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 연구회 (2) >
류휘안이 수결을 맺은 후 옥패 하나를 내밀자 옥패에서 푸른 빛이 일어나며 꽃밭 가운데 작은 문이 생겨났다.
“따라오시게.”
류휘안이 살짝 발걸음을 옮겨 작은 문 안으로 사라지자, 준혁도 곧장 그 뒤를 따랐다.
진법 안으로 들어오자 그곳엔 깊은 동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벅저벅
조금은 음침함이 느껴지는 동굴을 지나자 비로소 연구회라 불리는 널따란 공동이 준혁을 반겼다.
‘이게 무슨···.’
연구회의 모습은 준혁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깔끔했다. 하지만 상상 이상으로 참혹했다.
입구에서부터 시작된 모습에 준혁은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고 불쾌함과 분노가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지금껏 인체실험이라길래 시체를 해부하고 연구하는 것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한쪽엔 기둥처럼 생긴 수조(水槽) 수십 개가 나열돼 있었고, 수조 주위엔 정체를 알 수 없는 진법이 펼쳐져 있었다.
수조 안엔 알몸의 사람이 가느다란 실들에 꿰뚫린 채 둥둥 떠 있었는데, 전부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꿈틀-
간헐적으로 발작하듯 움직이는 수조 속 사람을 보고 있자니 절로 욕지기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
한쪽에 기둥 수조가 있다면, 그 반대쪽엔 사각형 수조가 나열돼 있었는데, 그곳엔 신체 일부가 잘린 사람이 마찬가지로 실에 꿰뚫린 채 누워있었다.
그 모습에 준혁은 눈앞에 있는 것들을 당장 때려 부수고 싶다는 마음이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준혁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본인은 정의의 사도도 아니었고, 인권을 위해 싸우는 투사도 아니었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인면수심의 한 장면을 보게 되자 알 수 없는 분노가 차올랐다.
준혁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리는 듯 보이자, 류휘안이 그의 곁으로 다가오며 타이르듯 말했다.
“진정하게 사제. 심호흡하고. 처음엔 다 힘든 법이니. 조금만 참으면 익숙해 질 것이네.”
“후우···.”
하지만 깊게 심호흡을 해도 마음이 가라앉질 않았다.
입구에 서서 수조 속 사람들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사이. 이충선을 비롯한 사형제들이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
“연구회에 온 걸 환영하네.”
“이제 진정한 우리 일원이 된 걸 축하하네! 최 사제.”
각자 덕담을 건네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축하한다고? 이 참혹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축하한다고?’
그 순간 준혁은 마동탁의 일기에서 보았던 구절이 떠올랐다.
-축기기에 오른 후, 처음으로 연구회에 참여했다. 욕지거리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동화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참아야 한다.
“후우···. 감사합니다. 사형들.”
준혁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내리누르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래. 나연이를 위한 것이다. 참자···. 참아야 해.’
하지만 애써 참는 것과 다르게 마음속에선 알 수 없는 불씨가 자라나고 있었다.
사람이란 게, 사람이기 위해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었다. 그랬기에 준혁은 빠르게 강해질 수 있음에도 식혈만복 공법을 익히지 않았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자들이 식인을 하며 수행을 올리던 그때 그 식인 남녀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사제 이리 오시게. 내가 내부 시설에 대해 설명해주겠네.”
이충선이 가까이 다가오며 준혁을 향해 손짓했다.
“예. 대사형. 부탁드리겠습니다.”
간신히 욕지거리를 누르며 공손하게 허릴 숙였다.
이충선은 기둥 수조 앞에 다가가더니 진법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이 진법은 안의 잠들어있는 수도자들의 생명 유지를 위해 매우 중요한 것이니 절대 훼손시키면 안 되네.”
“예. 대사형.”
“가느다란 실들이 보이지? 저건 인체의 혈과 영기의 흐름에 관해 알아내기 위해 설치한 것이네. 저것으로 인해 꽤 많은 걸 알게 되었지. 그리고 여기로 와보게 이건 말이야···.”
“...”
이충선은 기둥 수조에서 시작해서 연구회 곳곳을 누비며 각종 설비에 대해 알려주었다.
모든 설명이 끝나자 이충선은 연구소 한쪽을 가리키며 준혁에게 말했다.
“저기 보이지? 저긴 실험이 끝난 재료들을 모아두는 곳이네. 사제의 첫 일은 바로 저것들을 배출하고 정리하는 일이지.”
‘재료? 재료라고?’
준혁은 입을 열면 곧바로 욕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에 힘겹게 이를 악물며 고개만 간신히 끄덕였다.
