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64화 (64/408)
  • # 64 < 재결단 (3) >

    말을 하는 준혁의 시선은 바람꽃을 향해 있었다.

    “1년 가까이 이곳에 있다 보니 어느새 수하들과 정이 들었습니다. 다른 수사들과도 제법 오고 가며 안부를 묻기도 하고요. 하여 앞으로도 이곳에 남아 소각일을 맡고 싶습니다. 그리고 허락해 주신다면···. 4년 후에 있을 임무가 끝난 후에도···. 적호족으로 남고 싶습니다···.”

    준혁이 말끝을 흐리며 눈치를 살피자, 바람꽃과 산들바람의 눈가가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특히 산들바람은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는지 재빨리 시선을 돌려버렸고, 바람꽃만이 금세 신색을 바로 했다.

    “그래, 하던 일은 계속해. 하지만 이곳에 남고 싶다는 얘긴···. 임무가 끝난 후에 다시 하자. 가자 산들아.”

    “응. 언니.”

    수다 삼매경을 펼칠 줄 알았던 산들바람은 얼굴에 그늘이 진 채 바람꽃과 함께 떠나가 버렸다.

    ‘역시 나를 처리할 생각이었구나.’

    순간적으로 당황한 산들바람의 모습으로 유추하자면, 분명 ‘임무 후’라는 말에 크게 동요했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은근슬쩍 물어보아도 말을 돌리던 걸 보면, 그 임무의 중요도를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

    그러니 그 중요한 일을 목격했든, 실행했든, 일이 끝나고 난 뒤 살려줄 리가 없었다.

    그녀들이 떠나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준혁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소각장을 향해 돌아섰다.

    “그래, 그 정도가 우리의 거리지.”

    아무리 산들바람과 가까워지고 있다고는 하나, 준혁은 잊지 않고 있었다.

    자신은 그저 그녀들의 기분에 따라 언제든 죽을 수 있는 하찮은 생명일 뿐이라는 것을.

    ‘우선 혈정단부터 챙기자.’

    그러니 그녀들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빠르게 강해지는 것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최소한 원영기를 따돌리고 달아날 수 있을 만큼은.

    +++

    소각장에 들어서자 나무 울타리로 가려진 공터에 세 명의 수하가 준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세 명은 적호족 수사임은 틀림없었으나, 그동안 준혁에게 영석을 받는 것 외에도 수련에 관한 것부터 술법을 운용하는 것까지, 수많은 도움을 받으며 충실한 수하가 되어있었다.

    수하들 주위로는 수많은 시체 탑이 세워져 있었는데, 꽤나 널찍하던 공터가 가득 메워질 정도였다.

    “드디어 나오셨습니다. 대장.”

    세 명 중 가장 빠릿한 여우 한 마리가 앞으로 나서며 말을 이었다.

    “대장 명령대로 빙술(氷術)로 보존하긴 했는데, 모아두는 데도 한계가···. 아마 조금만 더 늦게 나오셨으면 어쩔 수 없이 소각하려고 했습니다.”

    “잘했네. 내 자네들이 얼마나 수고를 했는지 알고 있어. 두 달간 이 많은 시체에 빙술을 펼치려면 적지 않게 고단했겠지.”

    준혁은 적당한 칭찬으로 치하하며 공간대에서 영석 120개를 꺼내 그들에게 나눠주었다.

    “두 달간 밀린 영석이네.”

    “감사합니다. 헌데 양이···.”

    “그대들의 고생을 알기에 두 배로 준 것이네. 그럼 이제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다시 회수하러 가보게나.”

    준혁의 축객령에 세 명 중 두 명의 영수는 각자 맡은 지역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대표 격으로 나섰던 자가 떠나지 않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대기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하게.”

    준혁이 결단을 맺으러 가기 전 내린 명령에 의문을 가진 여우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을 꺼냈다.

    “처음 대장과 약속한 것이 있기에···. 비밀을 지키며 시체들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이 많은 양을 바로 소각시키지 않고 모아두라고 한 명령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혹시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의 질문은 아마 개인의 궁금증이 아닐 터였다. 다른 수하들은 물론이거니와, 어쩌면 바람꽃이 궁금해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들이 아무리 조심해서 술법을 사용하고 시체를 보관한다고 해도, 이 많은 양의 사체가 쌓여있다면 도저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것.

    또한 아무리 가까워진다 해도, 결국 준혁은 타 종족의 객(客)일 뿐, 혈족인 그들과는 처음부터 완전히 신뢰를 주고받는 사이가 될 순 없었다.

    아무리 맹약의 부적을 사용했다 한들, 원영기 수사가 개입한 순간 그건 의미 없는 물건일 뿐이니까.

    그랬기에 준혁은 이미 오래전 이와 같은 질문이 나왔을 경우를 대비해 준비해놨던 얘기를 꺼냈다.

