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 식혈만복 (1) >
상점가를 벗어난 준혁은 곧장 가까운 숙박시설로 향했다.
은편을 지불하고 방을 대실했고.
방으로 들어온 후엔 방문을 걸어 잠근 후 침대에 툭 걸터앉았다.
그리곤 분광소와 인지경, 적마도를 소환했다.
그나마 분광소와 인지경은 괜찮았지만, 적마도는 그 크기가 1.5미터 가량이나 되어서 들고 다닐 수가 없었던 것.
광맥이 있던 곳에 숨겨둔 후 이제야 불러냈다.
슈욱-
준혁의 소환에 응하며 세 법보가 허공을 가르며 나타났다.
세 법보를 하나씩 공간대 안에 집어넣은 준혁은 다시 소환을 실행했다.
슈욱-
공간대 안에서도 자유롭게 소환이 가능하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잘되는군.”
신비경에서 얻은 화살촉 모양의 법기를 공간대에 집어넣은 후, 국밥을 먹기 위해 환전했던 금전과 은전마저 정리했고 그제야 몸이 가벼워졌다.
항상 앞섬에 물건을 넣고 다녔기에 가슴이 볼록해져 있었는데, 이제야 가장 기본인 공간대를 갖추게 된 것.
“그나저나 그때 그 목소리는 도대체 뭐였을까?”
적발의 사내에게 제압당했을 당시, 노인의 목소리가 들리며 기이한 힘이 한줄기 생겨났기에 몸을 움직이고 식검을 소환할 수가 있었다.
사내를 적마도로 만든 후에 그 존재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그 위험했던 그때 한순간을 제외하곤 더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인지경, 분광소, 공천령 중 하나가 말을 걸어온 건가 싶었기에, 수백 번이 넘게 대화를 시도했지만 소용없었다.
“분명 나를 도와준 걸 보면 호의를 가진 건 분명한데···. 식검의 능력을 알고 있었던 걸 보면 이것들 중 하나일 게 분명하고.”
하지만 아무 반응이 없으니 더는 알아낼 게 없었다.
“흠.”
한참을 고민하던 준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채우면 되고, 알아야 할 게 있으면 배우면 되는 일.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 알 수 없는 일로 애꿎은 심력만 소비해 보아야, 시간만 낭비하는 일.
그렇게 생각하니 온몸이 나른해지는 것 같았다.
반년이 넘게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지하에서 좌선한 채 수련만 했더니, 침대에 몸이 닿자 저절로 눈이 감겨왔다.
“그래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몸은 피로하지 않았지만, 정신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그대로 뒤로 넘어가며 푹신한 침대에 몸을 맡겼다.
+++
하루를 꼬박 잠들었던 준혁은 일어나자 춘천으로 이동했다.
대한민국에서 정보를 이용하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통이문(通耳門)이라는 문파를 이용하는 것.
춘천엔 통이문의 강원도지점이 존재했기에 준혁은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비행법기만 있었다면 소양호를 따라 날아가면 금방이었지만, 가진 게 없던 준혁은 소양호의 외곽 도로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정말 이러실 겁니까?!!”
한참을 이동해 봉화산 인근을 지나려는데 어디선가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준혁은 괜한 일에 말려들 생각이 없었기에 발걸음을 돌려 소리가 난 방향을 피해 움직였다.
“으하하! 문형! 내가 모를 줄 압니까? 남양주에 나타났다는 보물! 문형이 가지고 있는 것 아닙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그만하십시오! 제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지 않았습니까!!”
“맞아요! 저희가 아니라는데 왜 자꾸 그러세요!”
‘남양주 보물?’
그건 자신의 흡기 때문에 벌어진 오해 아니던가? 실체가 없는 것이었으니 발견될 리도 없는 것.
준혁은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향하고 말았다.
얼마 이동하지 않자, 너른 공터에서 수염이 텁수룩한 사내가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를 핍박하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저자는?’
아주 잠깐 스쳐 갔지만,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수행을 검사했던 그 수염 사내였다.
‘청룡가의 사주를 받은 게 아니라, 보물을 찾고 있었던 거구나.’
“문형 왜 이러십니까? 1년 전만 하더라도 문형 수행이 겨우 연기기 8성이었습니다. 그런데 1년 만에 12성이 되었다? 보물이 아니라면 그걸 어찌 설명한단 말입니까? 그러니 내놓으시지요. 좋은 건 나누어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수염 사내는 축기기 2성으로 보였고, 핍박을 받는 사내는 연기기 12성. 여인은 연기기 8성이었다.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지 않습니까! 아니라고요! 아니라고!”
