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 사역마 (4) >
여동수가 고문을 가한답시고 준혁을 홀로 가둬둔 15일.
준혁에겐 금빛 문자가 전해준 정보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많은 내용 중 식칼에 대한 정보는 겨우 이름하나.
‘식검(食劍)’이라는 진명 뿐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세 가지 법기의 효능과 사용 방법 등에 관한 내용, 그리고 세 법기가 식검과 함께 신비경에 있었던 이유뿐이었다.
세 가지 법기를 다루는 내용을 체득한 준혁은 자신이 정말 희대의 보물을 얻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수련 속도를 올려주는 인지경?
사람들이 유일하게 정체를 알고 있는 그것마저도 원래 능력의 절반도 모르는 소리였다.
그리고 세 보물 중 가장 귀한 건 인지경이 아닌 옥팔찌인 공천령이었다.
“시작해 봅시다.”
준혁이 차분하게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빠르게 수결을 맺으며 한 손을 휘저었다.
수결이 끝나자 머리 위에 떠 있던 인지경이 번쩍 빛을 내더니 마치 스포트라이트라도 된 것처럼 빛을 쏘아 준혁을 감쌌다.
그 순간, 주위의 영기가 미칠듯한 속도로 준혁의 몸으로 끌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손안에 있던 단검이 다섯 개로 늘어나며 여동수와 대공자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이놈!! 역시 인지경을 소환한 건 네놈이었구나!”
다른 물건들은 처음 보지만 희대의 보물인 인지경을 잘못 볼 리는 없었다. 준혁이 소환한 거울은 분명 그들이 알고 있던 인지경.
여동수는 날아오는 단검은 무시한 채 공간대에서 채찍을 꺼내더니 준혁을 향해 내리쳤다.
대공자만이 단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은쟁반같이 생긴 법기를 꺼내더니 앞으로 내밀며 수결을 맺었다.
순간 은쟁반에서 푸른 물결이 발생하며 대공자와 여동수를 동시에 감쌌다.
직후 단검이 푸른 물결에 부딪히더니 튕겨 나감과 동시에 다시 찔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준혁은 날아오는 채찍을 피하며 손을 좌우로 빠르게 저었다.
그러자 다시 움직이고 있던 단검이 열 자루로 늘어나며 보호막을 연달아 사정없이 후려쳤다.
쾅- 쾅-
법기로 보호막을 만든 후 여동수를 도와 공격을 감행하려 했던 대공자는 순간 느껴지는 거력에 방어 법기로 영기를 강하게 쏟아부으며 뒤편에 서 있던 노인에게 외쳤다.
“어르신!”
대공자의 외침에 노인이 반응하며 한걸음 움직였다.
“끌끌, 이 늙은 진법가에게 대신 싸워주라는 겁니까? 그건 계약 조건에 없을진대?”
“도와주십시오! 사례하겠습니다.”
그러자 웃고 있던 노인이 공간대에서 무당이 굿을 할 때 쓰는 칠성방울을 꺼내 들더니 소리 나게 흔들었다.
짤랑- 짤랑-
그 순간, 영기에 음파가 반응하며 준혁 주위 공간이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펑-펑-
“윽!”
‘내 능력으로 오래 버티진 못해도 한순간은 압도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는데, 설마 데려온다던 진법가가 결단기 일 줄이야.’
준혁은 방울에서 터져 나오는 힘에 의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연신 비틀거렸다.
그때 그 틈으로 여동수의 채찍이 빠르게 날아왔다.
“죽어라!”
“내가 죽으면 인지경의 비밀을 풀 수 있겠습니까?”
공격하던 여동수가 준혁에 말에 움찔하며 공격을 회수해 버렸다.
그 순간 준혁은 자세를 바로 하며 양손을 교차하며 내뻗었다.
그러자 손짓에 따라 단검 열 자루가 춤을 추듯 선회하며 여동수에게 쏘아져 나갔다.
“이익!”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다니, 한심하군요.”
“닥쳐라!!”
광분한 여동수가 채찍을 허리에 두른 후 공간대에서 은빛으로 반짝이는 장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선 한 손으로 수결을 맺은 후, 장도의 도면을 손가락으로 쓰윽 훑었다. 직후 도를 높게 쳐들었다.
“베어져라!”
여동수가 도를 내려치자, 그 궤적을 따라 은빛 섬광이 강렬하게 쏘아져 나갔다.
