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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능력으로 광부에서 신선까지-26화 (26/408)
  • # 26 < 입산 (2) >

    준혁은 망부석이라도 된 것처럼 이마에 옥간을 가져다 댄 자세 그대로 며칠을 가만히 있었다.

    삼일이 지난 후에야 자세를 바로 하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오묘할 수가···. 내가 알던 상식을 벗어나 있어.”

    준혁이 알기로 공법이라는 건, 외부의 기운을 끌어와 몸 안에서 특수한 요결에 따라 정제를 거친 후에 단전에 쌓아가는 일련의 방법을 말했다.

    하지만 혈단법은 상리를 벗어나 있었다.

    우선 외부의 기운을 흡수하는 게 아닌, 생명체가 가진 피를 흡수해야만 했다.

    그리고는 흡수한 피를 정제하여 순수한 영기와 탁기로 분류했다.

    기이한 것은 그 후부터가 더 심했는데, 일반적으로 영기를 단전에 차곡차곡 쌓는 것과 달리, 영기를 핏속으로 주입시켜 기운을 폭발시켰다.

    그 후엔 마치 축기기에 오르는 것처럼, 핏속에 들어간 기운들을 폭발, 압축을 반복하며 영기로 압축된 정혈(精血)을 만들어 내는 것.

    그 정혈들을 한 방울씩 모아가는 게 혈단법의 수련 방식이었다.

    고밀도로 영기가 압축된 정혈이 늘어날수록 가용할 수 있는 영기의 총량이 늘어나고 영기의 질이 높아지는 것.

    “흠···.”

    준혁이 가장 상리에 어긋나있다고 생각하는 건 피를 흡수하는 것도 그걸로 수련을 하는 것도 아닌, 바로 그 정혈을 만든다는 행위 자체였다.

    정혈이란 게 무엇인가?

    수도자는 기본적으로 연기기, 축기기를 거쳐 일정 이상의 기운이 몸에 압축 포화 상태에 이르면, 온전하게 영기로만 이루어진 단전을 만들어 내는데. 그것을 금단이라 불렀고, 그 경지를 금단에 성공했다 하여 결단이라 불렀다.

    그렇게 온전한 영기로만 이루어진 단이 형성되면 몸속 기운은 그에 동화되기 시작하고 공기 중에 떠도는 천지영기를 더욱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

    그 후에 금단의 영향을 받은 신체 내부가 천천히 영기와 동화를 이루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핏속으로 영기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정혈을 만들어 내게 된다.

    즉. 정혈이라 함은 영기가 스며든, 온몸에 분포된 보조 단(丹)이라 할만했고, 금단 만큼이나 중요한 영기의 보관 창고였다.

    그리고 결단기에 이루지 못하면 절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금단을 이루고 난 후, 조금씩 정혈이 만들어지는 것과 달리. 이 공법은 강제로 정혈을 만든 후. 그 기운이 일정 이상 올라가면 강제로 금단을 만들어 버리는구나···.”

    참으로 기괴하다 할만했다.

    웃긴 것은 그렇게 상리를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데도, 그것이 사악하다거나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마공의 느낌은커녕, 오히려 현묘함이 가득하다는 게 특이하다면 특이했다.

    “이것 참···. 이걸 뭐라 해야 할지.”

    준혁은 혈단법이 적힌 옥간을 내려놓은 후, 공간대에서 식혈만복 공법서를 꺼냈다.

    그리곤 하루 가까이 그 안의 내용을 정독했다.

    “하아. 마치 준비된 듯 이렇게 돼다니. 참나.”

    준혁은 운명처럼 느껴지는 우연에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이곳에서 얻은 혈단법은 참으로 기괴하면서도 현묘한 공법이긴 했지만, 큰 문제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혈단법의 주요 요결인 피를 흡수하는 법, 정제하는 법, 탁기를 배출하는 법.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피를 정제하여 영기를 만들어 내는 방법만 수록돼 있을 뿐, 피를 흡수하는 법과 탁기를 배출하는 법에 대한 부분이 유실되어 있는 것.

    하지만 우연히 얻은 식혈만복을 적용하면 그 두 가지를 해결할 수 있었다.

    애초에 식혈만복은 피와 살을 먹어 영기를 얻어내는 것이었기에 혈단법의 피를 흡수하는 역할을 대신 할 수 있었고, 혈단공법을 통해 정제를 마친 후 생기는 탁기는 식혈만복에 수록된 혈피갑을 만드는데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가지 공법을 상호보완적으로 익히는 걸 고려하며 고민하던 준혁은 잠시 뒤 고개를 흔들었다.

    “안돼.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어찌 식인(食人)을 하며 수행을 올릴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절대 안 된다. 당장 해가 없다 한들···. 결국은 심마가 되어 나를 헤칠 게 분명해.”

    결국 준혁은 식혈만복과 혈단법을 동시에 익힌다는 선택지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렇다고 혈단법을 익히는 걸 포기하진 않았다.

    그리곤 다시 혈단법이 적힌 옥간을 집어 들어 이마에 가져다 댔다.