“흐흐흐, 결국 제 호의를 무시하고 독주를 받아야겠다면야···. 어쩔 수 없지요. 이젠 제가 직접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무작정 따라다니며 협박하는 게 호의입니까?!”
“흐흐, 그동안 살려준 게 호의 아니겠습니까?”
어느새 수염 사내의 눈빛엔 살기가 번들거렸고, 입가엔 호선이 그려졌다.
그 모습을 본 남자는 공간대에서 방패 형태의 법기를 꺼내 들더니 긴장한 표정을 했다.
“문형이 예전에 제게 물은 적이 있지요? 연기기와 축기기의 차이를? 오늘 한번 경험해 보시면 아실 겁니다.”
말을 마친 수염 사내가 공간대에서 부적 두 장을 꺼내더니 빠르게 수결을 맺었다.
부적은 영기를 받아들이더니 거대한 붉은 새로 변했고,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러자 연기기 사내가 방패를 공중에 띄우며 공간대에서 검은색 깃발을 꺼내 땅에 꽂아 수결을 맺었다.
“방(防)!”
그 순간, 깃발을 중심으로 열 걸음 정도를 반투명한 보호막이 나타나더니 단단하게 둘러쌌고, 방패는 크기가 커지며 여인의 뒤를 보호했다.
결국 수염 사내의 부적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보호막에 부딪히더니 힘없이 사그라들었다.
“제법입니다. 그려. 그럼 이것도 막을 수 있나 보지요.”
말을 마친 수염 사내가 공간대에서 날카로운 톱니가 달린 륜(輪)을 꺼내 들더니 보호막을 향해 던졌다.
동시에 수결을 맺자, 륜이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하며 희뿌연 달무리를 만들어냈다.
창-가가가각-
톱니가 달린 륜은 보호막에 부딪히더니 더 빠르게 회전하며 반투명한 벽을 갉아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보호막 안에 있던 사내와 여인이 서로 마주 보고 앉아 한 손을 맞잡더니 나머지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기이한 것은 각자의 수결이 아닌, 서로의 손을 교차하며 마치 한 사람이 수결을 맺는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에 수염 사내도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륜에 영기를 잔뜩 주입하며 힘을 냈다.
“갈라버려라!”
외침과 함께, 회전하던 륜이 두 배가량 커지더니 조금 전보다 훨씬 강렬한 기운을 뿜어대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가가가각-
하지만 강력해진 륜이 보호막을 뚫기 전, 두 남녀에게서 변화가 일어났다.
한참 동안 서로의 손을 교차하며 수결을 맺던 두 사람 중, 여인의 수행이 갑작스레 올라가기 시작한 것.
연기기 8성에 불과했던 그녀의 수행이 순식간에 12성으로 치솟았다.
“무! 무슨! 어찌 수행이!”
수염 사내가 놀라서 주춤하든 말든 상관없이 여인의 수행은 연기기 12성 끝자락에 도달하더니 갑작스레 신음과 환희를 토해내며 모로 풀썩하고 쓰러졌다.
“아···.”
그리고 여인이 쓰러짐과 동시에 손을 맞잡고 있던 남성의 수행이 미친 듯이 치솟기 시작했다.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고 있던 준혁도 그 순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찌 저런 기괴한 술법이! 여인의 수행이 증폭되더니 다시 상대방에게 그 모든 걸 옮겨주었어!’
그랬다.
쓰러진 여인은 연기기 8성에서 12성으로 올라가더니, 쓰러지는 순간엔 4성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반대로 남성은 여인이 쓰러짐과 동시에 연기기 12성의 벽이 깨지더니 축기기 초기에 가까운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저건 축기에 이른 것이 아니다. 몸속의 영기가 너무 짙어졌기에 그리 보이는 것뿐.’
그렇다 하더라도 엄청난 술법임은 틀림없었다.
상대방의 기운을 전해 받아 잠시나마 자신의 수행을 급격하게 올리다니.
그건 마치 인지경을 술법으로 만든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저 술법은 보물이 맞구나.’
보이는 능력으로만 보자면 인지경의 열화판 정도일 뿐이었다. 하지만 인지경은 오직 하나이지만 술법이란 건 배우면 누구나 펼칠 수 있는 것.
