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52화 (52/408)

# 52 < 자비에 (2) >

준혁의 제안에 또 한 번 침묵이 흘렀다.

한참의 장고가 끝났는지 안갯길 사이로 처음 나타난 여우보다 수십 배는 커다란 늑대 한 마리가 옥간 하나를 입에 물고 나타났다.

“한번 확인해 보시지요. 다만 이렇게까지 해드렸는데···. 맘에 들지 않는다고 거래를 취소하시면. 저도 가만히 있진 않겠습니다.”

늑대가 입김을 후우 불자 옥간 하나가 천천히 날아와 준혁의 손안에 들어왔다.

동시에 어디에선가 노란 부적 한 장이 팔랑거리며 날아왔다.

오래전 여서령 앞에서 사용했던 맹약의 부적.

“먼저 맹약 부터 하시지요.”

“나는 자비에 수사와 거래로 얻은 술법을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

말이 끝나자 준혁 앞에서 멈춰있던 부적이 꼿꼿하게 서더니 기이한 노란색 빛을 뿜어댔다. 그리고는 빠르게 쏘아져 와 준혁의 심장 어림을 때렸다.

“좋습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만족스럽다는 듯 말하는 자비에의 목소리를 흘려보내고는 심장 부위에 후끈거림이 사라지길 기다렸다.

그리곤 영기를 살짝 흘려보내 옥간에 장난을 쳤는지 확인해 본 준혁은 이내 이마에 가져가 내용을 확인했다.

‘흐음. 정말이었구나! 영수의 피를 이용해 상대 종족의 모습을 그대로 구현해낼 수 있는 술법이라니···.’

주요 요결과 상세한 술법의 구동 원리는 가려져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난 것들만 보자면 틀림없는 진짜 변신술이 분명했다.

다만, 청명에게 들었던 얘기가 떠올라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용을 보자면 말씀하신 것과 같군요. 다만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듣기로 여기 있는 이자에게 구색초에 대해 알려주셨다고 하더군요. 그 방편으로 이 변신 술법을 거론하고?”

“맞습니다.”

“헌데 어찌하여 직접 가지 않으신 겁니까? 직접 구색초를 구한다면 영석 오천 개 따위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부를 손에 넣을 텐데?”

망설임 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설토족으로 변하려면 설토족을 잡아야 합니다. 그 말인즉슨 내경까지 들어가야 한다는 말인데···. 저는 그럴 자신이 없습니다.”

“정말 그것이 다입니까?”

“물론입니다. 결단기 수행에도 내경에선 살아남는 걸 장담할 수 없거늘, 하물며 제 수행에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말을 들어보니 틀린 말은 아닌지라, 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커다란 늑대에게 옥간과 함께 중급 법기 두 개와 영석 칠백 개를 넘겨주었다.

“거래하겠습니다. 다만 거짓이 없으셔야 할 겁니다.”

“하하, 본국에서 저를 부를 땐 신용의 자비에라고 불렀습니다.”

늑대는 준혁이 건넨 물건들을 가지고 안갯길로 사라지더니 잠시 후 새로운 옥간 하나를 가지고 나타났다.

옥간을 받아든 준혁은 곧장 내용을 확인했다.

“그럼 볼일이 끝났으면 이만 돌아가시지요. 저는 해야 할 일들이 남아서.”

준혁이 옥간 속 내용을 확인하는 사이 늑대는 안갯길로 사라졌고, 갈라졌던 틈새가 다시 짙은 안개로 차올랐다.

그때 준혁이 옥간을 회수하고는 재빨리 공간대에서 검은 깃발 두 개를 꺼내 안개 속으로 날려 보냈다.

쉬익-

동시에 빠르게 수결을 맺어 영력을 방출했다.

“무너져라!”

스르르륵-

준혁의 행동에 진하게 차오르던 안개가 점점 희미해지며 협곡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짓인가! 감히 내 진법을 파훼해?! 이러고도 무사하길 바라는 것인가!”

노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준혁 옆에 있던 청명도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준혁을 바라보았다.

“대인, 진법에도 조예가 깊으셨음까? 휴우···. 다행이네.”

처음 준혁을 상대했을 때, 청명이 도망가지 않았던 이유는 비행술 수준이 낮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 세워두었던 원뿔 석탑을 이용해 진법으로 준혁을 상대하려 했던 것.

하지만 준혁이 너무 압도적으로 수하들을 죽여버리기에 시도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건 신의 한 수라 할만한 일이었다. 목숨을 구한 한 수.

안개를 날려버린 준혁은 싸늘하게 웃더니 협곡 방향을 쏘아보았다.

“자비에 수사. 내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까? 거짓은 없어야 한다고?”

“허 참. 겨우 그 수행에···. 맹랑하십니다. 그려. 말해 보십시오. 무슨 거짓을 말하는 겁니까?”

준혁은 자비에가 넘겨준 옥간을 가볍게 던졌다 받았다 하며 말했다.