“그럼 처리하고 오시게. 오늘은 그것만 해도 충분하네.”
잠시 후 이충선이 사라지자 준혁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지시된 장소로 이동했다.
그런 준혁의 마음속에선 심한 내적 갈등이 일고 있었다.
‘아무리 동생의 치료를 위한다고는 하지만···. 이런 행위를 지켜보고 합류한다는 게 맞는 행동인가? 그거야말로 핑계가 아닌가? 저들도 처음엔 나 같았겠지? 그게 익숙해지다 보니 지금의 저런 모습들이 된 것일 테고.’
생각해보면 류휘안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행한다.’라는 게 보였었다.
문득 또 한 번 마동탁의 일기장 내용이 떠올랐다.
-거부감이 들었던 인체실험도 시간이 지나니 무뎌간다. 다른 사형들도 다들 이렇게 변해간 거겠지?
‘이게 맞는 것인가? 스스로 정도만을 걷겠다고 다짐한 게 언제인가? 그 정도(正道)가 내 이익을 논하며 정해지는 일이었나?’
물론 세상엔 이보다 더 참혹한 일이 수없이 많을 테고, 모든 일을 준혁이 해결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고.
하지만 눈앞에 벌어진 일이고, 자신이 직접 참여해야 한다면 다른 얘기였다.
‘어쩔 수 없이 이번 한 번뿐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 결과가 달라지나?’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준혁은 내면의 물음과 마주해야만 했다.
‘과연 동생을 위한다는 마음이 내 신념을 져버리고 일을 행하게 할 만큼 중요한 일인가?’
물론 여전히 여동생의 치료가 인생의 최우선 목표였다. 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져버리면서까지 그 목적을 이루어야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아···. 어렵구나.’
한동안 고심하던 준혁은 결국 참아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이 나고 있었다.
지금 당장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전부 때려 부수려고 했다가는 반영근에 대한 정보 습득이 불가한 것은 둘째치고, 청룡가에 이어 설악산 무리에게서도 쫓겨 다녀야 할지 모르는 일.
원영기 수사라도 되어 모든 이들을 압도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그것은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든 것과 같이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결국 타협을 보아야만 했다.
‘그 누구보다 강해지리라. 더는 눈앞의 더러운 꼴을 참지 않아도 될 만큼! 내 의지만으로 내 신념을 관철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감정을 억누르며 재료라고 불린 실험이 끝난 수사들의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이동한 준혁은, 조금 전 자신의 결심이 송두리째 날아가는 걸 느껴야 했다.
“이···. 이···. 이···. 이게.”
너무 놀랐고, 분노해서 말이 채 나오질 않았다.
준혁이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처리해야 할 재료들 앞에 가만히 서 있자, 류휘안이 다가오며 준혁을 토닥여 주었다.
“처음엔 다 그러네. 그래서 다들 재료라고 부르는걸세, 그렇게 부르면 조금은 낫지. 너무 힘들면 이 사형이 도와줄까?”
자신을 위로하는 류휘안의 목소리에 준혁이 힘겹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자는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준혁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엔 해부되고 찢겨진 수많은 수도자의 신체 조각 사이에 있는 한 사내의 얼굴이었다.
“아! 이자 기억나네. 수행과 비교해 진법 관련 능력이 매우 특출났었네. 그래서 재료로 선택되게 된 거지.”
“...선택 말입니까?”
“왜 그러나? 설마 아는 자인가?”
질문과 상관없이 준혁은 다른 말을 물었다.
“설마···. 여기 있는 자들은···. 명왕의 시험에 응시한 자들인 겁니까?”
“맞네. 그들 중에 수행에 비해 우수한 자들을 선발하는 거지. 가만 보자. 이자는... 맞아! 진법 171호였네. 진법의 심상화 단계를 굉장히 수월하게 펼쳐냈던 게 기억나네.”
“이자의 이름은···.”
“응? 방금 뭐라고 했나?”
준혁의 목소리가 너무 작았던지 류휘안이 귀를 가까이 가져가며 물었다.
그 순간 준혁은 폭발하고 말았다.
“171호라니요!! 이 사람은!!! 이 사람에겐!! 오태식이란 이름이 있단 말입니다!!!”
외침과 동시에 준혁이 억눌러왔던 영력을 개방하자 순간적으로 돌풍이 일어나듯 주변 물건들이 뒤죽박죽 날아갔다.
와장창창-
“진정하게 최 수···.”
