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 입산 (1) >
뎅-
황금종이 울리자 밖으로 우르르 나가고 있던 수사 중 한 명이 알은체를 했다.
“어라? 최형? 성공했습니까?”
“운이 좋았습니다.”
“쩝. 부럽네. 나중에 술 사는 거 잊지 마시오.”
천이수는 진심으로 부럽다는 표정을 하다가 준혁의 성공을 축하해주고는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대부분의 연기기 수사들이 나갈 때쯤 축기기 중기의 사내를 필두로 비슷한 복장의 수사들이 다가왔다.
축기기 중기 사내는 처음 시험을 치르기 전 보았던 중년 사내였다.
“정말 성공한 것인가?”
“그렇습니다.”
“뭘 익히는데 성공한 거지?”
준혁은 손에 들고 있던 옥간을 내밀었다.
“혈단법이라 적힌 이것입니다.”
그러자 중년 사내가 움찔하며 옥간을 받아들었고, 뒤에 서 있던 다른 수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혈단법? 저건 처음이지 않나?”
“그러게. 발견된 지 반백 년이 넘도록 단 한 명도 나온 적이 없는데.”
“잘됐구만 잘됐어. 이번 기회에 혈단법의 비밀이 풀리는 거 아닌지 몰라. 아직 어떤 영근이 조건인지도 몰랐었는데.”
“크흐흠!”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수사들을 향해 크게 헛기침한 중년 사내가 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좋구나! 좋아. 자네에겐 두 가지 선택권이 있네. 지금부터 우릴 따라가 체질 검사를 통해 자네의 영근이 어떤 속성인지 판별한 후 영기유입이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지 상세히 알려주고 하산 하는 게 첫 번째.
아! 물론 약속한 영석과 단약을 줄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잠시 준혁의 표정을 살핀 사내가 말을 이었다.
“다른 한 가지는 지금부터 정식으로 관문 제자가 되어 도율님의 세 번째 제자이신 강만학님 휘하로 들어오는 것.
만약 두 번째를 선택하게 된다면 따로 검사 따위는 할 필요 없이 우리와 함께 지내며 천천히 공법에 대해 알려주면 되네.”
“제자가 된다면 어떤 제약이 생기는 것입니까? 혹시 설악산을 떠나면 안 된다거나···.”
“그럴 리가 있겠나? 비록 관문 제자라 하나, 이곳은 산수의 땅. 자네가 원한다면 어디에서 수련하든 자유일세.
다만, 혈단법에 대한 공유를 해야 하니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좋겠지. 그렇지 않으면 이동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나?”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중년 사내가 입가를 끌어올리며 눈을 빛냈다.
“어떤가? 관문 제자가 되어볼 텐가? 혼자 수련하는 것도 좋지만, 사형제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훨씬 좋을 것일세.”
그때. 웃고 있던 중년 사내의 눈빛이 허옇게 변하며 검은자위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리곤 사이한 안광이 흘러나와 준혁의 각막에 맺혔다.
허연 눈동자를 바라본 준혁이 순간 얼음처럼 경직되더니 입이 조금씩 벌어지며 멍한 표정으로 변해갔다.
잠시 후.
“역시 사형의 미혼술은 일절입니다.”
수사 중 한 명이 엄지척하며 말하자, 중년 사내가 가볍게 손사래를 치더니 준혁에게로 한 걸음 더 다가와 두 눈을 똑바로 맞췄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솔직히 말하면 된다. 알겠느냐?”
“네···.”
준혁은 반쯤 정신이 나간 듯 힘없이 대답했다.
“이름이 뭐지?”
“최...태식···.”
“너는 산수가 맞느냐?”
“그렇습니다···.”
“다른 곳에 속해있거나 속한 적은 없고?”
“네···.”
“지금의 수행에 이르기까지 얼마가 걸렸느냐?”
“15년···.”
준혁의 힘없는 대답에 중년 사내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그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흠···. 15년이라···. 뛰어나진 않군. 애매해.”
준혁의 수행은 현재 연기기 9성이었고, 15년 만에 9성이 되는 건 산수로서는 평균이긴 했지만, 일반 세가나 문파의 소속된 인물로 치자면 느리다 할만했다.
아니, 뒤로 갈수록 수행이 느려지는 걸 생각하면, 많이 늦은 감이 있었다.
혼잣말하던 사내가 다시 질문했다.
“익히고 있는 공법은 무엇이지?”
“우연히 구한 것이기에 이름은 알지 못합니다···.”
“공법의 요결을 말해보라.”
“천지의 기운은 단을 만드니 외력에 의한 강제는 내부에 치우침을 만든다···. 하여···. 단을 형성함에···.”
