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 자비에 (1) >
한동안 옥간 속 내용을 살핀 준혁은 설토족에 관한 것뿐 아니라, 내경과 중경에서 발견된 적 있는 다른 영수족에 관한 정보들까지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처음 옥간을 발견했을 땐 그저 보물에 대한 과한 집착이 빚어낸 광기라 여겼는데, 차경수가 정리해 놓은 정보는 꽤나 세심하고 객관적이었다.
‘이곳에도 나와 있구나.’
옥간 속 정보에는 설토족의 천년수와 보물에 관해 적혀있었다. 구색초라는 말은 없고 설토족이 달의 정기를 모아 기른 꽃이라고만 기록된 채.
설토족의 꽃은 오백년에 한 번씩 완벽하게 개화하는데, 그전에 채집한다면 평범한 약초나 다름없었다. 대신 완벽한 꽃을 취할 수 있다면 달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사시사철 피어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자랄 때까지 돌보고 있는 것이었어!’
도적 대장에게 들었던 정보들과 비교하니 평범한 구색초가 아니란 말이 더욱 와닿았다.
긴 시간 동안 거듭 확인해, 다양한 정보들을 외운 준혁은 옥간을 정리하고는 도적 대장에게 말했다.
“살고 싶으냐?”
“무, 물론입죠! 살려 주십시오. 대인!”
구속 법기에 잡혀있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도적 대장은 콧물 눈물을 흘리며 사정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준혁은 공간대에서 단약 하나를 꺼내 들어 그 안에 극소량의 피를 집어넣었다.
그것은 일전에 김춘수에게 주었던 것과 같은 것.
“이걸 먹거라.”
“이, 이게 무엇입니까요?”
“내가 원할 땐 언제든, 어디에 있든 네 심장을 날려 버릴 수 있는 물건이다.”
“히익! 그런 걸 어떻게!”
“싫다면 지금 죽고.”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공간대에서 은색 장도 하나가 빠져나와 화염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걸 본 도적 대장은 침을 꼴깍 삼키더니 세차게 고갤 끄덕였다.
“먹습니다! 먹겠어요!”
준혁이 손가락을 튕기자, 단약은 사내의 입속으로 쑥 들어갔다. 동시에 손발을 구속하고 있던 쇠고랑이 자동으로 풀려나며 준혁의 공간대 안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네가 할 일은 한가지다. 짝수달이 되면 비경 밖으로 나가 삿포로의 명월이라는 곳으로 가면 된다. 그곳에서 김춘수라는 자를 만나 그가 건네는 것을 가지고 오면 된다. 할 수 있겠지?”
“당연히 할 수 있습죠! 근데···. 두 달에 한 번씩 매번 가야 하는 것입니까요?”
“물론.”
준혁의 말에 도적 대장은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준혁의 속도로는 겨우 1주일 거리였지만, 축기기 중기인 그는 아무리 열심히 움직여도 비경 입구에서 중경 초입까지 한 달 가까이 걸리는 일.
그 말인즉 왕복 거리에 더해 비경 밖에서도 누군가를 만나고 와야 한다면, 두 달은 족히 걸릴 거라는 뜻이었다.
앞으로는 수련과 사냥 그 어떤 것도 하지 못하고 심부름만 해야 한다는 생각에 도적 대장은 암울해졌다.
“네가 일만 잘 수행한다면 수행에 필요한 단약을 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저, 정말이십니까?!”
“그래.”
물론 지금은 없으니, 나중에 생긴다면 이라는 말은 생략한 준혁이었다.
‘두 달에 한 번씩 정보를 모아놓으라고 했지만, 바로 확인은 하지 못할 줄 알았더니···. 이렇게 해결하는구나.’
준혁의 원계획은 비경 내에서 심부름꾼으로 부릴만한 자를 구하기 전까진, 반년 혹은 1년에 한 번만 김춘수가 모은 정보를 확인하려 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축기기 중기라면 심부름꾼을 하기엔 충분하다 못해 넘쳤기에 준혁은 만족스러웠다.
“가야 할 곳이 있으니 밖에서 대기하고 있거라.”
“넵! 그런데···. 어딜?”
“어디긴 어디겠느냐. 그 프랑스 수사에게 가야지.”
프랑스 수사가 말한 구색초에 관한 정보는 진실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중요한 건 바로 영수로 변할 수 있다는 술법.
만약 그 술법을 익히게 된다면 비경 내에서 생존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뿐만 아니라, 신분을 감추기에도 최고였으니 사냥을 시작하기 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섰다.
다만 움직이기 전에 도적들에게서 얻은 십여 개의 공간대를 정리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도적 대장이 꾸벅 인사를 하고 방음진 밖으로 나가자 준혁은 청룡가 수사를 처리했다. 그리곤 조금 전에 얻은 공간대의 물건을 전부 하나로 모았다.
