답하는 준혁이 말끝을 흐리자 바람꽃이 말해보란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중요한 일인 것 같은데 왜 바로 가지 않으시고 시간을 끄시는 겁니까?”

    “흠···.”

    바람꽃은 잠시 고민에 빠지다 말을 이었다.

    “하긴 너도 그동안 설토족과의 전쟁에서 공이 적진 않으니···. 알아둬도 되겠지. 우리가 왜 그놈들과 싸우는지는 알지?”

    “네. 천년수 때문 아닙니까?”

    “맞아. 천년수. 그 천년수에서 피어나는 천년화가 5일 후면 개화해.”

    “오일후···.”

    “그때가 되면 설토족은 모든 병력을 모아 마을을 방비하는 데만 애쓸 거야. 천년화는 개화한 후에 10일간 달의 정기를 받아야 하거든. 만에 하나라도 그 기간 동안 나와 산들이가 쳐들어와 천년화를 훔쳐 갈까 봐 단단히 준비하겠지.”

    ‘그래서 그게 뭐?’라는 눈빛으로 준혁이 바라보자 바람꽃이 말을 이었다.

    “그때 우린 삼청조를 잡으러 갈 거야. 영석산은 설토족이 철통같이 지키는 곳이거든. 천년화가 꽃피는 기간이 아니면 몰래 들어갈 방법이 없어.”

    +++

    바람꽃과 대화를 마치고 온 준혁은 소각장 한켠에 앉아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이 멍했을 뿐, 머릿속은 급속도로 회전하는 중이었다.

    ‘천년화가 피었을 때 몰래 숨어 들어가 삼청조라는 걸 잡는다고? 그게 무엇이길래?’

    준혁이 생각했을 땐, 원영기로 수행을 올려주는 천년화보다 가치가 있는 건 상상이 가질 않았다.

    만약 두 자매가 무리하더라도 강제로 천년화만 손에 넣는다면, 그 후론 세력의 균형을 완전히 무너트릴 수도 있는 일.

    물론 두 자매가 섣불리 나서지 않는 것이 설토족을 돕고 있는 다른 원영기 때문이라 하지만, 그렇다 한들 준혁이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천년화를 입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 같았다.

    ‘바람꽃은 천년화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어···. 그러면서 전쟁은 계속한다?’

    고민을 거듭하던 준혁은 영석산의 위치를 떠올리다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때마침 수하중 하나가 시체를 수급해오자 급하게 그에게 물었다.

    “자네. 혹시 영석산에 대해 알고 있나?”

    “영석산이면 설토족과의 경계에 있는 그곳 말입니까?”

    “그렇네. 혹시 그곳 아래 영석 광맥이 존재하나?”

    “그렇습니다. 산맥 안쪽으로 거대한 광맥이 있습니다. 아마 전쟁이 아니었다면 설토족이 이미 전부 캐갔을 겁니다.”

    “알았네. 일보게.”

    ‘그거였구나!’

    설토족과의 경계가 수백년에 걸쳐 변경된 걸 보면, 처음 전쟁은 신목 때문이었을지 몰랐다. 하지만 신비경을 발견하고 그곳에 대해 알고 난 후론 목적 자체가 바뀐 게 분명했다.

    그리고 영석산의 신비경은 적호족만이 발견했고, 설토족은 존재 자체를 모를 가능성이 컸다.

    그렇기에 그들이 광맥을 개발하다 신비경을 발견하지 못 하게 하려고 지금껏 전쟁을 해온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때 준혁의 머릿속으로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껏 도망갈 틈을 보고 있었는데, 생각대로만 풀린다면 이곳을 벗어나는 것은 물론이고, 기연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준혁은 수하 한 명이 복귀하길 기다렸다가 명령을 내리고는, 바로 움막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와 주위를 진법으로 몇 겹이나 두른 후에, 움막 중앙에 새끼 백호를 내려두었다.

    그리곤 종속의 인을 강하게 자극하며 백호에게 명령을 내렸다.

    “나를 믿고 이곳에 가만히 있어야 한다. 알겠지?”