툭- 떼구르르
준혁의 반응에 깜짝 놀라 뒷걸음치던 류휘안은 어느새 목이 잘린 채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해도 해도 어찌 인간으로 이런 짓을 벌인단 말이냐! 이 사람은! 이 사람은!! 그저 영석 몇 개를 얻기 위해 발버둥 치며 진법을 공부했을 뿐이란 말이다!!”
어느새 준혁의 눈가에 살짝 붉은빛이 맴도는 눈물이 맺혀 흐르고 있었다.
그제야 준혁은 자신이 왜 그리 분노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운이 좋아 뛰어난 법보들을 가지고 있었기에 달랐을 뿐, 어쩌면 자신도 이들처럼 하나의 재료가 되어 있을 가능성도 다분했던 것.
소리 없이 나타나 류휘안의 목을 잘라버린 분광소가 순식간에 증식하며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분광소가 분열하며 강만학의 제자들을 공격하는 사이 준혁은 오태식의 머리를 보며 처량하게 말했다.
“이런 모습으로 만나자는 말이었습니까?”
-아 참, 난 오태식이라고 하는데. 자넨 이름이 뭔가? 우리 같은 산수는 이런 인연도 소중히 해야 하는 법이야. 나중에 어떤 인연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 알겠어?
-동생 그럼 다음엔 더 발전된 모습으로 만나자고?
마치 예전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반나절도 안 되는 아주 짧은 만남이었다.
하지만 유난히 그의 모습이 기억나는 이유는 그와의 대화에서 자신의 과거가 투영되었기 때문.
희망도 없는 목표를 향해 그저 하루하루 매진해 나가는 부족한 인간.
오태식이 영석 하나라도 더 얻기 위해, 수행을 조금이라도 올려보기 위해 밤낮을 잊고 고행을 쌓는 것이, 마치 동생을 치료할 희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하루도 쉬지 않고 죽어라고 일만 하는 자신의 모습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잠시나마 현실에 타협하려···. 못 본 척하려 했던 것에 반성합니다. 오늘 이곳에 살계를 열겠으니, 하늘에서나마 억울한 마음 조금이나 푸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오태식의 머리를 향해 고개를 숙인 후 자세를 바로 하는 준혁의 눈엔 진한 살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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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광소가 한번 날뛰고 지나가자, 류휘안에 이어 다섯 번째 제자인 박면수도 차가운 시체가 되어 바닥을 굴렀다.
대사형인 이충선과 둘째 김막타, 셋째 예공한 만이 서로 등을 맞댄 채 각자의 방어 법기로 전면을 보호해 분광소를 막아선 채 버텼다.
“이 무슨 짓이냐!! 미친 게야?!”
이충선의 고함이 울려 퍼지며 분광소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 준혁에게 회수되었다.
준혁은 분광소를 공간대에 넣은 후 적호패를 공중에 띄워 몸을 보호하게 만들며, 적마도를 꺼냈다.
또 다른 한 손에는 하급 방패형 법기인 원반을 든 채로.
“미친 건 네놈들이겠지.”
“뭐?! 네놈?!”
“인간으로서 할 짓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게 있는 법이다. 이런 짓으로 수행을 쌓는다 한들 결단기를 넘어 그 위로 갈 수 있을 것 같은가?”
“뭣이! 네깟놈이 뭘 안다고 지껄이느냐?!”
이충선의 고함에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래. 나도 겨우 축기기. 아직 아무것도 모르지. 허나 네놈들이 벌인 이 짓거리가 사람이 해선 안 되는 일이란 건 잘 안다.”
“하, 어처구니가 없군, 겨우 정의감 따위로 지금 이 짓거리를 벌렸단 말이냐?”
“정의감? 아니. 나도 그렇게 정의롭지 않다. 다만. 빚을 갚고 싶을 뿐.”
준혁이 다가가면서 원반 방패를 1미터가량 키우며 옆면을 보호함과 동시에 적마도에 영기를 주입했다.
순간 진한 영기파동이 주변으로 퍼지며 이제 곧 전투가 일어날 것임을 암시했다.
이에 이충선이 공간대에서 붉은 수실이 달린 반달 모양의 무기를 꺼내 들었고, 옆에 은색 머리띠를 한 사내는 단궁을, 나머지 한 명은 부적 뭉치를 꺼내 들었다.
“기껏 막내들을 상대해 본 게 다이면서 아주 기고만장해 있구나! 오늘 하늘 위에 하늘이 있음을 알려주마!”
이충선이 소리치며 반달 법기를 쏘아 보냄과 동시에 양옆에서 화염을 실은 화살과 수십 장의 부적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준혁은 적마도를 발동시키며 낮게 읊조렸다.
“오 수사, 이름을 빌려 쓴 값···. 지금 갚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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