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 산수의땅 (1) >
여서령은 공천령이 저장 법기라고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반만 맞는 것이었다.
엄청난 용량의 물건을 저장할 순 있었지만, 그것은 저장의 용도가 아닌 사용할 재료의 보관용이었다.
공천령을 사용하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는데.
첫째. 공간석이라는 공간의 힘을 담은 돌을 이용해 활성화를 시켜야 했고,
둘째. 공천령 내부에 영기가 함유된 물건을 넣어 재료로 사용해야 했다.
원하는 만큼 공간을 접어 이동할 수 있는 공천령은 엄청난 능력만큼이나 발동할 때마다 막대한 영기가 소모됐고, 우선적으론 내부에 저장된 물건의 영기를 사용했다.
내부에 아무것도 없거나 재료가 부족할 땐 강제로 사용자의 영기를 뺏어갔는데, 사용자의 체내에 영기가 있는 만큼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사용한 만큼 영기를 빼앗기는 것이었다.
만약 서울에서 부산까지 이동하는데 공천령 내부에 영기를 지닌 물건이 충분치 않다?
그걸 사용자의 영기로 대신한다?
근데 영기가 충분치 않다?
그럼 이동하는 도중 원기가 말라버리고 도착하기도 전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준혁은 상세한 정보를 알았기에 자신의 몸속 영기의 총량을 계산해 최대한 멀리 이동했지만, 전투를 하느라 소비한 양이 많았는지 오차가 생기고 말았다.
그 결과 기혈이 뒤틀리고 전신에서 영기가 들끓고 있었다.
“우선 강원도로 넘어가자.”
영기를 모조리 빨리고 도망쳐온 거리. 동쪽으로 겨우 20킬로 정도였을 뿐이었다.
아마 예상이 맞는다면 남양주 위쪽의 천마산이나 철마산 그 어디쯤 일터.
이제부턴 혹시 모를 추격에 대비해 최대한 산맥을 타고 도망쳐야 했다.
민간인이 되었든, 수도자가 되었든, 혹시나 청룡가의 입김이 닿아 있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 사람들만 피한다면 크게 문제가 없었다.
산을 넘어 북서쪽으로 계속 간다면, 가평을 넘어 춘천까지 별다른 문제 없이 도착할 수 있었고.
강원도에만 도착한다면 더는 청룡가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각 팔도 중 유일하게 대문파나 세가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
수많은 산맥과 짙은 영기로 그 어떤 곳보다 강력한 세력이 들어설 법도 하지만, 산수의 천국이라 불리는 강원도.
그곳엔 대한민국의 유일한 원영기 수사인 명왕 도율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한마디.
-앞으로 강원도엔 그 어떤 세력도 발을 들이지 못한다. 수련을 하고 싶은 자는 산수로써 발을 내딛어라
그러니 강원도까지만 간다면 일단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곳으로 이동해 몸 상태를 회복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다시 짜는 게 먼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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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따란 대전 안.
수많은 인물이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중 가장 앞에 자리한 세 명은 준혁과도 인연이 깊은 대공자와 둘째, 그리고 여서령이었다.
그들 앞, 황금 단상 위로 호랑이 가죽을 덮어놓은 곳에 앉아있던 여공천은 인지경과 분광소를 어루만지다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그놈을 놓쳤다고?”
“예. 무슨 방법을 사용했는지 갑자기 사라져버렸습니다.”
“가기 전 인지경을 건네고?”
“그렇습니다.”
“흣. 재밌는 녀석이로군.”
여공천이 피식 웃음을 흘리자, 대답하던 대공자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평소 감정 변화 없는 가주 여공천이 이렇게 웃을 때면 한 번씩 피바람이 불곤 했었다.
“너는 그 녀석이 왜 인지경을 건네주고 도망간 줄 아느냐?”
“언제든 회수할 수 있으니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것도 그렇지.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몇 번이나 언급한 그놈의 여동생 때문일 것이다.”
“아···.”