    새끼 백호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준혁은 피식 웃고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공간대에서 진법 깃발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식검을 소환해 움막 중심에 꽂아 넣었다.

    잠시 후, 진법 깃발을 주변에 꼽고, 입을 벌려 정혈 한 방울을 뱉어냈다.

    그것의 정체는 바로 바람꽃이 심어둔 정혈.

    준혁은 정혈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식검 바로 위, 진법이 설치된 중심으로 가게 했다.

    순간, 식검이 부르르 떨더니 그곳에서 백호의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사방으로 흩어지던 기운이 움막 중앙으로 모여들며 정혈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 모습을 확인한 준혁은 공간대에서 영석을 무더기로 꺼내, 진법을 가득 메울 수 있게 특정 위치마다 영석을 심었다.

    ‘이 정도면 보름은 버티겠지.’

    준혁이 한 행동은 바람꽃을 속이기 위한 것.

    식혈만복의 정혈 정제법과 피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혈단법을 익힌 준혁은 예전부터 마음먹는다면 정혈을 언제든 제거할 수가 있었다.

    다만 그렇게 하지 못한 건, 정혈이 준혁에게서 벗어난 순간 바람꽃이 알아차릴 수도 있었기 때문.

    하지만 지금 바람꽃의 정혈은 식검이 내뿜는 백호의 기운에 둘러싸여 있기에, 외부에선 절대 그것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생명을 가진 새끼 백호까지 진법 안에 있었기에, 기감으로 훑어보는 것만으로는 아무리 원영기라 하여도 내부의 상황을 짐작하지 못할거라는 걸 준혁은 확신했다.

    만약 이대로 준혁이 도망친다면, 바람꽃은 보름 후 약속한 날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 터였다.

    “500년에 한 번 찾아오는 기회인데, 놓칠 순 없지.”

    하지만 몰랐으면 모를까. 원영기에 오를 기회를 준혁은 모른 척 지나칠 수가 없었다.

    산들바람이 찾아온 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준혁의 계획이 변경되는 순간이었다.

    +++

    움막에 안전장치를 마련한 준혁은 다시 백호족의 모습으로 돌아와 소각장을 벗어났다.

    한참을 이동하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동해 적호족으로 변신했고, 바로 수행을 축기기 초기로 만들었다.

    “이렇게 써먹게 될줄은 몰랐군.”

    결단기에 오르며 흡수한 바람꽃의 정혈.

    준혁은 아낌없이 정혈을 나눠준 바람꽃을 떠올리다 빠르게 설토족이 위치한 곳으로 쏘아져 나갔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기감을 넓게 퍼트리며 고위 수사를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한나절을 꼬박 날아온 준혁은 멀리 신목이 보이자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한참을 이동해 설토족 전사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그때부턴 백호둔영을 사용해 몸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고속이동비행술인 풍둔술과 다르게 백호둔영은 은둔술의 일종.

    백호둔영으로 존재감이 사라지게 만든 준혁은 연기기 축기기 수사들을 교묘히 피해가며 신목이 위치한 곳으로 계속 이동했다.

    그러길 한참.

    신목을 향해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간 후엔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당장 원영기로 느껴지는 기운은 보이질 않았으나, 결단기 영수의 기운이 신목을 중심으로 강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다섯.

    준혁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당황하지 않고 부적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는 빠르게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며 이마에 부적을 붙이고 수결을 맺었다.

    지금부터는 매우 섬세하게 기운을 조정해야 했기에 아무래도 영수의 몸보다는 인간의 몸이 나을 거라는 판단 때문.

    부적을 붙이고 수결을 맺은 순간, 준혁의 몸이 황토색으로 빛나는가 싶더니 쑤욱 하고는 땅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신목을 지키던 결단기 토끼 중 한 마리가 날아와 주위를 살피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하네···. 분명 술법이 발동되는 걸 느낀 것 같았는데···.”

    이족보행을 한 결단기 토끼는 의구심이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다, 입김을 내뱉고는 두 눈을 감았다.

    한참 동안 그렇게 주위를 배회하던 토끼는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는 혀를 차며 신목으로 돌아갔다.

    “내가 예민했나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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