총 12개의 공간대에서 나온 물건은 숫자에 비해 가벼운 감이 있었다.
영석은 총합 250여 개 정도였고, 비행법기를 포함한 하급 법기가 29개, 중급 법기 2개가 전부였다.
이번에도 다양한 부적들이 나왔는데, 전음부나 정신부같이 보조용으로 쓸만한 것들을 제외하곤 전부 한곳에 쑤셔 모았다.
광석을 포함한 재료들도 각각의 쓰임새에 따라 분류했다.
그리곤 평소처럼 빈 공간대를 태워버리려다가 멈칫하고는 생각에 잠겼다.
‘이제 굳이 처리할 필요가 없나?’
지금껏 빈공간대를 태워버린 건 혹시나 공간대에 새겨진 표식 때문에 꼬투리가 잡힐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
하지만 비경 안에선 그럴 위험이 극히 낮거나 없다시피 했기에 보조용으로 사용해도 될 듯했다. 더군다나 청룡가나 설악산 무리같이 큰 세력의 일원도 아닌 그저 산수 도적 무리가 사용하던 공간대라면 더더욱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생각을 정리한 준혁은 빈 공간대마저 자신의 공간대 한쪽에 보관하려다 문득 깨달음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지금까지 놓치고 있던 사실.
아니 생각도 해보지 못한 일.
“그러고 보니, 공간대도 법기잖아?”
준혁은 곧장 자리에 앉아 빈 공간대 세 개를 허공에 띄웠다. 곧이어 깃발을 쏘아 보냈다. 그리곤 깃발이 날아감과 동시에 준혁에게서 금빛 실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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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가면 되는 것입니까요?”
며칠간 공간대를 흡수하는 게 가능한지 확인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도적 대장은 중경 방향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준혁은 곧장 그의 뒤를 쫓으며 편안하게 날아갔다.
“이곳엔 너 같은 자들이 많은가?”
“저 같은 이라면···?”
“도적 무리 말이다.”
준혁의 말에 도적 대장이 뻘쭘한 표정으로 변명했다.
“그렇다고 봐야겠습죠? 직접 채집 같은걸 하는 것보다 효율이 좋으니···. 다른 지역엔 문파 규모로 움직이며 도적질을 하는 자들도 있다 들었습니다요.”
이런 저런 대화를 하며, 외경과 중경의 경계선인 병풍처럼 높게 솟은 산맥을 지나자 영기 밀도가 피부로 전해질 만큼 짙어짐을 느낄 수가 있었다.
“흐음~”
“중경에 처음 오시는가 보시죠?”
“그래.”
도적 대장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수사가 중경에 발을 내디디며 하는 첫 행동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것이었다.
그 청량감은 갈수록 희미해지긴 하지만, 처음엔 마치 시원한 영천수를 단숨에 마신 듯 상쾌함이 전해졌다.
“중경 초입은 외경처럼 안전한 편이지만,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영수족을 만날 수 있으니 조심해야 됩니다요. 더군다나 수행이 높은 괴수들도 있으니···.”
“알겠네.”
준혁의 대답에 도적 대장이 잠시 머뭇거리다 질문했다.
“그런데 대인, 제가 앞으로 어떻게 불러드려야 할깝쇼?”
“편한 대로 하면 된다. 그러는 넌.”
“청명, 명이라 불러주시면 됩니다요.”
“일본인이 아니었던가?”
준혁의 물음에 청명은 고갤 저었다.
“저도 잘···. 어릴 적 고아원에 맡겨졌는데, 저와 함께 있던 옥패에 그리 적혀있어 청명이라는 이름을 사용한겁니다요.”
말을 하면 자신의 공간대에서 사각 옥패를 꺼내 준혁에게 보여주었다.
살펴보니 법기는 아닌 듯했지만, 그저 시장에서 쉽게 살만한 물건도 아닌 듯했다. 영기 함량이 매우 높은 고품질의 옥으로 만들어진 옥패였다.
“특이하군.”
“헤헤. 그럽죠? 저도 어릴 땐 이 옥패를 보고, 제 신분에 비밀이 있는 줄 알았습죠. 결국은 뭐···. 이렇게 도적질이나 하는 삶이지만.”
준혁은 청명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 서쪽으로 날아가며 그에게 물었다.
“프랑스 수사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보게.”
“흠. 수행은 축기기 후기이고 이곳 비경에 모습을 드러낸 건 대략 20여 년 정도 됐습니다요. 기이한 술법을 사용하는데 몸놀림이 영수처럼 빠르기도 하고, 바람을 다루는 술법을 주로 사용합니다요. 좀 까칠하긴 한데, 사람 자체는 그리 나쁜 것 같진 않고···. 또 뭐가 있더라···.”
