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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59화 (59/408)

# 59 < 적호족(赤狐族) (2) >

대장로라 불린 소녀.

귀여운 세모 귀가 뾰족하게 솟아오른 꼬마 소녀는 가늠할 수 없는 기운을 풍긴 채 생글생글한 미소로 준혁을 주시하고 있었다.

‘원영기!!’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지만,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결단기 후기인 사쿠라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진한 무언가가 전신을 콕콕 찌르며 자극했다.

준혁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얼어붙어 있자, 소녀는 두 결단기 여우 인간에게 손짓했다.

“둘은 가봐. 얘는 내가 알아서 할게.”

“예! 대장로!”

잠시 후 절도있게 인사한 두 적호족이 떠나가자 소녀는 준혁 바로 앞으로 다가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곳곳을 살폈다.

“참 이상하네? 정말 영수족이 맞는 건가?”

“그게 무슨 소리이신지···. 전 백호족이 맞···.”

“그건 알겠는데. 왜 인족처럼 행동하지? 인족들이나 쓸법한 법기에, 인족들이 들고 다니는 공간 법기. 게다가···.”

스윽-

준혁이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틈에, 소녀의 손이 준혁의 목을 움켜잡더니 다른 손으로 몸을 확인했다.

“몸이 너무 약해. 마치 이제 갓 연기기에 오른 녀석 같잖아?”

준혁은 새끼 백호를 포기하고 도망간다고 해도, 살아날 확률이 거의 없다고 판단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설픈 거짓은 안된다.’

준혁이 입을 열려는 찰나,

소녀가 손가락을 세우더니 준혁의 이마 앞으로 가져갔다.

“뭐 알아보면 되는 거지. 아무 말 안 해도 돼.”

그녀의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란 준혁은 재빨리 몸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때, 지금껏 조용히 준혁의 목덜미에 붙어있던 새끼 백호가 ‘크아앙’ 소리를 내며 폴짝 뛰어 소녀의 팔목으로 달려들었다.

소녀는 피식 웃더니 손을 움직였고, 준혁을 구하려던 새끼 백호의 행동은 가상했지만, 결국 아무 소득 없이 제압되고 말았다.

“귀엽네. 새끼야? 아니면 형제?”

“...형제입니다.”

준혁의 대답에 소녀는 목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는 손을 털어 새끼 백호를 떨쳐내고 곧바로 등을 돌리며 말했다.

“따라와. 둘 다.”

+++

빠르게 날아가는 원영기 소녀를 뒤따르며 준혁은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변신술을 알아보진 못하는구나. 설마, 평소 수행이 드러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인가?’

수많은 움집을 지나쳐 계속 이동하자 찌를 듯이 우뚝 솟은 칼바위가 나타났다. 칼바위 뒤로 이동하자 진한 안개가 보였고, 안개를 통과하자 제법 그럴싸한 2층 목조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목조건물의 양쪽 기둥은 살아있는 나무가 이어져 있어, 마치 동화책에나 나올듯한 집의 모습이었다.

집 앞에 도착해 소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먼 곳에서 무언가가 반짝하는 느낌과 함께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슈웅- 쾅!

그것은 속도를 제어하지 못하고 건물 앞 공터에 부딪히더니 굉장한 소음과 함께 먼지를 일으켰다.

“언니! 신기한 거 잡았다면서! 어딨어?”

먼지가 사라지고 나타난 이는 원영기 소녀를 꼭 닮은 여자아이였다.

‘이자도 원영기?’

그녀는 원영기 소녀와 마찬가지로 수행을 판단할 수가 없었고, 느껴지는 기운이 절대 결단기가 아니었다.

“너 또 이런 식으로 다닐래?! 족인들에게 위엄을 보이라고 했잖아! 언제 철들 거야?”

“헤에. 이곳에 누가 올 리도 없는데 무슨 상관?”

“어휴. 정말.”

준혁이 보기엔 둘 다 말투에서 위엄이라곤 1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어? 이 흰둥이가 그거야? 마을 호수에서 나타났다는 그거?”

새로 나타난 소녀는 준혁이 신기한지 서슴없이 다가왔다.

그러다 새끼 백호를 발견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꺄아아아! 너무 귀여워!”

“크아앙!”

준혁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백호를 억지로 떼어낸 소녀는 그것을 품에 안으며 볼을 부볐다.

“언니! 나 이거 가질래!”

동생의 간절한 부탁에 소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준혁이 다급하게 나섰다.

“이 아이는 제게 소중한 가족입니다!”

“가족도 살아있어야 가족이지.”

반발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소녀가 인상을 쓰자, 준혁은 금세 꼬리를 말아야 했다.

그녀 말대로 살아남는 게 중요했기에.

“그럼 잠시만 제게···.”

