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 거래 (2) >
강만학이 대답하기 전 준혁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니면 파렴치한 여공천처럼 강제로 빼앗아 가실 겁니까?”
다시 한번 여공천을 언급하며 도발하자, 강만학은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만하지. 내가 그 인간을 혐오한다는 걸 눈치채고, 자꾸 그놈을 언급하는 것 같은데. 그만해도 충분히 알아먹었네.”
“죄송합니다. 제 목숨이 달린 일이다 보니 말이 심했나 봅니다.”
“아닐세. 그런 보물을 지니고 있다면 충분히 그럴 만하지···. 내가 한번 확인해 봐도 되겠나?”
강만학이 말을 꺼내자 준혁은 스스럼없이 인지경을 날려 보냈다.
오히려 인지경을 잡아챈 강만학의 표정이 놀랍다는 표정이 되었다.
“고민도 없이 건네다니. 자넨 정말 근래에 보기 드문 사람이군.”
“빼앗고자 하시면 여반장이거늘. 그런 고민으로 심력을 낭비하진 않습니다.”
“뭐? 하하. 맘에 들군. 맘에 들어.”
웃음을 흘리던 것도 잠시, 강만학은 한껏 기운을 끌어올리며 진지한 얼굴로 인지경에 영기를 밀어 넣었다.
잠시 후,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하! 정말 인지경이었구나! 대단해! 정말 대단해!”
기분 좋은 내색을 감추지 않고 인지경을 계속해 운용해보는 강만학의 눈치를 살피며, 준혁은 아까와는 달리 조심스러워하는 자세로 물었다.
“제 거래에 응해주시겠습니까?”
“거래? 좋다! 좋아! 내 받아들이지. 이런 천하의 보물을 주었으니, 원하는 건 뭐든 주겠네. 공법과 단약이라? 하하하 당연히 주고말고!”
거래가 성립하지도 않았지만, 강만학은 인지경이 자신의 것이 된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준혁은 가볍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제 사정을 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강만학님.”
“강만학 님이라니? 자네가 연기기 수사도 아니고 축기기 수사인데 어찌 스승도 없이 관문 제자로 남게 하겠는가? 오늘부로 정식으로 나를 스승으로 섬기게.”
“그래도 되겠습니까?”
“내가 내 제자를 받는다는데 꺼릴 게 무언가? 그대가 연기기로 수행을 숨기고 있던 건 청룡가 때문이지 다른 꿍꿍이가 있었던 것도 아니니, 나는 개의치 않네.”
그 말에 준혁이 바닥에 바짝 엎드리며 절을 했다.
“제자 최준혁 인사 올리옵니다!”
“하하하. 그래 경사로다! 이 보물과 함께 새로운 제자가 들어왔으니.”
강만학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이나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인지경도 인지경이었지만, 준혁의 태도와 상황을 살피는 능력, 거기다 당차게 행동하는 게 매우 맘에 들었던 것.
적대관계에 있는 자라면 단번에 쳐 죽일 만큼 건방진 행동이었으나, 내 새끼 내 제자라고 생각되면 그만큼 맘에 드는 처신도 없었다.
준혁이 당당하던 조금 전과 달리 바닥에 바짝 부복하고 있자,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못한 강만학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래. 제자야. 공법과 단약이라 하였느냐? 네가 혈단법을 운용할 수 있어서 입문하였던 것이 맞느냐?”
“그렇습니다. 다만 입문 후에 받은 공법은 무언가 빠진 것같이 제대로 익힐 수가 없어서 크게 진전이 있진 않습니다.”
“하하, 그럴 만도 하지. 그 공법은 너무도 기괴하여 처음부터 전반부를 배제해 놓았다. 사특한 인간의 손에 들어간다면 큰 참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라 처리한 일이지. 아마 다른 아이들은 그걸 익힐 수도 없으니 눈치채지도 못했을 것이야.”
강만학의 말에 준혁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설마? 스승님께선 익히셨단 말씀이십니까?”
고개를 저은 강만학이 대답했다.
“아니. 나도 그 공법은 익히질 못했다. 다만 그 내용이 너무 심오해. 오랜 시간 연구를 했었지. 자 받거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옥간 두 개와 서책 한 권이 준혁 앞으로 날아들었다.
“너도 혈단법을 익히려다 깨달았겠지만, 혈단법은 총 세 단계로 구성돼있다. 네 앞에 놓인 옥간이 그중 첫 번째 단계인 기운을 흡수하는 방법에 관한 내용이다.”
“아···.”
“그리고 나머지 옥간은. 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마련한 술법을 기록한 것이다.”
“임시방편 말입니까?”
고개를 끄덕인 강만학이 말했다.