청명은 그 외에도 자신이 아는 쓸데없는 정보들을 나열했다. 그렇게 신나게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꼬박 이동하자 안개가 짙게 드리워진 협곡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협곡은 황토색 절벽이 마주 보는 형태였다. 다만 안개 때문에 그 깊이를 알 순 없었다.
“여깁니다요. 그럼 부르겠슴다.”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청명은 전음부 한 장을 꺼내 수결을 맺더니 전방으로 날려 보냈다.
바람을 돌파하듯 거세게 휘날리며 날아간 전음부가 안개에 사무치며 사라졌다.
한참 후, 안개 너머에서 걸걸한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벌써 왔군. 영석은 다 준비 한 건가?”
“아니우! 다만 오늘은 새로운 분을 모셔왔으니 나와 보실 수 있겠수?!”
청명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잠시 후 협곡에 내려앉아 있던 안개가 좌우로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붉은 털을 가진 여우 한 마리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영수?’
준혁은 서책에서만 보던 영수이기에 여우를 면밀히 살폈다.
그러자 안개 속에서 걸어 나오던 여우가 불편하다는 듯한 눈으로 준혁을 쏘아보았다.
“수사께선 이 몸이 매우 신기하신가 보군요?”
“허! 말을 한단 말인가!”
준혁이 알기로 영수들에게도 등급이란 게 있었다. 대부분의 영수는 인간들과 비슷한 지능을 가졌지만, 사람과 대화를 하기 위해 언어라는걸 직접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선, 수행이 높거나 나이가 많아야 했다.
하지만 준혁 눈앞에 나타난 조막만 한 여우 영수는 딱 보기에도 새끼처럼 보였다. 수행도 겨우 연기기 초기.
기감을 쏘아 보내 여우를 자세히 살핀 준혁은 그제야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준혁이 입 밖으로 말을 꺼내기 전 청명이 여우에게 다그치듯 핀잔을 늘어놓았다.
“자비엔 수사, 장난 그만 치시우. 새끼 영수를 조정해 뭘 하자는 거요? 얘기할 게 있으니 좀 나와주시구려.”
자세히 살펴보니 새끼 여우는 새끼손톱만 한 구슬을 입에 물고 있었다. 목소리는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미안하네만, 움직일 상황이 아니네. 그리고 내 이름은 자비에 일세. 도대체 몇 번을 말하는가?”
“아! 그것참 미안하게 됐수다. 내 머리가 돌이라.”
“술법을 사러 온 것이 아니면 가보시게, 그리고 다른 이는 만날 생각이 없으니 다음부턴 수사 혼자만 오고.”
말을 마친 여우가 뒤돌아서자 준혁이 불러 세웠다.
“저도 술법을 사기 위해 온 것입니다. 가격은 충분히 치를 테니 팔아주시겠습니까?”
돌아가던 여우가 고개를 돌렸다.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왠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 그러십니까?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르지요. 가격은 들으셨습니까?”
준혁은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대답했다.
“허나 술법 하나에 영석 오천 개라니?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제 생각과는 다르군요. 바깥이라면 모를까, 비경 안에선 그 어떤 법기나 술법보다 가치가 있습니다. 싫으시면 그만입니다.”
영석 오천 개면 지금껏 준혁이 모은 영석의 양과 비슷했다.
“조금 깎아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깍는다라···. 그럼 이렇게 하시지요. 맹약의 부적으로 타인에게 전수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시면 영석 4천 개에 드리지요.”
잠시 말없이 턱을 매만지던 준혁이 제안했다.
“그것도 좋지만, 이건 어떠십니까? 맹약의 부적으로 약속드릴 테니, 중급 법기 두 개를 받고 술법과 교환하시는 겁니다.”
말을 끝낸 준혁이 공간대를 스치자. 조금 전 도적놈들에게서 얻은 중급 법기 두 개가 손 위에 떠 올랐다.
단검 모양의 법기와 톱 같은 날이 달린 창이었다.
“흐음···. 두 법기가 훌륭해 보이지만, 제가 손해를 봐야 하겠군요. 그리고 당장 법기가 필요한 것이 아닌 영석이 급하기에 그 제안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럼, 거기에 영석 오백 개를 더해 드리겠습니다.”
“흐음. 천 개라면 고려를.”
“육백.”
“구백 개.”
“칠백 개로 하시지요.”
그리고 긴 침묵.
좋다 싫다 확답을 하지 않고 말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작은 한숨 소리와 함께 수락이 떨어졌다.
“좋습니다. 거래하시지요.”
하지만 이번엔 준혁이 제동을 걸었다.
“잘 결정하셨습니다. 단! 주요 요결을 뺀 술법의 내용을 먼저 알려 주시지요. 정말 말씀하신 것처럼 뛰어난 술법인지 확인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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