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 공법 시험 (2) >
표지판 앞에서 고민하던 준혁은 결국 옥간이 그려진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각각의 표지판은 깃발, 약초, 검, 부적, 옥간이 그려져 있었는데.
깃발은 진법, 약초는 연단, 검은 검술, 부적은 부적술을 의미했다.
진법은 이제야 방음진만 배웠기에 시험을 치를만한 공부는 아니었고, 다른 것들 역시 전혀 체득하고 있는 것이 없었다.
결국 준혁이 고를 수 있는 건 옥간이 그려진 공법 시험뿐.
애초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그자의 말대로 어중이떠중이를 거르기 위한 게 맞겠구나.”
대부분의 산수는 가진 것도 배운 것도 별로 없었으니, 준혁이 고른 공법 시험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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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자, 벽돌로 쌓아 올린 네모난 구조물이 여럿 나타났다.
각 구조물은 제법 높이가 있는 것이 꽤 많은 수사가 들어갈 수 있는 듯했다.
그 앞엔 수많은 사람이 줄을 선 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대부분은 연기기 초기나 중기 수준이었다.
“새로운 사람들이 더 늘어난 것 같으니 다시 한번 설명해 주겠다.”
그때 구조물의 높은 곳에서 중년 사내가 나타나더니 공법 시험에 대해 알려주었다.
“순서에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서게 되면 여럿 옥간들을 보게 될 것이고 그중 무엇 하나라도 익힐 수 있다면 시험은 통과다. 간신히 영기만 움직일 수 있게 한다면 영석 30개와 충원단 한 병을 내리는 대신, 선배들의 안내에 따라 신체검사를 마치고는 하산할 수 있다.
만약 공법을 온전하게 운용해 낼 수 있다면, 신분과 수행에 상관없이 관문 제자로 발탁해 앞으로 설악산에서 수련할 기회를 주겠다.”
웅성웅성-
중년 사내의 말이 끝나자 줄을 선 채 차례를 기다리던 연기기 수사들이 놀라움에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겨우 영기만 움직여도 영석 30개와 단약 한 병이라니.
수사들, 특히 산수 출신들에겐 엄청난 기연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누군가가 중년 사내를 향해 질문했다.
“축기기에 이른 사람은 다른 시험을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들도 저희와 같이 공법을 익히는 겁니까?”
“자네가 축기기인가?”
“아, 아닙니다. 저는 연기기 후기입니다.”
“쯧. 이미 축기기 수사들은 산 중턱에서 따로 선별과정을 통해 다른 시험장소로 모였네. 관련도 없는 그런 고민을 할 시간이 있으면 내면이라도 한 번 더 관조하고 수행을 올릴 생각이나 하시게.”
“아, 죄, 죄송합니다.”
‘선별? 중간에 수행을 검사하고 따로 불러갔나 보구나.’
아마 준혁의 수행을 눈치채지 못했기에 그냥 연기기 틈에 끼어 산에 올라가게 방치한 듯했다.
‘어쩔 수 없지. 지금 나서는 건 안 될 일이지.’
원계획은 축기기 시험을 본 후 중급 공법을 익히는 것이었지만 그 계획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임의대로 수행을 조절하며 도율 휘하의 수사들을 속일 수 있다는 게 밝혀지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어떻게든 공법을 얻는다.’
중년 사내의 말을 들어보면, 시험에 나온 공법을 익히는 게 완전히 불가능해 보이진 않아 보였다.
신체검사를 하는걸 보면 특별한 조건이 있었기에 다른 이들이 쉽게 익히지 못하는 것이었고, 이들은 수많은 연기기 수사를 통해 그 조건을 알아내려고 시험을 하는 게 틀림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줄은 점점 줄어들었고. 어느새 준혁의 차례가 왔다.
문 앞에 대기하고 있다 한걸음 크게 옮겨 안으로 들어서자, 순간 공간이 바뀌며 드넓은 탑 구조의 내부로 이동됐다.
‘이곳에도 공간 진법이.’
탑 구조의 내부는 매우 독특한 형식을 하고 있었는데, 7층 높이의 탑이 높은 천장까지 뻥 뚫려있었고, 가운데엔 거대한 진열장이 있어 그곳엔 수많은 옥간이 진열되어있었다.
옥간들은 각각 같은 색끼리 한곳에 쌓여있는 것이 같은 공법들을 여러 개 복사해 둔 것으로 보였다.
탑의 내부가 돔 형식으로 뻥 뚫려있다면, 그 반대 벽면은 수많은 구멍이 뚫려 벌집 같은 모습이었다.
아마도 옥간을 고른 뒤 벌집 모양의 동굴로 들어가 수련을 하면 되는 것 같았다.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되겠지? 원하는 걸 고르고 익히면 된다. 기간은 15일. 그 안에 성공하면 언제든 이곳에 놓인 종을 울리면 된다.”
