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 눈꽃 비경 (1) >
사쿠라의 발언에 주변의 웅성거림이 심해졌다.
어느새 경매 주최 측에서 펼쳐놓았던 인식 장애 진법은 사라졌는지, 각각의 수사들의 모습은 드러나 있었다.
그중 가장 앞쪽에 앉아있던 사내가 단상 위를 향해 물었다.
“겨우 행방을 알려주는 것만으로 법보를 주신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가 설마 장난치는 거라 생각하진 않겠지?”
그때 사쿠라의 음성에 대답하듯 귀빈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천하의 사쿠라가 누군가의 심부름을 하고 있나 보군? 그 법기들은 한국에서 수배 중인 최준혁이란 자의 무구가 아닌가?”
자신을 조롱하는듯한 말에 사쿠라는 윗입술을 뒤집으며 이를 갈았다.
“어이, 시마타. 쳐맞아 죽고 싶지 않으면 닥치시지?”
“쯧쯧, 얼굴만 보면 세상 아름답거늘. 어찌 입엔 걸레를 물고 사는지.”
그 순간 사쿠라의 등 뒤로 나무의 환영이 나타났다. 동시에 나무에서 푸른 줄기를 가진 자주색 봉오리들이 생겨나더니 순식간에 터져 나가며 분홍빛 벚꽃잎이 풍성하게 자라났다.
“한번 해보자는 거지?”
“험. 난 이만 바쁜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하니 다음에 다시 얘기하지. 다만 사쿠라. 하나 충고하지. 한국의 어떤 세력에게 무얼 받기로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왜 그만한 대가를 치를 거라는 생각은 해보았나? 그자를 잡는 것까진 방해할 생각 없지만, 한국으로 넘기는 건 잘 생각해 보라고. 분명 후회하게 될 테니까. 우리도 그잘 찾고 있단 건 알아두고.”
잠시 후 말을 마친 시마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사쿠라는 이마를 찡그리다 좌중을 둘러보고는 재차 강조했다.
“아무도 모르나? 난 당분간 소금점의 료칸에 머물 것이야. 누가 되었든 정보를 가지고 온 사람에겐 이 법보를 줄 테니 널리 소문 좀 내라고.”
말을 마친 사쿠라마저 홀연히 사라져 버리자 남은 수사들만 빈 단상을 보며 벙찐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잠시 후엔 축기기 중기 수사를 시작으로 수많은 수사가 단상으로 올라오며 자신이 가진 물건을 경매에 올려 물물교환을 시도했다.
한편, 사쿠라와 시마타. 두 결단기 후기 수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준혁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결단기 후기 수사라면, 원영기를 바로 앞둔 사람들. 그런 자들을 움직이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들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애초에 그들 정도면 돈으로 쉽게 움직일 사람들도 아니었다.
막말로 큰돈을 제시해 부려 먹으려 한다면 그냥 다 때려 부수고 돈을 빼앗아 버리면 그만 아니겠는가?
그랬기에 일본의 3대 강자라는 두 명의 결단기 후기 수사가 자신을 찾는 다는 게 쉽게 납득이 가질 않았다.
‘당분간은 인지경과 분광소의 사용은 자중해야겠군.’
기운을 감추고 얼굴은 가렸으니, 두 법보만 사용하지 않으면 누구도 알아볼 일은 없었다.
더군다나 준혁은 독문 공법이라 할만한 것도 알려진 게 없었으니 스스로 정체를 밝히기 전엔 알아보는 게 쉽지 않을 터였다.
경매장 단상에 시선을 둔 채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준혁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시려는 건가요?”
“그래.”
“잠시만 기다리시면 등록한 물품 대금을 받아올게요.”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자, 종종걸음으로 사라진 여 시종은 잠시 후 하급 공간대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공간대를 넘겨받은 준혁은 기감으로 안에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그중 영석 세 개를 꺼내 여인에게 건넸다.
“수고했다. 밖으로 나갈 테니 안내하거라.”
준혁의 명에 여인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움찔거리다 결국 아무 말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귀빈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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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장을 벗어난 준혁은 곧장 소금점으로 이동해 중급 공간대를 구입했다.
“바로 오셨군요. 더 필요한 건 없으신 건가요?”
잠시 생각해 보던 준혁은 일회용으로 사용하는 법기 깃발을 가득 구입하고 영석을 지급했다.
“언제든 저희 소금점을 방문하시면 저를 찾아주세요. 성심성의껏 모실게요.”
나코라는 여인은 수수료를 두둑하게 받을 생각에 들뜬 것인지 유난히 친절한 모습이었다. 물건을 전부 사들인 준혁은 상점을 나서려다 갑자기 드는 생각에 몸을 돌렸다.
“아! 혹시 공간석을 구할 수 있습니까?”