남녀가 펼치는 술법은 엄청난 가치의 보물임은 틀림없었다.
수염 사내 역시 그걸 깨달았는지, 크게 놀라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말도 안 돼! 수행이 갑자기 늘어나다니! 서, 설마! 그것이 남양주에서 얻은 보물?!”
“아니라고 몇 번을! 됐습니다. 이제 이 모습을 보았으니 저희 인연은 여기까지인 듯싶습니다.”
“뭐, 뭐라! 설마 네놈이 나를 어찌하겠다는 말이냐!”
다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축기기 초기로 수행이 올라간 사내는 대답 대신 보호막을 해제하며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슈악-
순간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잠깐 사라졌다가 수염 사내의 앞에 나타났다.
“무, 무슨!”
수염 사내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공간대에서 부적 한 장을 꺼내 가슴 위로 내리치며 빠르게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부적이 발동하며 얇은 보호막이 몸 주변에 발생했다.
하지만, 너무 늦고 말았다.
보호막이 채 완성되기도 전, 빠르게 다가온 사내의 손이 수염 사내의 배를 관통해 버렸다.
푸욱- 쑥-
“제가 독하다 나무라진 마십시오. 저를 여기까지 내몬 건 당신이니까.”
“으으윽. 어찌 이렇게 빨리. 움···.”
수염 사내는 결국 말을 끝마치기도 전 숨이 끊기더니 털썩 쓰러져버렸다.
사내는 잔뜩 충혈된 눈으로 그런 시신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어 여인을 불렀다.
“연희.”
사내가 이름을 부르자, 쓰러져 있던 여인이 움찔하며 뒤척였다. 그리곤 천천히 일어나더니 수염 사내의 시신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놀랄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여인은 초점 없는 눈으로 시신 앞에 주저앉더니 입을 가져다 댄 후 시신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사내는 그런 여인의 행동을 보고 눈을 질끈 감더니 산 너머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탄식을 내뱉었다.
“당신 말대로 남양주는 아니지만 의정부에 나타난 신비경에서 이걸 얻었습니다. 허나 이게 어찌 보물이란 말입니까? 이 술법을 한번 익히면 그 후론 사람을 먹어야만 수행을 올릴 수 있거늘···. 이건 보물이 아닌 저주입니다. 저주···.”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나무가 우거진 방향을 바라보고는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다 보셨으면 나오시지요. 이런 모습까지 보였으니, 당신을 살려줄 순 없지 않겠습니까?”
아무 반응이 없자 시체를 파먹고 있는 여인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은 사내는 나무가 우거진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나무 사이 수풀이 갈라지며 준혁이 걸어 나왔다.
“기척을 감춘다고 감췄는데도 알아차리다니. 수행에 비해 기감이 좋으신가 봅니다.”
“저희의 이런 모습을 보고도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준혁도 꽤 많이 놀란 상태였다. 어찌 사람을 생으로 뜯어먹는데 놀라지 않겠는가?
다만 평소와 같이 겉으로 평온한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놀랄 게 무어 있겠습니까? 다만 제가 숨어있는 걸 어찌 아신 겁니까?”
“겨우 연기기 초기인 당신이 내 감각을 어찌 피한단 말입니까?”
지금 준혁은 평소와 같이 연기기 4성으로 보이게끔 외부로 흐르는 영기의 양을 조절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수풀 사이에 숨어있을 땐 완벽하게 기척을 감춘 상태였다.
그러니 사내의 말은 말이 안 되는 것.
“그렇습니까? 흠···.”
“저도 처음 본 분을 헤치고 싶진 않으나, 저와 연희의 비밀이 퍼져나가게 할 순 없으니.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길 바랍니다.”
말을 마친 사내는 잠깐 물끄러미 준혁을 바라보다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마치 마지막 작별 인사로 미안함을 담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숙여졌던 고개가 들린 순간.
슈악-
조금 전보다 더 빠른 몸놀림으로 쏘아져 나가며 단숨에 준혁이 있던 자리까지 도달했다.
“어?”
하지만 눈앞에 있어야 할 준혁이 보이질 않자, 사내는 놀람과 함께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그리곤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준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몸놀림이 꽤 가벼운 듯한데, 그래도 어디 그런 속도로 저를 잡으실 수 있겠습니까?”
별것 아니라는 듯 말하는 준혁.
어느새 준혁의 등 뒤엔 핏빛 광채를 내비치는 적마도가 그를 보필하듯 위용을 뿜어대며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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