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 탈출 >
긴 시간 동안 이곳에 갇혀있을 거라곤 생각해보지 못했던 준혁은 처음엔 조금 여유롭게 행동했다.
그러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날 때쯤에서야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했다.
자비에와 둘이서 유적의 돌조각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살펴도, 그 어느 곳에서도 출구를 발견할 수 없었던 것.
결국, 두 사람은 유적 밖, 공동까지 샅샅이 뒤진 후에야, 그 어디에도 출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다 처음 얼음 봉인을 해제한 것이, 석상에서 얻은 보법임을 깨닫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법을 달리해보았다.
바로 자비에가 늑대 영수로 변해 보법을 써가며 유적을 뒤지기 시작한 것.
그 예상은 기가 막히게 적중했고, 자비에는 2층의 거대 벽화 앞에서 새로운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위압감이 가득한 벽화를 마주 보고 보법을 사용하면 벽면에 그림으로 존재했던 백호가 환영처럼 일어나 보법 사용자를 공격했다.
두 사람은 이것이 밖으로 나가는 문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즉, 백호 환영을 이겨내고 벽화에 도달할 수 있다면 문을 열 수 있을 거라는 확신.
그렇게 자비에는 수색을 멈추고 벽화에 다가가기 위해 보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수행이 낮았기 때문일까?
자비에는 몇 달을 노력해도 벽화의 환영을 이겨내지 못했다. 매번 한 걸음도 다가가지 못한 채 주저앉고 말았다.
결국 시간이 흐르자, 준혁은 절반쯤의 도박을 해야 했다.
“수사. 정말 청혈을 흡수하시려는 겁니까? 혹시 잘못되어 저만 이곳에 남을게 걱정입니다. 청혈이란 것이 그리 쉽게 소화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저희 가문에서도 극소수만이···.”
“걱정 마십시오. 흡수하지 못한다 해도 방법은 있으니까.”
자비에의 눈엔 아무 준비 없이 청혈을 흡수하려는 준혁이 무모하게 보였다. 그의 가문에서도 정혈을 가지고 시험할 때, 극소량의 정혈을 이용했기에 준혁의 행동은 도박처럼 느껴지는 것.
하지만 그가 벽과 씨름하는 몇 달 사이, 준혁은 이미 식혈만복을 온전하게 익혀 그 안에 수록된 혈맥의 힘을 봉혈하여 배출하는 방법을 습득해놓은 상태였다.
다만 그 방법이 통할지 아닐지 판단할 수가 없기에, 자비에가 벽화의 비밀을 풀기를 바라며 기다렸던 것.
하지만 벽화를 향해 한 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하는 자비에를 보며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수사는 계속 도전하고 계십시오. 저는 1층으로 내려가 청혈을 흡수해볼 터이니.”
이미 결정을 내린 준혁의 단호한 모습에 자비에는 어쩔 수 없이 지켜보아야만 했다.
1층으로 내려온 준혁은 왼쪽 석실로 이동해 입구를 차단했다.
방음진과 환영진을 펼치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환영진 안에 폭발을 일으키는 함정까지 설치했다.
그리고는 석실 중앙으로 와 좌정했다.
“청혈이란 것이 혈맥의 힘만 뺀다면 정혈과 다를 게 없다. 우선 식혈만복에 나와 있는 방법으로 정혈을 정제해 보고, 실패한다면 바로 봉혈한다.”
봉혈해 청혈을 밖으로 배출한다면, 귀한 재료를 날리는 것과 마찬가지.
그랬기에 준혁은 다시 한번 공법서를 꺼내 주의 깊게 살피고, 머릿속으로 돌발 상황들을 예측하며 모의실험을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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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후. 다양한 가능성을 따져본 준혁은 청혈 한 방울이 든 자기병을 꺼내 마개를 열었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곧바로 흡수하는 것이 아닌 분리하는 것이 핵심이야.”
식혈만복과 혈단법을 운용하면 아무리 다양한 정혈을 먹어 치운다고 해도 다른 이들과 달리 커다란 부작용 없이 모든 걸 수행으로 치환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하는 건 경지를 올리기 위한 것이 아닌, 청혈 안의 고유 힘을 발현시키는 것.
준혁은 다시 한번 과정을 떠올리다, 망설임 없이 청혈을 입안에 떨어트렸다.
청혈은 입에 들어가자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졌고, 곧이어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청혈은 소리 없이 녹아들어 전신으로 퍼지며 알 수 없는 열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지금부터다. 부작용이 나타나면 바로 봉인해야 한다!’
열감이 퍼져갈수록 준혁은 긴장했고, 당장이라도 수결을 펼쳐 청혈의 기운을 봉인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하지만 청혈은 원래의 몸에 들어간 것처럼 아무 이상 없인 준혁의 몸 안에 스며들어 사라져 버렸다.
‘뭐야? 왜?’
그리고 그것은 식혈만복의 효능이라기보다는, 원래 자신의 정혈을 받아들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결국, 며칠간 부작용이 생겨나진 않을까 하고 조바심과 긴장감을 잔뜩 유지했던 게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무슨 이유지? 이건 정상적인 반응은 아니다.’