준혁은 작은 소녀에게 양해를 구한 뒤, 백호를 안아 들고 귀에 작게 속삭였다.

“말 잘 듣고 있거라···.”

말을 전하며 종속의 인으로 이어진 끈을 강하게 자극했다.

그러자 새끼 백호는 준혁의 의지를 읽었다는 듯 작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폴짝 뛰어 소녀의 품으로 돌아갔다.

소녀는 백호가 품에 들어오자 세상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한 얼굴을 하다가 땅을 박차며 사라져 버렸다.

“언니! 나중에 다시 올게!”

그리고 소녀가 사라지자 그녀의 언니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준혁만이 씁쓸한 얼굴을 하다 빠르게 신색을 고치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

소녀의 집으로 추정되는 곳은 단출한 모습이었다.

내부는 하나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중앙에 탁자와 의자 두 개, 방 한쪽에 그물침대와 물건을 수납하는 상자가 전부였다.

소녀는 준혁을 의자에 앉히더니, 목덜미에 손을 올리고 이마를 가만히 가져왔다.

“가만히 있어. 뭘 좀 느껴보고 싶어서니깐.”

경고하지 않았어도 경거망동할 생각이 없던 준혁은, 그녀와 닿은 이마를 통해 간질간질한 감각과 함께 맞닿은 얼굴 사이로 달달한 숨결을 느꼈다.

잠시 후 이마를 땐 소녀가 기분 좋은 얼굴로 반대편 자리에 앉았다.

“역시 아까 느낀 게 틀린 게 아니었어. 너 인족의 피를 이었구나?”

준혁은 화들짝 놀라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인족이라니요?”

“몰랐어?”

“말도 안 됩니다. 백호족의 긍지를 짓밟지 말아 주십시오!”

준혁은 최대한 당황을 숨기며 억울하다는 듯 호소했다.

“내가 인족의 피를 이었다고 했지. 인족이라고는 안 했잖아?”

“그게 무슨 뜻입니까?”

“네 단(丹)을 들여다봤는데, 인족의 정혈 한 방울이 단 주위를 맴돌더라고.”

소녀의 말에 준혁은 빠르게 내면을 살폈다.

‘이럴 수가. 반전되어있다!’

변신술의 영향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1방울뿐이던 백호족의 정혈이 단으로 바뀌어 있었고, 반대로 원래의 기운이 정혈 한 방울로 변해 단전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이게 말이 되는 현상이란 말인가?!’

이건 숫제 변신술을 사용했다기보다는 진짜 백호족이 된 거나 다름없었다.

유적에 있었던 3년간 단 한 번도 고려해보지도 않았던 문제.

준혁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자, 소녀가 피식 웃었다.

“정말 몰랐나 보네?”

“그렇습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덕분에 안 들킨 건가···.’

“내가 하나 제안할 게 있는데 말야. 네 지금 수행이 이상하던데? 혹시 결단에 반만 성공한 거야?”

“... 그것도 알아보셨습니까?”

“그래. 특이한 현상이긴 하지만, 없는 건 아니니까. 보통 결단이 성공하기 직전 외부 충격을 받을 때 그렇게 되곤 하지.”

“......”

준혁은 혈단법으로 인한 현상이었기에, 소녀의 말의 사실 여부를 알 수 없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3년.”

“??”

“3년 안에 결단을 안정시킬 자신이 있다면 살려줄게.”

그녀의 제안에 준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5년 후에 인족 수사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었거든, 아마 인족의 정혈만 가지고 있어도 충분할 거야.”

“아···. 그렇군요. 헌데 왜? 3년입니까? 5년이 아니라?”

소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필요한 건 안정된 결단기 초기거든. 네가 무슨 이유로 절반만 결단을 이루었는지는 모르지만, 3년 안에 안될 거면 5년에도 안 돼. 그러니 중경으로 넘어가 인족 결단기 하나 잡아 올 시간은 있어야지. 안 그래?”

“아···.”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소녀는 준혁이 3년간 깨달음을 공고히 한다면 결단을 온전히 완성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준혁의 결단이 미완성인 이유는 깨달음의 문제가 아닌, 단을 채울 영기의 부족.

3년간 얼마나 많은 기운을 흡수해야 할지 몰랐기에, 가(可) 불(不)을 논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준혁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호기롭게 ‘못합니다!’라고 외치는 순간 어떤 신세가 될지 알 수가 없었기에.

“해내겠습니다. 무조건.”

“좋아. 그럼 오늘부터 바로 수련에 들어가. 건물 뒤로 가면 별채가 있으니 그곳에 머물고.”

“예. 헌데 앞으로 제가 어찌 불러야 하겠습니까?”

“나? 나는 바람꽃이야. 다른 족인들은 대장로라 부르는데, 네 편한 대로 해.”