    ‘산들바람의 얘기가 도움이 컸지.’

    “흠···. 내가 익히고 있는 것과 관련된 것이니 비밀을 지켜주겠나?”

    “물론입니다!”

    “자네 혹시 혈옥수(血玉手)라고 들어보았나?”

    산들바람에게 들었던 혈옥수라는 경지.

    전장을 누비는 영수들에겐 전설과도 같은 신체 단련법. 시체를 태워 나온 정수를 몸에 바르면 피부위로 살기가 덧씌워지고, 그것을 수만 수십만 번 반복하다 보면 신체가 옥처럼 투명해지며 혈옥수가 된다고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혈옥수는 살기 자체로 만들어진 능력이었기에, 그 어떤 방법으로도 막을 수가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흔히 혈옥수라 하면 손을 단련하는 방법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손을 가장 자주 쓰기에 그럴 뿐, 신체 어느 곳이나 단련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다만 그 경지에 도달한 자는 구전으로만 전해질뿐 실존하진 않았다.

    준혁의 질문에 수하는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설마!! 그것을 익히고 계신 겁니까?”

    “그렇네. 해서 처음부터 소각 임무를 자처한 것이네. 비밀은 지켜줄 테지?.”

    “예!”

    한껏 예를 갖추고 떠나가는 수하를 보며 준혁은 구덩이로 다가갔다.

    다른 진법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으나, 구덩이 안쪽에 숨겨둔 혈단법은 사라진 지 오래.

    준혁은 입김을 불어 진법을 활성화시키고 안쪽으로 영석을 쏘아 보냈다.

    이제 두 달간 모인 영수의 시체를 혈정단으로 만들 시간이었다.

    +++

    ‘혈옥수···. 그래서 아무도 안 하려고 한 소각일을 맡은 거였어.’

    바람꽃은 절벽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다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갤 돌렸다.

    그곳엔 굳은 다짐을 한 것처럼 한껏 결연한 표정의 산들바람이 서 있었다.

    “언니! 나 중경에 다녀올게!”

    “갑자기? 왜?”

    “큰둥이를 제물로 바칠 순 없어! 내가 다른 인족을 잡아 올게!”

    “...”

    철없는 동생의 말에 바람꽃이 작게 한숨 쉬었다.

    “산들아, 중경이라고 결단기 인족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야. 하물며 찾는다고 해도 잡는 건 또 다른 문제지. 게다가 다른 원영기라도 있다면 어쩔 거야? 그런 건 생각 안 해봤어?”

    “몰라 몰라! 그럼 언니도 같이 가면 되잖아!”

    무작정 떼를 쓰는 동생 때문에 바람꽃의 눈가가 파르르 하게 떨렸다.

    +++

    며칠 동안 쉬지 않고 혈정단을 만든 준혁은 소각장 공터가 텅 비자, 곧바로 움막 안으로 돌아왔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산들바람 때문에 도통 시간을 만들지 못하다가, 며칠 전부터 그녀가 보이지 않자 기회다 싶어 빠르게 혈정단 제작을 끝마쳐 버린 것.

    그 많던 영수의 시체가 전부 붉은 구슬이 되어 공간대 안에 쌓이자,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산들바람이 방해하지 않을 때 꼭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준혁은 움막에 화폭뇌진을 설치하고 방형진과 방음진을 겹겹이 쌓았다. 그리고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식검을 소환했다.

    백호족의 모습으로도 가능했지만, 더 정교한 조정을 위해선 아직까진 인간의 몸이 훨씬 자연스러웠던 것.

    준혁은 식검을 잡은 채 의지를 집중했다.

    “인지경.”

    순간 머리 위 공간이 갈라지며 인지경이 나타나더니, 준혁의 의지에 따라 식검 안으로 빠르게 흡수돼 사라져 버렸다.

    결단기를 다지며 수련할 때 발견한 현상이지만, 밖에서 느껴지는 두 소녀의 인기척 때문에 이상 반응을 확인한 순간 곧바로 두 무구를 소환 해제시켜버렸었다. 이제는 이게 무슨 현상인지 확인해 보려는 것.

    ‘여기까진 저번에도 확인했지.’

    준혁은 식검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파동을 뿌리는 인지경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의지를 조정해 두 법보가 공명하게 만들었다.

    그 순간.

    식검이 손에서 벗어나 준혁의 머리 위로 이동했다.

    인지경이 나타날 때처럼 공간을 가르는듯한 모습에 놀라워하려는 사이.

    식검이 미칠듯한 빛을 뿜어내더니 준혁의 머리 위로 빛기둥을 쏘아 보냈다.

    그것은 인지경을 발동할 때와 똑같은 현상.

    “이럴 수가!! 이건!!!”

    하지만 현상이 같다고 결과까지 같진 않았다.

    평소 주변 영기를 끌어와 시전자의 영기 총량을 서너 배 늘려주던 인지경의 힘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있었다.

