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49화 (49/408)

# 49 < 눈꽃 비경 (2) >

‘이자가 왜 여기에, 료칸으로 간다하지 않았나?’

경매장에서 들었던 내용을 떠올리며 허릴 숙였다.

“또 뵙습니다. 선배님.”

준혁의 인사에 사쿠라가 손사래를 치며 다가왔다.

그녀의 뒤에는 날카롭게 생긴 사내 한 명과 가리개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따르고 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수행이 파악되질 않았다.

‘설마 전부 결단기?’

“비경으로 가는 줄 알았으면 같이 올 걸 그랬네? 안에 들어가 수련하려고? 아니면 영초 채집?”

일반적으로 비경은 깊이 들어갈수록 영기가 짙어졌기에, 채집 활동을 하지 않고 수련만 하는 이도 제법 많이 존재했다.

외경이라 불리는 비경의 초입만 하더라도 웬만한 영산 수준의 영기를 품고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수사가 무작정 비경으로 모여들지 않는 건 단 하나의 이유. 바로 생명을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초 채집을 위해 들어가려는 것입니다. 제 재능이 미천해 영단의 도움 없이는 수행이 올라가질 않기에···.”

사쿠라는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수고해봐. 너무 낙담하지 말고. 그리고···. 아니야. 무슨 오지랖은.”

사쿠라가 혼잣말하며 고개를 젓고 지나가자, 뒤에 따르던 이들이 준혁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후 사라졌다.

사쿠라가 준혁에게 아는 체를 했기 때문일까?

주변에 모여있던 수사들은 준혁에게 관심을 보이며 서로 수군대며 이야기를 나눴다.

준혁은 괜히 자신에게 이목이 쏠리는 것에 불편함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겉으로는 그 어떤 티도 내지 않았다.

그렇게 준혁이 따가운 시선을 느낀 지도 몇 시간.

어느새 달이 떠오르며 요테이산의 정상을 비췄다. 달빛이 내리기 시작하자, 산 정상엔 신비로운 빛이 퍼지며 옅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점점 짙어지던 안개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자, 분화구 중심에 기이한 물결이 움직이는 잔상 같은 것이 생겨났다.

마치 달빛이 일정 공간에 갇혀, 달아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 같은 모습.

‘왜 달의문이라 하나 했더니. 저런 모습이었기 때문이구나.’

신비로운 광경에 준혁은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리고는 달의문을 향해 움직이려는 순간.

사쿠라와 두 남녀, 그리고 두 명의 사내가 달의문 앞으로 내려섰다.

그중 가장 앞에 서 있던 사쿠라가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내가 누군지는 알지? 지금부터 비경에 들어가려는 자들은 신분을 조사할 거야. 모두 협조해.”

그때 웅성웅성하던 수사들 사이로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결단기 초기 수사였는데, 하얀 머리띠를 한 미남자였다.

“소문으로 듣긴 했지만, 정말이었군. 눈꽃 비경은 주인이 없거늘, 당신들이 무슨 권한으로 이곳의 출입을 통제한단 말입니까? 아무리 사쿠라 선배님이라 해도 그럴 권한은 없으십니다.”

용기를 낸 사내의 말에 사쿠라가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되물었다.

“넌 누구지?”

“제가 누군지가 중요합니까? 수백 년간 자유롭게 이용하던 비경을 감시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려주던지, 아니면 당장 멈춰주시오.”

“오호라, 그러고 보니 얘길 들어본 것 같네. 후쿠오카에 강맥문(强陌門)이라는 문파가 있는데, 죄다 머리에 하얀 영웅건을 쓰고 별 오지랖을 떨며 고상한척하는 놈들이 있다고.”

“뭣이! 말을 삼가십시오! 오지랖이라니요! 저희는 정의를 실천하는 겁니다!”

사내가 발끈하자, 그 모습에 사쿠라가 잔인한 비웃음을 머금었다.

“정의도 힘이 있어야 한다는 건 알지?”

“그 정도 힘은 있소이다!”

그 순간 사쿠라의 발밑에서 쾅! 소리가 나며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곤 순식간에 강맥문 소속의 사내 앞에 나타나 손을 휘둘렀다. 어느새 그녀의 손엔 작은 나뭇가지가 쥐어져 있었는데, 공기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질 듯 휘어지는 걸 보면 평범한 나뭇가지 같아 보였다.

펑-

사쿠라의 나뭇가지가 사내를 가격하자, 사내는 연기처럼 터져 나가며 멀리 떨어진 하늘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당신은 맘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죽이고 보는 겁니까?!”

허공에 연기가 모여들며 사내의 모습으로 변하자, 사쿠라의 입가엔 비웃음이 더욱 진하게 걸렸다.

“아니? 맘에 들어도 죽이는데?”

