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53화 (53/408)
  • # 53 < 백호 유적 (1) >

    부웅-

    십여 미터의 몸체가 움직이자 바닥이 잘게 흔들렸다. 흙 인형은 순식간에 준혁의 눈앞에 거대한 흙 주먹을 들이밀었다.

    파앗-

    하지만 주먹이 아무리 빠르다 한들, 준혁은 스치기도 전에 이미 사라져 버렸다. 붉은 장도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그의 등 뒤에서 잔상을 남길 뿐.

    흙 인형의 머리 위로 이동한 준혁은 발로 흙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흠, 정말 흙만으로 만들어 낸 건가?”

    준혁을 놓친 흙 인형이 자비에의 깃발 신호에 따라 또다시 주먹을 움직였다.

    부웅-

    영기가 흙 주먹 위로 뿜어져 나오며 푸른 기운을 내뿜고 있었고, 그 주먹은 준혁을 짓이겨 버릴 것처럼 뻗어왔다.

    파앗-

    허나 거대한 흙 주먹과 자신의 몸통 중 무엇이 더 단단한지 실험해볼 생각이 없던 준혁은 적마도의 힘을 이용해 다시 한번 이동했다.

    퍽- 푸학-

    그리고 준혁이 피한 자리엔 흙 인형이 자신의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있었다.

    머리가 터지자 흙더미가 비산하며 쏟아졌고 준혁은 그 모습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재생하는구나.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겠군.’

    흙 인형이 신기하긴 했지만, 굳이 계속해서 구경할 생각은 없었기에, 준혁은 곧장 자비에 곁으로 이동했다.

    파앗-

    흙 인형을 상대하던 준혁이 갑자기 사라졌다가 자신 앞에 나타나자 자비에는 움찔하다가 광소를 터트렸다.

    “하핫, 내가 그리 허술할 것 같으냐! 고급 주술인 바람춤은 그 무엇도 통과할 수가 없다!”

    ‘이건 보호막이라기보다는 영기를 무력화시키는 건가? 흑몽환에는 상극이구나.’

    자비에가 만들어낸 장막은 일반 방어 법기가 만들어낸 보호막과 다르게 법기 공격에 담긴 영력을 낮추어 공격력을 떨어트리는 능력.

    ‘그렇다면 그에 걸맞은 상극 법기를 사용하면 간단한 일.’

    기감으로 상대의 능력을 파악한 준혁은 흑몽환의 기운을 흩어버리고, 공간대에서 청룡언월도를 꺼내 들어 영기를 집중시키며 단순하게 일자로 내려찍었다.

    쉬익-

    “하핫, 무구를 바꾼다고 나의 바람춤을 뚫을 수 있, 헉!”

    언월도는 바람 장막을 지나치며 살짝 힘을 잃었다. 하지만 곧바로 영기를 집중시키자 바람을 찢어발기며 곧장 자비에에게 쏘아졌다.

    쾅-

    자비에는 바람 장막이 뚫리자 급하게 털 뭉치 같은 걸 뱉어내더니, 공격을 막으려 했지만, 언월도에 실린 괴력을 막기엔 역부족.

    “컥-”

    단 한 수만에 피를 울컥 쏟아낸 자비에가 연신 뒷걸음치며 몸을 가누지 못하자, 준혁은 빠르게 이동해, 어느새 그의 목에 단검을 들이댄 채 서 있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손을 움직이자 자비에의 목이 절반쯤 갈라지며 모로 쓰러졌다.

    털썩-

    “가짜였군.”

    처음부터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가졌던 준혁은, 목숨을 취하고 나자 확실히 이상함을 느꼈다.

    더군다나 눈앞의 흙 인형도 여전히 몸을 회복하며 준혁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중.

    그에 준혁은 협곡을 향해 소리쳤다.

    “자비에! 아직도 내가 당신의 하수로 보이는가!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명년 오늘을 당신의 제삿날로 만들어 주겠소!”

    준혁의 외침에 청명을 상대하던 토끼가 황급히 뒤로 물러났고, 흙 인형이 무너져 내리며 흙더미가 되어 수북이 쌓였다. 그리곤 협곡 내에서 진짜 자비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선배님 되십니까?”

    흥- 코웃음을 친 준혁이 말했다.

    “그것이 중요합니까? 스스로 신용이라 말하며 거짓을 말한 것이 문제지?”

    “선배님 그것은 오해입니다. 제가 말하지 않은 것은 있지만, 거짓을 말하진 않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을 두고 기만이라 하는 겁니다.”

    잠시 후 깊은 한숨 소리와 함께 사라졌던 늑대가 물건들을 입에 문 채 다시 나타났다.

    “선배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모두 돌려드리고. 술법은 그냥 드리는 것으로 하지요.”

    하지만 준혁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이미 상대는 갖은 수단을 전부 소비한 상태이고, 거기에 더해 자신을 죽이려고 한자인데 물건값만 환불받고 떠날 생각은 없었다.

    늑대가 날려 보낸 물건들을 전부 공간대에 담은 준혁이 차갑게 말했다.