“공간석이요? 혹시 공간 법기를 만들 때 사용하는 공석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공석 중에 영기 함유량이 매우 짙은 물건을 말합니다. 영석 중에 고등급 물건이 따로 있듯이.”
준혁의 설명에 나코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보네요. 공석 자체도 구하기 어렵지만, 공석에 등급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어요.”
준혁은 조금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간석을 구해 공천령을 되살리고 싶었지만, 설악산의 산수들도 공간석의 존재는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괴뢰를 만드는 핵심 재료인 오행석처럼, 공간석도 지구에서는 구할 수 없는 물건일지도 몰랐다.
그러다 생각이 상급 공간대에까지 미치었다. 아무리 뛰어난 장인이라 할지라도 동시대의 모든 이들을 압도하듯 앞서기는 쉽지 않은 일.
‘혹시 야마기가 상급 공간대를 만들어 낸 건 공간석이 있거나 그에 준하는 무언가가 있는 건 아닐까?’
“그럼 상급 공간대는 살 수 있습니까?”
준혁의 질문에 나코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고갤 저었다.
“죄송해요. 상급 공간대는 야마기님께서도 많이 만들지 않으셨답니다. 제가 알기론 친분이 있는 몇 분에게만 선물하셨다고 알고 있어요.”
그때 나코의 설명을 잇듯, 껄렁껄렁한 여인의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이었다.
“그래. 나같이 가까운 친우에게만.”
준혁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고, 앞에서 친절하게 설명하던 나코는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사쿠라 선배님을 뵈어요.”
준혁도 곧바로 허리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선배님을 뵙습니다.”
“축기기 초기? 오호? 내 스타일인데?”
준혁을 보고 위아래로 훑으며 입맛을 다시던 사쿠라는 습관적인 장난인 듯 눈을 찡긋했다.
“너무 욕심이 많은 거 아냐? 축기기 초기주제에? 야마기와 친분이 없다면 그건 포기해. 그가 만든건 중급도 구하기 어려운 걸 상급이라니 풋. 주제를 알아야지?”
사쿠라는 작은 핀잔을 한 후 이내 관심을 지우고 나코를 향해 말했다.
“야마기가 맡겨놨지? 귀찮게 말이야. 직접 가져다줄 것이지. 나보고 오라 가라 하는 놈은 아마 세상천지 그놈 밖에는 없···. 어라?”
껄렁하게 말을 꺼내던 사쿠라는 입술을 삐죽이더니 광대가 살짝 올라갔다.
그리고는 고개를 삐딱하게 돌리며 다시 준혁을 바라보았다.
“너 가리개 좀 치워볼래? 내가 요즘 누굴 좀 찾고 있어서 말이지.”
어느새 완전히 몸을 돌린 사쿠라가 눈을 빛낸 채 준혁을 응시했다. 그 모습에 준혁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제가 공법 수련 중 기혈이 뒤틀려···. 그 영향으로 얼굴이 너무 흉측하여 가리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니, 양해 부탁드리옵니다.”
준혁은 차분하고 예의 있게 행동했지만, 그것이 통하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 있는 법.
사쿠라는 명백히 후자였다.
“알았으니까 벗어봐. 내가 찾는 놈이 아니면 사과할게.”
하지만 준혁은 행동하지도, 그렇다고 변명을 하지도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사쿠라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한걸음 다가왔다.
“수상한데? 너 혹시 최가니?”
그때 준혁이 한숨을 푸욱 쉬며 가리개에 손을 가져갔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으나, 선배님께서 그리 원하신다면···.”
툭-
얼굴 가리개가 치워지자 준혁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모습을 확인한 사쿠라는 인상을 한껏 꾸기더니 뒷걸음으로 물러나며 손사래 쳤다.
“이런 쯧, 알았으니깐 가리개 써. 내가 미안해.”
준혁이 지금껏 가리개로 가리고 있던 콧등 아래부터 얼굴 하관이 전부 피고름과 함께 짓이겨 있었다. 코끝은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듯 붉은 살점처럼 변해 있었고, 입술도 부르트고 검은 멍이 곳곳에 들어있었다.
피부는 얼마나 징그러운지 살인을 밥 먹듯이 했던 사쿠라마저 거북한 듯 시선을 돌렸다.
준혁은 사쿠라의 반응에 쓸쓸한 눈빛을 하고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가리개를 착용했다.
“선배님께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드려 송구합니다.”
준혁의 말에 사쿠라가 찝찝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내가 잘못했는데 네가 왜 사괄해. 미안해. 나도 좀 사정이 있어서. 아이씨 기분 잡쳤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입맛을 다시고 있는 사쿠라를 보며, 준혁은 깊게 허릴 숙였다.
“그럼 저는 이만 일이 있어서···. 선배님을 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곤 곧바로 등을 돌려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그때 무언가가 날아오자 준혁이 가볍게 피하며 잡아챘다.