옥간이 놓인 진열장 옆에는 주먹만 한 황금색 종이 놓여있었다.
“자! 그럼 시작하라!”
사내에 명령에 준혁을 포함해 연기기 수사들이 우르르 몰려가더니 진열장의 옥간을 집어 이마에 가져다 댔다.
그 사이에서 준혁도 아무 옥간이나 집어 들어 이마에 가져갔다.
‘흠. 풍마륜공(風摩輪功)이라···.’
옥간 속 내용을 확인한 준혁은 문득 피식 웃고 말았다.
기분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어이가 없어서였다.
다른 옥간을 이마에 대고는 또 한 번.
피식-
‘화월통공(和月通功)’
그리고 또 다른 옥간을 가져왔다.
‘광신체령투선공(光身體靈鬪仙功)?’
그 뒤로도 대부분의 옥간을 대충 살펴보고는 어이가 없어 아무것도 고르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준혁과 비슷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몇몇만이 아무것도 모르는 듯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옥간을 들고는 동굴로 들어갔다.
“젠장! 이건 죄다 쭉정이 아닌가? 공법의 주요 요결은 하나도 없이 완전 기초적인 영기를 느끼고 움직이는 방법만 나열돼 있으니 원.”
옆에서 투덜거리는 사내의 말에 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 사람의 말대로 이곳에 놓인 옥간은 공법이라고 부르기보단, 공법의 기초인 영기유입법 만을 보기 좋게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했다.
아무리 하급 공법이라도 제법 가치가 있을진대, 유출을 고려하지 않고 산수들에게 익힐 기회를 준다는 게 이상하긴 했었다. 한데 이 정도로 쓸모없는 상태일 줄 몰랐다.
한마디로 이곳에 준비된 공법은 밖으로 가지고 나가봐야 그저 기를 흡수하는 방법 자체만 적어놓은 태극단공이나 별반 다를 게 없는 수준이었다.
“하긴 이래야 정상이긴 하지.”
오히려 안심이 든 준혁은 결국 아무 옥간이나 집어 들고는 사람이 없는 동굴을 찾아 안으로 들어갔다.
쭉정이건 아니건 우선은 익힐 수 있나 없나부터 확인을 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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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어찌 하나도 없지?”
공법 시험에 들어온 지도 10일.
준혁은 이미 대부분의 옥간을 확인했음에도 단 하나도 영기유입에 성공하질 못했다.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 듯, 지금껏 누구도 종을 치지 않았다.
“영석 30개와 단약을 괜히 주는 게 아니었어.”
아마 입산한 전체 중 한두 명이나 통과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 보였다.
결국 준혁은 진열장의 젤 아래 구석에 놓여있던 마지막 공법서를 집어 들고 동굴로 돌아왔다.
“혈단법(血丹法)이라. 가장 인기가 없는 게 위치 때문만은 아니었구나.”
이름에 ‘피’가 들어가는 것치고 좋은 공법은 별로 없었다. 물론 익힐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공법이라도 각각의 효능이 있을 테지만, 마공류는 대체로 부작용이 심한 편이었다.
준혁이 가지고 있는 식혈만복 역시 피를 다루는 마공 중 하나로, 그 참상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마지막인데 됐으면 좋겠군,”
준혁은 진지한 표정으로 가부좌를 한 채로 혈단법의 내용을 머릿속에 주입했다.
그리고는 옥간속에 나와 있는 방법을 따라 단전에서 기운을 일으키며 전신으로 움직이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순간 무언가가 꿈틀하더니 몸 안에서 요동쳤다.
“어?”
준혁은 깜짝 놀라 기운을 해제해버리고는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시도했다.
꿈틀-
이번에도 무언가가 움직이며 요동쳤다. 준혁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내면을 관조해 더욱 강하게 기운을 끌어올려 보았다.
그러자 꿈틀대던 기운이 서서히 흩어지더니 전신을 돌아 다시 뭉치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은 하나의 충격에 가까웠다.
왜냐하면 진기가 흩어졌다 모이는 과정이 마치 축기기에 이를 때의 과정을 축소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
축기기가 기운을 압축하며 폭발적으로 외부 기운에 동조했다면, 혈단법이란 이 공법은 피를 압축하며 그 작용으로 몸속 영기를 강하게 증폭시켜 순환시키고 있었다.
‘이런 식의 운용 방법이라니···.’
제대로 된 공법도 아니고, 중요한 것은 다 빠진 엉터리 공법임에도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현묘한 공법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다만 피를 다룬다는 게 꺼림칙하긴 했으나, 영기유입 및 순환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태극단공으로 빨아들인 기운보다 훨씬 순수했고 청아했다.
그 뒤로 준혁은 꼬박 하루 동안 혈단법의 영기유입법을 운용하며 제대로 된 혈단법만 익히게 된다면 엄청난 발전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하지만 섣불리 판단을 내리진 못했다.