써걱-
굉장히 강력했지만, 눈으로 보고 못 피할 정돈 아니었기에 준혁은 옆으로 살짝 비켜나며 은빛 섬광을 피해냈다.
하지만 살짝 놀라고 말았다.
은빛 섬광은 바닥과 천장 할 것 없이 고문실 전체를 통으로 갈라버린 듯 거대한 흔적을 남기고는 준혁을 스쳐 간 것.
“제대로 스치면 단번에 잘려 나가겠구···. 이런!”
은빛 섬광의 위력에 감탄을 내뱉으며 단검을 조정하고 있던 준혁은 등 뒤에서 밀려오는 거력에 빠르게 단검을 불러들였다.
채재쟁 쟁-
열 자루의 단검들이 빛살처럼 다가와 준혁의 등 뒤를 막아내며, 되돌아온 은빛 섬광을 주춤하게 만든 사이 준혁은 겨우 공격을 회피할 수 있었다.
결국 단검들을 제치며 다시 준혁을 스쳐 지나간 은빛 섬광은 또 한 번 방향을 바꾸더니 되돌아왔다.
“영기가 주입되는 한 계속해서 움직이는구나!”
슬쩍 여동수를 보니 은빛 장도에 정신을 집중한 채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아마도 축기기 중기에 불과한 그가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고등급의 법기임이 틀림없었다.
그 예상에 맞게 대공자가 여동수를 말렸다.
“그만하거라. 더 이상 운용하다간 원기를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저 자식의 무시하는 눈빛이!”
“어차피 독 안에 든 쥐다. 지금이야 법기의 힘으로 저런 위력을 내는 듯싶지만, 언제까지 가능할 것 같으냐? 흥분하지 말고 자세히 살펴라.”
두 사람의 대화에 준혁도 맞장구를 쳤다.
“역시 대공자는 언제나 침착을 유지하시는군요. 서령 아가씨만큼은 아닐지라도 당신에게도 꽤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참으로 아쉽습니다.”
“어쩔 수 없다. 가문은 가주의 것. 내 의지 따윈 중요하지 않으니까.”
무언가 내려놓은 듯한 목소리로 대답한 대공자가 공간대에서 쇠사슬이 달린 낫을 꺼내 들고는 천천히 영기를 주입했다.
“어르신, 정말 안 도와주실 겁니까?”
“무슨 소리냐? 나도 열심히 돕고 있거늘?”
“... 알겠습니다. 가주께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허. 어린놈이 나를 협박하는 것이야? 네 말대로 저놈이 이곳에서 도망갈 수도 없고, 조만간 기력이 쭈욱 빨려 죽을 것 같은데, 굳이 힘을 쓸 필요도 없겠구먼. 에잉.”
노인은 입맛을 쩝 다시더니 다시 한번 칠성방울을 세차게 흔들었다.
짤랑-짤랑-
똑같은 움직임이었지만 결과는 아까와 사뭇 달랐다.
방울이 울린 순간 준혁의 몸 곳곳이 터져 나가며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펑펑- 주르륵-
“으윽!”
갑작스러운 통증에 준혁은 재차 단검을 움직이려던 행동을 멈추고 몇 걸음이나 물러서야 했고, 결국 벽에 부딪히고야 멈춰 섰다.
‘이건 도대체 뭐지? 피할 방법이 없다.’
온몸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단 한 번의 공격에 낭패한 상황이 돼버렸다.
‘역시···. 인지경의 도움을 받아도, 결단기에는 비빌 수조차 없어.’
인지경의 원래 공능은 주변 영기를 강제로 주입해, 시전자가 사용할 수 있는 영기의 총량을 세 배가량 늘려주고, 회복 속도 역시 그만큼 높여주는 것.
축기 1성에 이제 막 오른 준혁이 인지경의 도움을 받아 축기기 중기인 여동수와 후기인 대공자를 아주 잠깐 밀어붙이긴 했지만, 한 체급 높은 결단기에는 한치도 견줄 수가 없었다.
만약 준혁이 축기 후기였다면, 어쩌면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가정(假定)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단번에 준혁이 낭패한 모습을 보이자, 대공자와 여동수는 여유를 되찾았고, 노인은 흘흘 거리며 공간대에 방울을 집어넣었다.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무릎을 잡고 간신히 숨을 몰아쉬는 준혁을 보며, 대공자가 한 걸음 다가가 말을 꺼냈다.
