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 재결단 (1) >
다음 날 아침.
준혁은 시체를 회수하기 위해 흩어진 수하들을 뒤로한 채 구덩이로 다가가 짧게 입김을 불었다.
그 순간, 허공으로 붉은 단약 하나가 쏙- 하고 나타나더니 준혁 앞으로 천천히 날아왔다.
단약을 잡아챈 준혁은 진법안으로 영석 하나를 쏘아 보낸 후,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움막 안으로 이동했다.
누군가 뒤에서 그런 준혁을 보았다면, 호랑이 엉덩이가 씰룩씰룩하는 것이 꽤 기분이 좋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움막 안으로 들어선 준혁은 지체없이 단약을 삼키려다 멈칫했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공법을 운용해야 하나?’
영수로 변한 상태이기에 단의 위치가 심장 어림으로 바뀌어있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 수 없었기에, 준혁은 거듭 고민하다 결국 공간대에서 깃발을 몇 개 더 꺼내 들었다.
변신술이 적용되는 건 순식간이라 들킬 염려는 없었지만, 만에 하나가 있기에. 한 번 더 방비를 하려는 것.
움막에 설치된 방음진과 방형진 위로 화폭뇌진(火爆雷陳)을 겹쳐 설치했다.
누군가 강제로 방형진을 제거하려 든다면 화폭뇌진이 바깥으로 터져나가며 주변을 날려버릴 터.
그 시간이면 다시 백호족으로 변할 시간은 충분히 벌 수 있었기에, 준혁은 안심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시간을 끌어 좋을 것이 없기에, 곧바로 혈정단을 입안에 집어넣고 공법을 운용했다.
혈정단은 빠르게 녹아 사라지며 열감이 느껴지는 은은한 파동을 만들었고, 이내 준혁의 피부위로 옅은 붉은 광채가 만들어지다 피부안으로 스며들며 사라졌다.
이미 혈단법을 이용해 한번 정제를 거쳐서인지, 예상보다 빠르게 흡수되더니, 순식간에 공법 운용을 마칠 수가 있었다.
‘흐음. 생각보다 효과가 좋다. 이 정도면 결단기를 제대로 만드는데 반년이면 충분하겠어.’
다만 일반적인 약초로 만든 단약과 다르게, 탁기가 만들어져 몸 안에 흩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단약 흡수를 끝내고 곧바로 백호의 몸으로 돌아가려던 준혁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수결을 맺었다.
식혈만복을 아예 익히지 않았다면 모를까? 청혈을 흡수하기 위해 공법을 완벽하게 익힌 준혁은 식혈만복에 나와 있던 혈피갑을 떠올리며 탁기를 따로 모아 움직였다.
수결이 끝나자, 준혁의 피부위로 눈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세한 핏빛 갑옷이 만들어졌다.
‘혹시나 했는데! 탁기로 혈피갑을 만들 수 있구나! 게다가 혈피갑이 운용되는 동안은 몸 안의 탁기를 느낄 수도 없다니!’
신기하게도 혈단법의 유일한 부작용이 식혈만복 공법과 만나자 장점으로 활용할 수 있겠단 판단이 들었다.
‘만약 두 공법을 하나로 합칠 수만 있다면?’
고심을 거듭하던 준혁이 혈피갑을 해제하자, 탁기는 원래대로 돌아와 몸 안에 쌓였다.
‘이것에 대해 연구해볼 가치가 충분하다! 만약 성공만 한다면 혈단법의 유일한 약점을 보완할 수 있어.’
뜻하지 않게 보물을 발견한 듯 준혁은 날아갈 것 같은 기분으로, 변신술을 사용해 백호족으로 돌아왔다.
탁-
몸이 바뀌며 바닥에 떨어진 공간대를 보면서도 생각을 이어갔다.
‘자비에의 말대로라면 변신술이 익숙해지면 이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했었지?’
변신술을 사용할 때마다 공간대를 주우러 다닐 수는 없었으니 빠른 시간 안에 수련이 필요해 보였다.
그때 문밖으로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준혁을 불렀다.
“야, 큰흰둥이!”
경박하고 장난기가 가득한 걸 보니 두 자매중 동생인 산들바람 수사.
준혁은 빠르게 입김을 내뱉어 화폭뇌진을 제거하고는 움막 밖으로 나갔다.
“산들바람님 오셨습니까.”
“왔으니까 부르지? 너 바보야?”
“......”
하얀 털이 수북이 박힌 외투를 걸친 꼬마 소녀는 커다란 두 눈을 땡글거리며 생각 없이 웃고 있었다.
그녀의 품 안엔 새끼 백호가 안겨있었는데, 무언가를 맛있게 먹는 듯, 준혁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일이신지요?”
“너 할 일없지? 나랑 같이 잠깐 가자.”
“죄송하지만, 소각 임무를 맡고 있는지라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준혁이 정중하게 거부하자 소녀가 가소롭다는 듯 웃음 새는 소리를 냈다.
“킥, 다 알거든? 인족들이 쓰는 진법으로 자동 소각 할 수 있게 만들었잖아? 언니가 다 말해줬어.”