“익히다 보면 깨닫게 될 것이다. 나 역시 이론만으로 연구한 것이기에 뭐라 단정 짓긴 힘들다. 그리고 서책엔 내가 깨달은 내용을 적어놓았으니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리고 단약이라. 흠. 그래 이 정도면 적당하겠구나.”
잠시 공간대에 손을 가져다 대며 계산을 마친 강만학이 손을 가볍게 털었다.
그러자 그의 손짓에 따라 하얀 자기병 20병이 날아와 준혁 앞에 내려앉았다.
“청명단 10병과 지룡단 10병이다.”
“청명단과 지룡단···.”
“우선 지룡단으로 수행을 올리고 부족한 부분을 청명단으로 채운다면 어렵지 않게 축기기 중기까지는 수련이 가능할 것이다. 그것들을 소화해내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니, 후에 또 한 번 단약을 주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스승님.”
강만학이 이렇게 시원하게 쏠지 몰랐기에 준혁은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그의 인품과 성품이 어떤지는 몰라도, 거래에 임하는 자세는 확실히 상도를 지키고 있었다.
“흠···. 하지만 인지경에 비한다면 너무 적다 할 수 있지. 잠시만 기다리거라. 내 새로 얻은 제자에게 각박하다는 소릴 들을 수는 없으니 잠시 다녀오마.”
“네···. 스승님.”
말을 마친 강만학은 가볍게 몸을 띄우더니 처소에서 빠르게 사라져버렸다. 그리곤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조금은 편안해진 얼굴로 되돌아왔다.
어느샌가 준혁 앞엔 옥간 하나와 작은 천 하나, 그리고 동그란 적색 패가 놓여있었다.
“네가 혈단법을 익힐 수 있다고는 하나, 그건 효용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 공법. 이론적으로는 대단한 공법임은 틀림없으나 네가 제대로 익힐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다른 공법을 준비했다.”
“다른 공법이라 하심은···.”
“충선이의 말을 들어보니 입산하기 전 강체술 비슷한 공법을 익혔다고 들었다. 맞느냐?”
충선은 첫 번째 제자를 뜻했다.
아마 시험장에서 준혁이 읊조린 공법의 요결을 바탕으로 그리 판단한 듯했다.
‘그건 식혈만복의 일부였었지.’
“네 맞습니다. 이름은 모르오나 그런 효능이 있었습니다.”
준혁의 대답에 강만학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공법이란 게 다양하게 익혀 도움이 되는 것만을 취하는 것도 이롭긴 하나, 자신에게 잘 맞는 걸 익히는 것도 중요하지. 네가 신체를 단련하는 공법으로 혼자서 수행을 올려왔다면, 너와 잘 맞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준비했다. 상급의 강체술 공법이니 혈단법과 같이 익혀도 좋을 것이다.”
혈단법이 아닌 또 다른 공법이 주어지자 준혁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또한 크게 걱정할 건 없으나, 네 신분은 최대한 숨기는 게 좋을 테니, 거기 놓인 법기를 항상 착용하고 다니거라. 그러면 누구도 너의 진면목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나머지는 내가 아끼던 방어법기이니 잘 사용하면 된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래. 이제 나가보거라. 당분간은 모든 일에서 배제해줄 테니 수련에만 전념하고.”
강만학에게서 축객령이 떨어지자, 준혁은 마지막으로 준비했던 얘길 꺼냈다.
“스승님. 마 수사. 아니 마 사형의 처소는 제가 정리해도 되겠습니까?”
혹시나 재산을 탐내는 것처럼 보일까 봐 준혁의 행동은 조심스러웠다.
“혹시 동탁이의 여동생 때문이더냐?”
“아, 알고 계셨습니까?”
“내 제자의 일을 모를 리가 있을까? 그 아이가 죽기 전 부탁한 것이냐?”
“그렇습니다.”
“그래. 그건 너에게 일임하마.”
강만학은 말을 하며 작은 보따리를 주었다.
“이건?”
“그 아이의 부탁을 들어주는 데 쓰거라.”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두 사람 모두 크게 만족할만한 거래가 끝나자, 준혁은 인지경을 들고서는 착잡한 표정을 하고있는 강만학에게 다시 한번 크게 절한 후 그곳을 벗어나 거처로 향했다.
아마 마지막에 마동탁의 얘길 꺼내서 기분이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제자를 생각하는 건 진심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가?’
저택을 나오자, 사형들이라 불러야 할 인간들이 조금은 음흉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았지만. 준혁은 인사만 하고 떠나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들의 시선에 담긴 뜻은 강만학의 남다른 성적 취향을 만끽하고 왔을 준혁을 향한 비웃음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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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처로 돌아온 준혁은 곧장 공법을 수련하거나 공간대 속 물건들을 확인하지 않고,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 명상에 잠겼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동굴 입구에서 진동이 오며 누군가의 방문을 알렸다.