“이럴수록 일을 어렵게 만들 뿐이다. 비록 이런 사이가 돼버렸지만, 나도 서령이를 도와 네 동생을 책임지고 살려내겠다. 그리고 솔직히 모든 걸 말해준다면 정신부까진 사용하지 않을 테니···. 어떤가? 가지고 있는 걸 전부 넘기고 사실대로 말할 생각이?”
“형님! 지금껏 속고도 또 그런 말입니까! 절대 안 됩니다!”
대공자의 말에 준혁은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창백해진 얼굴로 피를 흘리고 있으니 그 모습이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하하, 대공자께선 여전하십니다. 한 가지만 여쭙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가주께서 저를 철저히 망가트려야겠다면 그땐 어떡하시겠습니까?”
“...”
“보십시오. 대공자께서 가주가 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약속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흐음···. 그럼 내 손속이 야속하다 말하지 말게. 나는 진심으로 자넬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고, 충분히 노력했으니.”
어느새 항상 차분하던 대공자의 신색에 변화가 찾아왔다. 두 눈에 살기가 맴돌았고, 전신에서 영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전에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가?”
“혹시 인질의 조건이 뭔지 아십니까?”
“... 그게 무슨 말이지?”
“인질이란 살아있을 때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준혁의 말에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대공자가 말했다.
“설마 빙제소에 있는 자네 여동생을 두고 하는 말인가? 굳이 그녀를 인질로 삼을 필요가 있겠나? 설마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하하하, 대공자. 세상일이란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분명히 알아두십시오. 인질은 살아있을 때 가치가 있다는 말.”
준혁이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말을 끝맺자, 모두가 주변을 경계하며 기감을 퍼트렸다.
분명 빈말은 아닐 터. 무언가 준비돼있다고 느낀 것.
준혁이 손을 뻗자 인지경이 기능을 멈추더니 그의 손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인지경. 정말 대단한 보물 아닙니까? 수련 속도를 배는 빠르게 해준다는 게? 게다가 사람들이 모르는 게 있는데···. 원영기에 이르러 사용하면 그 효과가 배는 가속됩니다.”
“뭐?!”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 효과가···. 그래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준혁은 피식 웃더니 인지경을 대공자에게 던져 주었다.
대공자가 얼떨결에 인지경을 받아들자, 준혁이 단호한 목소리로 힘을 줘 말했다.
“저는 분명 말씀드렸습니다. 인질은 살아있을 때 가치가 있다고. 제가 돌아올 때까지 단 하나의 생채기도 없이 잘 보관해주시길 바랍니다.”
물론 인지경이 아니라 여동생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준혁이 손을 휙 저었고, 팔목에 있던 옥팔찌가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파아앗-
그리고 빛이 사라진 순간, 그곳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준혁은 한 줄기 빛이 되어 어디론가 떠나버린 뒤였다.
재미난 구경을 보듯 관망하던 노인은 눈을 화등잔만 하게 치켜뜨며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말도 안 돼. 공간을 찢었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다. 절대 아니야. 설마 저것은!’
그리고 근처에선 시뻘게진 얼굴의 여동수가 분노에 찬 소릴 질렀다.
“이 개새끼가!! 쿨럭-”
어느새 여동수의 명치에는 흐릿하게 변한 단검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깊숙이 박혀있었다.
마지막에 준혁이 손을 저은 건, 공천령을 발동시키려는 게 아닌 분광소로 최후의 공격을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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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이 드문 산속.
빛이 번쩍인가 싶더니, 그곳에 피투성이의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는데, 온몸이 피투성이였고,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하얗게 탈색된 듯 보였다.
그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바닥에 피를 한 움큼이나 뱉었다.
“우웩, 커억,”
사내는 한 번 더 피를 뱉어내고는 서 있을 체력도 없는지 흙바닥에 그대로 뻗어버렸다.
“역시나 재료가 없인 위험하구나. 조금만 더 멀리 왔으면 원기가 말라버렸겠어.”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팔목을 들어 옥팔찌를 바라보았다.
옥팔찌는 어느새 사라진 상태이고, 그 자리엔 짙은 묵색의 팔찌 형태의 문신만이 새겨져 있었다.
그 문신의 모양은 준혁이 가지고 있던 공천령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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