자비에가 몇 번이나 경고한 것을 제외하고라도, 식혈만복에 나와 있는 내용에 비춰보아도 너무 이상하고 특이한 반응.
준혁은 의구심에 다시 한번 내면으로 깊게 침잠하며 자신의 상태를 완벽하게 점검했다.
그리고 특이한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기운의 중심인 단전.
단전을 중심으로 전신에 퍼져있는 정혈.
하지만 단전 바로 옆, 확연히 남다른 정혈 한 방울이 마치 지구를 공전하는 달처럼 단전 주위를 돌고 있었다.
공전하는 그것, 청혈로 의심되는 정혈은, 처음의 백호청혈의 기운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온전한 준혁의 정혈도 아니었다.
마치.
“두 기운이 섞여, 새로운 정혈이 된 것 같지 않은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반응에 또 한 번 면밀히 관찰을 끝낸 준혁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한편으론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전혀 해가 되지 않을 거란 걸 알았기에 안도했고, 어찌 된 일인지 알 방도가 없기에 찝찝했다.
‘어쩔 수 없지. 당장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으니, 우선 이곳을 탈출하고 생각하자.’
+++
준혁이 2층으로 올라오자 자비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성공하셨군요!!”
“운이 좋았습니다. 다행히 저도 정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체질이더군요.”
“정말 그렇습니다! 허나 이건 알아두셔야 합니다. 만약 또 다른 정혈을 흡수하려 할 땐, 더 조심해야 합니다. 다양한 정혈을 흡수할수록 그 수만큼 위험도가 올라니까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비에가 한쪽으로 물러나자, 준혁은 품 안의 백호 영수를 한쪽에 내려두고, 벽화를 마주 보고 섰다.
정확히 벽화로부터 스무 걸음.
딱 그 자리에서 시작해야 벽화의 반응을 끌어낼 수가 있는 것.
준혁은 바로 수결을 맺어 변신술을 사용했다.
그 순간, 단전 주위를 맴돌고 있던 정혈이 단전 안으로 흡수되어 사라지며, 몸에 핏빛 광채가 번지며 지나갔다.
광채가 사라진 후 그곳엔 준혁 대신 2미터가량 크기의 백호 한 마리만이 존재했다.
백호로 변한 준혁의 모습은 벽화 속 백호의 모습과 사뭇 달랐는데, 우선 벽화의 백호처럼 흉포한 모습이 아닌, 편안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가장 큰 차이는 지금껏 족자를 비롯한 벽화 속 백호 모두 귀밑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청색 털을 가지고 있는 반면, 준혁은 귀밑털의 색이 진한 핏빛을 띄고 있었다.
“오! 이것이 백호족!”
“그럼 제가 한번 도전해 보겠습니다.”
준혁은 백호족으로 변하며 몸에서 떨어져 나간 공간대를 허리에 찬 후,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벽화를 향해 다가가며 석상의 발걸음을 그대로 따라 했다.
그 순간, 지금껏 위압감을 풍기고 있던 벽화에서 살아있는 백호의 환영이 튀어나와 앞발을 크게 휘둘렀다. 동시에 괴성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크아앙!”
앞발에 튀어나온 발톱에는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이 담겨있었는데, 아무리 환영이라 해도, 적중된다면 무사할 수 없을 거란 직감이 왔다.
‘자비에가 왜 한 걸음도 못 움직이고 물러서나 했더니, 이것 때문이었구나!’
결국 준혁도 괴성과 앞발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환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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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후.
자비에가 몇 달간 한 걸음도 떼지 못한 것과 달리, 준혁은 다섯 걸음이나 벽화에 다가갔다.
도전과 동시에 시작되는 백호 울음소리를 제외한다면, 환영의 공격은 시간이 지날수록 수월하게 피하거나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다섯 걸음을 넘어 다시 터져 나오는 백호 울음소리는 모든 기운을 날려버리고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울음소리가 중첩되니 몸이 버티질 못한다. 수를 찾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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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후.
자비에가 쉬지 않고 도전하는 사이. 준혁은 다시 1층으로 내려와 하급 법기와 하급 공간대를 전부 흡수했다.
흡기술로 유적 자체의 기운을 흡수할 수 있나 실험했지만, 아쉽게도 그건 불가능했다.
다시 2층으로 올라온 준혁은 인지경을 꺼냈고, 도전과 동시에 영기를 강렬하게 방출하며 백호 울음소리를 최대한 방어했다.
준혁의 수행이 엄청나게 올라간 걸 본 자비에가 멍한 표정을 짓는 사이, 준혁은 열 걸음까지 다가갔다.
하지만 결국 세 번째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자 영기가 흩어져 버렸고, 환영 공격에 적중당하며 내상을 입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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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6개월 후.
자비에는 겨우 세 걸음 다가갔고, 준혁은 세 번째 울음소리를 이겨내고 열다섯 걸음째를 지나 네 번째 울음소리가 들린 순간 바로 뒤로 물러나 버렸다.
“수사 대단합니다. 끝이 보여요.”