“...알고 계셨군요.”
‘역시···. 어디선가 보고 있구나.’
준혁은 입맛을 다시며 시선을 살짝 피했다. 나름 무안하다는 연기를 시전한 것.
그리고 소녀는 준혁의 연기에 깜빡 속아 넘어갔다.
“무안해 할 거 없어. 다들 편하게 놀고 싶은 거지 뭐. 안 그래? 암튼 가자.”
결국 준혁은 소녀의 뒤를 쫓아 마을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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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말이 많았다.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정말 단 한 순간도 입을 쉬지 않았다.
“그래서 말야. 내가 그때 그 토끼놈을 잡아서 말야. 응? 듣고 있어?”
“... 예. 이번이 스물일곱 번째 토끼 사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헤에. 잘 듣고 있구나.”
“그런데 산들바람님. 저흰 어디로 가고 있는 겁니까?”
준혁의 질문에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던 소녀가 무슨 소리냐는 듯 반문했다.
“응? 가긴 어딜 가?”
“계속 이동 중이지 않습니까?”
“가만히 있으면 심심해서 움직인 건데?”
“......”
준혁은 난생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잠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 뒤로도 산들바람은 이름처럼 사방을 쏘아다녔고, 준혁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뒤를 계속 따르며 대화상대가 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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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날아가던 준혁의 눈에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는 나무 한 그루가 들어왔다.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랬기에 더 체감할 수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거대해, 주변에 있는 나무들을 잡초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준혁이 비행을 멈추고 나무가 서 있는 방향을 바라보자, 산들바람이 옆으로 다가와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뭐해? 가만히 서서?”
“산들바람님. 저것은 무엇입니까?”
준혁의 시선을 따라 고갤 돌린 산들바람은 그것도 모르냐는 듯 준혁을 구박했다.
“바보야. 몰라? 저건 신목이잖아.”
“신목?”
“우리가 저 망할 토끼들하고 싸우는 게 저것 때문이잖아.”
“아···. 혹시 자세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 좋아.”
산들바람은 본격적으로 수다를 떨 생각인지, 주변을 탐색하다 가까운 언덕으로 이동해 자릴 펴고 앉았다.
준혁이 곁에 내려앉자 마치 모터가 달린 것처럼 주둥이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진짜 신목을 몰라? 신목이 뭐냐면···.”
신목(神木).
300년 전만 하더라도 적호족의 영토에 있었다던 신목은, 모든 영수가 탐내는 것 중 하나였다.
신목이 영수족의 보물이 된 이유는 하나의 꽃 때문이었는데, 500년마다 한 번씩 개화하는 그 꽃을 먹게 된다면, 달의 정기를 이어받아, 순식간에 원영기에 오른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돌았기 때문.
‘청명이 말한 구색초!’
“정말 그 꽃을 먹게 된다면 손쉽게 원영기에 오른단 말입니까?”
“내가 그렇게 원영기에 올랐으니까.”
“!!!”
“단 결단기 후기에 올라야 하고, 다른 원영기 수사가 도와줘야 해. 꽃 자체에 엄청난 기운이 스며들어 있어서 혼자서 해결한 순 없어.”
대단한 일이었다. 축기기가 쥐구멍이라면, 결단기에 오르는 건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
원영기는 그 바늘구멍을 수십 번 연달아 통과해야 이룰 수 있는 경지라고 평가받을 만큼 오르기 힘든 경지.
오죽하면 그 많은 인간들 중 원영기가 오직 7명뿐이겠는가.
준혁이 멀리 떨어진 나무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키고 있을 때, 산들바람이 윗입술을 뒤집으며 으르렁거렸다.
“질문은 끝나고 해! 내가 어디까지 얘기, 아 맞다. 그래서 원래 우리 영토에 있던 신목이었는데···.”
산들바람의 얘기를 요약하자면 이랬다.
원래 신목이 있던 자리는 적호족의 영토였다. 그러던 것이 300년 전 설토족이 대규모로 침공을 해왔고 단번에 신목이 자라나는 영토를 빼앗긴 것.
경계를 맞대고 있던 두 종족의 힘의 크기는 엇비슷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적호족이 살짝 우세한 정도.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갑작스레 설토족에 새로운 원영기가 나타났고, 단번에 밀리고 만 것.
바람꽃은 새로운 원영기가 타 종족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게 신목을 빼앗겼다고는 하나, 만약 신목의 꽃을 이용해 또 다른 원영기가 나타난다면 세력의 균형은 더 크게 깨지게 될 테니.
그랬기에 적호족은 영토를 되찾기 위해 계속해서 무리를 하는 중이었다.
“그 신목의 꽃이 개화하는 날이 5년 뒤란 말입니까?”
“응. 그때까진 어떻게든 전쟁에서 이겨야 해.”
“그럼 제가 해야 할 일이란 게···. 그것과 관련된 겁니까?”
“응? 너? 너는 다른 일인데?”