    “한국의 수도계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목숨값은 목숨으로밖에 대신할 게 없다고. 어찌 생각하십니까?”

    “휴우. 다시 한번 사죄드립니다.”

    “말로 해결할 수 있었다면, 진작 끝났겠지요?”

    “무엇을 원하시는 겁니까?”

    “우선 모습을 드러내시지요. 언제까지 그 안에 숨어있을 겁니까?”

    자비에의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준혁이 바로 협곡 안으로 쳐들어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기감을 통해 느껴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진법들 때문.

    “나가면 제가 살 수 있겠습니까? 선배님께서도 안으로 드시는 게 껄끄러워 보이시는데. 다시 한번 사죄드릴 테니 이렇게 끝냈으면 합니다···.”

    그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청명이 준혁의 곁으로 다가왔다.

    “대인. 저곳에 펼쳐진 진법은 멸하진(滅霞陳)과 대라멸진(大羅滅陳)임다!. 시간이 꽤 오래 걸릴 테지만, 안전하게 안으로 들어갈 틈 정도는 만들어낼 순 있습니다요! 진법 안이었다면 불가능해도 바깥에서라면 제 실력으로도 충분할 겁니다요!,”

    ‘대라멸진?’

    차경수의 거처에서 구했던 세 가지 진법 원반 중 하나의 이름.

    “대라멸진? 그에 관한 정보가 있다면 내게도 주게. 혹시 자넬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니.”

    청명은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옥간 두 개를 꺼내 건넸다.

    “저에게 아주 소중한 것들입니다요···.”

    준혁은 고개를 끄덕여준 후 옥간을 건네받아 빈 옥간에 정보를 옮겨 담고는 원본은 청명에게 건넸다.

    “얼마나 걸릴 거 같은가?”

    “그게, 대충 한···.”

    청명이 말을 이으려던 순간, 안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알겠소! 알겠으니 진법은 손대지 말아 주십시오! 수십 년이 걸린 제 노력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목소리를 무시한 채 준혁은 공간대에서 진법 깃발 뭉치와 영석을 잔뜩 꺼냈다.

    “이것들이 있으면 더 빨리할 수 있을 터, 가져다 쓰게. 나도 지금부터 진법을 들여다보겠네.”

    “예, 대인! 최대한 빠르게 제거해 보겠습니다요!”

    두 주먹 불끈 쥐며 의욕을 발산하는 청명이 공간대에서 기이하게 구부러진 깃발 뭉치를 꺼내 들더니 협곡 가까이 걸어갔다.

    그리고는 허공에 깃발을 던지며 수결을 맺었다.

    “안된다 하지 않았소이까!!”

    그때 협곡 안에서 무언가가 날아오더니 깃발들을 가격하며 땅에 꽂혀 들었다.

    그것은 검은 기운이 줄줄 흘러나오는 거대한 깃발이었는데, 깃발 천에는 산과 계곡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동시에 간절한 노호성이 함께했다.

    “선배님! 잠시만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지금도 듣고 있습니다.”

    “...”

    “시간을 끌려는 겁니까?”

    “...후우···. 아닙니다. 사실···. 저는 오래전부터 바람 일족의 으뜸이라는 백호족의 흔적을 쫓아왔습니다. 기나긴 조사 끝에 이곳에서 그 유적을 발견했고요. 다만 유적은 고대절진이 보호하고 있기에 20여 년간 그것을 해제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설치한 진법을 강제로 해제해 버린다면 제 20년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돼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제발···. 멈춰주십시오.”

    유적이라는 말에 관심이 쏠렸다. 청명도 마찬가지인 듯 두 귀를 쫑긋 세운 채 집중하고 있었다.

    “백호족의 유적이라. 저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영수족 중 그 능력이 출중하여 고대엔 사방위신이라 불렸다는 백호, 주작, 현무, 청룡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선배님께서 원하신다면 유적에서 나오는 것들 중 일부를 바칠 터이니, 부디 손을 멈춰주십시오.”

    준혁이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긴 척하자, 청명이 두 손을 비비며 말을 걸었다.

    “대인. 나쁘지 않은 제안 아니겠습니까요? 그리고 안에 들어가면···.”

    말을 끝까지 하진 않았지만, 눈빛만 보아도 알 것 같았다. 청명은 자비에를 죽이고 유적을 독차지하자고 눈으로 말했다.

    준혁은 고개를 젓고는 청명에게 명령했다.

    “진을 해체하게.”

    반응은 바로 나왔다.

    “선배님! 당장 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진법은 건드리지 말아 주십시오!”

    준혁은 가소롭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내 어찌 당신을 믿고 안으로 들어가겠습니까? 이미 한번 나를 속인 전적이 있거늘.”

    “아닙니다. 이번엔 정말 속이지 않겠습니다. 그러기에 저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인 산과 계곡의 깃발까지 내보인 겁니다! 청명 저자도 저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겁니다. 그러니 제발!”

    준혁이 시선을 옮기자, 청명은 산과 계곡이 그려진 깃발을 뽑아 들며 주의 깊게 살폈다.