자비에의 감탄에 준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앞으로가 진짜일 겁니다.”
‘더는 불가능하다. 내가 원영기에 오르지 않는 이상, 네 번째 울음소리를 듣고 진행한다면···. 반드시 죽는다.’
물론 울음소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네 번 중첩된 디버프 효과로 인해, 그다음에 다가올 환영의 공격을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그동안 울음소리가 한번 중첩될 때마다 자신이 어느 정도 약화되었는지 정확히 계산하고 있었기에, 다음 상황을 예측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다시 도전해 봐야겠지···.’
자비에라면 이곳에서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을 버티며 수련해, 결국 이곳을 탈주 할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준혁은 흡수할 무언가가 없다면, 수행을 올릴 수가 없었기에 무리가 있더라도 계속 도전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라면 벽화 도전을 거듭할수록 수행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육체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기에 전혀 불가능한 도전은 아니라는 것.
‘이건 분명 강제로 영수족의 강체술을 익히는 과정이 분명하다.’
어렴풋이 벽화의 의미를 깨닫고 있는 준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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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후.
“크아아앙!”
네 번째 울음이 끝나고 벽화의 환영은 전신을 짓이겨 버릴 것처럼 두 발을 높이 들며 준혁을 덮쳤다.
순간 준혁의 몸 주위로 강력한 기운이 퍼져나가며 백호 환영의 기운을 약하게 만들었다.
“터져라!!”
곧이어 앞발 공격에 환영이 약해졌지만, 준혁은 난처한 표정을 짓다 뒤로 물러나 버렸다.
“한 걸음 더 다가가실 수 있었을 텐데. 왜?”
“아닙니다. 보기완 달라요. 환영을 처리했다면 다음 공격에 분명 당했을 겁니다.”
준혁은 아쉬운 마음을 다스리며 다시 처음 자리로 돌아가 재도전을 준비했다.
그때, 지금껏 2년간 죽은 듯 잠들어 있던 새끼 백호가 눈을 떴다.
눈을 뜬 백호는 마치 엄마라도 찾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준혁을 발견하고는 그의 목덜미로 폴짝 뛰어 안겼다.
“너 일어났구나?”
부비부비-
백호는 조막만 한 몸뚱이를 문지르며 두 손으로 준혁의 목덜미 털을 꾹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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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6개월 후.
작은 보호막에 둘러싸인 새끼 백호는 준혁의 목덜미 위에 찰싹 붙어있었다.
그런 백호를 업은 준혁은 환영을 연달아 격파하며 마지막 두 걸음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 녀석이 이리 도움이 될 줄이야.’
잠에서 깨어난 새끼 백호는 준혁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고, 준혁은 어쩔 수 없이 백호를 목덜미에 태운 채 보호막으로 새끼 백호를 감싼 후 벽화 도전을 진행해야 했다.
하지만, 백호가 다치지 않게 조심해야 했기에 더 힘겨운 도전이 될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벽화 속 백호 울음소리가 절반이나 급감해 더욱 수월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새끼 백호 때문이란 걸 준혁은 쉽게 눈치챘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들러붙은 거였다니.’
사실을 깨닫고 나자 어린 백호 영수가 더욱 각별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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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후.
준혁이 마지막 한걸음만을 남겨두고 있을 때, 자비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수사.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자포자기한 얼굴의 자비에는 준혁에게 철로 만든 상자를 꺼내 건넸다.
“이것을 제 가문에 전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하겠습니다.”
“같이 나가면 될 것을 왜 그러십니까?”
어느새 자비에의 얼굴엔 짙은 그늘이 깔려있었다.
“수사께서도 눈치채지 않으셨습니까? 아마 벽화의 시련을 통과한 자만이 이곳을 나갈 수 있을 거란 걸···.”
“흐음.”
실제로 준혁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벽화는 문의 역할이 아니라 통과할 자격을 물음과 동시에 그에 걸맞은 수련을 강제로 시키는 것.
아마도 새끼 백호가 스스로 깨어난 후 자기병 안의 청혈과 약을 먹고, 백호족의 술법과 무구를 얻은 후에 최소한의 실력을 쌓고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만든 장치가 분명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사.”
“나의 무얼 믿고 이걸 맡긴단 말입니까?”
“저희가 함께한 게 벌써 3년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만 먹었다면, 제 재산을 쉽게 강탈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더군다나 유적에 들어와 조변석개하는 제 행동을 다 받아주시고···. 수사의 성품을 아니 이리 부탁드리는 겁니다.”
자비에는 준혁이 철제상자를 받아주지 않자, 전음부 한 장을 꺼내더니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주입했다.
“윈드라스 자비에 입니다. 이것을 가져온 자는 저와 가문의 은인···.”
자비에의 모습을 지켜보던 준혁은 결국 철궤와 전음부를 건네받았다.
“알겠습니다. 수사 말대로 우리가 3년을 동고동락했으니···. 이 정도 부탁은 들어드리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수사.”
대화를 마친 준혁은 물건을 정리하고 벽화를 향해 돌아섰다.
이제 지긋지긋한 유적에서 나가야 할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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