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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60화 (60/408)
  • # 60 < 적호족(赤狐族) (3) >

    적호족 원영기 수사에게 잡힌 지도 한 달.

    준혁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역시 방법이 없다.”

    준혁은 곧장 별채를 나서 본채를 지나친 후, 목조건물의 공터 앞으로 나갔다.

    짙은 안개로 둘러싸여 있는 일정 공간.

    처음엔 이곳이 바람꽃 수사의 거처라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감시 용도로 만들어놓은 감옥 같은 곳이었다.

    준혁이 공터로 나오자 어디선가 바람꽃이 날아와 그 앞에 내려섰다.

    “왜 나왔어?”

    소리 없이 나타난 그녀를 보고 준혁은 앞발을 땅에 붙이고 고개를 숙였다.

    이곳에 온 후 배운 영수족의 존경을 표하는 인사법이었다.

    “바람꽃님. 부탁드릴 것이 있어 나왔습니다.”

    “말해봐,”

    “저는 어릴 때부터 실전을 통해 수행을 올려왔습니다. 해서 집안에서 하는 수련은 전혀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응? 이곳이 갇힌 곳이긴 해도, 영기 밀도는 다른 곳에 뒤처지질 않는걸?”

    “그건 알고 있으나···. 저와 맞지 않은 수련법입니다.”

    준혁의 하소연에 바람꽃이 의문을 담아 던졌다.

    “그럼 원하는 게 뭔데?”

    “얼마 전 산들바람님이 오셔서 하신 말을 들어보니, 몇백 년간 설토족과의 전쟁을 이어가고 있다 하시더군요.”

    “그렇지.”

    바람꽃이 맞는 말이라며 수긍하자, 준혁이 입술을 다시고는 말을 이었다.

    “저 역시 전쟁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실전을 통한 수련만이 저를 정진시킬 수 있으니, 오늘부터 설토족과의 전쟁에 참여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준혁의 발언에 바람꽃이 두 눈을 껌뻑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지만, 그 안에 든 것은 한 손으로 자신을 찢어발길 수 있는 원영기라는 것을 알기에, 준혁의 눈엔 귀여운 모습이 괴기하게 느껴졌다.

    “지금 네 수행에 죽을 일은 없겠지만···. 넌 너무 약해. 그냥 이곳에서 수련해.”

    “허락해 주신다면, 반드시 3년 안에 결단기를 완성해 보이겠습니다!”

    “흐음.”

    준혁의 의지를 읽었는지, 바람꽃은 결국 수락했다.

    “결단기라면 한 구역의 대장급이야. 하지만 넌 너무 불안정하고 약하니까···. 그래. 우선 부대장으로 참여한 후에 다시 결정하자.”

    “감사합니다!”

    준혁이 다시 한번 영수족의 인사법으로 몸을 낮출 때, 바람꽃이 입김을 불자, 입에서 작은 빛무리 같은 것이 쏘아져 나오더니 멀리 사라졌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넌 왜 인족들처럼 공간 법기를 들고 다녀?”

    “그, 그건···.”

    “설마 몸 안에 그릇을 만들지 못하는 거야?”

    몸 안의 그릇이란 영수들이 자신들의 무구를 저장하는 방법으로, 인간들의 단(丹)처럼 영기를 뭉친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실제 신체 내부 일정 공간에 빈공간을 만드는걸 뜻했다.

    당연히 준혁은 그런 것을 시도해보지 않았다.

    “아닙니다. 단지 오래전 인족들의 물건의 도움을 받아 수행을 크게 늘린 경험이 있어서···. 어쩌다 보니 그들의 방식을 많이 차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준혁의 거짓말이 나름 납득이 갔는지, 바람꽃은 턱을 한 손으로 매만지며 주억거렸다.

    “하긴, 수행이 낮을 땐 인족들의 방식이 더 효율적이고 편해 보이긴 하지. 하지만 말야. 그런 식으론 절대 발전 못해. 인족들과 우린 타고난 신체며 영기 수발 방법이 전혀 다르다고. 알겠어?”

    “명심하겠습니다.”

    그 뒤로도 바람꽃은 예전과 다르게 준혁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다.

    그때, 바람을 가르며 여우 인간 하나가 나타났다.

    “대장로, 부르셨습니까?”

    새롭게 나타난 이는 준혁이 처음 호수 위에 나타났을 때 만난 적이 있던 여우 인간이었다.

    ‘이름이···. 갈미라고 했었나?’

    자신을 죽일 듯이 쫓아왔던 결단기 초기수사임을 알아보았다.

    갈미도 준혁을 보고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자 기억나지? 한동안 우리와 함께할 거야. 같은 족인으로 생각하고, 설토족과의 전쟁에 참여하고 싶다니깐, 갈미 네가 데려가. 몸은 허약하니깐 너무 심하게 굴리진 말고.”

    “예! 대장로!”

    바람꽃에게 깍듯하게 인사한 갈미는 준혁을 보고 못마땅한 얼굴을 하다 허공 한쪽을 손짓했다.

    “수행은 내가 더 높아 보이니 말 편하게 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그럼 가지.”