“그거 가져가. 내가 재미 삼아 가끔 만드는 부적인데, 위급할 때 사용하면 본토 내에선 꽤나 써먹을 만 할 거야. 미안해서 주는 거야.”
부적을 확인한 준혁은 품속에 집어넣고는 다시 한번 허릴 숙였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
피식-
준혁은 소금점을 벗어나 비경으로 날아가며 가볍게 웃고 말았다.
“악마니, 나찰이니, 나쁜 소문은 다 붙어있더니. 의외로 마음이 여리지 않은가?”
역시, 소문이란 건 믿을게 못되었다.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들던 사쿠라라는 수사는 생각보다 마음이 여려 보였다.
“하긴. 상황에 따라 사람은 변하는 것이니.”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자면, 단지 미안함이 생길법한 상황이라 그녀의 행동이 그랬던 것이지, 다른 상황에선 어떤 모습이 튀어나올지는 알 수 없는 법.
“그나저나, 빨리 치료를 해야겠구나.”
처음 그녀가 가리개를 가리켰을 때, 준혁은 혈둔술로 도망을 쳐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무작정 혈둔술을 남발하다간 아무리 경지가 안정되었다 한들, 결단이 깨져 버릴 수도 있는 법.
게다가 원영기에 거의 근접하다 평가받은 결단기 후기 수사라 쉽사리 도망이라는 선택을 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준혁은 그녀가 지적한 순간, 기지를 발휘해 혈단법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피를 다룰 수 있는 공법의 힘을 이용해 얼굴 하관에 몰려있던 피를 강제로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힘을 가하면 겉으로 힘이 발출될 수도 있기에, 한편으론 피부를 보호하며 안에서만 들끓게 했고, 그 결과 피고름과 함께 얼굴 하관이 전부 짓이겨져 버린 것.
다만 이것은 술법을 이용해 특정 효과를 발휘한 것이 아니었고, 실제로 몸이 상한 결과였다.
그랬기에 시간이 지나 상태가 나빠지기 전에 치료를 해야 했다.
준혁은 서둘러 비경의 입구가 있는 요테이산을 향해 이동했다. 다만 축기기 초기의 수행으로 위장 중이었기에, 그에 걸맞은 속도로 비행법기를 조정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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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테이산.
눈꽃 비경은 홀로 우뚝 솟아오른 요테이산의 정상. 분화구의 흔적만이 남은 그곳에 존재했다.
밤이 찾아와 달빛이 요테이산의 정상을 비추면 비경의 입구가 나타났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달의문이라 불렀다.
눈꽃 비경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비경으로 출입이 자유롭다는 것. 달이 뜨는 밤이면 언제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나올 때는 반대로 비경 안에 해가 뜰 때였다.
어떤 비경들은 몇 달 혹은 몇 년 주기의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만 출입을 할 수 있는 곳도 있었기에, 눈꽃 비경은 출입의 자유만으로도 다른 곳보다 안전하다 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수많은 수사가 몰려드는 이유였다.
눈꽃 비경의 입구가 존재하는 정상 부근에선 비행이 금지돼 있었기에, 준혁은 산 중턱으로 날아가 바닥에 내려섰다.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수사가 비슷하게 법기에서 내리며 정상을 향해 걷고 있었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구나.’
비경 내부는 기다란 호리병처럼 생겼다고 준혁은 알고 있었다. 사방으로 수만 킬로미터가 넘는 공간이 있는데 그곳을 외경이라 불렀다.
외경엔 다양한 괴수들과 영초, 각종 특이한 광물을 채집할 수 있었기에 연기기부터 축기기까지 다양한 수사들이 머물며 활동을 하고 있었다.
북쪽으로 계속 이동하면 높은 산맥이 나오고, 그곳을 넘어서면 중경이 나타났는데, 그곳부터는 영수족이 출몰했기에 수행이 낮은 수사들은 무리를 이루지 않으면 매우 위험했다.
다만 위험한 만큼 고급 영초나, 광석을 구할 가능성은 커졌다.
중경을 넘어 더 올라가면 내경이라 불리는 지역이 나타나는데, 그곳은 극히 위험하기에 지금까지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었다.
다만 원영기 영수가 존재한다는 소문이 무성했기에, 누구도 위험을 무릅쓰고 안으로 들어가려 노력하진 않았다.
산 정상에 도착하자 준혁은 수많은 수사가 분화구의 중심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 무언가를 기다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저곳에 비경으로 들어가는 문이 생기나 보군.’
살짝 시선을 올려 하늘을 보자, 날은 거의 저물고 서서히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제 달이 완연하게 떠올라 분화구를 비추면 비경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것.
그때.
전혀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준혁을 불렀다.
“어? 너 일이 있다더니, 비경에 들어가는 거였어?”
목소리의 주인공은 사쿠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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