“교묘하게 감춰두면 모를 줄 알았습니까? 술법을 적용하기 위해서 피가 필요하다? 피가 아니라 정혈이겠지요.”

“...”

“당신은 내경까지 들어가 설토족을 잡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결단기 이상의 설토족을 잡을 자신이 없는 것이겠지요. 아닙니까?”

준혁의 지적에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어찌 그것을 단번에···. 험. 그렇다 한들! 내경까지 가려면 최소한 결단기 이상의 수행은 지녀야 하니 큰 차이는 없습니다. 결단기 수행에 결단기 영수를 잡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닐 테니, 게다가 정혈은 피가 아닙니까? 고로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하? 그렇습니까? 그럼 왜 이건 빠트리신 겁니까? 자신보다 수행이 높은 자에겐 술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헙! 어떻게···. 큼! 흠흠!”

준혁이 단번에 술법의 약점을 파악한 이유는 오래전에 얻은 식혈만복 공법 때문이었다.

그 안엔 식인을 통해 기를 흡수하는 과정 중에 피와 정혈이 각각 어떤 식으로 기운을 방출하고 흡수되는지, 흡수되어 체화되는 과정에 발산하는 기의 파동이 외부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가 적혀있었다.

그 내용을 알고 있던 준혁에겐, 옥간에 기록된 피의 흡수 방식이 말하는 게, 일반 피가 아닌 ‘정혈’이라는걸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고,

그 과정 중에 술법 특유의 파동이 생겨나는데, 그것은 영근을 감출 수 없는 것처럼, 자신보다 수행이 높은 자에겐 단번에 파악돼 버린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자비에는 잠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금세 침착함을 되찾으며 별것 아니란 듯 말을 이었다.

“그걸로 내가 거짓을 말했다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영수족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고 했지, 그게 절대 들키지 않는다고는 한 적이 없습니다. 무릇 술법이란 게 다 그렇지요. 완벽한 것이 어찌 존재하겠습니까?”

자비에의 대답에 준혁은 피식 웃고는 공간대에서 똑같이 생긴 팔찌 두 개를 꺼내 팔목에 찼다.

“아무리 수도계가 약육강식의 세계라지만, 전부 도적놈들 천지구나.”

준혁의 쓴웃음이 섞인 한탄에 오히려 자비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런 건방진 자를 보았나! 뭣이 어째? 도적? 진짜 도적이 무엇인지 볼테냐?! 쯧쯧, 아무리 수행이 낮고 경험이 없다고는 하나, 그리 경솔해서야 어찌 살아가려고 그러는가!”

그리고는 청명에게도 한 소리 했다.

“이봐 청 수사. 구매자를 데려온 것까진 고마우나 어찌 저런 위아래도 모르는 자를 데려온 것인가? 내 오늘은 자네 얼굴을 봐서 보내줄 터이니 당장 물러가게! 다음에도 이런다면 그땐 손님뿐만 아니라 자네도 살려주지 않겠네!”

자비에는 당연히 수행이 낮은 청명이 바짝 엎드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크나큰 오산.

청명이 소릴 질렀다.

“야 이! 개새끼야!! 니가 사람 새끼냐! 나는 영석을 구하려고 목숨 걸고 뼈 빠지게 일했거늘! 뭐?! 결단기가 넘는 영수를 잡아야 하고, 더군다나 수행이 높은 자에겐 바로 들켜?! 야 이 개 호로 상놈아! 너 오늘 잘 만났다. 아주 초상을 치를 줄 알아라!”

그리고는 곧바로 준혁 앞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대인! 저 새끼 좀 족쳐주십셔! 대인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런 것도 모르고 수십 년의 고생을 저놈에게 바칠뻔했습니다요!”

그때 협곡 안에서 노한 목소리가 울렸다.

“중요한 일을 진행 중이기에 나서지 않으려 했거늘, 내 심기를 제대로 자극 하는구나!”

그리곤 안개가 사라진 협곡 안쪽에서 무언가가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그것들은 전부 영수였는데 옥간을 가지고 나왔던 늑대보다 조금 더 큰 늑대 두 마리와 눈처럼 하얀 모습을 한 토끼 한 마리, 그리고 인간 수사와 비슷한 외형을 가진 이족보행을 하는 늑대였다.

영수 셋은 축기기 초기 수행이었다. 개중에선 토끼가 가장 수행이 높아 보였고, 인간과 늑대를 합쳐놓은 듯한 영수는 축기 후기 수사였다.

준혁은 늑대인간처럼 생긴 수사가 자비에라는 프랑스 수사인 걸 단번에 알아보았다.

겉모습은 이족보행을 하는 영수처럼 보이긴 했지만, 풍기는 기운이 다른 영수와는 달랐다. 다만 진짜 인간 수사라 하기엔 무언가가 이상했다.

‘변신술을 사용해 늑대족으로 변한 건가? 흠. 헌데 왜 이리 영력이 옅어 보이지?’