    간단하게 용건만 말한 갈미는 한번 따라와 보란 듯 땅을 거세게 차며 안개를 뚫고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 모습을 보며 바람꽃이 준혁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전투 실력은 인정할만해. 많이 배워.”

    준혁은 바람꽃이 다른 이가 아닌 갈미를 붙여준 이율 깨닫고는 가볍게 고개 숙이고 그의 뒤를 쫓아 안개 속으로 쏘아졌다.

    +++

    둔광을 일으켜 뒤를 쫓자, 곧바로 갈미를 따라갈 수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더니, 용케 살아있었군.”

    “다 바람꽃님의 은혜입니다.”

    “무슨 이유로 대장로께서 널 살려주셨는지, 왜 우리 부족의 전쟁에 참여시키는지는 모르나···. 허튼짓을 할 생각은 마라. 만약 우리에게 피해를 입힐 생각이라면. 대장로께 벌을 받는다고 해도 네놈을 찢어 죽일 테니까.”

    고압적인 태도에 준혁은 속으로 피식 웃고는 겉으로는 살짝 겁먹은 듯 목소리를 낮췄다.

    “명심하겠습니다.”

    한참을 날아가자 거대한 흙벽이 두 영수를 반겼다.

    흙벽 위엔 연기기와 축기기 여우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당분간은 나를 따라다니며 해야 할 일을 배우면 된다.”

    갈미는 준혁에게 따라오라는 눈짓을 하고는 흙벽 위의 병사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렸다.

    누군가에겐 시체 치우는 일을, 누군가에겐 일정 지역의 순찰을, 또 다른 이에겐 마을 중심으로 보내 물자 조달을.

    “지역의 대장이란 건, 모든 일을 관리해야 한다. 물론 상대 진영에서 결단기가 나오면 가장 앞장서야 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테니 딱히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사무적인 딱딱한 갈미의 말에 준혁이 궁금한 걸 물었다.

    “그럼 평소엔 연기기와 축기기 수사들만 싸운단 말입니까?”

    “그래.”

    “혹시 이유라도 있습니까?”

    “당연히. 결단기는 각 부족에서 소수뿐이다. 혹여라도 죽게 된다면 세력이 급감하고, 또 다른 부족들의 먹잇감이 되고 말지. 그러니 최대한 전투를 자제하는 것이다.”

    ‘아! 설토족뿐만 아니라, 주변 영수족끼리 물고 물리는 관계라서 그렇구나.’

    준혁에게 아무 말이 없자, 갈미는 말을 이어갔다.

    “대장의 역할을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신임할 수 있는 부하를 뽑는 것이다. 물론 족인들 모두 다 믿고 일을 맡길만하긴 하지만, 모두가 성실한 것은 아니니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따라오라 저쪽에서도 해야 할 일을 알려주겠다.”

    갈미는 마치 신입생에게 학교를 소개하는 선배처럼 꼭 알아야 할 것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빠르게 소개했다.

    반나절 동안 곳곳을 누비던 갈미는 마지막으로 흙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나무를 원뿔 형태로 세워둔 곳으로 준혁을 안내했다.

    주변에 건물이라곤 움집들 뿐이라 제법 눈에 띄는 양식이었다.

    “앞으로 이곳에 머물러라. 조금 전 일러둔 대로 일을 행한 후엔 자유롭게 개인 정비를 하면 된다. 단 절대 혼자서 진영 밖으로 나가 설토족을 사냥하는 건 금지다.”

    반나절 동안 가까워지긴 힘든지, 여전히 그의 목소리는 차갑다 못해 뚝뚝 음절마다 끊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태도완 상관없이 준혁은 처음 그대로 예의 있게 경청하는 자세를 유지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말만큼 잘하나 두고 보지.”

    갈미가 떠나자, 준혁은 나무 움막 안으로 들어가, 움막 전체에 방음진을 설치하고 누군가 갑자기 들어올 때를 대비해 방형진(防形陳)으로 주변을 감싸 바로 알아차릴 수 있게 대비했다.

    준혁이 바람꽃을 설득해 전장으로 나온 이유는 단 한 가지. 바로 영수를 사냥해 수행을 올리기 위한 것.

    하지만 그 계획은 시작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갈미는 준혁을 전혀 믿지 않는지, 애초에 전장에 참여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

    그가 맡긴 일이라곤 대부분 하급 수사들이 일을 잘 진행하는지 확인하고 보고하는 일이었다.

    간혹 전장에 참여할 때도 있었으나, 그땐 항상 갈미가 함께했었다.

    그렇게 3개월이 순식간에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

    준혁은 삼 개월간 매일같이 진행하던 물자 관리와 이동현황에 대해 갈미에게 보고하고, 자신의 거처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답이 없다. 벌써 석 달이나 흘렀어.’

    석 달간 준혁이 얻은 영수의 시체는 0 이었다.

    애초에 직접적인 전투를 할 수 없으니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건 물론이거니와, 전투를 한다 해도 가까이서 갈미가 지켜보고 있었기에 시체를 따로 챙길 수도 없었다.

    ‘이제 수습 기간이 끝났으니 대장직을 맡을 수 있다. 허나 예감이···.’