준혁이 한참 동안 말을 잇자. 중년 사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응? 이상하군. 이건 공법의 요결이라기보다는 마치 신체 단련의 강체술과 비슷하지 않은가. 흠. 뭐 천천히 알아보면 되겠지.”
가볍게 손을 들어 준혁의 말을 멈추게 한 중년 사내가 잠시 생각에 잠기자 다른 수사가 끼어들었다.
“사형. 별문제 있겠습니까? 이 정도면 다른 곳 세작은 아닌 거 같습니다.”
“그건 그렇지.”
그때 다른 수사 한 명이 말을 덧붙였다.
“사형. 나중에 우리에게 진심으로 협력할지도 물어봐야지요.”
“그러려고 했다.”
중년 사내는 멍하니 서 있는 준혁을 향해 다시 질문했다.
“이곳엔 왜 온 거지?”
“뛰어난 공법과 단약을 얻기 위해서···.”
“수행을 올릴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텐가?”
“네···.”
“대의에 어긋난 잔악한 짓일지라도 명령에 따를 수 있나?”
“네···.”
준혁의 대답에 만족한 표정이 된 사내가 수결을 맺더니 자신의 양쪽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그의 안광이 더욱 강해지며 사이한 기운이 강해졌다.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준혁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금부터 너는 나의 말에 호감을 느끼게 된다. 내가 하는 말은 전부 옳기에 거부감을 느끼지 못한다.”
파앗-
말이 끝맺음 되자 강한 빛이 뿜어져 나왔고 그에 비례해 준혁의 표정은 창백해져 갔다.
빛이 사그라들자, 중년 사내가 숨을 몰아쉬며 인상을 찌푸렸다.
“사형 고생하셨습니다. 새로운 사제가 생겼군요.”
“똘똘한 놈이겠죠? 예전에 그놈처럼 멍청하면 답이 없는데···.”
뒤에 서 있던 수사들이 각자 한마디씩 하자 중년 사내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하더니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이 방법을 쓴다 해도 완벽한 것이 아니다. 이 녀석의 천성이 어떤지가 중요하지.”
“흐흐, 보나 마나 아니겠습니까? 망설임 없이 대의를 저버리겠다는 놈치고 우리 일을 싫어할 리 없습니다.”
“그건 그렇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 년간은 행동을 지켜보고, 그 후에 본격적인 연구회에 동참시키도록.”
“사형도 참. 미혼술까지 걸어놓고도 조심하시기는.”
그때 한 명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근데 보통은 기력이 탈진돼 쓰러지지 않나요? 저놈은 여전히 뻣뻣이 서 있네?”
그 순간. 준혁의 몸이 휘청하더니 털썩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중년 사내가 별일 아니란 듯 말했다.
“아까 들어보니 강체술과 비슷한 공법을 익힌 듯하더군. 아마 다른 이들보다 체력이 좋아서일 것이다. 시간을 지체할 필요 없으니 모두 이동하자. 스승님께 보고드리고 하려면 바삐 움직여야 하니.”
“네. 사형.”
잠시 후, 중년 사내는 준혁에게 다가가더니 수결을 맺어 손가락으로 기운을 모은 후 준혁의 이마에 잠시 가져다 댔다. 그리곤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으음···.”
“일어나게. 대화 중에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아 죄, 죄송합니다. 뭔가 좀···.”
“딴말 필요 없이 그래서 어쩔 텐가? 보상을 받고 하산할 텐가? 아니면 관문 제자가 될 텐가? 난 함께 했으면 좋겠는데.”
준혁은 고민 없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제자가 되겠습니다!”
+++
설악산에서 가장 험하다는 곳 중 하나인 공룡능선.
능선의 작은 봉우리 밑 수많은 동굴 중 하나로 들어서자, 동굴 안엔 작은 침상과 탁자 하나, 그리고 협탁처럼 생긴 진열장만이 휑하니 놓여있었다.
“이곳이 네가 머물 곳이야. 그리고 이것.”
툭-
옥간 하나와 하급 공간대 하나가 탁자 위에 올려졌다.
“네가 운기에 성공한 혈단법이 적힌 공법이야. 당분간은 다른 일 말고 이것의 수련에만 집중하면 돼. 일 년 후부턴 공법의 영기유입 지도를 만들고 네 영근이 어떤 식으로 공법에 영향을 주는지 알아볼 거니깐, 그땐 까진 밖에 나올 생각도 말고 수련에만 집중해. 다른 사형들이 사람 좋게 웃어도···. 뒤떨어지는 녀석을 봐줄 만큼 좋은사람들은 아니니까. 특히 큰 사형은.”
“알겠습니다. 사형.”