“우리에게 섣부른 행동을 하지 말라고 경고를 한 것이다. 이제 조만간 이것들을 회수해 갈 테고 그 의미는 한가지 뿐. 자기 뜻대로 인지경을 조정할 수 있으니,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는 뜻이겠지. 동생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영원히 우리 손에 들어올 수 없다고 각인시키려고 이것을 보여준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사탕을 주고 달래다, 뺏어버리는 것으로 자신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지.”
실제로 준혁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다시 한번 언제든 회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경거망동 하지 못하게 경고의 의미를 날릴 생각이었다.
또한 잠시 시선을 분산시켜 여동수에게 칼침을 놓기 위한 것도 이유였다.
여공천은 가소롭게 웃던 표정을 고치더니 여서령 쪽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서령이 넌, 정말 몰랐던 것이냐?”
“네. 가주님. 그는 분명 무영근자였어요. 제가 몇 번이나 확인했는걸요.”
“흠···.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턱을 매만지던 여공천이 인지경과 분광소를 휙 던졌다.
“가노. 혹시 그 물건들을 봉인할 수 있겠습니까?”
“결계로 소환을 막아달라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흐음. 이런 식으로 소환자의 부름에 반응하는 법기를 본 적이 없어서···. 확답은 못 드리겠습니다. 이 물건들은 지금껏 알고 있던 수도계의 이치를 벗어나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보겠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칠성방울을 사용해 준혁을 낭패하게 했던 노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여공천이 목소리에 힘을 주며 전방에 무릎 꿇은 이들에게 명령했다.
“지금부터 구색초를 구해오거라. 아무리 귀한 것이라고는 하나 수십 년에 한두 번씩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구해오라.”
“명 받들겠습니다!”
명령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가자 여공천은 빈 곳을 바라보며 작게 읊조렸다.
“살아있어야 인질이라 하였느냐? 그래. 내 네 동생을 진정으로 살게 해주마. 그땐 그 아이가 진짜 인질이 되어줄 터. 기대되는구나.”
+++
집에 돌아온 여서령은 힘없이 걸어가 방문을 잠갔다. 그리곤 장롱에서 매우 낡은 공간대 하나를 꺼냈다.
“그게 그 사람 물건인가요?”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여서령은 화들짝 놀라다가, 그녀가 누구인지 확인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언니였군요. 깜짝 놀랐네.”
“제가 뒤따르는 것도 잊을 만큼 넋이 나가 있으신 건가요?”
“...그 사람···. 살았겠죠?”
“무사히 도망쳤으니 가주께서 우릴 모은 것 아니겠어요?”
여인의 말에 여서령이 또 한 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라버니 말이···. 도망치기 전에 결단기 수사에게 당해, 몸이 정상이 아니라고 했거든요···.”
여서령은 낡은 공간대에서 술법서 몇 권과 비행법기, 그리고 충원단이 든 자기병과 청룡패, 피독주를 꺼내 들었다.
그리곤 한참 동안 그 물건들을 바라보다 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정말 그 사람에 대해 모르고 있었을까요? 거짓말할 사람은 아니었는데···. 이걸 보면 오래전부터 수련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여서령의 말에 여인이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만약 그 사람이 진짜 무영근자라면 어떨까요?”
“네? 그게 무슨?”
“만약 정말 말도 안 되는데···. 진짜 무영근자라면. 무영근자가 수행을 쌓게 된 것이라면, 과연 진실을 말하는 게 맞을까요? 저 역시도 비밀로 했을 거예요. 그게 아무리 제 목숨을 살려준 아가씨라 해도요.”
“......”
“아가씨가 이해하고 비밀을 지켜준다고 해도, 비밀이란 건 결국 드러나게 되는 법. 결국 들통나는 순간, 어딘가로 끌려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여인의 말에 여서령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만약 가주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분명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딘가로 끌려가 실험을 당했을지도 몰랐다.
가주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으니까.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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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인근으로 공간이동을 해 나타났던 준혁은 힘겹게 발걸음을 옮겨 천천히 산을 넘어갔다.
