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 혈정단 >
준혁의 호언장담에 갈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왜지?”
“무슨 말씀이신지?”
“왜 그런 일을 하려는가 말일세? 자네 말대로 전부 기피하는 일인 것을. 이유가 뭔가?”
갈미의 질문에 준혁은 잠시 고민하는 척을 하다 대답했다.
“대장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삼 개월이나 이곳에 있었지만, 그 누구도 저를 상급 수사로 대우해주지 않습니다.”
“크흠.”
“같은 종족이 아니라 배척하는 건 당연하다 여기지만, 마음이 그리 편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기피하는 일을 도맡아 처리한다면, 족인들의 마음도 사고 전쟁에 도움도 되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더해 간혹가다 부서진 심장도 얻을 수 있으니 수행도 올릴 수 있고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상대방 수사를 죽이면 곧바로 그들의 무구를 회수하고 심장을 적출했다.
심장은 영수들의 영기가 모여있는 힘의 근원이었기에 영수들에게는 영단이나 마찬가지였고, 그것은 상대방을 척살한 자의 몫이었다.
그렇게 심장과 무구를 회수하고, 무기로 사용하던 몸 일부분까지 제외하고 나면 쓸모없는 시체 덩어리만 남았다.
하지만 간혹가다 깨진 심장 조각을 얻을 수 있기에 시체 처리반도 전혀 이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런 일은 아주 가끔 일어날 뿐이었고, 대부분은 그저 차디차고 쓸모없는 시체일 뿐이었다.
“이제 보니···. 설토족 결단기와 승부를 보는 게 겁이 나는 건가? 그래서 시체 처리만 하며 그 얼마 되지도 않은 심장 부스러기를 얻으려고?”
갈미가 쏘아보자 준혁이 난처하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허헛. 그렇게 콕 찍어 말씀하시면 제가···.”
준혁의 태도에 확신을 얻었는지, 갈미의 차가운 얼굴에 한줄기 비웃음이 비췄다.
“그래. 다들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있는 법이니. 알겠네. 그렇게 처리하지. 내일 일을 도울 아이들 셋을 보내주지. 일은 언제부터 가능하겠나?”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
자신감에 찬 준혁을 보며 갈미가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한가지는 꼭 기억하게.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그게 잘못되면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는 법. 스스로 장담한 거니, 절대 말이 나오게 처리하면 안될 것이야.”
마지막까지 경고를 날리는 갈미에게 인사를 한 준혁은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움막을 나섰다.
머릿속으론 전체 전장 지도를 떠올리고 소각장과의 거리를 계산하며 동선을 짜기 바빴다.
+++
다음날이 되자 축기기 초기 영수 세 마리가 소각장 근처로 날아왔다. 목적지는 밤사이 옮겨진 소각장 옆 준혁의 새로운 거처.
모두 다 얼굴에 똥 밟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다들 반갑네. 시체 소각반에 온 걸 환영하네.”
“아예···.”
“네 뭐···.”
건성으로 대답하는 영수들을 보며, 결단기로서의 위엄을 보이려다 속으로 웃고 말았다.
같은 종족으로 이루어진 이들은 인간들보다 수행의 고하를 더 엄격하게 따졌다. 그런 이들이 결단기인 준혁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타 종족이기 때문.
성벽에서 마주쳤던 연기기 같은 경우는 그래도 예의를 갖추는 편이었으나, 축기기 들은 대놓고 싫어하는 티를 냈다.
거기다 가장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했기에 나오는 반응.
이럴 때 권위를 내세워 다그치는 건 일을 망치는 행동일 뿐이었다.
“자네들 시체 소각일은 전부 해봤을 테지?”
준혁의 물음에 셋중 그나마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여우가 말을 받았다.
“다들 연기기 때 신물 나게 했었습니다.”
“그렇지? 그럼 믿고 맡겨도 되겠군. 그전에 자네들에게 해줄 말이 있네.”
“???”
어리둥절한 얼굴의 여우를 한 차례씩 마주 본 준혁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자고로 채찍보다는 당근.
“내 알기로 자네들은 전투를 통해 전리품을 얻는 것 말고는 따로 보상받는 게 없더군?”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하급 연기기라도 일을 하면 소정의 대가를 지급받는 인간과 달리, 같은 혈족이 중심이 된 족인들은 월급, 연봉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오직 전투에 나가 상대방에게 물건을 빼앗거나, 그 외 시간에 내경 곳곳을 돌며 채집활동을 해야만 했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네. 자네들 셋이 전 전장을 돌아다니며 시체를 수거해야 한다면, 앞으로 수행을 올릴 시간도, 채집을 할 시간도 없을 터. 그건 너무한 처사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어느새 세 영수족의 시선이 준혁에게 쏠려있었다. 자세도 아까와 다르게 제법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전장의 시체를 한 구도 빠짐없이 수거해 온다면! 삼일에 영석 하나씩을 지급하겠네.”
준혁의 발언에 세 영수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부릅떠졌다.