“어서 오십시오, 대사형.”
거처에 찾아온 자는 대사형인 이충선과 다른 사형제들이었다.
“사형들을 뵙습니다.”
준혁이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하자. 몇몇이 헛기침을 했고, 그중 가장 앞에 서 있던 이충선이 의심스러운 눈빛을 한 채 말했다.
“스승님께서 자넬 굉장히 맘에 들어 하셨나 보더군. 연기기에 불과한 자네를 제자로 받아들이다니.”
‘아, 내 수행에 대해 밝히지 않았구나.’
“제가 운이 좋았습니다. 스승님께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과연 운이 좋았을까? 몸이 좋은게 아니라?”
“네?”
준혁이 의아함에 되물었지만, 이충선은 매서운 눈빛으로 가볍게 혀를 찰 뿐이었다.
“쯧. 스승님의 명이니 어쩔 도리가 없지. 이거 받게.”
이충선은 공간대 하나를 건네고는 뒤돌아섰다.
그러다 멈칫하고는 말했다.
“아 참. 스승님께서 자네에게 마 사제의 처소를 정리하라고 하더군. 이른 시일 내에 정리하게나. 그리고 당분간은 연구회를 비롯한 어떤 임무도 맡기지 말라 하셨으니···. 수련에만 전념하시게···.”
마지막 말끝이 살짝 떨리는 게, 불만이 강해 보였지만, 준혁은 눈치 못 챈 척 웃으며 대답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형.”
이충선은 차갑게 코웃음 치더니 다른 이들을 이끌고는 입구로 걸어 나갔다.
문 역할을 하는 진법을 나서기 전 한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두고 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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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이라는 인간들이 전부 진법 밖으로 사라지자 준혁은 거처 안쪽으로 이동해 그들이 건네주고 간 공간대 안을 확인했다.
“많기도 하구나.”
강만학은 혈단법의 유실된 부분을 주면서 그에 대한 수련 방식을 알려주었다.
혈단법의 기를 흡수하는 법을 익히기 위해선 진법에 조예가 깊어야 했고, 그걸 위해 대량의 진법 관련 옥간을 보내온 것.
혈단법과 다른 공법은커녕. 진법을 익히는 데만도 한세월이 걸릴 듯싶었다.
하지만 그런 수련 걱정과는 달리 준혁의 입가는 모로 올라갔다.
이제 공법과 단약이 준비되었으니,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할 수 있는 것.
큰 짐을 하나 치운 것 같아 마음이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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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들이 가져온 진법 옥간 뭉텅이들을 수준별로 나누어 놓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렸다.
준혁의 공간대 안에 있는 기초 진법 같은 것들은 아예 보이질 않았고. 몇 권의 초급과 나머지 대부분은 중급, 그리고 아주 적은 상급 진법들로 나뉘었다.
진법을 먼저 공부하는 게 나을지 새로 얻은 공법을 익힐지 고민하던 준혁은 아차 하는 생각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마 수사의 거처부터 확인해야겠구나. 그들이 장난이라도 칠지 모르니.”
스승의 명이 떨어졌기에 그럴 일은 없겠지만,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 특별 대우를 받는 준혁을 시기해 일을 방해할 수도 있었다.
혹시라도 마 수사의 거처에 먼저 들어가 물건들을 빼돌리기라도 한다면 난처해지는 건 준혁뿐이었다.
준혁은 진법 옥간을 제외한 물건 전부를 공간대에 넣은 후 곧장 동굴 밖으로 향했다.
‘내 거처에서 남동쪽으로 끝부분이라 했었지?’
준혁은 마 수사가 알려준 내용을 떠올리며 저급한 판자형 비행법기에 올라 목적지로 날아갔다.
잠시 후 마 수사의 거처로 생각되는 동굴 앞에 도착하자, 그가 죽기 전 알려준 방법대로 수결을 맺고 영기를 발출했다.
“합!”
수결이 끝나자, 동굴 앞 진법이 잘게 흔들리더니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작은 구멍이 생겨났다.
준혁은 지체없이 안으로 쓱 스며들 듯 사라졌다.
그리고 준혁이 사라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동굴 앞에 천천히 내려섰다.
“빠르기도 하네요. 막내 사제가 가지고 있던 영단과 영석 좀 챙기려고 했더니.”
“그러니 말이다. 아쉽지만 돌아가자. 스승님이 명하셨으니···. 어쩔 수 없지.”
“제가 알기로 마 사제가 예전에 보물을 얻었다는 소문도···.”
“그만. 저자에게서 강제로 뺏기라고 하겠다는 말이냐? 돌아가자.”
“네. 사형.”
먼저 등을 돌려 사라지는 사내와 달리 시무룩하게 대답하던 사내의 얼굴엔 짙은 시기심이 머물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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