    “대인. 저자가 사실을 말하는 듯합니다. 이건 상급 진법 깃발로 그 가치가 어마어마할 겁니다요.”

    “상급 깃발? 진법 깃발에도 등급이 있단 말인가?”

    준혁의 반응에 청명이 설명했다.

    “물론입죠. 일반적으로 쓰는 진법 깃발이 영기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용도라면, 상급 깃발은 깃발 자체에 진법의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요.”

    자비에가 날려 보낸 상급 깃발을 앞으로 내밀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 깃발로 치자면, 거대 진법에 특화된 듯 보입니다요. 아마 지금 저곳처럼 산이나 계곡 전체를 진으로 둘러쌀 때 그 효력을 배가시켜주는 것일 듯 싶습니다요.”

    청명의 설명에 힘을 싣듯 자비에도 긍정했다.

    “맞습니다. 저희 가문의 보물입니다. 이 정도면 저를 믿어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비에의 간절한 말에, 한참이 지난 후에야 준혁이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믿어드리지요. 대신 저도 안전장치는 해야겠습니다. 청명, 진법에 틈을 만들 수 있게 조치하고 발동만 하지 말게.”

    “예! 대인.”

    청명이 하려던 일을 마저 하기 위해 빠릿하게 움직였다.

    “자비에 당신이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면 나도 진을 훼손하지 않겠습니다. 허나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상황이 보이면···. 아시겠지요?”

    “휴우, 예···. 다만, 조심해주십시오···.”

    +++

    ‘대라멸진···. 대단하구나.’

    청명이 진법에 구멍을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 사이, 준혁은 그가 건네준 옥간의 내용을 확인하고 있었다.

    대라멸진.

    그것은 대라신선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진법으로, 총 16방위에 16개의 멸진을 만들면 신선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무적에 가까운 진법이었다.

    다만 준혁이 보고 있는 내용 속의 대라멸진은 선계에서 사용하는 진정한 대라멸진이 아닌, 소대라멸진이라 불릴만한 것이었다.

    16방위중 1방위만을 점하는 용도로 만들어졌는데, 그럼에도 결단기 수사 정도는 무력하게 만들 수 있는 진법이었다.

    ‘특별한 재료가 들어가는 것만 아니었다면, 엄청난 물건이 되었을 수도 있겠어.’

    다만 진법 깃발과 영기만으론 발동할 수 없기에 아쉬움이 남았다.

    진법을 공부하고 나니 자비에가 공격형인 대라멸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 수 있었다.

    대라멸진은 유적을 보호하고 있는 진법을 약화하는 용도였다.

    그리고 진법에 대해 알면 알수록 청명에게 시켜 일을 진행한 것은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아무 준비 없이 자비에의 말만 믿고 협곡 안으로 들어갔다면, 그가 대라멸진의 방향을 유적이 아닌 자신에게 돌린 순간, 죽음을 각오해야 할지도 몰랐었다.

    물론 그가 말한 대로 유적에 대한 열망이 그토록 강하다면 모든 걸 포기하고 대라멸진의 방향을 바꾸진 않을 테지만,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

    준혁은 혹시나 자신이 위험해질 수도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대라멸진과 또 다른 옥간에 적혀진 멸하진에 대해 계속해서 연구했다.

    멸하진 역시 이름만큼이나 상대방을 가둬두고 죽이는것에 초점이 맞춰진 진법이었다. 대라멸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진법에 갇힌 개체 자체를 죽이기 위한 방법이라기보다는, 진법 안의 영력을 소멸시키는 데 중점을 둔 것.

    멸하진이 발동되면 주변 영력이 소멸하며 노을이 지는 것처럼 붉은 기류가 흐른다고 하여 멸하진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었다.

    준혁은 대라멸진에 관해 공부하던 중 문득 자신이 가진 대라멸진 원반 법기가 몇 방위를 점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눈이 있기에 꺼내지 않고 다음에 확인하겠다는 생각만 가졌다.

    만약, 3방위 이상을 점할 수 있게 만들어진 진법 원반이라면, 어쩌면 원영기 수사를 무력하게 만들지도 몰랐기에 기대감이 차올랐다.

    그렇게 진법을 연구하며 청명이 하는 일을 유심히 살피고 감시했다.

    ‘그러고 보니 신비경은 몇 번 경험했지만, 유적은 처음이구나.’

    확률적으로 신비경보다는 유적에서 보물이 발견될 가능성이 컸기에, 기분이 살짝 들떴다.

    준혁이 과한 욕심은 부리지 않고, 정명한 자세를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수도자의 길을 걷고 있기는 마찬가지.

    수행을 올리거나 실력을 올릴 수 있는 보물이라면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그것이 사방위신이라 불린 백호족의 유적이라 하면 더더욱.

    그렇게 청명이 진법을 손보기 시작한 지 일주일 후, 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협곡으로 걸어 들어갔다.

    걸어 들어가는 준혁의 손엔 구부러진 깃발 하나가 들려있었는데. 그것은 협곡에 설치된 대라멸진을 망가트릴 열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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