과연 이것을 익힐 수 있게 되었단 걸 알리는 게 나을지 아닐지를.
명왕 도율의 수하들인 그들 역시 공법을 연구하기 위해 이 같은 일을 벌였을 것이기에 사실을 밝혔을 때 선의로 다가올지 악의로 다가올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축기기 시험이야 임무만 완수하면 끝이었으니 간단했지만, 이 시험은 도무지 감을 잡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진열장과 종을 번갈아 보며 고민에 빠져있을 때, 옆에 있던 사내가 탄식을 내뱉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허유···. 쓰벌. 그만큼 알아보고 왔는데도, 하나도 성공하지 못하다니.”
‘알아보고 왔다고?’
사내의 한탄에 준혁이 슬그머니 다가가 말을 붙였다.
“잘 안 되시나 봅니다? 저도 영기를 다루는 데는 꽤 소질이 있다 자부했는데, 하나도 익히지 못하겠군요. 이젠 이것들이 다 사기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준혁이 너스레를 떨며 투덜거리자, 사내가 동감이란 듯 손을 내밀었다.
“난 천이수요.”
“최...태식입니다.”
“형씨 말에 동감이오. 선배한테 어렵단 얘긴 귀가닳도록 듣고, 조언도 얻고 왔는데도 망할, 하나도 익힐 수가 없으니 원 나 참.”
“흠···.”
준혁이 말을 되받지 않고 머뭇거리자 천이수가 피식 웃더니 턱을 위로 까딱거렸다.
“왜? 최형도 그 조언이 뭔지 알고 싶습니까?”
“물론입니다. 하지만 공짜로 그런 걸 들어도 되겠습니까? 괜히 폐 끼치고 싶진 않습니다.”
“프흣. 없는 소리 하기는. 뭐 어려운 거라고. 내 알려줄 테니까 나중에 선주 한잔이나 사주시오.”
선주란 영초로 담은 술을 말했다.
미약하지만 영기도 회복되고 피로도 날려버릴 수 있어 곡식을 끊은 수도자들이 애용하는 음식이자 음료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대접하겠습니다.”
“흐흐, 약속 잊지 마시오?”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천이수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여기 오기 전, 이곳을 통과했던 선배께 얘길 듣고 왔습니다. 그 선배가 말하길 시험장은 특수한 영근을 가진 사람을 찾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더이다.”
“특수한 영근이요?”
“일반적으로 대부분 수사들의 영근은 오행의 기운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조금씩 치우치긴 하겠지만 대체적으로 비슷하지요. 헌데 간혹가다 자연 원소 중 한 가지 원소만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도 있다 하더이다. 예를 들면.”
말을 하던 사내가 풍마륜공이 적힌 옥간을 빼내 왔다.
“이 풍마륜공은 오직 풍영근이라 불리는 바람 속성의 영근에 특화된 사람만이 익힐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럼···.”
“어떤 공법은 화영근, 어떤 것은 뇌영근···. 정말 보기 힘든 특수영근만이 익힐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무영근자인 내가 하나도 익힐 수 없었구나···. 헌데 혈단법은 그럼 뭐지? 다른 이들은 이것도 못 익히는 것 같았는데.’
준혁이 아무 반응 없이 가만히 있자, 천이수가 말을 이었다.
“그 선배는 이 풍마륜공에 성공해 영석과 단약을 받았다고 합디다.”
준혁이 궁금했던 본론이 나오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냥 그것만 받고 나왔답니까?”
“뭐 어쩔 수 없는 것이었지요. 관문 제자가 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그 선배는 애초에 산수가 아니라 저기 전주 이가 출생이었으니깐.”
“아···.”
“제자 권유를 거부하고 며칠간 영기 다루는걸 다른 이들 앞에서 시전해 보이고는 하산했다고 하더이다.”
사내는 그 후로도 자신이 알고 있던 얘기들을 미주알고주알 떠들다가 꼭 술을 사라고 강조하며 옥간 하나를 들고는 동굴로 사라졌다.
사내가 사라지고 난 빈자리.
준혁은 한참 동안 고민했다.
‘정말 아무런 술수 없이 영기유입법에 대해 조사만 하는 걸 수도 있지만, 그 선배란 자가 산수가 아닌 세가 출신이라 별 탈 없이 떠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한들, 이 신묘한 공법을 포기하고 아무 소득 없이 내려가기도 꺼려지는구나.’
혈단법의 영기유입법 만으로도 도움이 될 것 같았지만, 온전한 공법을 얻고 싶은 욕심이 컸다.
문득 팔목의 문신을 바라보았다.
‘공천령만 사용할 수 있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래! 위험 없이 이익만을 얻을 순 없는 것. 최대한 조심히 행동하면서 나아가보자.’
결국 15일째.
대부분의 연기기 수사들이 떠나가던 순간, 준혁은 종 앞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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