“누구도 살려주지 않겠다. 신용의 자비에! 오늘만큼은 살육의 자비에가 되겠노라!”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영수들의 등장에 청명이 잔뜩 긴장한 채로 법기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준혁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당신이 자비에?”

“감히 함부로 입을 놀려?!”

“당신이 나를 기만하지 않았습니까?”

“허허. 끝까지 태도가 뻣뻣하다니. 정말 네놈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자비에가 땅을 박차며 준혁에게 쏘아져 갔다. 동시에 그의 곁에 있던 두 마리의 늑대 역시 준혁을 향해 움직였고, 토끼는 청명에게 날아갔다.

자비에가 준혁에게 접근해 손을 내리긋자, 그의 손길에 따라 바람이 일었다. 바람은 순식간에 칼날로 변했고, 주위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 회오리쳤다.

“다음 생에선 말을 입 밖으로 꺼낼 땐 두 번 생각하거라!”

자비에의 바람 칼날과 두 마리 늑대의 입에서 쏘아져 나온 반투명한 구체가 준혁의 몸을 찢어발기려는 찰나.

파앗-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꺼지듯 사라져 버린 준혁이 어느새 자비에의 등뒤에 나타났다.

하지만 바로 공격하진 않고, 충고의 말을 건넸다.

“당신도 명심하십시오. 칼을 들기 전엔 항상 상대방의 수행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는 걸.”

“헉!”

준혁의 목소리에 놀란 자비에가 몸을 보호하며 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반대로 두 마리의 늑대는 몸을 사리지 않고 더욱 적극적으로 준혁을 공격했다.

그 순간 준혁의 양 손목에 채워져 있던 검은 팔찌에서 검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더니 1미터 남짓한 얇은 도신을 가진 환두대도(環頭大刀)로 변했다.

환두대도는 모습을 갖춤과 동시에 준혁의 손짓에 따라 사선으로 교차하며 흉포하게 다가오던 두 마리 늑대를 베어버렸다.

스걱-

축기기 초기 수행이었던 두 마리의 늑대는 변변찮은 활약도 해보지 못한 채 머리부터 꼬리까지 정확히 이등분으로 갈라졌다.

달려오던 힘을 해소하지 못한 채 갈라지면서도 움직이는 게 소름 끼치게 괴이했다.

준혁의 수행은 여전히 축기기 초기로 보였기에 자비에는 영수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마, 말도 안 돼! 어찌 동급 영수를 이리도 쉽게!”

그 모습에 당황한 자비에는 서둘러 공간대에서 거대한 보라색 깃발을 하나 꺼내더니 허공에 교차하듯 엑스자 형태로 저었다.

“바람에 이는 춤! 일어나라 땅의 아이여!”

주위의 기운이 깃발의 움직임에 따라 요동치는 걸 느끼며, 칼날의 핏물을 날려버린 준혁은 공중으로 살짝 몸을 띄우며 자비에 에게 날아갔다.

그에게 근접한 준혁이 다시 한번 쌍 대도를 휘두르는 순간.

깃발과 함께 일고 있던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더니 두 사람 사이에 거대한 장막을 만들어냈다.

바람 장막은 마치 소용돌이가 치듯 아래에서 위로 솟구쳤는데, 준혁의 구름 칼날을 손쉽게 짓이겨 버렸다.

동시에 준혁이 서 있던 땅이 갈라지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술법은 아닌데? 뭐지? 또 다른 영수인가?’

“수행에 비해 강한 건 인정한다만 상대를 잘못 잡았다! 오늘 부림술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보여주마!”

후두두둑-

잠시 후 땅이 갈라지며 거대한 흙더미가 솟구쳐 올라왔다.

흙더미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움직이더니 바위 세 개를 얹은 모습의 거대 인형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 크기가 주는 위압감이 어마어마할 정도라 준혁도 잠시간은 가슴이 철렁함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이내 사태를 파악하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십여 미터의 크기를 지닌 흙 인형은 크기와 비교해 수행은 고작 축기기 후기. 그것도 중기를 겨우 넘어선 후기에 불과했다.

물론 축기기 후기가 쉽게 여길만한 것은 아니었으나, 흙 인형의 거대한 몸체에 비교한다면 왠지 귀엽다 느껴질 수행이었다.

또한 이성이 없어 나타난 순간 몸을 뒤척거리며 주변을 파괴하기만 했지, 자비에의 말에 따라 신속하게 움직인다거나 하진 않았다.

“저놈을 짓이겨 버려라!”

자비에의 명령에도 곧바로 반응하지 않던 거대 흙 인형은 황, 적, 청 색을 지닌 부적이 연달아 몸에 달라붙고 거대한 깃발이 움직인 후에야 준혁을 목표로 삼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도는 아까와 달리 매우 신속했고, 둥그런 흙 몸통 옆으로 솟아나 있던 흙 주먹엔 영기가 눈으로 보일 만큼 진하게 뭉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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