    ‘두 배? 그전보다 두 배는 강력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스르르륵-

    허공에 떠 있던 식검 뒤로 조잡하게 생긴 목각 인형이 가부좌를 한 채 나타났다.

    ‘법기 현상? 아니다!’

    “인지괴!. 그래! 이게 식검에게 먹히기 전 모습이구나!”

    손목 두께의 일자 통나무를 마디마디 연결해 만든 것처럼 보이는 조잡한 목각 인형은 아무 감정도 없는 텅 빈 눈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준혁은 몸 안의 기운이 결단기 중기를 넘어 후기에 다다르려고 하는 걸 확인하고는 식검에 집중해 인지경과 분리시켰다.

    그러자 목각 인형 환영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펑 하고 사라져 버렸다.

    ‘대단하구나.’

    목각 인형 환영이 완전히 사라지자, 이번엔 분광소를 소환하려다 움찔하고 동작을 멈췄다.

    ‘내가 무얼 지나친 것 같은데···.’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생각이 목각 인형의 텅 빈 눈까지 미치자, 그제야 준혁은 깨달은 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쳤다.

    “그래! 그때 경매장에서 귀원패! 그때 나타난 환영은 분명 눈빛이 살아있었어! 설마? 그건 적마처럼 살아있는 상태에서 무구로 변해있던 건가?”

    궁금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확인을 할 수 없으니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만약 귀원패 안에 있는 백팔마선이 살아있다면, 그것을 통해 식검을 포함한 다른 법보들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기회가 된다면 꼭 귀원패를 손에 넣어야겠다고 다짐한 준혁은 잠시 마음을 다스린 후, 분광소를 소환했다.

    슈욱-

    눈앞 허공을 가르듯 나타난 분광소.

    준혁은 다시 한번 식검으로 의지를 내비쳤고, 인지경이 그랬던 것처럼 분광소는 빛을 뿌리며 식검 안으로 흡수돼 사라졌다.

    준혁은 두 무구가 하나로 합쳐졌지만, 그 안에서 하나 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의지로 공명을 일으켰다.

    화악-

    삐이이익-

    그 순간 식검이 빛을 뿌리며 동시에 기이한 피리 소리를 냈다.

    ‘응? 이건 전혀 모르겠군.’

    빛덩이로 변한 식검은 분광소의 능력을 사용하는 게 분명했는데, 의지를 쏘아 보내도 아무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심지어 원래 능력인 증식도 되질 않았다.

    결국 한참을 살펴본 준혁은 입맛을 다시며, 분광소를 식검에서 분리한 후 공간대에 집어넣어 버렸다.

    그리고는 다음 순번인 적마도를 소환했다.

    붉은 도신에서 광채를 뿜어대는 적마도는 소환과 동시에 식검에 흡수되었고, 준혁의 의지에 따라 공명을 시작했다.

    잠시 후, 옅은 빛무리가 식검을 감쌌고, 빛이 사라지며 형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말??”

    식검이 떠 있던 자리엔 어느새 붉은 몸체에 붉은 갈퀴를 가진 말(馬), 말 그대로 적마(赤馬)가 서 있었다.

    “......”

    그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연기를 했던 준혁도 이번만큼은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한참 동안 말없이 붉은 말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는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몸체를 만져보며 살폈다.

    “살아있는 게 아니었구나···.”

    처음의 당황이 가시자 적마의 상태가 일반 법기들처럼 그저 외형에 불과하단 걸 깨달았다.

    그리고 손을 대, 영기를 흘려보내자 여느 법기들처럼 적마의 능력을 알 수 있었다.

    ‘이동 신통.’

    적마는 적마도일 때와 마찬가지로 이동기를 가진 무구.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법보 특유의 기운과 기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설마 이게 진짜 적마의 모습인가?”

    한참 동안 적마를 살피던 준혁은 움막 안에선 그 능력을 확인해 볼 도리가 없다는 걸 깨닫고는 식검과 분리해 버렸다.

    그 후 팔목에 문신으로 남아 있는 공천령을 식검에 흡수시켜보려 했으나, 원래부터 문신이었던 것처럼 어떤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이게 끝일까?”

    문득 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리고 그건 준혁이 내심 바라는 기대이기도 했다.

    축기기 때 처음 반응을 보인 세 법보는 결단기에 이르러 또 한 번 새로운 변화를 보였다.

    그렇다면 원영기에 이르렀을 때 또다시 변할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아니더라도, 그 어떤 보물들도 견줄 수 없는 것들이 틀림없었지만, 만약 또 한 번 능력이 향상된다면 그땐 법보를 뛰어넘는 그 무언가가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만약 정말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정말 그렇다면 말이다.

    과연 그 누가 있어 이런 무구들의 주인인 자신의 행보를 막을 수 있겠는가.

    준혁 안에서 조그마한 웅심(雄心)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