    토씨 하나, 숨은 뜻마저 온전하게 파악하다 보면 다른 방법이 보일 수도 있었기에.

    +++

    3개월 후.

    여전히 망부석처럼 침상 위에 앉아있던 준혁이 천천히 눈을 뜨며 손안의 옥간을 내려다보았다.

    “후우···.”

    그동안 삼일에 네 시간씩만 자며 오로지 공법을 해석하는데 매달렸던 준혁은 몇 가지를 추가로 알아낼 수 있었다.

    첫째. 피(血)라 함은 인간의 생체적인 피를 말하는 것이 아닌,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원기를 의미했다.

    다만 사람에게 있어 근원적인 원기라는 건 대부분 핏속에 내포돼 있었기에, 공법에선 피라는 단어를 채용한 것.

    그러니 혈단법의 유실되어있는 피 흡수 방법을 알아낸다면, 굳이 사람의 피를 먹을 필요도 없이. 괴수나 영수 같은 다른 영기를 품은 생명체를 이용할 수도 있었고, 그것마저 꺼림직하다면 효율은 떨어지더라도 생명엔 지장 없이 생명체가 가진 원기만을 가져올 수도 있었다.

    두 번째. 피를 정제하고 남은 탁기는 일정 이상 모인다면 반드시 외부로 발출해야만 했다. 그렇지 못한다면 내부에서 폭발을 일으켜 사용자를 해치게 되는데. 유실된 탁기 제련법을 얻지 못한다면 식혈만복의 혈피갑을 응용한다고 하여도 결국 그 부작용을 온전하게 해소할 순 없었다.

    세 번째. 당장 피를 흡수하지 않고 영기를 품은 자신의 피를 정제할 수 있었는데. 그 효율 역시 꽤 대단했다. 하지만 피를 정제하는 과정에서 여태껏 올려두었던 경지를 다시 다져야만 했다.

    모든 걸 종합해 본다면 당장 피를 흡수하지 않더라도 혈단법을 익히고 경지를 올릴 수 있었다.

    다만 그렇게 될 경우, 단약이나 기타 방법을 동원해 경지를 올린 후, 다시 정제 과정을 거쳐야 했기에 수련 속도가 떨어질 게 분명했다.

    “어찌해야 하나.”

    준혁이 공법을 익힐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던 그때.

    동굴 입구에서 얕은 영기파동이 일어났다.

    준혁이 손을 휘익 젓자, 입구에 있던 진법이 잘게 진동하더니, 진법 앞에 머물러있던 사내가 비행법기에서 내리며 천천히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마 선배님.”

    “잘 지냈어? 공법은 익힐만하고?”

    처음 준혁을 거처로 안내했고, 그 뒤로도 매달 방문하고 있던 마동탁 이었다.

    그의 질문에 준혁의 표정이 급히 어두워지며 고개를 내저었다.

    “쉽지 않습니다. 시험장에서 익혔던 영기유입법이 요결과 섞이니···. 제 자질에 성과가 나질 않는군요.”

    “괜찮아. 다들 그랬으니까.”

    “선배님은···. 혹시 무슨 공법을.”

    “나? 나는 화영근을 타고나 화월통공을 익혔지. 그나마 정보를 얻을 수가 있어서 어렵지 않게 익힐 수 있었지만. 최수사가 익힌 혈단법은 여태껏 아무도 익힌 적이 없어서···. 아마 혼자 힘으로 해결해야 할 거야.”

    “그렇군요.”

    “너무 기죽은 표정 하지 말고. 다들 후배한테 거는 기대가 커. 혈단법을 온전히 익히고 나면 어떤 영근인지도 알 수 있을 테고. 그럼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지식을 얻는 거니깐.”

    “노력하겠습니다. 헌데. 무슨 일로?”

    준혁의 물음에 마동탁이 이마를 '탁' 치더니 말했다.

    “나도 참. 산머리곡산에 일이 생겼는데. 사형이 자넬 데려가라고 하더라고. 아마 머리도 식힐 겸 같이 가라는 뜻이겠지?”

    “산머리곡산···.”

    “혹시 1년 전쯤 남양주에 나타났다는 보물에 대해 알아?”

    빠르게 생각을 마친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산속에 틀어박혀 수련 했기에 자세한 건 모르지만. 우연히 애긴 들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경기도지사 어른과 강원도지사 어른께서···.”

    “알고 있네. 맞아. 그때 보물이 나타난 흔적이 이번엔 산머리곡산 지하에서 발견됐나 봐.”

    “아···.”

    “어차피 우리가 간다고 해도 보물을 얻을 순 없겠지만, 동향 파악은 해놔야 하니. 같이 가자.”

    잠시 후 준혁은 네모난 하급 비행법기에 올라 마동탁의 뒤를 따라 하늘을 날았다.

    +++

    “제법 능숙하네? 이전에도 비행법기를 다뤄본 적이 있어?”

    “처음입니다.”

    “오호, 그럼 재능이 있나 보네.”

    물론 예전에 암시장에서 얻은 비행 법기를 다루는 비법을 익혔기에 운용하는 게 편했던 것이었다.