그 순간, 사쿠라의 등 뒤로 나무 환영이 나타나며 순식간에 꽃봉오리를 만들어냈다. 거의 동시에 꽃봉오리가 터져 나가며 벚꽃잎이 만발하자, 사쿠라가 허공을 향해 손을 움켜쥐었다가 폈다.

그녀의 손짓은 바람을 어루만지듯 살랑거리며 움직였고, 그 움직임에 따라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벚꽃 나무를 흔들었다.

쏴아아-

그리고는 바람에 따라 벚꽃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며 황홀한 풍경을 만들어내는가 싶더니, 이내 꽃잎들은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여 엄청난 속도로 허공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하지만 그녀의 꽃잎이 목표에 닿기도 전. 허공으로 도망쳤던 사내는 다시 구름처럼 펑 하고 터져 나가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오늘 나를 공격한 걸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사내의 목소리만이 남아 주변에 울려 퍼질 뿐이었다.

사내가 도망가자 사쿠라의 뒤를 따르던 두 남녀가 이마를 꿈틀하더니 각각 비행법기를 꺼내 들고 허공으로 솟구치려 했다.

하지만 이내 사쿠라의 손짓에 멈춰 섰다.

“됐어. 성가신 법기를 가지고 있어서 못 잡아.”

그 상황에 두 남녀 중 사내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강맥문이 크다고는 하나, 고작 결단기 초기 수사가 셋 있을 뿐입니다. 감히 건방지게 사쿠라님께!”

“아니, 한 명은 중기에 올랐어. 그리고 저놈들이 내 눈치를 안 보는 건. 얼마 전에 왕웅 밑으로 들어갔기 때문일걸?”

사쿠라가 별일 아니란 듯 말하자, 오히려 사내가 깜짝 놀라 반문했다.

“왕웅이면 중국의 원영기 수사 말입니까?”

“그래. 그놈이 요새 무슨 생각인 줄은 모르겠는데, 여기저기 찔러보면서 본국에서도 세력을 만드는 중이거든.”

“그럼···. 사쿠라 님께서도···.”

피식 웃은 사쿠라는 사내의 말을 잘라버렸다.

“귀찮게 세력은 무슨. 원영기에만 오르면 그깟 놈들 죄다 쳐 죽이면 그만이지. 지금도 왕웅 그놈을 이길 자신은 없지만, 지지 않을 순 있다고. 그러니 이번에 그것만 구할 수 있다면···. 그러니까 알지?”

“사쿠라 님께서 원하는 물건을 얻으실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내가 갑작스레 한쪽 무릎을 꿇자, 옆에 있던 여인은 살짝 자세를 낮추며 사내의 말에 동조했다.

+++

한편, 일련의 일들이 벌어지는 걸 보며 준혁은 청룡가의 힘에 새삼 놀라고 있었다.

사람들을 조사하겠다고 나타난 사쿠라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결단기 사내. 그중 한 명은 아는 얼굴이었다.

‘저자 이름이 가심악 이라 했던가?’

여동수에게 납치당했을 때, 정신부 효과를 증폭시키기 위해 나타났던 진법가 결단기 수사.

가심악이 청룡가에 편입됐다는 정보를 얻은 적이 있기에, 여공천의 명으로 자신을 잡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또 다른 결단기 한 명은 준혁이 본 적 없던 청룡가의 호법 중 한 명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사쿠라를 움직인 건 청룡가란 말이겠구나. 두 결단기에 사쿠라라···.’

다른 건 제쳐두고 결단기 후기 수사를 움직였다는 것만으로 청룡가에 대한 평가가 수직 상승했다.

그때 상황을 마무리한 사쿠라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또 불만 있는 놈 있어? 말해봐? 아무도 없지?”

한바탕 하고 나자 수사들은 더는 불만을 표출하지 못하고 순순하게 달의문 앞에서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고는 비경 안으로 들어갔다.

+++

어느덧 비경 안으로 들어가는 줄은 줄어들고 준혁의 차례가 찾아왔다.

“앞으로 오시게.”

준혁은 들킬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에, 마음을 편안히 가라앉히며 가심악 앞으로 걸어갔다.

“축기기 초기라···. 어디 출신인가? 보아하니 일본인은 아닌 듯한데?”

“한국에서 왔습니다. 산수 출신입니다.”

통역술이란건 전달되는 뜻만 바꿔주고 입 모양은 속일 수가 없기에 준혁은 사실대로 말했다.

“한국? 어디서 수련했지?”

“마지막으로 거주했던 곳은 청계산 인근이고, 그전엔 북한산 근처에서 생활했습니다.”

“흐음. 괜찮다면 주로 사용하는 법기를 볼 수 있겠나? 그리고 얼굴을 확인해야 하니 가리개도 치워보게나.”