“아니, 사형이란 말은 일러. 지금은 그냥 선배라고 부르면 돼. 네가 축기기에 오르고 나면, 강만학님을 정식으로 모실 수 있고 그때가 돼야 사제지간이 되는 거니깐.”
“아···.”
“그러니깐 수련에 힘쓰라고.”
사내는 이것저것 설명해 주더니 품 안에서 부적 석 장을 건네주었다.
소리를 담아 보낼 수 있는 전음부였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무슨 일 있으면 이걸로 연락하고. 그럼 가볼게. 수련 열심히 해. 나도 연기기 11성에 관문 제자가 된 후, 5년 만에 축기에 성공했어. 그러니 노력하면 된다는 거 잊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등을 돌려 동굴을 떠나려던 사내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아 참. 난 마동탁이라고 해. 이름이 최태식이라고 했었지?”
“네. 그렇습니다···. 한데 제가 이름을 말한 적이 있습니까?”
“어? 어? 무, 무슨 소리야. 아까 오면서 얘기했잖아···. 하하. 난 그럼 가봐야겠네. 수고해.”
준혁의 질문에 마동탁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네모난 비행 법기에 올라타더니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어리숙하지만, 악해 보이진 않는군.’
준혁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굴을 살펴보았다. 그리곤 입가에 미소를 띠며 탁자 위 옥간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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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후.
이마에서 옥간을 땐 준혁의 입가가 모로 올라갔다.
“역시···. 모른 척 당해주길 잘했구나. 온전한 공법이다.”
준혁은 자신의 의도가 들어맞자 쾌재를 불렀다.
사실 중년 사내가 처음 미혼술을 걸었을 때, 준혁은 시야가 흐릿해지며 정신이 몽롱해지는 걸 느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단전에 있던 식검의 기운이 솟아오르더니 뇌리를 파고들던 기운들을 깡그리 잡아먹어 버리기 시작한 것.
그건 단약의 기운이 몸속에 퍼지다가 단전으로 빨려들 듯 흡수되는 감각과 비슷했다.
그때 누군가의 입에서 미혼술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준혁은 급하게 식검을 달랬다. 몽롱한 기운이 뇌리로는 오지 못하게 막으면서 완전히 없애진 않고 두고 보았다.
그리고는 미혼술에 당한 척 순순히 대답하며 혼이 나간 연기를 한 것.
만약 자신에게 몹쓸 짓을 하려 한다면 식검으로 바로 미혼술을 풀어버리며 눈앞에 수사들을 전부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무슨 이유든, 사람의 정신을 조종하는 미혼술을 펼쳤다는 건 그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논다는 것. 살수를 펼친다 해도 거리낄 게 하나 없었다.
그들 무리의 최고수가 축기기 중기였기에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승리를 장담했다.
다행인지 그들은 그저 세작인지 아닌지를 조사하고 신변잡기에 대해 물었을 뿐, 해가 될 일을 하진 않았다.
마지막에 정신을 제압해 세뇌를 시키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그들에게 편입해야만 공법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참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온전한 혈단법이 손에 들어오자 지금처럼 웃고 있는 것.
“이제 공법을 얻었으니 비경으로 떠나도 상관이 없겠구나.”
하지만 당장 급하지 않았기에 서둘러 사라질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준혁에게 1년간의 수련을 명했고. 안전한 수련 장소가 필요했던 준혁에겐 매우 반가운 얘기였으니까.
게다가 수도계의 지식에 목말라 있던 준혁에게 이곳의 존재는 사막의 오아시스나 다름없었다.
“뭘 준거지?”
옥간과 공간대를 주었으니, 공간대 안의 내용물을 확인할 시간이었다.
앞으로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이라 했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연기기 제자에게 줄 만한 건 뻔했기 때문에.
“역시.”
공간대 안엔 사내가 타고 간 판자처럼 생긴 하급 비행법기와 법기를 다루는 방법에 대한 기초 입문서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관문 제자를 나타내는 목패. 초급 부적 뭉치, 영석 5개, 연기기 단약 1병 마지막으로 동굴 입구의 문 역할을 할 진법 법기 한 벌이 조촐하게 준혁을 반겨 주었다.
각각의 물건을 자신의 공간대에 옮겨 담은 준혁은 빈 공간대를 태워버리고, 진법 법기를 꺼내 입구에 설치했다.
대단한 것도 아닌, 방음진(防音陳)이라는 초급 진법 중 하나였다.
문을 설치한 후 옥간을 집어 든 준혁은 침상 위에 올라앉았다.
그리곤 옥간을 이마에 가만히 가져다 댄 후 눈을 감았다.
“이제 시작해 볼까?”
본격적으로 공법을 익혀야 할 시간.
동굴엔 어둠과 함께 기이한 열기만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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