좌선을 통해 영기를 받아들일 수 없으니 바닥난 영기를 채울 방법이 없었고, 여전히 뒤틀린 기혈을 간신히 억누르고만 있었다.
“헉헉. 예전보다 더 힘드네.”
수행을 쌓기 전 일반인이었을 때보다 몸 상태가 더 좋지 않았다. 간신히 걸음을 떼고는 있었지만, 턱 끝까지 올라온 숨은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게 만들었다.
결국 하루 동안 산 하나를 넘지 못한 준혁은 나무둥치 사이에 비어있는 장소를 발견하고는 그곳에 몸을 뉘었다. 그리곤 낙엽을 끌어모아 몸을 덮고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잠들기 전보다 호흡이 조금 더 편해졌다는 느낌에 이상함을 느끼며 몸을 덮고 있던 낙엽을 손으로 밀어냈다.
그 순간 낙엽들이 부스스 먼지처럼 바스러지며 흩어졌다.
“?? 뭐지?”
하룻밤 사이에 낙엽이 갑자기 썩을 일도 없을진대 이상하다 느꼈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펴본 순간, 낙엽 따위는 안중에서 사라져 버렸다.
자신이 누워있던 나무둥치 사이를 중심으로 반경 3미터가량이 썩은 듯이 음산한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그건 마치 생명이 다해 죽어버린 모습이었는데, 나무는 수분을 완전히 잃어버린 듯 빼 적 말라 있었고, 바닥의 풀들은 가느다란 실처럼 변해 시들해져 있었으며, 황토색을 띄고 있던 흙바닥은 회색으로 변해 바람도 없는데 먼지를 날리고 있었다.
“도대체 자는 동안 무슨 일이? 어라?”
의문을 가지며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잠시.
준혁은 호흡뿐만 아니라 몸을 움직이는 게 훨씬 가벼워졌다는 걸 느꼈다. 그리곤 곧바로 자리에 앉아 내면을 관조했다.
“이럴 수가! 회복됐어!”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었지만, 미약하게나마 뒤틀려있던 기혈들이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몸속에 단 한 톨도 남아있지 않았던 영기가 개미 똥만큼 작은 양이었지만 분명하게 몸속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단약을 먹지 않는다면 영기를 흡수할 수 없는 몸이었고, 그렇기에 망가진 몸을 회복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강원도 산맥으로 숨어들어 간 후, 단약을 구할 방법을 마련하려 했었다.
“그럼 이 상황이 나 때문에?”
준혁은 기쁨을 느끼며 주변을 다시 한번 자세히 살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의 몸이 회복된 것과 주변의 기운이 바짝 말라버린 것의 관계를 추론하지 못할 리 없었다.
문득 잠들기 전 자신이 무얼 했는지 떠올린 준혁은 곧바로 자신의 수련 기공인 태극단공을 끌어올렸다.
“어젯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기공 수련을 한 것 말고는 이렇게 될 이유가 없다.”
외부의 기운을 끌어와 몸속에 남아있는 단약의 기운을 연화시키는 태극단공에 그런 효능이 있을 리는 없지만, 그것 말고는 당장 연관 있어 보이는 것이 없었다.
“흐음···.”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단 하나의 기운도 모여들지 않았다.
“내가 잘못 생각했나?”
고개를 갸웃거린 준혁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회색으로 죽어버린 곳에서 벗어나 푸른 잡초들이 무성한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자리에 앉아 태극단공을 운용했다.
그렇게 기공에 집중하길 잠시.
미미하지만 영기가 분명한 기운들이 아주 느리게 몸 안으로 흡수돼 들어옴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거다!”
준혁은 쾌재를 부르며 두 눈을 감은 채 온전히 정신을 집중해 기공을 운용했다.
두 시간쯤 지나 더는 아무 기운도 유입되지 않자, 천천히 눈을 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곤 자신이 앉아있는 곳 반경 3미터가량이 좀 전과 동일하게 완전히 죽어있는걸 볼 수 있었다.
다시 살펴보니, 그것은 죽어있다고 표현하기보다는 영기가 메말라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려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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