다른 이들은 외형을 바꾸는 술법을 사용했나 검사하고 출신지만 파악했는데, 한국 출신이라는 말에 더 빡빡하게 검사를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사쿠라가 다가왔다.

“가 수사. 그 녀석은 내가 확인했어. 그냥 들여보내.”

사쿠라의 말에 가심악이 움찔하더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이 확인하셨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알겠습니다. 자넨 들어가 보게.”

준혁은 말없이 사쿠라를 향해 가슴에 손을 올린 채 가볍게 인사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비경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그녀가 준혁을 불러세웠다.

“야. 내가 오지랖 같아서 아무 말 안 하려 했는데. 중경에 들어가면 수옥과(水玉果)라는걸 구할 수 있을 거야. 여(女) 수사들이 목매어 구하려고 하는 것 중 하나인데. 그걸 먹으면 네 얼, 아니 상처를 가라앉힐 수 있어. 만약 결단에 오르면 완전히 치료할 수도 있고, 나도 덕 좀 봤었거든.”

“감사합니다. 선배님. 명심하겠습니다.”

“단 네 수행에 혼자 구하려 들다간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하니깐···. 꼭 무리를 지어 움직이고.”

준혁은 또 한 번 허리를 깊게 숙이며 감사함을 표했다.

사쿠라는 그런 준혁 가까이 오더니, 그의 어깨를 토닥거린 후 자리를 벗어났다.

“죽지 말고, 잘 이겨내. 그깟 얼굴···. 껍데기에 불과하니깐 자신감 좀 가지고.”

잠시 후 준혁이 달의문을 통과해 사라지자 얼굴 가리개를 한 여인이 사쿠라에게 다가갔다.

“언니. 이런 모습 처음이에요. 저자는 누군가요?”

사쿠라가 별일 아니란 듯 피식 웃어 보였다.

“그냥, 우리 어릴 때가 생각나는 애랄까?”

그때 강한 바람이 불며 사쿠라와 함께 온 여인의 얼굴 가리개가 살짝 흔들렸다.

그리고 그 안의 얼굴은 마치 준혁이 사쿠라에게 보여주었던 것처럼 심각하게 짓이겨진 처참한 모습이었다.

다만 여인은 얼굴뿐만 아니라 목으로 이어지는 피부 전부가 그러했다.

+++

잠깐의 어지러움이 생겨났다가 해소되자, 준혁의 눈앞엔 무성한 수풀이 펼쳐져 있었다.

수풀 앞으론 수십 미터는 넘어 보이는 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어 달의문을 통해 비경 안으로 들어왔음이 실감 났다.

주위엔 먼저 들어간 수사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는데, 듣던 대로 외경 초입 부분에 무작위로 이동되는 것 때문이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여기가 비경이구나.”

숨을 크게 들이마신 준혁은 지구와는 전혀 다른 상쾌함을 느끼며 가슴을 활짝 열었다.

잠시 후, 기감을 넓게 퍼트려 주위를 파악한 뒤,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분광소를 소환해 깊다란 굴을 파냈다.

그 후엔 흡기술을 이용해 안쪽에 제법 넓은 공동을 만들어 낸 후, 방음진과 환영진으로 입구를 막았다.

그리고는 새로 구한 중급 공간대에 물건을 전부 옮겨 담은후 자리에 앉았다.

“늦기 전에 치료해야지.”

짓이겨진 얼굴을 치료하기 위해선 다시 혈단법을 운용해 피를 안정시키고 기혈을 바로잡으면 되는 일.

하지만 시기가 너무 늦어진다면 완벽하게 치유되지 않을 수도 있었기에 준혁은 서둘러 회복에 돌입했다.

+++

꼬박 삼 일간 몸을 회복한 준혁은 쓰게 웃으며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으로 뺨을 쓰다듬자, 아주 옅은 상처들의 질감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빠르게 치료한다고는 했지만, 미세한 상처들이 남아버렸던 것.

멀리서 본다면 티가 안 날 정도였지만, 가까이서 자세히 살피면 매끈하던 피부가 살짝 그을린 것처럼 변한 걸 볼 수 있었다.

“수옥과라고 했지? 시간이 되면 그것도 구해야겠네.”

하지만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기에 우선순위에 발을 내밀 정돈 아니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준혁은 임시로 만든 토굴에서 나섰다. 그리고는 깊게 숨을 몰아쉬다 중급 비행 법기를 꺼내 허공으로 치솟았다.

‘이제 중경으로 넘어가 영수들을 사냥하자, 하루라도 빨리 중기에 이른다.’

결단기 중기.

인지경의 힘을 빌린다면 결단기 후기의 힘을 사용할 수 있을 터였고, 그렇다면 더는 숨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