    높은 산봉우리를 날아가는 준혁은 상쾌함과 동시에 이제야 진정한 수도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나저나 선배님.”

    “왜?”

    “그곳에 수사들이 많이 모여있습니까?”

    “듣기로는 그래. 보물을 얻고 싶은 자들부터 결단기 수사를 따라 온 자들까지 바글바글하겠지?”

    마동탁이 고개를 끄덕이자 본론을 얘기했다.

    “그렇다면 뛰어난 축기기 수사인 마 선배님께서 아무런 준비 없이 그곳에 가셔도 되겠습니까?”

    “응? 그게 무슨말?”

    준혁의 아부에 마동탁의 귀가 쫑긋했다.

    “이 일대엔 대부분 연기기 산수이고, 뛰어난 수사는 도율 어르신의 제자분들뿐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선배님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다른 이들이 그런 선배님의 신분에 경계할 수도···.”

    “에이. 나 따위가 무슨. 그리고 난 도율 사조의 제자가 아닌 강만학 스승님을 모시는 사손뻘 제자인걸.”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가면이라도.”

    준혁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마동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공간대에서 작은 손수건을 꺼내 입가에 가져다 댔다.

    손수건은 그의 콧등과 귀에 걸리며 얼굴의 절반을 가렸다.

    “듣고 보니 일리는 있네. 괜히 스승님이 이 일에 끼어들었다는 게 알려져 봐야 좋을 건 없지. 다른 사숙이나 사백의 귀에 들어가 봐야···. 뭐해? 너도 써야지?”

    “제가···. 가진 게 없어서.”

    준혁이 부끄러운 듯 목소리가 작아지자, 마동탁이 피식 웃으며 공간대에서 얼굴 가리게 하나를 건넸다.

    ‘도율의 제자들끼리는 사이가 좋지 않나 보구나.’

    “하나 더 있어서 다행이네. 이건···. 흠. 그래 선물로 줄게. 축기기에 오른다면 내 바로 아래 사제가 될 테니까. 미리 축하 선물로.”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럼 빨리 가볼까?”

    “네!”

    +++

    비행하면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머리곡산의 한 장소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곳엔 수많은 수사가 기웃거리고 있었는데.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은 수사들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두 곳이었다.

    ‘역시나. 내가 수련했던 장소를 발견했나 보군. 그나저나 저들이 도지사?’

    준혁이 바라보는 곳엔 강렬한 기운을 내뿜는 두 명이 각각 무리를 만든 채 서로를 경계하고 있었는데. 의도적으로 기운을 방출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고 있는 것 같았다.

    “선배님. 저곳이. 그 보물이 나타났을지도 모르는 그곳입니까?”

    준혁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묻자 마동탁은 대답 없이 수결을 맺었다.

    그리곤 품에서 부적 한 장을 꺼내 가볍게 찢어버렸다.

    잠시 후 수많은 수사 중 한 명이 비행법기에 오른 채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두 사람 앞에 멈춰 섰다.

    “선배님을 뵙습니다.”

    “경과를 말해봐.”

    “현재 다양한 수행의 수도자들이 몰려든 상태이며, 저기 보이는 강원도지사와 경기도지사를 중심으로 세력이 크게 갈리고 있습니다. 아직 내부를 깊숙이 탐색한 자가 없어서인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합니다.”

    보고를 듣고 있던 준혁이 끼어들며 질문했다.

    “근데 어찌 저곳이 드러난 겁니까? 말을 듣자 하니 산속에 있다던데?”

    “이자는?”

    준혁이 갑자기 끼어들자 보고를 하던 연기기 수사가 마동탁을 보며 궁금함을 표했다.

    “이번에 새롭게 관문 제자가 된 수사야. 아마 이른 시일 내에 정식 입문 제자가 될 가능성도 있으니, 앞으로 그리 알고 있으면 돼.”

    “아,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저는 김춘수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김춘수의 인사에 준혁이 뻘쭘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선배님이라뇨. 아직은 저도 연기기 후기일 뿐입니다.”

    “아닙니다. 같은 관문 제자라 할지라도 마 선배님의 말을 들어보니. 설악산에 정식으로 거처를 마련하신 것 같은데···. 저와 같을 순 없지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헌데 아까 물어본 것은···.”

    준혁이 화제를 돌리자 김춘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보고를 이어갔다.

    “최근 이곳 산머리곡산의 지형이 움푹 파여 들어가고 산이 조금씩 매몰되는 현상이 발견됐었습니다. 으레 가벼운 침식이라고 생각했기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얼마 전 산 깊은 곳까지 일직선의 싱크홀이 생겨나며 이곳을 지나가던 산수들의 눈에 뜨인 것이지요.”

    “싱크홀이요? 제 눈엔 아무것도 보이질 않습니다만?”

    준혁이 의문을 표하자 김춘수가 손가락으로 강원도지사가 자리한 곳을 가리켰다.

    “저곳입니다. 현재 진법으로 가려져 있어 육안으론 파악이 불가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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