준혁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별채를 향해 움직였다.

그때, 소녀가 다시 준혁을 불러 세웠다.

“뭐 잊어버린 거 없어?”

“무엇을···.”

“이거.”

말과 동시에 피 한 방울이 둥실 떠올라 준혁에게 날아왔다.

“내 정혈이야. 안전장치는 해야겠지?”

준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정혈을 입 안으로 넣었다.

“걱정 마. 꽁꽁 싸뒀으니깐.”

+++

별채 역시 단출한 방 하나였다.

작은 건물에 좁은 방. 이곳엔 그물침대도 없고, 오직 탁자와 의자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준혁은 내부를 꼼꼼히 살펴보고는, 공간대에서 깃발을 꺼내 방음진을 설치했다.

그리고는 방 한가운데 앉아 내면을 살폈다.

바람꽃의 정혈은 무언가에 둘러싸인 채 심장 어림에 딱 달라붙어 있는 중.

그 수법이 준혁이 청명에게 했던 것과 비슷했기에 절로 실소가 흘렀다.

다만 준혁은 극소량의 정혈을 사용했지만, 바람꽃은 한 방울을 사용했다는 게 달랐다.

‘도대체 무슨 일을 시키려는 거지?’

다행히 목숨을 건질 수는 있었지만, 의구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내경 내에서 인족이 필요한 일이라는 게 짐작이 가질 않았다.

‘정혈이야 흡수하면 그만이다. 기회를 보아서 탈출하자.’

다만 어떤 방식으로 원영기 수사들을 따돌리고 도망갈 수 있을지가 미지수였다.

+++

멀리 적호족의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칼처럼 솟은 산꼭대기.

절벽 끝에 앉은 소녀를 향해 귀여운 새끼 백호를 품에 안은 소녀가 다가가 옆에 앉았다.

“언니, 그놈은 거기 혼자 두고 온 거야?”

“응.”

“왜 살려둔 거야? 우리 흰둥이처럼 귀여운 것도 아닌데?”

절벽 끝에 앉아있던 소녀, 바람꽃은 동생의 품에 있는 백호를 슬쩍 쳐다보다 가볍게 혀를 찼다.

“그 녀석 몸에 인족의 피가 흘러.”

“뭐어어어??!”

소녀가 화들짝 놀랐고, 백호의 두 눈도 동그래졌다.

“그게 정말이야?”

“응.”

“그럼 당장 죽···! 아! 설마?”

“그래. 그곳에 데려갈 거야. 마침 제물이 필요했는데 잘됐지.”

바람꽃이 시선을 들어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자, 그녀의 동생 산들바람도 언니의 시선을 쫓았다.

두 소녀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열망이 어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근데 이상한 건···.”

“응? 뭔데? 뭔데?”

“아니야. 뭐 딱히 신경 쓸 정도는.”

바람꽃은 처음 준혁을 잡았을 때를 생각했다.

인족의 정혈을 가지고 있는 영수족. 결단기 수행에 어울리지 않는 나약한 몸.

게다가 아주 잠시였지만, 전투 방식은 마치 인족 같았다.

‘수상한 게 한둘이 아닌데···. 뭐 크게 신경 쓸 일은 없겠지? 설마···. 인족이 영수족으로 변신을 한 건? 푸흣. 그럼 내가 몰랐을 리가 없지.’

바람꽃은 스스로도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했다는 듯 실소하고 말았다.

“근데 그 아이는 계속 데리고 다닐 거야?”

“응? 귀엽잖아.”

“결국 시간이 지나면 다른 영수족과 다를 게 없어.”

언니의 말에 산들바람이 백호를 쓰다듬으며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때 가서 먹으면 돼. 그러니 흰둥아~ 천천히 자라렴~”

순간 새끼 백호가 움찔하고는 몸을 말았다.

그리고는 몸을 부르르 떨며 미세하게 줄어들었지만, 두 원영기는 미처 눈치채지 못한 채 대화를 이어갔다.

“산들아, 어릴 때 기억나?”

“응? 뭐가?”

“내가 흰토끼 결단기 놈에게 붙잡혔을 때, 네가 나를 구하겠다고 무식하게 덤벼들었던 거?”

“당연히 기억하지. 헤헤. 결국 장로님이 오셔서 우릴 구해주셨잖아. 갑자기 왜?”

“아니 그냥. 오랜만에 그때가 생각나서.”

바람꽃의 시선은 동생의 품에 안긴 백호에게 닿아있었다. 새끼 백호가 형을 위해 자신을 공격하려던 것이 떠올랐다.

‘귀엽네. 나도 키울까?’

큰 호랑이를 떠올린 바람꽃은 이내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날려버렸다.

‘아니야. 어차피 죽을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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