준혁은 기회라 생각해 빠르게 되물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응? 그게 뭐냐면 설토족의 영석산 아래 비밀공간이 있는데, 그곳에 가서 삼청···. 야! 너어! 내가 바본 줄 알아?! 언니가 말하지 말랬거든!”
산들바람의 매섭게 치켜뜬 눈빛을 받으며 준혁은 입맛을 다셔야만 했다. 그리고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그럼 스물아홉 번째 토끼 사냥에 대해 들려주십시오.”
“응? 맞아 맞아. 아까 그 얘기 했지? 그래서 내가 그 토끼 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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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음공에 가까운 수다를 견딘 준혁은 떠나는 그녀가 남긴 ‘내일 또 봐~’라는 말에 온몸에 소름이 돋은 채 소각장으로 돌아왔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워 혈단법은 멈춰있었지만, 영석으로 인해 진법 자체는 유지되어 있었다.
“대장님. 시체를 넣어도 불이 붙지 않습니다. 뭔가 잘못된 것 아닙니까?”
“아니네. 산들바람님과 잠깐 일을 보고 오느라 내가 신경을 못 써서 그런 거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수하들을 돌려보낸 준혁은 혈단법을 다시 가동하고 움막으로 이동했다.
‘그녀와 돌아다닌 건 시간 낭비가 아니다.’
처음엔 곤욕스러웠지만,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설토족과 적호족, 그리고 내경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얘기를 접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구색초라 알고 있던 것의 진짜 정체를 알게 된 것. 그건 그 어떤 기연보다도 소중한 정보였다.
‘원영기라니···.’
+++
6개월 후.
“산들님,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응, 큰둥이 너도~”
어느새 제법 친밀해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호칭도 변해있었다.
인족에 대한 분노를 제외하곤 산들바람은 그냥 천진난만한 생각 없는 아이였다.
놀기 좋아하고 장난을 즐겨하는.
‘분명 수백 년은 살았을 터인데···. 사회 규범에 얽매이지 않아서인가?’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인간의 관점으로 이해하려는 게 잘못된 것. 그녀는 적호족의 적통을 잇고 있었기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장 어른이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성을 못 느꼈을 터였다.
산들바람이 떠나고 나자, 준혁은 움막 안으로 들어와 화폭뇌진을 설치했다.
6개월간 꾸준히 복용한 혈정단 덕분에 이미 기운은 완벽하게 차오른 상태.
이젠 결단기를 완성해, 수행을 온전하게 만들어야 했다.
준혁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움막 가운데 좌정하고, 공간대에서 혈정단 10알을 꺼내 들었다.
마지막 한 발을 내딛기 위해 10일간 섭취를 중단하고 모아놓은 혈정단.
‘집중해서 단번에 끝낸다.’
잠시 그것들을 내려다본 준혁은 고민 없이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혈정단은 입속으로 들어가자 빠르게 녹아 전신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혈단법을 운용하자, 원기들이 자리를 찾듯 온몸에 퍼져있는 정혈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고, 급기야 정혈의 기운이 포화상태로 접어들며 이상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이상 반응을 보인 정혈들이 격류처럼 휘몰아 움직이며 몸 안에서 작은 폭발을 일으키기 시작하자, 준혁은 의지를 다지며 기운을 강력하게 제어했다.
그 순간, 절반 정도 완성돼있던 결단이 퍼석하며 부서지고, 그 안에 쌓여있던 엄청난 기운들이 온몸을 터트릴 듯 사방으로 분출되어 움직였다.
콰쾅!
몸에서 수많은 폭발음이 들리고 전신 피부를 뚫고 나가려던 기운은 급속도로 반전되더니 다시 단전이 있었던 위치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처음부터 새롭게 쌓아가듯 천천히 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준혁의 피부위로 핏빛 광채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며, 그에 반응하듯 하늘에서 이상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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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르르릉!
번쩍-
전쟁이 한창인 진영의 후미 부분.
소각장이 위치한 곳 상공으로 엄청난 기운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기운은 이내 검은 먹구름으로 변했고, 그 안에선 노란 뇌전이 번뜩이며 존재감을 알렸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먹구름 사이로 오색빛깔이 나타났고, 점점 크기를 키워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미터 늘어났다가. 다시 백여 미터는 넘는 거대한 구름이 형성되었다.
멀리 떨어진 산꼭대기.
영기 구름이 나타나는 이상 현상을 본 바람꽃이 놀란 듯 그곳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옆에 있던 산들바람은 의문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언니? 누가 결단기에 오르는 걸까?”
“아니. 이건 큰둥이야.”
“응? 걔는 이미 결단기잖아?”
결단기에 오른 준혁이 경지를 단단히 다지고 수행을 회복한다고 해도, 첫 결단을 만들 때처럼 영기 구름을 불러온다는 건 어불성설.
“그러게. 이상해. 이런 현상은 처음이야. 가봐야겠다.”
말을 마친 바람꽃은 가볍게 땅을 박차더니 빛무리를 뿌리며 순식간에 쏘아져 나갔다.
“언니! 같이 가!”
당연히 산들바람도 그 뒤를 따랐다.
혹시 큰둥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걱정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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