“저, 정말이십니까? 삼일마다 말입니까?!”
“게다가 소각은 내가 도맡아 처리할 테니, 자네들은 그저 수거만 확실히 하면 되네.”
“그 말 진심이십니까? 정말 그것만으로 영석을 주신다고요?”
그들이 이렇게 놀라는 이유는 하나.
위험을 무릅쓰고 전투를 통해 심장을 적출하고 무구를 회수하는 게 훨씬 이익이 되는 행동이라지만, 위험부담 없이 영석을 얻을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게다가 삼일에 하나면 일 년이면 100개가 넘는 양. 거기에 더해 영수족은 인간들과 비교해 수행을 올릴 수 있는 심장은 쉽게 구할 수 있었으나, 술법 수련을 도와줄 영석은 꽤나 귀한 것.
영석 광맥의 숫자에 비해 너무나 많은 영수족의 숫자가 가장 큰 이유였다.
그걸 알면서도 준혁이 3일에 하나라는 눈이 돌아갈 정도로 좋은 조건을 내민 건,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단, 조건이 있네.”
꿀꺽-
연달아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일하며 보고 듣게 되는 것들은 절대 발설하지 말 것.”
“그, 그것은···.”
너무 큰 먹잇감이었지만, 영수들은 바로 달려들지 않고, 망설였다.
준혁은 타 종족의 인물. 비밀을 만드는 게 달갑지 않은 것.
“하지만 내 행동이 족인들에게 작은 해라도 된다면, 비밀 유지를 지키지 않아도 되네. 내 술법이 알려지길 꺼려서 그러는 것이니.”
다음 말이 나오자 세 영수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세 영수의 대답에 준혁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입김을 후우~ 하고 불었다.
그러자 부적 석 장이 공간대에서 빠져나와 세 명의 영수 앞으로 날아가 멈췄다.
“그럼 도장 찍을까?”
+++
“벌써 시체가 쌓이기 시작했을 터. 전부 수거해 오게. 기억하겠지? 한 구도 빠짐없어야 한다는 걸?”
“넵!!”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두 눈에 총기를 반짝이며 영수들은 각자 맡은 방향으로 흩어졌다.
축기기 수행이기에 시체를 옮기는 일이 연기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를 터.
준혁은 그들이 멀어지는 걸 보며 곧장 소각장으로 향했다.
작은 언덕 아래 뾰족한 나무를 울타리처럼 세워둔 공터.
소각장은 공터 안쪽에 마련되어있었다.
인간들처럼 특정 시설물이 있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시체를 태우기 위한 용도로 깊은 구덩이가 파여있었고, 그 모습을 가리기 위해 공터 주위에 높은 울타리가 쳐져 있을 뿐이었다.
소각장은 앞으로 타 종족 출신이 맡을 거라는 얘기가 나와서인지 을씨년스러운 느낌과 고약하게 탄 냄새를 제외하곤 아주 작은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침 하기 싫은 일을 내가 한다고 나서니, 다들 신나서 사라져 버렸군.”
그래도 몇몇은 남아서 인수인계를 할줄 알았건만, 아무도 없으니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불 계열의 술법을 사용할 줄만 안다면 개나 소나 소각장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이기도 했다.
‘우선 확인부터.’
준혁은 일을 시행하기에 앞서, 기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소각장 내부는 물론이고, 땅속, 울타리 밖, 주변 언덕까지.
모든 확인이 끝나자 구덩이 앞으로 걸어갔다.
‘기감엔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지만, 바람꽃이 맘먹고 숨는다며 알아차리긴 어려울 터···.’
준혁은 조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허공으로 입김을 후우 불었다.
그 신호에 따라 공간대에서 깃발 수십 개가 빠져나오더니 허공에 일정한 간격으로 주르륵 늘어섰다.
수결을 맺을 수가 없기에 정신을 집중해 술법을 발현시켰다.
타다닥-
깃발들은 일정한 공식에 따라 구덩이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다 땅속을 파고 들어갔다.
잠시 후 구덩이 위로 작은 불꽃이 만들어지더니 사방으로 번지며 크기를 키우다, 깃발 안으로 쑤욱 하고 빨려 들어갔다.
진법이 완성되자, 구덩이 한가운데엔 작은 불덩이가 나타나 혼자서 불타올랐다.
그다음으로 또 한 번 깃발이 주변으로 늘어서며 기운을 차단했고, 또 다른 깃발이 그 위로 중첩된 또 다른 진법을 설치했다.
‘만약 직접 확인하러 온다 해도, 이 정도면 충분히 속겠지?’
준혁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눈속임 진법 설치를 끝내고는 또 다른 깃발들을 쏘아 진법안으로 집어넣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매번 시체를 가져올 때마다 구덩이 앞에서 혈단법을 시전할 수는 없는 일.
준혁은 그동안 익힌 진법 지식을 기반으로 구덩이 안에 상시로 운용되는 혈단법을 새겨넣고자 했다.