    왠지 수습과 마찬가지로 갈미가 자신의 진영 바로 옆 지역으로 준혁을 배치하고,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것만 같았다.

    ‘흐음···.’

    준혁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며 성벽 길을 걷는 사이.

    짜증이 섞인 어린 여우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진짜! 또 내가 당번이야?”

    “뭘 짜증이야? 겨우 닷새만이잖아? 난 이틀 연속했다고.”

    “에휴. 정말 너무 싫다. 안 그래도 녹초인데. 소각까지 하려니.”

    “소각만 하면 그나마 낫지. 난 수거까지 같이했다고.”

    “뭐? 너도 참 재수가···.”

    두 영수의 한탄은 흙벽 위에서 들렸기에, 준혁은 벽 아래로 조심히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한동안 신세 한탄을 하는 두 영수의 대화를 듣다 보니 준혁의 뇌리로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들의 대화가 끝날 때쯤 되자 준혁은 작게 헛기침하며 두 영수 앞에 내려섰다.

    “헛. 부, 부대장님!”

    처음엔 준혁을 꺼리던 적호족 병사들도 삼 개월이 지나자, 어느 정도 적응했는지 자연스럽게 부대장이란 말이 나왔다.

    다만 반가운 얼굴들은 아니었다.

    “얼굴이 익군. 물어볼 말이 있는데.”

    “마, 말씀하십시오.”

    “조금 전에 말한 시체 처리 말일세.”

    “히익!”

    두 영수는 자신들의 불평불만이 준혁의 귀에 들어갔다는 생각에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그대들을 나무라려는 게 아니니 일어들 나게. 나와 심도 있게 대화 좀 해보자 이거지.”

    “네?”

    준혁은 당황한 두 영수를 붙잡고 시체 수거에 대해 이것저것 캐물었다.

    기본적으로 전투가 끝나면 각 진영에서 시체 수거반이 나와 죽은 자들을 수거해갔다. 그리고 그것을 소각장으로 운반하고 불 계열의 술법을 사용하는 자들이 번갈아 가며 시체를 태웠다.

    하지만 수많은 시체를 태운다는 건 누구나 기피하는 일. 당연하게도 그 일은 연기기 수사들이 도맡아 해야 했고, 안 그래도 수행이 낮은 연기기 들은 전투 후 영기 고갈로 인해 술법을 사용하는 데 매우 곤욕스러워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설토족의 술사 중에는 주변의 사기(死氣)가 강할수록 힘이 강해지는 자들도 있었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족인들을 수거해가지도 않았다.

    그걸 두고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적호족으로선 할 수 없이 상대 진영의 시체까지 수거하여 처리하는 일을 해야 했고.

    적호족 시체 처리반은 모두가 꺼려해, 결국은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일 처리를 하고 있던 것.

    ‘이거다! 드디어 활로를 찾았어!’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준혁은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라 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두 영수만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준혁이 떠나간 자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

    다음날이 되자 준혁은 원래 해야 할 일도 미뤄둔 채 곧장 갈미의 처소를 찾아갔다.

    “갈미 대장.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안에선 여전히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게.”

    준혁이 나무로 지어진 갈미의 처소로 들어가자, 그는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벌써 일 처리를 다 끝낸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이지?”

    준혁은 어젯밤 생각해뒀던 계획을 떠올리며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

    “이제 3개월이 지났으니, 한 지역을 맡긴다 하셨지요?”

    “그랬지.”

    “허나 생각해보니 저에겐 어울리지 않는 자리인 것 같습니다.”

    갈미는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털들이 꼿꼿이 섰다.

    “자네가 대장로께 부탁을 해놓고, 이제 와 무르려는 것인가?”

    “아닙니다. 어찌 그러겠습니까? 저에게 다른 생각이 있는데 한번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준혁은 갈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며 편안히 말을 이었다. 평소 준혁이 전투에 나서는걸 탐탁지 않아 했기에, 거절당할 거라는 건 염두에도 없었다.

    “저는 적호족이 아니니, 제가 족인들을 이끌고 전투에 나선다는 건 효율적이지가 못합니다. 다들 지휘관을 믿지 못하는데 어찌 전쟁에 임하겠습니까?”

    “흐음···. 그건 그렇지.”

    “해서 제안드립니다. 전투가 끝난 후 시체를 수거하고 소각하는 일을 모두 기피한다 들었습니다. 축기기 수사들이 맡아 하기엔 인력이 낭비되는 것이고, 연기기 수사들이 맡기엔 수행과 비교해 너무 고단하지요. 더군다나 따로 전담하는 담당자도 없어서 그날그날 운이 나쁜 자들이 덤터기를 써 일하는 게 다반사고요.”

    “크흠. 제안을 한다더니 그 얘길 하는 이유가 뭔가?”

    준혁의 입꼬리가 양쪽으로 올라갔다.

    “저에게 축기기 수사 셋만 붙여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신다면 모두가 기피하는 그일. 제가 도맡아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갈미님이 맡으신 지역뿐 아니라···. 다른 대장들이 맡은 지역 전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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