다만 지금 수행에 완벽한 상시 진을 만든다는 건 불가능했기에, 여섯 시간마다 기운을 불어넣고 재가동시켜야만 했다.
또한 진법이 유지되고 있어야 했기에 영기를 주입하는 것과는 별개로 하루에 영석 하나씩이 소모되었다.
그렇게 준혁이 구덩이 안에 혈단법을 새기기 시작했지만, 다른 진법에 가려 눈에 보이진 않았다.
내부에선 금빛 실들이 요동치며 기묘한 문양을 새겨나가며 구덩이 속 공간을 확장해가고 있었지만, 겉으로 보기엔 그저 작은 불씨 하나가 구덩이 위에 둥둥 떠 있을 뿐이었다.
+++
맑은 하늘.
조각구름 하나가 바람 따라 흘러가지도 않고, 하늘 한쪽에 고정된 채 가만히 있었다.
구름 위엔 여우귀를 한 귀여운 꼬마 소녀 두 명이 앉아 있었는데, 하나같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언니, 쟤 뭐 하는 거야?”
“인족들의 진법을 설치하잖아.”
“진법? 왜?”
준혁의 행동을 바라보며 눈을 떼지 못하는 바람꽃을 보고는 산들바람이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응? 왜에?”
“제법 꾀를 부리네.”
“무슨 말이야? 궁금해에~”
동생이 애교를 부리자 바람꽃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갈미에게 들으니, 저자가 족인들이 기피하는 일을 도맡아 처리하면서 환심을 사려 한다고 했었거든.”
“응. 그래서?”
“시체를 수거하는 일은 수하들에게 맡기고, 그걸 태우는 일은 진법으로 자동으로 해결하고···. 결국 크게 고생하지도 않으면서 생색은 다 내려는 거지.”
“에에? 그런 거였어? 그럼 데려다가 다른 일 시키자!”
바람꽃은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더니 다시 준혁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아니야. 그만 돌아가자.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겠지. 약속을 안 지키면 죽이면 그만이니깐.”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실전을 경험한다더니 이젠 시체 소각? 말만 그렇게 하고 몰래 설토족 사냥이라도 나서려는 줄 알았는데···.’
잠시 상념에 잠기던 바람꽃은 이내 고개를 털어내 잡념을 날려버렸다. 동생에게 했던 말대로 3년 안에 결단기를 안정화하지 못하면 죽이면 그만이었다.
그렇지 않고 정말로 시체 소각 같은 일을 하면서 수행을 올릴 수만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었다.
그녀도 신경 쓰고는 있었지만, 해결하지 못한 게 바로 시체 수거, 소각에 관한 문제였으니까.
+++
준혁이 구덩이 안에 혈단법을 완성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가까운 지역으로 출발했었던 수하 한 명이 시체 세 구를 메고 나타났다.
여우 수하는 예전과 다르게 소각장 구덩이에 붉은 불꽃이 둥둥 떠 있는 걸 보며 고개를 갸웃 해했다.
“대장님 이게 무엇입니까?”
“내 말 하지 않았나? 앞으로 자네들은 수거만 하면, 소각은 내 직접 한다고. 이제 시체를 구덩이 안에 넣으면 저 불꽃이 자동으로 시체를 소각할걸세. 내가 없더라도 말일세.”
“네에? 정말입니까?”
후훗 하고 웃어 보인 준혁이 구덩이 쪽으로 턱을 내밀며 해보라는 듯 지시했다.
그에 수하는 구덩이로 조심스럽게 다가가더니 시체 세 구를 집어넣었다.
화르륵-
시체가 구덩이 안으로 들어간 순간. 그 위에 떠 있던 불꽃이 파르르 진동하더니, 이내 크기를 키워 세 구의 시체를 빠르게 태워버렸다.
잠시 후 검은 연기만이 살짝 생겨나고는 불꽃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작게 줄어들어 버렸다.
“대단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다면, 그동안 그렇게 서로 미루지 않았을 텐데요.”
“내 말이 그 말이네. 무작정 일을 하기보단 효율적으로 해야지. 그럼 또 가보게. 쉴 틈이 없을 텐데?”
준혁의 은근한 말투에 여우 수하는 화들짝 놀라며 빠르게 멀어져갔다.
“다시 다녀오겠습니다!”
구덩이 가장 안쪽엔 혈단법이 바로 그 위에는 방음진, 그위엔 화탄술진(火呑術陳)과 환영진, 마지막으로 기운을 모아 다시 안쪽으로 돌려보내는 반원진(反援陳)까지.
준혁은 틈 없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제대로 작동하는 진법을 보고는 꽤나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겐 보이지 않지만, 준혁에게만 보이는 그것.
구덩이 안, 금빛 실들에 둘러싸인 붉은 무엇.
콩알보다 작게 뭉친 그것은 영수의 기운이 뭉친 단(丹)이었다.
꺼내먹기엔 아직 기운이 너무 약했지만, 이제 겨우 시작.
준혁은 붉은 단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앞으로 네 이름은 혈정단(血淨丹)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